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내려준 기적 / 글 김 명이
아, 아. 눈, 저, 눈, 눈을 떴다. 여보, 얘들아 아버지가 너거 아버지가 눈을 떴다.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병원 모퉁이에 서있던 식구들 모두가 나의 비명에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들것에 실려 나오는 아버지 곁으로 황겁히 몰려 들었다. 저마다 외마디 비명이다, 1996년10월 초에 남편은 갑자기 머리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뇌출혈 이란 병명이 나왔다. 남편은 오래 전부터 간 경화로 몸이 쇠약해 있었던 터라, 간 치수가 높아 쉽게 수술 할 형편이 못되었다. 정말 어이 없는 일이다. 이를 두고 하늘이 노랗다고 할까, 남편은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점점 정신이 혼미해 지고 있다. 사지를 꼭꼭 주무르지 않으면 수족에 마비가 온다하여, 밤도 낮도 쉬지않고 두드리고 주무르고 애써보아도 끝내 한쪽 수족이 마비되고 말았다. 일주일 지난 후에는 완전이 제 정신이 아니었다.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 살고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친척들이 병문안을 오고 다정했던 벗들이 문병을 와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3살짜리 애기와 같은 기능이라 이 모습을 보는 이 마다 돌아 서서 눈물을 훔쳤다. 간 치수가 높아 수술은 엄두도 못 내고 복수가 차서 배는 곧 터질 것만 같았다. 곁에서 지켜보는 이의 안타까움이 피를 말리는 순간순간을 감이 누가 짐작 할 수 있을까, 부산 백병원 뇌신경 외과 중환자실은 두병실을 나란히 곁에 두고, 한쪽에는 마지막 숨을 몰아 쉴 때 인공호흡 시키거나 뇌사상태로 있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고, 또 한쪽에는 보호자가 곁에 있으면서 위험한 고비를 넘긴 중환자가 있는 곳이다.
양쪽 병실을 드나들며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기를 3개월, 창백한 얼굴에 뼈만 앙상한 남편은 복수로 배가 불러 가뻔숨을 몰아 쉬워 차마 가슴아파 볼 수가 없다, 보다못해 서울로 옮길 것을 결심하고 주치의 소견서와 진료 서류를 모두 갖추어 떠나려니 원장은 가지 않기를 권했다. 환자는 살날이 며칠 남지 않았으니 먼 길을 고생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토록 원장의 간곡한 권고도 뿌리치고 서울 중앙 병원으로 찾아 갔으나 역시, 소견서 내용을 보고는 다른 병원에 가 보라고 하면서 환자를 병원 문전에 방치해 둔 채, 문전 박대를 하였다. 아무리 울며 사정 해보았지만 환자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럴 수가, 나는 순순 이 그냥 물러 설수 없었다. 이럴 경우에 이판사판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도 해야 했다. 너네, 병원에 천리 길을 마다 않고 살려보려고 찾아왔는데, 환자를 문전에 두고 죽일 작정이 더냐, 이 엄동 설한에 저렇게 문전에 두고 얼어 죽게 하고 싶으면 죽도록 버려 두어라, 너네 의사들 본분이 무엇인지 잊어버렸나, 내가 가르쳐 줄까, 일단은 응급실에라도 눕혀 주사라도 놓아 주고 보내야 그것이 의사의 도리요 본분이 아니냐 소견서도 안 보았냐 3개월동안 주사로만 살아온 사람이 아니든가, 그런데 저 토록 땅바닥에 팽개쳐 둘 태냐고 나는 한바탕 병원에서 북새통을 이루고 미친 듯이 발광을 했다. 그제서야 그들은 환자를 응급실에 눕히고 링거 를 달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결국은 입원실로 옮겨졌다. 그러나 내과가 아닌 신경외과였다.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남편의 의식이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집불 같은 생명의 불씨가 서서히 꺼져가고 있는 것이다. 아, 이제는 절망 뿐이다. 서울로 온 지가 팔일째, 이제는 버티어볼 희망이 없다. 신진대사가 멈춘지도 오일이나 지났다. 더 이상 가망이 없음을 판단하고 퇴원 할 것을 담당 의사와 의논하고 마지막 숨을 따뜻한 내 집에서 가족들의 보호 안에 거두고 싶었다. 그러나 의사의 대답 이 마산까지는 글쎄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고는 말없이 돌아선다. 퇴원은 바로 죽음을 예고하는 것이다. 고향 집에도 초상치룰 준비를 하도록 부탁하고, 각 지역에 친척들에게도 부고 대신에 전화로 알리고 수화기를 내려 놓으니, 너무 억울하고 불상해 그대로 보낼 수가 없었다. 평소에 얼마나 깔끔하고 단정한 분이시던가. 병원에 온후로 옷 한번 바로 입지 못하고 가족들의 따뜻한 간호 한번 받지 못하고 그대로 먼길 보내기는 너무 억울하고 서러웠다. 울다가 지쳐서 대기실로 돌아오니 예수를 믿으라는 조그마한 전단지가 나의 눈을 잡아 당긴다. 그래 하나님은 기적을 행한다는데 사람의 능력은 이제 벗어난 상태라, 하나님 에게 기적을 바라는데 마음을 굳혔다. 큰 병원이라 육층에 교회가 있어 나는 거기서 울면서 애원 했다. 하나님 정말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남편 불쌍히 여기시고 하루만 정말 딱 하루만 생명을 연장해주면 내 목숨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 말씀 믿고 섬기겠다고 애원했다, 애원이 아니라 절규였다.