하덕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 글이다. 꺼내어 다시 읽어 본다.
하덕규와 한계령
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 늘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자신의 음악에 정직하려 노력하는 사람, 어린 시절 뛰놀던 드넓은 동해바다와 푸른 설악산을 가슴 한 켠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
노래에 인생을 걸었던 사람, 본명보다 ‘시인과 촌장’으로 더 잘 알려진 사람… 바로 노래하는 음유 시인, 하덕규다. 그는 이 시대가 나은 시인이자 촌장이다. 이상을 꿈꾸는 시인과 현실 속을 살아가야 하는 촌장처럼 도시에서 살아가지만 고향을 그리워했고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살면서도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고집했다.
결국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에 방황하던 그는 술과 담배에 의지해 살아야 했고, 한때 마약에 빠졌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누구보다 건강한 정신으로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노래하고, 곡을 만들고, 시를 쓰고,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하루를 1년처럼 바쁘게 살아가는 가수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를 손숙은 ‘아주 특별한 인터뷰’(CBS)에서 만났다.
○개인적으로 하덕규씨 노래를 좋아해서 한번 만나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마주앉기는 처음이에요. 그런데 보니까 아직 젊으시네요. : 올해 우리 나이로 오십이에요. 다른 분들은 50세가 되면서 힘들어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삶의 중압감 같은 것들을 가지시는 것 같은데 저는 그런대로 행복하고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아름답고, 무언가 새로운 것들을 시작하는 나이인 오십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웃음) 하덕규 씨 팬이 굉장히 많아요. ‘오빠’ 하는 팬들은 아니더라도 정말 가슴 속으로 좋아하는 팬들이 많이 있는데 방송에서 하덕규 씨 목소리 듣기는 요즘 어려워요. : 몇 년 만에 처음인 것 같아요. CBS에서 DJ를 십 수 년 해서, 이 스튜디오도 굉장히 익숙해요. 손 숙 선생님 앉아계신 자리가 제 자리였거든요. 감회가 새롭고, 다시 보니 좋네요. 예전에는 직장 없이 프리랜서로 노래를 불렀는데 몇 년 전부터 백석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시간을 내기가 어렵고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일도 그 일 때문에 조금 소홀히 하게 됐죠.
○아이들을 가르쳐 보시니까 어떠세요? : 갈수록 힘들어요.(웃음) 제가 성숙해 간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갈수록 학생들의 눈빛을 대하기가 두렵다는 생각이 들고, 얼마 전에 노랫말로 쓰기도 했는데 결국에는 아이들에게 잘 살라고 하는 건데 과연 내가 잘살고 있는 건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돼요. 하지만 굉장히 재미있게 지냈고 즐거웠습니다.
○하덕규 씨 노래 중에 주옥같은 곡들이 많은데 한계령, 가시나무, 사랑일기.. 정말 많은 곡들이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는데 지금까지 나온 앨범이 몇 장이에요? : 정규앨범은 10장 냈고요, 또 여럿이서 같이 만든 앨범이 몇 장 있습니다.
○저는 시인과 촌장이라는 이름이 너무 좋더라고요. 누가 지으셨어요? : 원래는 저희가 지은 게 아니고 서영은 선생님의 단편소설 제목이에요. 제가 대학시절 때 창작과비평사의 책들을 구독했는데 그 속에 시인과 촌장이라는 아주 암울한 느낌이 드는 단편소설이 있었어요. 그런데 음반을 내고 가수가 되면서 처음에는 다른 이름이었는데 그 이름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팀 이름으로 정하고 활동할 때 사용했어요. 서영은 선생님의 소설이 주는 뉘앙스 자체가 우리 시대에 주는 이미지가 있었어요. 그런 것들을 젊은 시절에 공감하면서 표현하고 싶은 마음으로 팀 이름을 삼았는데 나중에 서영은 선생님을 뵀는데 도용한 것을 기꺼이 허락해 주셨어요.
