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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국민들은 우리 민족에 대해 몇 가지 고정관념(固定觀念)을 갖고 있다. 첫째로 '우리는 단합이 어렵다. 즉 우리는 뭉치면 싸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한 예로는 조선시대의 신하들 간의 당파(黨派)싸움을 든다. 둘째로 '우리민족은 가슴속에 한(恨)이 담겨있다.'라는 생각을 한다. 즉 과거의 이민족들의 수많은 외침으로 피해를 받아서, 가슴속에 그 일들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다는 뜻이다. 셋째로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좁은 한반도(韓半島)를 주무대로 살아왔다.'라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나 역시 이런 생각들을 역사에 관심을 갖기 전까지 하고 있었다. 내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의 전기(傳記)를 읽고 나서라고 말할 수 있다. 난 그 책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단합이 어렵고, 항상 외침만 받아 한이 많은 우리 민족이 어떻게 주변 이민족들을 정벌하여 엄청난 영토를 얻고, 중국을 견제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특히 그가 확장한 영토를 지도에서 찾아 본 후에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이 후 많은 고민을 거듭한 결과 일제(日帝)의 식민주의(植民主義) 역사관(歷史觀)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식민주의 역사관 성립의 배경
식민주의사관은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의 한국에 대한 식민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왜곡된 사관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주장은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독립정신을 말살하는 방향으로 짜여진 것이다. 결국 일제가 의도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한국의 수천 년의 문화전통은 정체되고 부끄러운 역사일 뿐이다. 그러한 잘못된 역사는 한국의 민족 스스로가 극복할 수 없다. 따라서 일제의 식민통치는 오히려 한국의 역사발전에 도움이 된다. 이와 같이 하여 우리 민족에게 패배의식을 조장시키고 자신들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함으로써, 결국 우리 민족의 저항의식을 마비시키고 식민통치를 영속화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이 결과 식민통치가 끝나고 수십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우리의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 편찬작업
이런 식민주의 역사학을 주도한 기관으로는 동경제국대학·조선사편수회·경성제국대학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가 가장 대표적인 작업을 수행하였다. 조선사편수회는 일제관학자가 중심이 되고, 한국인을 고문과 촉탁으로 등용하여 가담시켰다. 한국인으로 참가한 사람은 고문에 이완용·박영효·권중현이고, 편수업무에 이병도·신석호·최남선·이능화가 참여하였다. 조선사편수회의 대표적인 작업으로 『조선사』 편찬작업을 들 수 있다. 조선 총독부에서는 1916년 '반도사편찬사업'을 시작한 후, 1922년에 조선사편찬위원회, 1925년에는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고 식민주의 역사학을 조직적으로 창출시켜 갔다. 즉 식민주의 역사학은 1925년 총독부 산하의 조선사편수회로 개편된 이후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여, 1937년까지 무려 16년의 기간 동안 백만원(百萬圓)이라는 당시에는 엄청난 거금을 투자하여 『조선사』 37권을 완성하였다. 『조선사』의 편찬원칙은 일제에게 유리하고 필요한 것은 많이 채록하고 한국사의 본질적인 문제나 민족문제 그리고 일제에게 불리한 것은 의도적으로 제외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료를 마음대로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조선사』가 한국사 연구 및 교육정책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컸다. 즉 한국의 주체적 연구와 교육은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일제에 의해 편집된 왜곡된 자료를 갖고 한국사연구를 진행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일제의 한국사연구는 순수학문으로의 연구가 아닌 그들의 침략을 정당화·합리화하는 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결국 그들의 목적은 우리 민족의 열등의식을 강조하고, 일본인의 우리 민족에 대한 우월감(優越感)을 세뇌시켜서 우리의 일제에 대한 독립·저항의식을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주요 논리로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타율성론(他律性論), 정체성론(停滯性論), 당파성론(黨派性論) 등이 있다.
