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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야기 | <조선시대>- 제17대 효종, 김자점의 역모사건,
| > 김자점의 역모사건 김자점, 그는 인조반정의 공신이라는 입지를 바탕으로 한 때 정권을 장악해 권세를 누리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아 물러난 바 있으며, 이후 김류와 제휴하면서 다시 정계에 나선 인물이었다. 김자점은 사은사로 수차에 걸쳐 청나라를 내왕하면서 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한편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조소용과 결탁하여 인조의 의심을 받고 있던 소현세자를 비난하여 인조와 이간을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조소용이 낳은 효명옹주와 자신의 손자 세룡을 혼인시킴으로써 궁중과 유착관 계를 보다 강화시켰다. 그러나 김자점은 자신의 절대적인 후원자였던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여 김상헌, 송시열 등 반청 인사들을 중용하자 그들의 탄핵을 받아 유배당했다. 그는 유배 후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역관 이형장을 시켜 새 왕이 구신 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고 한다고 효종을 청에 고발하였다. 그는 그 증거로 조선이 청 의 연호를 쓰지 않은 문서를 보냈다. 이사건으로 청나라는 군대를 압록강 근처에 배치하고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이경석, 이시백, 원두표 등의 외교 능력에 힘입어 이사건은 무마되었고 김자점은 다시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광양으로 유배된 김자점은 1651년 조귀인과 짜고 다시 역모를 획책한다. 아들 이익으로 하여금 수어청 군사와 수원 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을 제거하고 숭선군을 추대하려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미리 폭로되어 아들과 함께 죽었으며, 그를 후원하던 인조의 후궁 조귀인도 사약을 받았고 그를 따르던 무리들도 모두 축출당했다.
효종의 업적 두 번에 걸친 외침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파탄지경에 이른 경제 질서 확립을 위해 그는 충청도와 전라도 근해 지역에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고, 전세를 1결당 4두로 고정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 한편, 문화면에서도 역법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 태음력과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하여 24 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간을 계산하여 제작한 시헌력을 사용하게 했다. 또 '국조보감'을 재편찬해 치도의 길을 바로잡고, '농가집성' 등의 농서를 마련해 농업 생산을 늘리려 했다. 또한 흐트러진 윤리를 바로잡기 위하여 소혜왕후가 편찬한 '내훈', 김정국이쓴 '경민편' 등을 간행하였다
인선왕후 장씨 인선왕후 장씨는 우의정 장유의 딸이며, 13세가 되던 1630년 한살 어린 봉림 대군과 가례를 올리고 풍안부부인에 봉해졌다. 1637년 조선이 병자호란에 패전하자 소현세자를 따라 봉림대군과 함께 볼모로 잡혀가 8년 여 동안 심양에서 생활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가 죽고 봉림대군이 세자에 책봉되자 세자빈이 되었으나, 책봉이 제때 되지못해 사저에서 아이를 낳기도 했다. 그 뒤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며, 1649년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어 2년 뒤에 정식으로 책봉되었다. 1659년 효종이 죽은 후 1662년 효숙의 존호를 받아 대비로 있다 가 1674년 질병을 얻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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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쏠쏠한 재미 좋은글 사랑합시다.
전주향교/鶴田/옮김/한문희총대장 감사합니다.
본래의 마음,자유인 한문희총대장, 백두대간의 전설 자유인 백두대간종주대한문희총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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