○소설이 사람한테 주는 인상이 굉장히 강한 것 같은데 저는 예전에 박경리 선생님의 책을 읽다가 ‘가화’라는 여자의 이름이 나왔어요. 그때 딸을 낳으면 가화라고 지어야지 그랬던 적이 있었는데 시인과 촌장이라는 이름이 그래서 나온 거군요.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하덕규 씨 노래를 들으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베어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고향이 어디세요? : 태어난 곳은 강원도 홍천이고요, 아주 어렸을 때 두 살인가 세 살 때에 속초 근방으로 이사를 가서 거기서 열 살까지 자라다가 서울로 이사를 왔어요. 부모님의 고향은 이북이셨고 피난 내려오셔서 정착을 하셨죠. 속초에 가면 이북에서 오신 함경도 분들이 많으신데요, 저희 부모님은 평안도 분들이세요.
○몇 남매세요? : 9남매였어요. 아버님이 이북에서 형님들 세 명을 데리고 오셨고 여기서 저희 어머니랑 재혼하셔서 6남매가 태어났어요. 9남매 중에 제가 일곱째입니다.
○부모님이 9남매 학교 보내고 먹이시려면 굉장히 힘드셨을 것 같아요. : 그 당시에는 형제들이 많아도 어떻게든 건강하게 잘 컸던 것 같아요.
○그런데 10살 때 왜 서울로 올라오셨어요? : 아버님이 양조장을 하셔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어요. 아이들이 조금씩 자라면 서울로 유학을 보내셨는데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저 혼자 왔어요. 누나들은 이미 와 있었고요. 전학을 와서 누나들과 같이 살았는데 저는 유달리 고향을 그리워했어요. 그래서 서울이 너무 싫었고 제가 자랐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들이 많이 쌓여서 그런지 대학을 미대에 다니면서 그림을 그릴 때도, 그 이후에 음악으로 전환을 해서 노래를 할 때도 계속해서 작품에 나타나는 것들은 잃어버린 고향의 이미지들이죠.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3학년 때 그 어린 나이에 전학을 오면 대도시의 이질감과 스트레스 같은 것도 있었을 것 같아요. : 서울의 학교 이미지가 참 싫었어요. 제가 사립학교에 다녔는데 분위기가 적응이 잘 안됐고 아이들이 병약해 보이고 왠지 가식적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아무튼 서울이 그런 느낌으로 와 닿았어요. 고향에는 방학 때마다 가서 지내다 왔죠.
○고향 하면 주로 어떤 이미지를 떠 올리셨어요? 속초 쪽은 떠올릴 이미지가 많잖아요. : 제가 사는 곳은 속초에서 20리 올라간 곳에 있는 어촌인데요, 아주 가난한 마을이었어요. 앞에는 바닷가고 뒤에는 설악산의 줄기가 굉장히 아름다웠죠. 아버지 따라 꿩 사냥도 하고 또 바다에 나가서 물오리 사냥도 하고 고기도 잡아서 먹고 했던 기억들이 많죠.
○그런 소년을 서울에 데려다 놨으니... 혹시 환경 때문에 성격은 안 변하셨어요? : 제가 열한두 살쯤에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그때부터 감수성이 예민하고 내성적인 사람이 됐어요. 형님들은 이미 장성하고 결혼하신 분들이셨고 우리들은 어렸는데 누나가 소녀가장이었어요. 누나가 그 당시 고등학생이었고, 그때부터 도시생활을 어렵게 했는데 그래서 아마도 시골에서 행복했던 때를 잃어 벼렸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것 같고 폐쇄적으로 성격도 변한 것 같아요.