일선동조론
일선동조론은 한국사의 뿌리를 없애려는 논리로서, 표면적으로는 한국과 일본이 같은 조상으로부터 피를 이어 받은 근친관계에 있다는 주장이지만 내면적으로 고대 이래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이론이다. 이 논리를 다룬 책으로는 시게노, 쿠메, 호시노 등의 일본 교수들이 쓴 『국사안(國史眼)』이 있다. 이 책은 출운신화(出雲神話)에 나오는 스사노오미코토가 조선의 지배자가 되고, 이나히노미코토가 신라의 왕이 되며, 그의 아들 아메노히보꼬가 일본에 귀복하며,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신라를 치는 등 허황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 책에 따르면 조선은 일본과 조상이 같을 뿐만 아니라 고대로부터 일본의 지배에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조선지배는 두 민족을 원상상태로 복구시키려는 당연한 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제시하는 또 하나의 증거로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있었다. 임나일본부설은 광개토태왕비의 비문을 해독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내용을 찾아서 자신들이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주장한 학설이다. 광개토태왕비는 1883년경 사코라는 일본의 정보장교가 수집한 후 6년간의 해독 작업을 거쳐 소개되었다. 일본학자들은 전에는 자신들의 사료(史料)인 『고사기(古事記)』,『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을 인용해서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주장했다. 하지만 광개토태왕 비문을 입수한 이후에는 이 비문의 내용이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입증해준다고 주장하면서 비문을 중심으로 과거에 주장했던 내용과 연대들을 수정해 갔다. 하지만 비문의 파손이 심해서 정확한 해독이 어렵고, 일본(日本)이란 국호가 그 시기 보다 후에 정해지며, 파손부분을 석회로 바른 흔적이 보이면서 이진희 등의 한국의 학자들에게 조작의 의혹을 받았다. 결정적으로 학자가 아닌 일본의 정보장교가 비문을 수집했다는 점에서 더욱 조작 의혹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학설은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어서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있다.
이러한 주장과 역사해석을 통해서 한국은 옛날부터 일본의 지배아래 있었다는 역사상이 일본인에게 심어졌다. 그리고 조선 병합이 이루어지면서 일선동조론은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었다. 합병 직후에 일본의 학술지 『역사지리』는 당시 일본의 역사학자 대부분을 동원하여 임시 중간 조선호를 냈다. 거기에는 "일천만 백의의 민중은 이제야 제국에 새로이 붙은 신민(臣民)이 되었다."라고 간행사에 씌어 있었으며, 여기에 실린 글들은 모두 일본의 한국 합병을 '양국 조상이 하나라는 설'을 근거로 예찬하였다. 가령 호시노라는 자는 '역사상에서 본 일한동역(日韓同域)의 복고(復古)와 확정(確定)'이라는 글에서 한일 합병은 과거로의 복귀(復歸)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3·1 운동 후에 더욱 강하게 주장되었다. 키다의 '일한양민동원론(日韓兩民族同源論)'은 그 대표적인 논문이다. 여기서는 고고학적 유물 외의 문헌·언어·풍습·신화 등 여러 방면에서 한일 두 민족의 동원(同源)이 상세하게 논해졌으며 동시에 일본의 한국지배의 정당성과 이에 반항하는 민족독립운동의 부당성이 강하게 주장되었다. 더욱이 이 논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일선동조론이 규모를 확대하여 단순히 일본인과 한국인과의 동조(同祖)·동원(同源)을 말할 뿐만 아니라, 만주·몽고 민족을 포함한 동조·동원이 주장되고 있는 점이다. 일선동조론은 일본과 한국과의 근친성·일체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두 민족간의 연대와는 전혀 상반되는 의식이다. 거기에는 한국의 독자적인 민족, 혹은 국가로서 존중하는 의식이 전혀 없다. 상대방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는 곳에 연대는 생각할 수가 없다. 동조론이 아무리 친근성을 강조하더라도 한국인으로서는 모욕으로밖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독선적인 일선동조론은 단순히 역사가의 한국사관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는 명치연간을 통하여 한국에 관한 다수의 저작에 광범하게 나타났다. 즉 일본인의 한국 역사에 대한 주요한 틀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일선동조론은 당시의 일본학자들에게도 비판을 받았던 논리이다. 그리고 한국의 학자들의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으로 일본의 고대문화의 대부분이 한반도에서 전해진 것들이었으며, 신공황후가 신라를 치고,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주장했던 시기의 일본은 아직 국가단계에도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본이라는 국호도 훨씬 후대에 정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일제가 주장하는 일선동조론은 한마디로 허무맹랑한 소설과 같은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오히려 일본민족이 한국에서 건너간 민족이라는 학설이 신뢰를 얻어가고 있다.
