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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군산 55코스 제1부
진포해양테마공원-째보선창-서래포구마을-경암동철길마을-진포시비공원
20230628
1.경암동 철길마을과 금강 시간여행
서해랑길 54코스 종점이자 시작점인 55코스 출발지에서 군산시 장미동 일대를 둘러보며 지난 시절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군산 부두역으로 협궤열차가 증기를 뿜으며 달려오고, 부두 노동자들이 부잔교에 접안한 선뱍의 화물을 옮기는 힘겨운 모습과 선창에서 흘러나오는 노랫가락이 들려온다. 그 가까이에 조선 민중의 수탈에 앞장선 일제의 근대 서양식 금융 건물들이 위엄을 드러내고, 식민지의 가난한 조선 백성들이 위축되어 거리를 스쳐간다. 시간을 거슬러오른 이 상상의 어두운 풍경에서 시간을 흘러내려와 오늘 현재의 대한민국 자존의 풍경이 진포해양테마공원에 휘날리고 있다. 진포대첩을 기념하여 육해공군에서 퇴역한 군장비들이 늠름하게 전시되어 있고, 진포대첩을 재현한 조형물도 조성되어 있다. 진포해양테마공원 관람의 정점은 해군상륙함(LST) 위봉함 676호이다. 시간에 허둥거리며 내부관람은 엄두도 못내고 외관만 살피며 째보선창을 향하여 허겁지겁 일행을 좇아간다.
출발할 때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비가 세차졌다. 우산을 받쳐들고 장미동 지역에서 금암동으로 넘어갔다. 이곳이 옛 죽성포구인 째보선창이다. 개천이 금강과 만나는 자리에 널찍한 만(灣)이 형성되어, 배의 접안이 용이하고 해풍을 피할 수 있는 장점들 때문에 이곳에 죽성포구가 형성되었고, 일제 강점기에 어판장이 들어서서 죽성포구는 동부 어판장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죽성포구는 자연 지형이 움푹 째져 있는 모습이어서 예전부터 째보선창이라 불렸는데, 일설에 이곳에 살던 째보(언청이) 객주가 포구의 상권을 모두 장악하면서 동부 어판장을 째보선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째보선창의 현실을 훨씬 실감나게 한다. 이 일대의 복개공사 때문에 움푹 째여 있는 선창을 볼 수가 없어서 째보선창 이야기가 현실적 사실감을 더해 준다. 그래서일까? 이곳에 군산 맥주양조장이 들어서고 '째보이야기 1899' 수제맥주시음장도 조성되었다. 째보이야기가 오늘의 쇠락한 째보선창을 얼마나 흥성하게 할 수 있을까? 아직 9시가 안 된 시각, '째보이야기 1899'는 문을 열지 않았다. 어느 날일까? '째보이야기 1899' 에서 맥주를 들이키며 시간을 거슬러 군산 이야기에 빠질 날을 기약한다.
비는 소낙비로 변하여 퍼붓기 시작한다. 여름날의 소낙비, 오랜만에 퍼붓는 빗속으로 나아갔다. 순식간에 등산화와 아랫도리가 젖었다. 우산을 받쳐 머리와 가슴 언저리까지만을 비를 막으며 군산시 중동 지역으로 들어갔다. 샘터경로당 옆 골목길에 벼락장군 만신집이 있다. 해안 지역에 풍어와 안녕을 기원하는 만신집들이 요즘 많이 사라졌는데, 군산 도심 중동에 벼락장군 만신집이 남아 있다. 벼락장군이 높이 솟은 마른 대나무 줄기에 만신 깃발을 달고 시대의 증언처럼 벼락을 치는 것 같았다. 비가 사그라들어 가랑비로 변했다. 벼락장군의 보호인가?
중동(仲洞) 서래5길을 따라가면 오른쪽 주택 벽면에 벽화, 왼쪽 철판 울타리에 중동 지역을 소개하는 여러 사진들과 설명안내판이 붙어 있다. 100년 전의 사진들과 그 시대의 이야기들이 빗물처럼 흘러내린다.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옷차림과 풍물들이 가까운 시절의 낯익은 모습처럼 가슴을 적시고 빗물 따라 흘러간다. 아버지, 어머니가 벽화 속에서 걸어나오셔 골목길로 걸어가신다. 바삐 따라가지만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비의 환상에서 깨어나 이야기 골목길을 빠져 나왔다. 서래포구마을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 중동(仲洞) 복합커뮤니티센터를 돌아나가면 광장에 중동 당산제(仲洞 堂山祭)를 모시는 당집이 새로 지어져 자리하고 있다.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도 마을의 안녕과 복(福)을 축원하고,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는 당산제를 200년 이상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당집은 경포천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는데 경포천으로 나가보니 금강과 합수하는 경포천 하구에 경포천을 가로지르는 서래교가 놓여 있고, 경포천 정비 작업이 진행 중에 있다. 경포천 정비 사업으로 어수선하게 어질러진 서래포구마을 입구 조형물 옆 시멘트벽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음식 준비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어부 아저씨들도 배에 달았던 만선기를 빼들고 당산제로 갑니다. 정성껏 만든 제사상에 올릴 음식도 지게에 그득하게 싣고 흥겹게 노래하며 올라가요." 예전의 흥성했던 서래포구마을 모습을 표현한 것 같다.