○낯선 서울의 환경과 아픈 가족사 때문에 많이 힘이 드셨겠어요. :- 사실 지금은 부모님을 이해하죠. 이미 아버님은 십 수 년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미국에 계신 데, 어머니의 소녀 시절 얘기, 어머니가 어떻게 아버지와 살게 되셨는지 얘기도 듣고 어머니하고 얘기를 참 많이 해요. 어머니가 초등학교 선생님도 하셨고 굉장히 똑똑한 여성이셨어요. 원래는 어머니께 약혼자가 있었는데 인민군으로 나가서 전사했던 것 같아요. 어머니도 나라가 분단되는 바람에 포로수용소에 있는 오빠를 찾으러 내려왔다가 못 가게 된 거죠. 그래서 유력한 사람을 찾아가서 오빠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던 사람이 바로 우리 아버지였어요. 아버지 집에서 머물면서 찾을 때까지 기다려 봐라 했던 것이 불가피하게 가정이 만들어진 거죠. 이렇게 만들어진 가정이 굉장히 많아요. 그 가운데서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거죠.
○어머님은 미국에 가시고 6남매는 나중에 어떻게 되셨어요? : 다들 생활력이 강하고 어렸을 때 고생을 해서 지금은 다 잘 살아요. 다시 가정이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따로 살면서 나중에 어머님을 미국으로 모셔가서 지금 거기서 살고 계시죠. 아버님은 형님 댁에서 사셨어요. 저는 그런 과정들을 보면서 우리 민족사의 아픔이 여전히 우리 가정을 관통하고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신앙을 갖게 되면서 치유되는 과정들을 경험했어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들을 편하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어머니는 미국에서 재혼은 안 하셨나요? : 재혼은 안 하셨어요. 어머니를 뵐 때마다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구나 하는 마음이 들죠. 사춘기 때 상처를 많이 받았을 때는 반항도 많이 하고 가출해서 설악산을 많이 갔어요. 그림도 그리고 앉아 있다가 오기도 하고 여러 번 그랬어요.
○가족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마치 소설 같기도 하고 드라마 같기도 하고, 전쟁이라는 것이 당사자들만 힘든 게 아니고 자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 우리 가족사는 전쟁으로 빚어진 가족사잖아요. 그런 아픔의 거대한 강줄기라고 할까요, 거대하게 구성원들에게 흐르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아요. 한이라는 정서로 대변할 수 있을 것도 같고, 경험하면서 젊은 날들을 보냈죠.
○하덕규 씨 노래에는 늘 한이 서려 있는 것 같아요. 유명해 지시고 돈도 좀 버셨고 생활도 안정적이셨을 텐데 왜 그렇게 방황을 하셨어요? : 그때는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내 안에 상처와 상실감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한때는 약물도 했지만 깨고 나면 너무 허무했어요. 신앙을 갖게 된 서른 이전까지 방황이 계속 됐던 것 같아요. 요즘의 연예계에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는데 너무 안타까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갈수록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윤리 같은 것들이 점점 약해지고 사라져 가고, 가치가 상대화되다 보니까 무엇이 절대적으로 중요한지 잃어버리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생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힘들면 버리게 되고, 그냥 소중하고, 중요하고, 나에게는 둘도 없는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요즘에는 술, 담배는 안 하세요? : 벌써 이십 년이 넘었지요.
○고향이 사람의 상처를 보듬어 주죠. 사람들은 행복할 때 고향 생각 안하는 것 같아요. : 그래서 가면 더 좋았지만 또 돌아올 때 허전한 것도 있어요.
○하덕규 씨의 그림이나 음악에 고향의 영향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세요? : 제가 크리스천이 되기 전까지는 자연과 고향이 제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해 줬던 것 같아요. 그리고 노래하는 의미도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내용이 주된 내용이었고요. 사람들에게 음악을 통해서 자연을 펼쳐보여서 위안을 얻고 우리가 생각해야 할 본질적인 순수의 회귀 같은 것들을 노래를 통해서 말하려고 했기 때문에 저에게는 너무나 삶의 중요한 화두였고 대 주제였어요.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하셨어요? : 그건 아니고 그림을 잘 그렸어요.