타율성론
타율성론은 한국사가 한국인의 자율적인 결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외세의 침략과 지배에 의해 타율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한국이 식민지가 된 것은, 일제의 포악한 침략성 때문이라기보다는 한국이 외세에 지배당해온 필연적인 결과라고 설명한다. 일제는 한국사에서 타율적인 법칙을 찾아내기 위해 온 정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한국사의 출발은 중국 이주자들의 식민정권에서 시작했다고 하면서 기자(箕子)와 위만(衛滿)을 강조했다. 한사군(漢四郡)이 마치 수백 년 동안 북한 지역을 통치하 것처럼 꾸몄으며, 한사군의 존재시기에 남한은 고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 후에도 반도(半島)라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중국과 만주, 몽고의 여러 민족과 일본이 쉬지 않고 한국을 침략해 한국사에 일관되게 흐르는 타율성을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들은 만선사관(滿鮮史觀)이라는 특수한 역사관을 만들어, 만주에서 일어난 여러 민족들이 한국을 타율적으로 얽어맨 중요요인 되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한국사의 타율적인 성격을 내치와 국방에까지 연결해 한국 역사에 친러파, 친미파, 친명파, 친일파 등 수많은 파당들을 등장시켰다. 내치의 여러 문제들을 외세에 의존해 해결하고만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에게는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의타적(依他的), 의뢰적(依賴的), 사대적(事大的) 민족성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논리는 몇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우선 지리적으로 반도이기 때문에 많은 침략을 받았고, 비주체적(非主體的)이 되었다는 논리는 역사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무시하고 단지 지리적인 요인에 의해 정해 졌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단지 침략을 많이 받았다고 그 역사가 타율적인 역사가 될 수는 없다. 좋은 예로는 우리의 이웃인 중국을 들 수 있다. 중국은 고대에서부터 근대까지 우리보다 더 많은 외침을 받고, 국가가 멸망한 적도 있었으나 타율적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침략한 민족들이 중국의 문화에 동화·흡수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므로 타율성 이론은 일제의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역사관일 뿐, 우리 역사의 진실을 설명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어떤 민족이든 침략 받은 수치의 역사는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때로는 외세의 침략이 그 민족의 잠재력(潛在力)과 결속력(結束力)을 불러 일으켜 민족 통합을 촉진시키고 민족 문화를 꽃피우게도 한다. 우리 나라의 역사도 이런 점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정체성론
서구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동양의 침략과정에서 이질적인 동양사회의 특징을 발전속도가 매우 느린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일제는 이러한 논리를 한국사에 적용하였다. 즉 자신들은 동양 사회에 속하지만 서구와 비슷한 역사발전 단계를 밟아 왔는데, 조선은 일본에 비하여 매우 뒤떨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체성론의 기본 발상이다. 정체성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이는 후꾸다와 시가다였다. 후꾸다는 독일에서 유학하여 경제학의 대가인 브렌타노(Lujo Brentano)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러일전쟁 직전인 1902년 여름에 조선을 돌아보고는 그것을 자료로 삼아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라는 논문을 썼다. 여기서 그는 한국사의 두드러진 특성으로 정체성을 들고, 그 원인으로는 봉건제(封建制)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당시 한국의 발전단계를 일본에 비교한다면 봉건제가 성립되기 전인 고대 말 10세기경의 '후지하라'시대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를 이론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한국은 토지사유제(土地私有制)가 성장하지 않아 토지공유(土地公有)의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교통경제(交通經濟)·화폐경제(貨幣經濟)의 발달이 낮은 수준이고, 씨족적(氏族的) 통제의 사회로서 상공업(商工業)의 사회적 분화(分化)가 미숙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정체성론을 주장한 또 다른 학자인 시가다는 '조선에서의 근대자본주의의 성립과정'과 '구래의 조선사회의 역사적 성격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개항 당시의 한국은 자본축척(資本縮尺)도 없었고, 기업적 정신을 가진 계급도 없었으며, 대규모 생산을 담당할 기계 기술도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해방 후에 쓴 글에서까지도 "이조 오백 년간 어느 시기를 들어보아도 같은 생활 양식이 있을 뿐이고 같은 사고 형식이 지배하였다. 생산 방법의 약진도 없고 소비 생활의 변화도 없어서 항상 동일한 주장과 같은 비난이 반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반성도 개혁도 없었다. 