서래포구(京浦) 마을은 군산 최대의 자연하천인 경포천(京浦川)을 앞에 둔 어촌마을이었는데 당시 마을 주민들은 자신들의 마을을 슬애라고 불렀다. 슬애란 서래의 군산식 발음으로, 그 뜻은 '서울에 가는 포구'라는 뜻이다. 이 슬애를 한자로 '경포(京浦)'라고 적게 되었다고 한다. 군산포가 조창을 중심으로 한 관용포구였다면 '서울로 가는 포구'인 경포(京浦)는 조선시대 군산의 어업과 상무역이 가장 활발했던 민간인 포구로서, 700여 척의 배가 드나들었고, 실뱀장어, 꽃게, 주꾸미 등 어획물을 수확하며 과거 군산 수산업의 중흥기를 이끌어 왔던 곳이라고 한다.
경포천(京浦川) 위 경포교로 올라갔다. 경포교에서 남쪽 경장동 방향을 바라보면 경포천의 최종 배수문 경포배수갑문이 놓여 있다. 저 위쪽에 경장 시장이 있었을 것이다. "경포에는 경장시라는 오일장이 열렸다. 경장 시장은 경포에서 경포천을 따라 조금 안쪽으로 올라가 현재의 경장동 예그린 아파트 인근에 위치하였다. 일명 설애 장터라고도 불렸다."(향토디지털군산문화대전 참조) <군산풍풀기(群山風物記)>의 작가이자 시인인 최영 작품 '개구리'는 경장동을 배경으로 하여 창작되었다. "경장동(京場洞)/ 주택가는/ 개구리들의 텃밭을/ 나누어 가졌다.// 무논에서만/ 살아야 할 그들이/ 도자에 깔려 죽고/ 농토마저 모두 빼앗겼다.// 살아 있는/ 목숨들은 흩어져/ 건폐율(建蔽率)의 그늘에 숨어/ 정원수 이파리 이슬로 연명했다.// 정원수는 묻어나는/ 달빛의 그늘에 숨어 살다가// 이슬비가 오는 밤이면/ 살아 있는 목숨들을 알아 낸다./ 울면서 확인을 한다.// 소낙비가 뿌리는 밤이면/ 독립만세를 외친다/ 죽은 목숨들도 함께 울어댄다."(최영(崔瑛, 1945~2011)의 '개구리' 전문) 경포천의 서래포구와 경장 시장, 이곳에 살던 수많은 백성들이 개구리들처럼 울어대고 있는 것 같다.
근엄한 군산경찰서를 지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군산화력발전소 자리에 건립된 군산 천연가스발전소를 거치면 군산 로컬푸드 복합센터 홍보물이 세워져 있다. 알림막에 2023년 6월 27일 개장을 알리고 있으니 어제 로컬푸드가 개장한 것이다. 그런데 경암동 철길마을을 지나 조촌로를 따라 금강 강변으로 가는 도중에도 2023년 5월에 개장한 군산 중소유통공동도매물류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군산은 로컬푸드 유통 중심지가 되는 것 같다.
경암동 철길마을로 진입한다. 철로 왼쪽 건물은 주로 2층 구조, 그 오른쪽 건물은 화장실이나 창고라고 한다. 철길을 따라간다. 철길과 주택 사이가 너무 좁아 놀라웠다. 이 철길이 폐쇄되고 새로 지어진 집들이겠지? 아니었다. 1944년 철도가 개설되고 철도 주변에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했고, 19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철길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페이퍼 코리아 공장과 군산역을 연결하는 총 연장 2.5㎞의 경암동 철길은 신문 용지 재료를 실어 나르기 위해 1944년에 최초로 개설되었고, 2008년 7월 1일 최종으로 통행을 끊었다.