○이상하게 노래 잘 하시는 분들 보면 그림도 잘 그리시더라고요. 그런 쪽으로 재주들을 타고 나신 것 같아요. 그럼 화가가 되실 생각을 하셨어요? : 초등학교 때부터 오로지 그 꿈을 갖고 있었는데 대학을 들어가면서 제 안의 끼를 발견했다고 할까요? 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다가 우연히 아마추어 콘테스트 노래자랑에 나갔다가 이종환 선생님의 셀부르에서 시작을 하게 됐어요. 그룹을 만들어서 같이 나갔죠. 처음에는 팝송이 아니라 제가 직접 만든 곡을 불렀어요.
○어떤 노래였는지 생각나시나요? : 가물가물해요. 경연대회에 나가서 1등을 했는데 그때부터 노래를 시작했어요. 아마추어 무대에 서기 시작하다가 유명했던 가수 한 분이 갑자기 방송을 펑크 내는 바람에 FM 라디오에서 대타가 필요했는데 마침 우리밖에 없어서 방송국에 가서 노래를 불렀어요. 제가 만든 노래를 불렀는데 그때 거기 계신 PD 한 분이 눈여겨보다가 레코드 회사를 소개했어요. 그때 방송에서 팀 이름을 물어보는데 얼떨결에 시인과 촌장이라고 대답을 했어요. 계획한 게 아니었고 다만 마음에 두고 있다가 셋이서 하다가 둘이 하게 됐는데 팀 이름을 못 정하고 있었던 거죠. 같이 노래했던 친구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는데 지금은 노래를 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럼 미대에 다니면서 노래를 하신 거예요? : 사실 미대를 다니면서 평론과 작품보다는 이론 쪽에 관심이 많아서 미학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미국유학을 가고 싶어서 음반 한 장 내서 돈 벌면 가리라 했는데 첫 음반이 소위 히트가 안 되는 바람에 못 갔어요. 그때부터 고민을 참 많이 했어요. 그림을 다시 그려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몇 년 지나면서 결국은 예술이라는 것이 자기표현이고 자기 안의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건데 재료의 차이일 뿐이지, 어떻게 보면 음악이 확산력이 강하고 좀 더 대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음악 하는 게 재미있고 고생은 되었지만 그 길을 가기로 결심했죠. 지금도 아내하고 은퇴하면 그림 그리러 시골로 가자고 해요.(웃음)
○그 노래 중에서 한계령은 고향의 얘기잖아요. 그런데 자신이 한계령의 원작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왜 그렇게 주장을 하는 거죠? : 제가 만났어요. 아직도 미스터리한 부분이긴 한데, 자기가 시 낭송회를 열었는데 그때 제가 그곳에 갔고 노랫말을 가져갔다는 거예요. 그 부분은 제가 기억나지 않아요. 물론 가끔 노래들을 쓸 때 모티브를 얻어올 수는 있어도 남의 것을 베껴다가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은 안 되는 거죠. 곡을 쓰다 보면 단 한 줄이라도 모티브를 얻어올 수 있는데, 제 노래 중에 그런 노래들이 있어요. ‘누구도 외딴 섬이 아니라’든지 이런 것들은 영국 시인의 제목을 따 온 것이기도 하고 이런 것들은 토를 달아주기도 하는데 그게 24~5년 된 너무 오랜 일이라서 혹시 제가 기억에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분이 원작자라면 너무 큰 실례를 범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분이 그걸로 옛날에 발표를 한 적이 있나요? : 아니요. 그리고 중간 단은 양희은 선배에게 곡을 드렸을 때 너무 허무주의로 흐르는 것 같아서 두 줄을 고쳤어요. 심의에 걸려서 양희은 선배가 고쳤는지, 양희은 선배가 심의에 걸릴까 봐 고쳐서 넣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그분이 낸 시집을 보니까 고친 그대로 실어 넣은 거예요. 그러니까 노래가 나온 다음에 작년인가 재작년에 시집이 나온 거죠. 혹시나 그분의 시를 한 구절이라도 모티브를 얻었다면 그것은 인정해 드려야 하는 부분인데 그런 기억이 없어요. 곡을 썼던 기억, 멜로디를 붙이던 기억까지도 생생한데 그분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 굉장히 노력을 했고 그분이 시집에 싣겠다고 할 때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그러나 계속 문제가 된다면 제 제작권과 관련해서 법적 분쟁까지도 생기니 주의를 해주고 아름다운 노래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얘기를 했죠.