항상 양반은 지배하고, 상민은 굴복하고, 항상 주자학(朱子學)은 금과옥조(金科玉條)이고, 항상 원시적 농경이 행해지고, 항상 국민은 최저한의 생활에 만족하도록 되어졌다. 이와 같은 취생몽사적(醉生夢死的) 시간의 경과를 포괄적·상징적으로 이름 붙인 것이 곧 조선사의 정체성론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일본의 정체성론자들이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의 조선사회를 8세기에서 10세기경의 일본 수준으로 보고자 한 저의는 그들 나름대로 단정한 소위 낙후된 조선사회의 근대화(近代化)를 위한 일본의 역할을 강조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조선을 근대화시키는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이웃으로 한국을 도와주는 국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사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은 일본의 침략행위를 합리화하는 식민주의 역사학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이 논리를 극복하려면, 일제의 조선 진출이전에 조선에서 근대화를 향한 사회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면 된다. 조선은 17세기 이후에 사회·경제뿐만 아니라 그 외 다른 방면에서도 근대 자본주의(資本主義) 사회로 이행할 수 있는 맹아를 지니고 있었다. 첫째, 농업 분야에서 자본주의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판매 목적의 상업적 농업과 이를 위한 대농(大農) 경영이 이루어진다. 이는 곧 자급자족(自給自足) 위주의 중세 봉건적 농업에서 근대 농업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둘째, 화폐가 통용되고 상업이 급속도로 발전되었다. 17세기이래 화폐 '상평통보(常平通寶)'의 발행 횟수와 발행량이 급속히 증가하고, 이와 함께 5일 혹은 3일마다 열리는 장시(場市)가 19세기초에는 전국적으로 1000여 개가 넘었다. 또한 지역 교통로를 중심으로 대상권(大商圈)이 형성되고 상업 자본가가 출현했다. 셋째, 수공업(手工業)에서도 변화가 일어난다. 자본주의적인 공업생산의 바로 전 단계라고 할 수 있는 공장제 수공업이 나타났다. 19세기초에는 수천 명을 고용하는 광산이 생기고 이 과정에서 자본과 기술이 분리되는 경영방식도 나타났다. 넷째, 중세를 지탱하던 가장 끈끈한 제도인 혈통·신분제가 붕괴하고 있었는데, 이는 아주 결정적이다. 19세기 중엽인 철종 때 이미 신분제가 붕괴하고 있었음을 당시의 대구(大丘) 호적이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항들은 조선후기에 근대화의 싹이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정체성론 역시 일본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일 뿐이었다.
당파성론
일제의 학자들은 우리 민족이 태어나면서부터 당파적(黨派的) 민족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민족적 단결을 파괴하여 독립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 왕조의 정치를 당쟁(黨爭)이라고 매도하였다. 이 논리의 대표적인 학자는 시데하라이다. 그는 『한국정쟁지(韓國政爭志)』라는 책을 통하여 당파성론을 만들었다. 당쟁이라는 용어를 나름대로 개념 규정하여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그는 조선시대의 정파(政派)는 "주의(主義)를 갖고 서로 대립하는 공당(公黨)이 아니라, 이해를 가지고 서로 배제하는 사쟁(私爭)이다."라고 규정하였다. 하야시는 시데하라의 견해를 보강하여 『조선통사』라는 책에서 "소위 당파란 것은 본래 뚜렷한 주의·강령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러 가지 돌아가는 형세에 따라 동서남북 여럿으로 분속된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경제사가인 카와이도 『조선에서의 당쟁의 원인 및 당시의 상황』이라는 글에서 경제생활이 곤궁하고 그것에 따른 사회조직이 문란한 것이 당쟁이 뿌리내린 주된 원인이라는 경제결정론(經濟決定論)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또한 호소이도 『붕당 사화의 검토』에서 정쟁은 여러 대에 걸쳐 계속되어 결코 고칠 수 없는 조선인의 체질이라고 강조하였다.
당파성론의 강조는 3·1 운동 이후 한국민족의 민족운동을 분열시키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1922년에 기획되어 1925년에 완성된 『조선사강좌』 시리즈에는 조선왕조의 정치에 관해 '이조정쟁약사'와 '근세조선사'에서 다루었다. 그 집필자인 오다와 세노는 그 뒤 줄곧 당쟁사 연구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오다는 천주교 박해나 홍경래난의 원인까지도 당쟁에서 찾았다. 또한 세노는 16세기 사화(士禍)를 당쟁과 연결시켜 당파성론을 확대시켰다.
그러나 이 논리 역시 몇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민족성이 역사의 산물인 것이지 역사가 민족성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주장은 거꾸로 되어 있는 것이다. 둘째, 국내의 대립항쟁이 없는 민족이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한때 지방분권적(地方分權的)이었던 일본에서 이 점은 더욱 심하였다. 셋째, 흔히 조선시대의 붕당(朋黨)을 말하지만, 그 것이 선천적인 민족성의 소산이었다면 한국사의 시초부터 있었어야 한다. 하지만 붕당은 16세기에 이르러서야 발생하였다. 이것은 붕당이 역사적 산물이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붕당이 한국사의 발전에 긍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고 한다.