추억의 시간 여행 경암동 철길 양쪽으로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군데군데 향수를 일으키는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어린 시절 불렀던 기찻길옆 동요를 부르며 경암동 철길을 걷는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 칙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소리 요란해도 아기아기 잘도 잔다.// 기찻길 옆 옥수수밭 옥수수는 잘도 큰다./ 칙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소리 요란해도 옥수수는 잘도 큰다."(윤석중/동시, 윤극영/작곡, 기찻길옆1947) 철길 옆에 해바라기가 피어난다. 옥수수를 심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시간의 추억 여행 철길에는 교복대여소들이 많다. 교복을 입은 남녀학생들이 철길을 가는 모습이 상상된다. 낭만파는 교복을 대여받아 입고 옛 학창시절의 추억에 잠길 법도 하다. 철길을 달리는 열차와 집이 거의 맞닿을 정도로 좁은 철길을 순식간에 걸었다.
경암철길마을 관광안내소 앞으로 나오니 철길마을 쉼터에, 열차가 어디쯤 올까? 소년이 철로에 귀를 대고 철로의 울림을 듣는 모습의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내 귀는 기차바퀴, 기차가 달리는 소리가 그리워지네." 기찻길옆 소년은 자라서 지금 이 추억에 젖을 것 같다. 이 철길에 기차는 하루 2회, 시속 10km로 달렸다고 한다. "기차가 지날 때에는 역무원 세 명이 기차 앞에 타서 호루라기를 불고 고함을 쳐 사람들의 통행을 막았으며, 그 사이 주민들은 밖에 널어놓았던 고추 등 세간을 들여놓고 강아지도 집으로 들어갔다. 시속 10km 정도의 느린 열차는 2008년 7월 1일 통행을 완전히 끊었다. 비록 기차는 사라졌지만, 소유의 경계가 없는 문과 벽...고즈넉한 마을 일상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설명안내판) 길손의 체험 밖에 있는 기찻길을 상상한다. 어려운 시절의 고단한 추억이 희망의 별빛처럼 반짝인다.
경암동 철길마을에서 금강 강변길로 나와 강변로 옆 강변길을 따라간다. 강변로 동쪽 구암동 지역에 아파트 대단지 공사가 한창이다.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안내 표지판은 보이는데 그 건물을 찾을 수 없고, 멋지게 솟은 구암교회 석조건물이 보인다. 군산 3.1운동 기념관은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일어난 군산 3.1 만세 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2008년 개관하여, 군산 지역 3.1 운동 관련 사진과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군산 3.1운동은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 구암교회 교인들이 주동이 되어 거사했다고 하니, 구암교회의 역할이 크다. 군산 구암교회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전킨에 의해 1899년 설립되었으며 1959년 현재의 석조 건물을 건축하였다고 하는데, 두 석탑이 솟아 있는 모습이 멋지다.
강변길을 따라가며 금강하굿둑과 뒤돌아서서 동백대교 방향을 바라보면 지금까지 걸어온 군산 지역의 길과 군산시가지가 한눈에 보이고 앞으로 걸어갈 금강 건너편 충남 서천군 지역도 가늠된다. 옛 장항제련소의 굴뚝이 아련한 추억을 되살린다. LG 화학이 되었다가 이제는 LS메탈 장항공장으로 바뀌어 있다. 저 굴뚝은 수탈의 상징처럼 솟아 있다가 조국근대화와 산업화의 상징으로,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변화해 왔다. 대한민국 산업화의 전형처럼 솟아 있는 저 굴뚝은 장항 지역의 추억의 대명사이다.
금강(錦江), 비단강을 거슬러 오른다. 지난 시절 금남정맥 산줄기를 타면서 군산시 나포면에 솟은 오성산에 올라 금강과 주변 지역을 조망하던 추억이 떠오른다. 이번에는 금강 강변길을 걸어 오성산 방향으로 오른다. 오성산에서 금강을 내려보며 금강을 추억하듯 금강 강변길에서 금강과 함께 금강을 추억한다. 금강과 관련한 문학은 <탁류>와 <금강>이 최고라고 늘 생각한다.
군산 출신의 위대한 작가 채만식(1902~1950)은 1937년에 발표하기 시작한 <탁류(濁流)>라는 소설을 이렇게 시작한다.
"금강(錦江)…….
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물줄기가 중동께서 남북으로 납작하니 째져 가지고는 ― 한강(漢江)이나 영산강(榮山江)도 그렇기는 하지만 ― 그것이 아주 재미있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번 비행기라도 타고 강줄기를 따라가면서 내려다보면 또한 그럼직할 것이다."(채만식의 <탁류> 첫 부분>
이렇게 금강을 묘사한 다음, 작가는 금강의 두 줄기 흐름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두 물줄기가 조치원을 지나서 합수하여 공주, 부여, 논산, 강경까지 들이닫는데, 여기까지(공주-강경)를 백마강이라 이르며, 백마강은 금강의 색동으로서 여자로 치면 흐린 세태에 찌들지 않은 처녀 시절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 뒷부분을 조금 더 인용해 본다.