○그런데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 89년에 해서 고등학교 1학년 딸과 중학교 2학년의 아들이 있어요. 지금은 가족이 다 미국에 있는데 정말 못 할 짓이에요.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 자체가 아픔이고 외롭고 한 줄로 쓴다면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 제일 소중한 것이 가족이다’라는 걸 알았어요. 혼자서 왔다갔다 해봤는데 너무 어려워서 학교에 휴직계를 내고 곧 떠나요. 신학공부를 하고 있는데 미국에서 2년 정도 공부를 하고 오려고요. 가족이 많이 좋아해요. 아이들이 아빠가 없는 공백이 있는데 역시 가족이 함께 있는 것이 최고의 공부인 것 같아요.
○우리가 시골서 자라면서 느꼈던 정서를 아이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이 늘 가엽고 안타까웠는데 자녀와는 주로 무슨 대화를 나누세요? : 솔직한 이야기 많이 하고 성상담도 해요. 솔직하게 대화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요즘은 성이라는 것이 가정 밖의 범위로 너무 범람해서 학생들에게는 잘못된 가치관으로 자리 잡힌 것 같아요. 하나님이 가정 안에만 허락하신 선물인데 오용하고 있는 세상이잖아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많이 얘기를 합니다.
○자녀들이 한국에서 나고 자랐는데 그곳에 적응을 잘 하고 있나요? : 오히려 그곳에 더 맞아 해요. 한국에서는 공부 잘하고, 온순하고, 제도에 잘 적응하는 아이들이 모범생인데 딸아이는 그렇지 못했어요. 자기주장이 강해서 선생님들께 야단도 많이 맞고 적응을 못 했지요. 본인이 먼저 보내달라고 해서 보냈는데 너무 힘들어하니까 집사람도 가게 되고 가족이 다 가게 된 것이죠.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하면 어떤 일을 하실 건가요? : 저는 목사가 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은 아니고 신학과 선교학을 같이 공부해서 제가 지금 하고 있는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요. 기독교 실용음악이라는 분야는 제가 최초의 전공자인데 아직은 한국에 이론도 없고, 대학에서 가르칠 만한 교재도 완성되어있지 않거든요. 그런 기반을 가지고 이쪽 분야에 텍스트를 만들고 학생들 가르치고 나름대로 방향을 제시하고 싶은 소원이 있어요.[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시인과 촌장'의 노래하는 음유시인 하덕규 / 2007-02-28 / 정리 : 이상원)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447624)]
추억의 LP 여행] 하덕규(上)
시인이자 라디오 DJ, 싱어 송 라이터인 남성 듀오 시인과 촌장의 리더 하덕규. 음유 시인으로 불리는 노래 속에는 기독교적인 향내가 은은하다. 시인과 촌장은 하덕규의 꾸밈없는 보컬과 함춘호의 탁월한 기타 연주가 일궈내는 절묘한 조화로 들국화, 김현식, 조동진 등과 함께 1980년대 젊은 영혼들을 사로 잡았다.
조성모, 유리 상자, 이정봉 ,이은미 등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한 ‘가시 나무’는 이후 신드롬이 생겨났을 만큼 주목 받았던 그의 대표곡. 양희은이 부른 ‘한계령’ 또한 그의 곡이다.
아름다운 재킷 그림을 스스로 그렸던 하덕규는 이정선에 이어 음악과 미술의 결합으로 대중 음악의 수준을 예술로 끌어 올린 뮤지션이다.
하덕규는 3남 6녀의 대가족 집안에서, 1958년 7월 21일 강원도 홍천 태생으로 태어났다. 선친은 평남 진남포에서 한국 전쟁 때 내려와 하덕규의 모친과 재혼을 하고 속초에 터전을 마련했다. 어린 시절 드넓고 푸른 동해 바다와 설악산이 있는 속초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성장했다.