식민주의 역사관의 영향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말미암은 영향은 심각한 것이었다. 우선 학교 교육에서 식민사학이 강제되고 있었으므로 그 것의 보급이 식민사관을 극복하려 했던 민족사학의 전달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결과 일제가 목적한 대로 한국인 사이에 자기 역사에 대한 비하와 멸시가 만연하여 조국에 대한 애정을 잃어 갔고, 한국사를 절망적인 역사로 이해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그리고 점점 민족성이 마비되면서 일본인으로 변해 가는 사람이 증가하였다. 둘째, 불리한 상황에서 싸워야 했던 것이 민족사학의 처지였으므로 한국사학의 발전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한국사학이 발전하는 것을 항상 경계하고 방해하였다. 그 방법으로는 한국 사학자들을 감시하고, 학문 외적으로 회유도 하고, 탄압하는 원시적 방법도 구사했다. 그러므로 민족사학자가 해외로 망명한 이가 많았고, 식민사학에 합류해 가기도 했다. 셋째, 역사학에서 과학성의 기초라 말하는 실증에서도 일본사와 조선사에 적용하는 방식이 달라 조선사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두 가지 경우를 말하면, 하나는 조선사의 경우 부정적 사실을 집중 개발하여 조선사가 부정이 부정으로, 부패가 부패로, 눈물이 눈물로 연속된 역사로 이어지도록 사실을 찾아 실증하는 것이다. 그것도 있는 사실이므로 그것들만 모으면 결국 멸망으로 가는 역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일본의 실증사학인 아카데미즘사학이 일본사를 정리하는 방법은 전통시대의 일본사에서 실증으로 부정할 수 있는 것을 떼어내는 방식으로 정리해 갔는데, 조선사는 백지 위에서 실증할 수 있는 것을 모으는 방식으로 역사를 정리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사는 긍정의 기초 위에 부정의 사실을 찾았고, 식민사학의 한국사 작업에서는 부정의 기초 위에 긍정의 사실을 찾는 방식이었다. 그러한 원인으로 한국 고대사가 과학적으로 실증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1960년대 구석기 시대와 청동기시대의 발굴 성과가 있기까지 옛 기록을 믿으려 하지 않는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넷째, 구체적인 사례로 남북조(南北朝)시대가 통일신라시대로 인식이 굳어간 것,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4국 시대에 임나일본부설이 끼어들어와 3국 시대에서 4국 시대의 인식이 일어나거나 발전하지 못한 것, 온통 당쟁의 망국으로 몰고 간 것 등 역사해석을 오도한 것이 적지 않았다. 비록 그것들이 옳다고 해도 이의를 제기하면 봉쇄해 버리는 방식으로 논의 광장을 경직시켜 역사학 발전을 차단했던 것이다. 다섯 번째 영향은 한국인이나 한국사학계가 현대사 연구의 감각을 잃어 버렸다는 점이다. 한국인이 고대사에 대해서도 민족적 의미가 있으면 연구를 계속하기가 힘들었는데 하물며 식민통치 당시의 문제를 역사학으로 평론해야하는 현대사 또는 당대사의 연구는 입문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현대사는 식민사학의 전유물로만 존재하였다. 그리고 식민사학자들은 한국 학생이 현대사에 관심을 보이면 역사는 적어도 한두 세대는 경과해야 객관화할 수 있고 그래야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결과 1970년대까지도 현대사 연구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하였다.
식민주의 역사관의 극복과 우리 역사관의 미래
결론적으로 식민주의적 한국사관은 일제의 한국지배를 정당화·합리화시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사관이다. 학문의 생명은 진실을 추구하는 것에 있다. 하지만 식민사관은 이 진리를 무시했으므로 진정한 의미의 학문이 될 수 없다. 이 왜곡된 사관을 극복하지 못하면 올바른 한국사관이 발전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그리고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세계의 중심은 우리 민족이다.",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다.",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가 세계 최초이며 세계의 여러 민족들은 다 우리의 후손이다." 등의 식민사관에 억눌려서 생긴 부작용인 지나친 민족주의 역시 극복해야 할 것이다. 또 사관뿐만 아니라 일제가 심어준 우리의 민족성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 역시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한(恨)의 한민족(韓民族)', '뭉치면 싸우는 한민족', '한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해 본 적이 없는 한민족의 역사' 등의 말이 우리에게 쓰여진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위에서 확인하였듯이 한 국가의 선조들의 역사와 민족성을 왜곡하는 일은 후손들에게 엄청나게 나쁜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그런 일을 저지른 과거의 일본 제국주의는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고, 우리에게 사과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과거 일본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왜곡된 역사를 신뢰해서는 안되고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우리의 역사를 다시 보아야 한다.
*참고서적*
1. 조동걸·한영우·박찬승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하)』 '창작과 비평사'
2. 이범직·조동연
『한국인의 역사의식』 '청년사'
3. 조동걸
『현대 한국 사학사』 '나남출판'
4. 이만열
『우리 역사 5천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바다출판사'
5. 이기백
『한국사 신론』 '일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