"백마강은 공주 곰나루(熊津)에서부터 시작하여 백제(百濟) 흥망의 꿈자취를 더듬어 흐른다. 풍월도 좋거니와 물도 맑다. 그러나 그것도 부여 전후가 한창이지,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의 꿈은 깨어진다. 물은 탁하다. 예서부터가 옳게 금강이다. 향은 서서남(西西南)으로, 빗밋이 충청·전라 양도의 접경을 골타고 흐른다. 이로부터서 물은 조수(潮水)까지 섭쓸려 더욱 흐리나 그득하니 벅차고, 강넓이가 훨씬 퍼진 게 제법 양양하다. (중략)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黃海)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大處 : 市街地)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群山)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채만식의 <탁류>에서)
금강(錦江)의 진짜배기는 강경에서부터 군산 앞 바다까지로서 물이 흐리다는 것, 금강(錦江)은 처녀 시절이 다하고 세태에 찌든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의 모습과 같은 것으로, 그런 여인의 이야기를 금강이 끝나는 지점 남쪽 언덕에 올라앉은 대처(大處) 군산을 통하여 이야기하겠다고 넌지시 일러준다. 그리고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충남 서천에서 대처 군산으로 넘어온 정주사의 큰딸 초봉이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 이야기는 국권을 상실한 조선의 비극과 상통하는 이야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금강(錦江)을 노래한 시(詩)로는 단연 충남 부여 출신의 신동엽의 장시(長詩) <금강(錦江), 1967년>으로, 그것의 오른쪽에 자리할 작품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근대사, 진주민란(1862년)으로부터, 동학혁명1894년, 3.1만세운동(1919년), 4.19혁명(1960년)의 흐름 속에서 동학혁명의 실패와 그 이후의 희망을 노래한 작품이 <금강(錦江)>이다. 동학혁명 당시에 한양으로 진격하던 동학군들이 공주의 우금치 고개를 넘지 못하고 일본군과 관군의 총에 쓰러져 혁명은 실패한다. 그때 죽은 수많은 넋들을 위로하는 강, 내일의 꿈을 위해 다시 씨앗이 되는 강이 금강(錦江)이라고 신동엽 시인은 노래한다. 그래서 금강(錦江)은 백제 패망의 설움을 담고 있고 동학혁명 실패의 통한(痛恨)을 품고 있고, 조선 국권 강탈의 비통(悲痛)을 안고 흘러가는 강이다. 그러나 설움과 통한과 비통은 거름이 되고 정신으로 남아 새로운 시대와 세계를 꿈꾸며 흘러가는 강이 된다. 신동엽 시인은 지난날의 큰 아픔을 품은 현재의 금강(錦江)을,
錦江의/ 부드러운 물굽이가/ 멀리서/ 희게 빛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로이 흘러가는 江물.
(신동엽의 <금강> 제21장에서)
노래하고서, 이제 새 씨가 되어 새롭게 번식할 금강(錦江)을 이렇게 읊는다.
백제(百濟),/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
금강(錦江),/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바람버섯도/ 찢기우면, 사방팔방으로/ 날아가 새 씨가 된다.//
그러나 찢기우지 않는 바람버섯은/ 하늘도 못보고/ 번식도 없다.
(신동엽의 <금강> 제23장에서)
금강(錦江)이여, 그렇게 나아가자. 썩고 망한 것이 남긴 거름과 정신을 바탕으로 새 씨가 되어 맑은 하늘을 볼 수 있게 번식을 하자. 하굿둑을 막고(1990년), 새만금 간척지를 개척하고(2010년), 그러나 금강(錦江)이 나아갈 방향이 결코 이것만은 아니지 않느냐. 새로운 금강(錦江)의 역사는 물질적 번영에 정신적 깊이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금강 하구 너머의 서해 바다를 바라보며 신동엽 시인의 연민과 분노의 정신을 가슴에 품었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5.3km
전체 탐방 시간 : 3시간 49분
군산 내항 역사문화공간 설명안내판, 뜬다리 포토존 안내판, 서해랑길 54·55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해안에 호안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오른쪽 광장에 진포해양테마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서해랑길 54·55코스 안내도 오른쪽 기둥에 서해랑길 55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거리 14.9km, 소요시간 5시간, 난도 쉬움이라고 적혀 있다. 째보선창, 서래포구, 경암동 철길마을, 진포시비공원, 금강시민공원을 거쳐 장항 도선장에 이른다.