벌거숭이로 동네 친구들과 뛰놀며 물고기를 잡던 추억이 서려 있는 어린 시절의 고향 정경과 자연은 그에겐 천국이었고 음악의 중요 DNA로 자리잡았다.
속초 천진 초등 학교를 다니던 9살 때 서울 숭의 국민 학교로 전학했다. 처음 화려한 서울에 호기심이 넘쳤지만, 1년 후 가정이 깨어지고 부친의 사업마저 실패해 가난과 긴 고통의 터널로 접어 들었다. 한영중에 입학하면서 음악이 좋아져 기타를 가지고 싶었으나 꿈같은 일이었다. 중 3때 펩시 콜라 뚜껑 상품권 응모에 응모해 기타가 생겼다.
독학으로 기타를 배우기 시작해 트윈 폴리오, 어니언스의 노래를 멋지게 연주할 만큼 실력이 붙었다.
하지만 한영고에 진학하면서 여러 번 가출을 한 그는 고향 설악산에 올라 텐트 생활을 하는 극심한 방황기를 겪었다.
현실에 적응 못하고 성격도 내성적으로 변해 갔다. 그는 고통을 심해지면서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살을 앓았다. 여러 미술 대회에서 수상을 하며 화가를 꿈꿨던 그는 공부보다는 그림 그리기에 전념했다.
홍대나 중대를 지망했지만 필기성적이 좋지 않아 1980년 뒤늦게 추계예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학교 생활에 흥미를 잃어 1학년 때 중퇴를 했다. 이후 2년 가량 화실을 경영하며 틈틈이 작곡을 했다. 화가의 꿈을 버리지 못해 미국 유학을 준비했지만 가난은 늘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쉽게 돈과 명예를 얻을 것 같아 동창생 오종수, 후배 전홍찬과 트리오 ‘바람개비’를 결성해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하덕규는 이종환이 운영했던 명동 쉘부르의 노래 자랑 대회에 출전, 3전 4기의 자세로 인상을 심어로 낮 시간 아르바이트로 노래를 불렀다. 이후 오종수와 듀오를 결성, 유니버샬과 계약금 130만원에 창작 곡 11곡이 수록된 데뷔 음반을 냈다. 팀 이름은 서영은의 단편소설 ‘시인과 촌장’으로 정했다.
삶을 반영하는 깊이 있는 음악의 정립은 부족했지만 장르의 탐색이 치열했던 데뷔 음반은 포크와 록을 넘나들며 독특한 사운드를 이끌어낸 ‘짝사랑’, ‘꽃을 주고 간 사람’, ‘님 타령’등이 학생층에 강하게 어필 되었다. 몇 차례의 방송 출연 후 아티스트를 소모품으로 여기는 방송 관계자들에게 심한 모멸감을 느끼고 “가요계의 병폐적 속성에 영합하기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오종수가 결혼 후 사업을 하기 위해 도중 하차를 하는 바람에 음악적 모색기를 맞이했던 때이기도 했다.
김민기, 한대수, 미국의 포크 가수 우디 거스리가 그에게 영향을 준 국내외 뮤지션들. 솔로로 독립한 하덕규는 김민기, 조동진, 김창완, 전인권 등과 교류를 하며 삶과 음악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났다. 82년 옴니버스앨범 ‘독도는 우리 땅’에서 종이비행기가 부른 ‘안녕’, 이병훈에게 ‘님타령’, 83년 남궁옥분에게 ‘슬픈 재회’를 주며 작곡가로도 호평을 얻어낸 그는 83년 대성음반에서 첫 독집을 냈다.
하덕규는 제작사의 상업적 의도만이 반영된 이 음반을 지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만,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이 즐겨 불렀던 ‘진달래’등에서 음악적 변화를 추구했던 때이기도 했다. 혼란스러웠던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반항보다는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생각하는 맑고 건강한 노래를 추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삶과 노래의 현실적인 괴리감은 고통을 동반했다. 그래서 위스키 반 병을 마셔야 잠이 들었고 하루 2갑 이상 씩 줄담배를 피우며 그의 심신은 망가져 갔다.심신이 황폐화되어 가던 86년 겨울, 누나가 다니던 교회를 찾았다.