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나는 평소에 예수님도 하나님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 서고 보니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 남편을 하루만이라도 가족들과 같이 보내고 싶은 욕망 뿐이었다. 긴-,밤이 지났다. 새벽 여섯시 다시 교회를 찾아가 하나님과 단판 싸움이라도 하듯이 신경전을 벌이고 매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기도가 아니라 애간장이 다 녹아 버릴듯한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의 몸부림이었다. 아침 7시 첫 면회시간에 들어갔을 때 남편은 불러도 대답 없고 아무리 눈을 떠보라고 울부짖었으나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날이 밝아 퇴원 수속을 마치고 우리가족은 병원 한쪽에 지친 모습으로 맥없이 넋을 놓고 남편이 나오기를 기다린 지 세시간, 11시가 다되어서야 들것에 실려 나오는 남편의 눈, 병원측에서는 완전이 시체 취급을 하고 지금까지 링거로만 살아온 사람인데 생명 줄인 주사마저 모두 제거하고 몸뚱이 하나만 달랑 실려 나왔다. 아,' 이게 어찌 된 일일까, 환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들을 처다 보고 있었다. 아, 이런 기적이 있을 수가, 하나님 ,하나님 감사합니다,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불렀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적이다,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나의 절규를 하나님은 외면 할 수 없어 들어주셨다. 나의 애절한 간구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건강한 사람도 서울서 진동까지 먼 길을 오려면 목을 축여야 하거늘 하물면 환자가 얼마나 목이 탈까, 생수를 한방 울씩 넣어 보지만 입 속으로는 하나도 넘어 가지않고 입 가로 모두 흘러 내린다. 집 떠나 온지 3개월이 지나도록 입으로 아무것도 넘긴 것이 없어 입술 자체가 붙어버렸다. 이날 따라 얼마나 눈이 많이 내렸는지 온통 빙판길이었다, 1997 년 1월 5일 드디어 남편은 살아서 자기침실에 눕게 되였다. 이 시간이 있기를 얼마나 애태웠던가, 이제 눈을 감는다 한들 여한이 없겠다. 먼 곳에서 친척들이 상을 치르기 위해 많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은 가버린 정신까지 맑게 돌아오고 있었다. 막상 숨을 쉬고 살아났으니 주사라도 놓아야 겠다는 생각에 가까운 병원 원장님을 모셔 왔으나 살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혈관마저 쪼그라들어 주사바늘 하나 꽂을곳이 없어 그냥 돌아가고 말았다. 서울 병원에서는 목에 구멍을 뚫어 혈관에다 링거를 달았는데 집에서는 장비부족으로 주사마저도 놓을 수 없었다. 물도 한 방울 넘어가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붕대를 접어서 입술에 얹어 놓고 24시간 꼬박 곁에 앉아 물을 조금식 부어 서서히 타고 흘러 들도록 하여 하루가 지나니 보리차가 커피 숱 가락 반 서푼은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교회에 전화하여 기도해 주기를 부탁했더니, 선교사와 장로님이 와서 매일 하루도 걸러 지 않고 기도해 주었다, 집에 온지 삼일 만에 친척들이 부위금으로 가져온 봉투를 쾌유를 비는 위로금으로 약 갑으로 쓰기를 당부하고 모두 떠난 뒤 .한문으로 쓴 주소를 보였더니 술술 다 읽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그 기쁨을 말로나 글로써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이제는 정말 살았으니 무엇이든지 먹여야 했다. 그 동안 병원에서 환자들에게 하던 간호사의 흉내를 내어 보리차를 고무 호수로 코에 넣어 큰 주사 대롱으로 밀어넣고는 한시간 뒤에 다시 밖으로 배출시키고 이렇게 하기를 계속 반복하였다. 보리차가 미음으로, 다시 죽으로, 다음에는 밥으로 이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니, 멎었던 신진대사가 자연적으로 원 상태로 돌아가 약한 첩 쓰지않고 주사한대 맞지않고 오직 기도와 정성으로 살아났으니 나의 기쁜 이 마음을 하나님께 감사 드릴 뿐이다. 하나님께 하루만 생명을 연장해 주기를 얼마나 애절하게 가슴이 다. 녹아내려도 부족할 심정으로 애원하지 않았던가, 그러던 남편은 하루 없는 백일을 살다가 고 운님 그리운 님, 한곳에 다 불러놓고 가장 편안한 모습으로 1997년 4월 12일 저녁에 깊은 잠이 들었다. 세상에는 믿기 지 안을 이런 기적도 있음을 말하고 싶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 하면서 가장 위급한 순간에 놓일 때,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을 찾고 부르리라 생각한다. 진심으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할 때 정녕 그곳은 하나님이 계시리라 믿는다.
(시작메모" 처음느낀 하나님의 체험신앙 간정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