서해랑길 54·55코스 안내도와 55코스 시작점 표지판과 함께 서해랑길 55코스 탐방 출발을 기념한다.
일제강점기 장미동 군산 내항에 만들어진, 간조와 만조의 수위 변화와 무관하게 대형선박 접안을 위해 조성된 시설이다.
건너편은 충남 서천군 마서면 지역이다. 오른쪽 끝에 금강하굿둑과 금강갑문교가 보인다.
앞에 부잔교가 있고, 그 뒤에 금강을 가르는 동백대교가 보인다. 전라북도 군산시 해망동과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원수리를 연결하는 동백대교는 2018년 12월 27일 개통되었으며 처음 이름은 군장대교였다고 한다.
군산시 장미동 일대이다. 오른쪽에 서해랑길 55코스 출발지, 왼쪽 앞 건물은 배수펌프장, 길 끝 지점이 옛 군산선 종착역 군산부두역이라고 짐작한다. 동백대교가 금강을 가르고 있다.
군산시 장미동 일대이다. 중앙 뒤에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건물, 바로 앞에 '시간을 건너 군산에 빠지다' 관광안내소가 있다.
'장미동(臧米洞)' 지명은 조선시대 기록에서 확인할 수 없다. 1949년 전라북도 군산시 장미동으로 개칭되며 처음 등장하였다. 군산시 장미동은 옥구군 북면 지역이었다가 1910년 신설된 군산부(群山府)에 편입되면서 동빈정 1정목(東濱町一丁目)이 되었다. 1949년 일본식 동명 개정에 따라 군산시 장미동으로 개설되었으며, 1973년 이후 중앙로 1가동 관할을 받다가 1998년 월명동이 관할하는 법정동으로 개편되었다. 장미동은 군산시의 동(洞) 지역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금암동, 죽성동, 영화동 및 중앙로 1가 등과 인접하고 있다. 군산시 원도심 지역에 속하며 군산 내항을 중심으로 설정된 행정 구역이다. 1899년 개항 이후 군산항의 발전과 함께 도시화가 시작되었다. 해망로, 대학로, 중앙로가 통과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뜬다리란 부두에 네모진 모양의 배를 연결하여 띄워서 수면의 높이에 따라 위아래로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만들어 놓은 다리 모양의 구조물이다. 군산 내항 뜬다리 부두(부잔교)는 1926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1938년에 완공하였다. 이 뜬다리 부두는 군산항의 육상 영역에서 선박으로 연결되도록 하였으며, 육상 연결부가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 회전이 가능하도록 하고, 여러 대의 대형 선박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군산 내항 뜬다리 부두(부잔교)는 철도를 통해 군산항으로 운송되어 온 쌀을 선박으로 옮길 때 사용되었으며 일제강점기 쌀 수탈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시설물이다.(설명안내판)
군산 내항 광장은 진포해양테마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진포해양테마공원 : 군산 내항의 진포해양테마공원은 고려말 최무선 장군이 최초로 화포를 이용하여 왜구를 물리친 진포대첩을 기념하며 미래의 주역인 어린이들의 체험학습의 장으로 활용, 올바른 역사의식 확립과 자긍심 고취를 위해 당시 전투현장이었던 내항 일대에 육해공군의 퇴역장비 13종 16대를 전시하여 공원을 조성하였습니다. 4200톤급 위봉함 3,288㎡(지하2층, 지상4층)에 병영생활상의 모형 및 용품을 전시, 재현하는 등 체험 위주의 전시공간을 구축하고자 흥미를 자아낼 수 있는 4D 영상관(시뮬레이터 입체영상관), 위봉함을 비롯한 해경정, 수륙양용장갑차, 자주포, F-86전투기 등 총16대의 육·해·공군의 퇴역군장비를 활용한 체험형 복합테마공간입니다.
사업내역
■ 조성기간: 2007년 10월 2010년 8월, ■사업비 : 50억원, ■총면적: 16,300㎡
■ 전시장비 •해군 - 2대 : LST (1대), 상륙장갑차(1대), •육군 - 6대 M-548(2대), M-48(2대), 자주포 (2대), •공군 - 7대 : F-86, UH-1B, O-2A, F-5F, C-123K, F-4D, T-41B, •해양경비정 : 마니산 273함
군산시 장미동 군산 내항에 조성된 진포해양테마공원을 뒤돌아보았다.