“저를 괴롭혔던 이중성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된 채 살아가는 많은 현대인들이 안고 있는 공통의 문제임을 발견했지요” 84년 기타리스트 함춘호를 만나 2기 시인과 촌장을 재결성했다. 85년 우리 노래 전시회 프로젝트 음반에 참여해 ‘비둘기에게’를 발표했고 이정선에게 ‘외로운 밤에 노래를’, 양희은에게는 ‘한계령’‘찔레꽃 피면’을 주며 작곡가로 주목을 받았다.
86년 은유와 시적 상상력이 넘쳤던 하덕규의 음악과 함춘호의 연주가 빛났던 시인과 촌장 2집 ‘사랑 일기’를 발표했다. 이 음반의 히트를 발판으로 하덕규는 자신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의 음악에 빈번하게 이미지화 된 ‘비둘기’는 평화의 의미를 뛰어 넘어 ‘희망과 사랑’을 꿈꾸는 자신의 분신이었다.
그는 ‘고양이’를 통해 부도덕하고 교만한 가진 자들에 대한 비판을 가했고, ‘사랑 일기’와 ‘풍경’을 통해 세상과 자신을 껴안으려는 의지를 동시에 보여 주었다. 창작과 노래는 하덕규, 함춘호는 연주에만 전념하는 독특한 시스템이었다.
[추억의 LP여행] <시인과 촌장> 하덕규(下)
87년 꿈나무 소극장에서 첫 단독공연을 갖고 88년 시인과촌장 3집 <숲>을 발표했다. 히트 곡 ‘가시나무’를 통해 영적 구원의 고해성사를 노래한 하덕규는 “이제 나는 자유를 얻었다”고 털어놓았다. 복음을 통해 새롭게 거듭났지만 여전히 나약한 자아를 소년의 목소리를 통해 표현했던 ‘새날’또한 명곡이었다.
또 한계령 등 발표했던 80여곡의 가사를 묶어 시집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청맥’을 냈다. 이 시집은 5만권이상 팔린 베스트셀러가 됐다. 88년 이후의 음악 활동은 영적 성장을 고백한 일기나 다름없다. 90년 첫 가스펠 앨범 <쉼>을 냈고, 92년 독집 <광야> 통해 더욱 적극적으로 기독교적 음악세계를 드러냈다.
일부 팬들은 반감을 느끼며 멀어져 갔다. 하지만 인기에 연연하기 않고 신앙적 확신 위에서 현대 기독교 음악(CCM)의 길을 걸었다. 91년 숭의음악당에서 ‘자유’콘서트를 갖고 GNP' '아침무지개’등 미발표 곡과 히트 곡들을 묶어 시인과 촌장 10주년 기념 베스트음반을 발표했다.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와 함께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자선공연을 연 그는 94년 공동 음반 <한 톨의 사랑이 되어> 제작을 계기로 조하문 장필순 이문세 등과 미국 캐나다 브라질등지의 해외공연에 참여했다. 소리의 전도사가 된 그는 95년 CBS FM에서 하덕규의 ‘CCM 캠프’진행을 맡고 97년에는 15년 음악생활을 정리한 기념앨범<15years, 15songs>과 함께 독집‘집도 누구도 외딴섬이 아니다’를 발표했다.
그의 히트곡 <가시나무>는 리메이크곡으로 또다시 인기 정상에 오른다. 2000년 조성모는 <가시나무>를 리메이크한 앨범 <클래식>을 발표, 130만장이 넘는 대박을 터트린 것이다. 가시나무의 리메이크는 조성모가 처음이 아니다. 97년 남성 듀오 유리상자가, 99년엔 신세대 발라드가수 이정봉이 리메이크해 불렀다.