군산시 장미동(臧米洞)은 1899년 개항 이후 군산항의 발전과 함께 도시화가 시작되었다. 해망로, 대학로, 중앙로가 통과하고 있다. 공공 시설로 군산 근대 역사 박물관, 군산 세관, 한국 전력 공사 군산 지점, 수자원 관리 공사 서해 지사가 위치해 있다. 특히 장미동 군산 내항 일대는 군산시가 조성한 근대 산업 유산 예술 창작 벨트의 중심지이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87호 구 군산 세관 본관, 국가 지정 등록 문화재 제374호 구 조선 은행 군산 지점, 국가 지정 등록 문화재 제372호 구 일본 제18 은행 군산 지점, 미즈 상사 등이 복원되어 자리잡고 있다. 군산 개항 100주년을 기념해 조성한 100년 광장과 고려 말 최무선 장군이 최초로 화포를 사용하여 왜구를 물리친 진포대첩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한 공원인 진포 해양 테마 공원이 위치하여 군산 시민의 휴식 공간이자 어린이들의 체험 학습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진포해전 장면을 재현하는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해도원수(상원수) 나세, 도원수 심덕부, 부원수 최무선, 세 장군 중 최무선 장군이 중앙에 위치해 있다.
1.진포는 군산의 옛 이름이며, 진포대첩(鎭浦大捷)은 1380년 8월에 해적집단인 왜구가 5백척에 이르는 대선단으로 진포에 침입하여 야만적인 약탈을 자행했을 때 이를 물리친 전쟁입니다. 당시의 일을 기록하고 있는 고려사에 의하면, 왜구의 만행으로 죽은 우리 백성들의 시체가 산과 들을 뒤덮었고, 또한 약탈한 곡식을 나르면서 흘린 쌀이 한 자도 넘게 땅을 덮었다고 합니다. 고려 정부는 왜구를 진압하기 위해 해도원수 나세와 심덕부, 최무선 장군 등을 파견하였고, 고려군은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로 공격하여 왜선 500척 모두를 불살랐습니다. 진포대첩은 세계 해전사에서도 함선에서 화포를 사용한 최초의 전투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해상전투로서, 해전에 있어 새로운 전기가 되었습니다.(설명안내판)
2.최무선(崔茂宣, 1325~1395) : 고려 후기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각종 화기를 제조한 발명가. 1377년 화약 연구와 무기 생산이 가능한 '화통도감(火筒都監'이 설치 되었다. 이곳에서 총포와 화전, 철령전, 피령전 등의 발사물, 질려포와 같은 폭탄, 주화 등의 로켓 화기, 신호탄 등 독창적인 무기도 개발되었다. 1380년에 금강 하구(전북 옥구군)에서 벌어진 진포대첩은 최무선이 만든 화약무기를 실은 전함을 이끌고 직접 전투에 나가 파괴력이 뛰어난 화포 등을 이용해 왜구의 군함을 모두 격침시켜 큰 공을 세웠다.(안내판)
호안시설이란 강이나 바다의 기슭이나 둑 따위가 무너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하여 설치한 구조물이다. 군산 내항 호안시설은 1926년부터 1938년까지 원활한 해안 접안과 철도 부설을 위해 견치석(석축을 쌓는 데 쓰는 사각뿔 모양의 석재)과 콘크리트를 주로 사용하여 만들었다. 1905년 세관용지로 사용하기 위하여 강변을 매립하고 고정 잔교 1기를 설치하는 것을 시작으로 군산선 철도의 확장과 수탈한 쌀 보관을 위한 창고 부지의 확보를 위해 군산세관 북쪽의 수덕산을 깎아 매축(바닷가나 강가를 메워서 뭍으로 만듦)하였다. 군산 내항 호안시설은 근대 항만의 조성과 1920년대 후반 군산의 공간구조 변화에 영향을 준 시설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해군상륙함(LST) 위봉함 676호 내부 관람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외관만 살피며 그냔 통과한다.
1.해군상륙함(LST) 위봉함 676호는 시민들의 안보교육 학습장과 군산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해군과 무상대여 협약을 체결하고 2007년 12월에 진포해양테마공원에 옮겨놓았다. 위봉함 내부에는 병영생활상의 모형 및 용품을 전시 재현하는 등 체험 위주의 전시공간과 4D 영상관(시뮬레이터 입체영상관) 등을 관람할 수 있다.
2.해군상륙함(LST) 위봉함은 1945년 1월 16일 미국에서 LST849함으로 건조되어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상륙작전 등에 참전하였다. 1959년 1월 13일 미국으로부터 인수되어 LST676 위봉함으로 명명된 후 대한민국의 주력 상륙함으로써 상륙작전과 수송작전을 수행하였다. 1965년부터는 월남전의 백구부대 일원으로 전투에 참전하였고, 지난 48년간 전투 활동과 해군 사관생도와 해군 장병들의 훈련 및 실습활동 지원을 통하여 국토방위 등 대한민국 해군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2006년 12월 31일에 명예롭게 퇴역하였다. 위봉함은 수송 능력은 승무원 125명(작전병력 500여명), 수륙양용전차 15대, 트럭 15대 등이며, 전장 99.6m, 전폭 15.3m, 4,080톤 규모의 함정이다.
장미동에서 금암동으로 넘어왔다. 째보선창의 길을 몽깃돌길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금암동(錦岩洞)’ 지명은 조선 후기 지도와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1932년 일본식 동명에 따라 군산부 동빈정 1정목(東濱町一丁目), 동빈정 2정목(東濱町二丁目)이라고 불렸다. 1932년 전북 옥구군 미면 경장리의 일부가 군산부에 편입되어 동빈정 1정목, 동빈정 2정목으로 개편되었다. 1946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동빈정 1정목의 일부와 동빈정 2정목의 일부가 통합되면서 군산부 금암동이 되었으며, 1949년 군산시 금암동으로 개칭되었다. 1973년 중동 관할 법정동이 되었으며, 1998년 중앙동 관할 법정동으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북쪽으로 금강 하구와 인접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경포천이 흐르고 있다. 일제 강점기 군산역에서 군산 내항까지 이어진 군산선 철도 일부 구간이 있으나 현재는 운행이 중지된 상태이며, 관내 중심부를 해망로가 동서 방향으로 관통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째보선창에서 뒤돌아보니 위봉함이 위풍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다. 째보선창은 복개되어 예전의 모습은 사라졌다고 한다.
오른쪽은 째부선창, 왼쪽 등대 뒤쪽에 금강하굿둑과 금강갑문교가 보인다.
비가 내린다. 등대 건너편은 충남 서천군 마서면 지역이다.
이곳은 예전에 죽성포구라 불렸던 곳이라고 한다.
군산 맥주양조장 앞에서 째보선창을 다시 뒤돌아보았다. 비가 쏟아지고 있어 금강은 부옇다.
군산시 금암동에 위치했던 포구 째보선창은 죽성 포구라 불리며,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부터 군산시의 주요 포구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 시대 이곳에 큰 대나무 밭이 있어 마을을 감싸고 있었는데, 대나무 숲이 마치 성(城)과 같이 마을을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마을의 이름을 죽성리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 죽성 포구가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조선 시대 편찬된 『옥구 군지』이다. 당시 포구의 위치는 현재 해안 파출소 자리에 있던 돌산 기슭이었다. 돌산 기슭에는 현재 둔율동 성당의 인근 산에서 흘러 내려온 개천 물과 팔마산 기슭을 돌아 대명동 구시장을 지난 물이 서로 만나 죽성 포구로 모여들었다. 물이 강과 만나는 자리에 널찍한 만(灣)이 형성되어, 배의 접안이 용이하고 돌산으로 인해 해풍을 피할 수 있는 장점들 때문에 자연스럽게 죽성 포구가 형성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곳 살던 째보[언청이] 객주가 포구의 상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어 째보선창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는 어판장이 들어서면서 동부 어판장으로 불리었다. 현재는 복개 공사로 째보처럼 움푹 파여 있는 선창을 볼 수는 없으며, 포구 및 어판장으로서의 기능도 상실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째보선창에 동부어판장 건물을 리모델링해 군산 맥주양조장이 2021년 조성되었다.
군산비어포트(GUNSAN BEER PORT) : 군산시는 '째보선창'이라 불리던 이 곳의 동부어판장 건물을 되살려 수제맥주 공동양조장을 조성하였다. 군산에서 수확한 보리로 청년들이 수제맥주를 양조하는 이 곳에서 지역농업-도시재생-청년창업이 함께하는 '군산맥주'의 역사를 시작하였다. 2021. 12. 18(설명안내판)
'째보스토리 1899'는 째보선창의 수협창고를 리모델링하여 맥주 시음판매장으로 조성한 곳이다.
군산시 도시재생 뉴딜사업에서 수협창고 기능이 상실돼 흉물스럽게 변한 옛 수협창고를 리모델링해 조성한 ‘째보 스토리 1899’는 군산 개항의 해인 지난 1899년부터 이곳 째보선창의 이야기를 담고 만들어가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군산시 부처협업 사업으로 1층은 수제맥주 제조시설과 시음 판매장이 들어서고, 2층과 3층은 문화예술과와 협업으로 (재)전북문화콘텐츠산업진흥원에서 위탁 운영, 2층 사무실에 9개의 스타트업기업이 입주해 각종 강연과 문화행사를 진행하고 있다.(전북신문)
'째보스토리 1899'에서 째보선창 입구 '해망로'로 나오면 건너편에 금암동 '구시장 입구' 버스정류소가 있다.