2000년에도 ‘맨발의 디바’로 불리는 이은미도 불렀지만 조성모에 의해 진가가 드러났다. 가히 ‘가시나무 신드롬’이라 할만 했다. 하덕규 스스로 젊은 날의 방황을 넘어 종교적 구원을 얻어가던 시기의 고해성사였던 이 곡은 “개인적 의미를 넘어 인간 존재의 고뇌를 음악어법으로 풀어냈다”는 평가 속에 재조명 받았다.하지만 여배우의 손가락의 절단하는 등 남녀간의 선정적인 사랑표현으로 일관된 조성모의 뮤직비디오는 “원작을 훼손했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음악평론가 성기완씨는 “조성모의 <가시나무>는 원곡의 철학적인 깊이가 달콤한 센티멘털리즘으로 윤색되면서 사유를 동반하는 호소보다는 직접적인 감수성으로 감각적인 N세대를 움직였다. 내지르는 노랫말만 난무하는 당시 신세대들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귀한 노래 말을 접할 기회를 얻은 것은 오히려 바람직했다”고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에피소드 한 토막. 하덕규는 99년 말 가시나무에 대한 리메이크 허락을 받으러 온 조성모에게 “성모, 교회 다니냐”고 한마디만 물었다. “교회에 다닌다”는 대답에‘가시나무’라는 단어에 애착을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허락을 했다.
2000년 3월 시인과 촌장 4집 ‘다리’를 발표했다. 사람과 사회, 사람과 사람사이에 다리를 놓아 단절된 인간들의 관계를 연결하고 싶다는 바람의 앨범이었다.
97년 함춘호와 재작업을 선언한 후 4년 만이었고 시인과 촌장으로서는 12년 만에 발표한 앨범이었다.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기념 콘서트를 열어 화제가 된 이 곡은 만도린 벤조 페니 휘슬 아이리쉬 포크 하프 등 이국적 악기 사용으로 아이리쉬 스타일에 얼터너티브 모던 록을 접합 시킨 곡으로 모던 록 그룹 델리스파이스가 부르기도 했다.
하덕규는 이기적인 마음의 뿌리인 가시를 없애고 사랑으로 화합한다는 메시지의 신곡‘가시나무2’를 발표했으나 라디오와 콘서트장이 아닌 TV에서 듣기는 여전히 힘들었다.
2001년 천안대 교회실용음악과에 출강을 시작한 그는 2002년 12월 세종문화회관의 라이브 앨범을 발표하고 전국 부흥투어 콘서트에 참여하며 대학 캠퍼스 등 곳곳을 도는 전도공연으로 CCM의 국내 활성화에 기여했다. TV에서 만나기 힘들었던 하덕규는 2004년 6월 KBS TV ‘낭독의 발견’에 얼굴을 내민데 이어 9월 연대 노천강당에서 열린 CBS 창사 50주년 기념 포크 페스티발 무대에 함춘호와 나란히 나와 4년 만에 팀을 이뤘다.
양희은이 불러 유명한 그의 곡 ‘한계령’이 고뇌가 극에 달해 자살의 유혹을 느낀 상황에서 설악산 한계령에 올라 만들어낸 곡이라면 ‘가시나무’는 종교를 통해 마음의 평화를 찾았을 때의 곡이다. “포크 싱어로서 존재와 사회에 대해 질문을 던졌던 시절이 시인과 촌장 시절이라면, 인간의 궁극적 해답을 찾는 여정이 그 이후의 음악 생활이었다.
이제 책임 있는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 같다. ” 그의 또다른 히트 곡 ‘사랑일기’는 임대주택 주거문화정착 홍보 송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의 홍보대사로, 사회의 아픔과 평화의 메시지를 노래를 통해 전파하며 살아가고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 주간한국 /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42&article_id=0000003256§ion_id=106&menu_id=106)
첫댓글 노래만 알고 있었고 작곡자에 대해선 전혀 아는 점이 없었는데 하덕규란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네요~! 주님을 영접후 오랜 방황을 접었다니 너무 감사한 이야기입니다~!
저도요. 한게령도 가시나무새도 좀 알고나니 예사로 들리지 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