금암동은 군산시의 북동쪽에 위치하여, 북쪽으로 장미동, 서쪽으로 금동과 신영동, 동쪽으로 중동과 경암동, 남쪽으로 중앙동과 대명동이 이웃하고 있다. 금암동은 군산의 원도심 지역에 속하며 포구 지역 및 상가 지역을 이루고 있다. 금암동은 조선 시대 죽성포구라 불리던 째보선창이 있다. 째보선창에서 1970년대까지 운영되었던 군산시의 동부어판장은 해망동에 위치한 서부어판장과 함께 군산 지역 수산업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군산 내항의 기능이 약화되고 수산업의 중심이 비응항과 해망동으로 이전되면서 현재 군산 동부어판장은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장미동 백년광장에서 시작하여 금암동 째보선창에 이르는 '탁류길'은 군산시 근대 문화유산의 대표적인 탐방로로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 '째보스토리 1899'에서 해망로로 나와 서쪽을 바라보니 째보선창 삼거리로 차가 달린다. 서해랑길은 해망로 동쪽을 따라가는데, 앞쪽에 노란 게시판이 보여서 잠시 게시판을 보고 되돌아와 진행한다.
노란 게시판은 군산시 중앙동 몽깃돌길 설명안내판이었다.
몽깃돌길은 군산시 중앙동 신영시장과 째보선창(죽성포구) 일대를 이르는 길로서 주민 모두가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생활환경개선 및 범죄예방 디자인이 적용된 구간입니다. 노후 주거지 및 폐·공가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주거환경이 열악해짐에 따라 인구가 감소하는 등 범죄예방에 취약해지는 문제점이 있어 이를 해소하기 위해 벽면도색 및 보행길 유도사인, 가로등 설치 등 환경조건을 변화시켜 범죄의 기회적 요인을 제거하며, 주민이 함께 관리하며 지켜나갈 아름다운 길입니다.
몽깃돌이란 밀물과 썰물 때에 배가 밀려나가지 않도록 배꼬리에 다는 돌을 뜻합니다. 과거 번성했던 째보선창에는 몽깃돌을 드리우고 수많은 어선이 포구에 정박되어 있었답니다. 하지만 현재의 째보선창은 예전의 모습과 달리 폐선이 정박되어 생기를 잃은 공간이 되었답니다. 잠자고 있던 어선은 몽깃돌을 걷어올리고 다시 바다로 나가길 기다리고 있답니다.
A코스 '째보선창길' : 째보선창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부터 군산시의 주요 포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본래 명칭은 죽성리에 있는 포구라 하여 축성포구라 불렸으나, 일설에 의하면 이곳 축성포구에 살던 패보(언청이) 객주가 포구의 상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어 째보선창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는 설과 지형상으로 째보처럼 째져 있는 항구의 모양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일제강점 기에 어판장이 들어서면서 동부 어판장으로 불리었고, 현재는 복개공사로 째보처럼 움푹 파여 있는 선장은 볼 수 없으며, 포구 및 어판장으로서의 기능도 상실했습니다. 하지만 패보선장에서는 군산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으며, 썰물 때에는 갯벌을 거니는 수많은 갈매기들을 볼 수 있답니다. 또 군산시 중앙동 도시재생 뉴딜 사업을 통해 옛 동부 어판장을 리모델링하여 째보 스토리 1899를 개장하였고 수제맥주를 맛볼 수 있는 곳으로 새로운 동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B코스 '신영시장길' : 신영시장은 1980년대 노점상 정비 과정에서 공설시장 주차장 지역 노점상을 현 위치인 철도청부지와 복개 지역에 이주시켜 형성된 시장입니다. 신영시장이 위치한 신영동은 일제강점기 때 동양정이라고 불리다가 광복 이후 인접한 영동의 또 다른 동네라는 의미의 '신영동'으로 바뀌게 되었답니다. 신영시장은 건어물시장으로 유명하며, 그중에서도 군산의 명물인 박대가 많이 유통되고 있답니다. 85개의 점포로 운영되고 있으며 2021년도에는 군산시 중앙동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통해 친환경 생선 건조장을 만들어 자연광과 자연풍을 이용해 생선을 위생적으로 건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은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옛 철길이 남아 있어 추억여행을 하기에 좋답니다.
C코스 '도시재생숲' : 한화부지의 넓은 공간에 수년째 방치되어 있던 쓰레기들이 쌓여 있어 우범지역으로 형성되었으나, 중앙동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통해 2019년부터 방치되어 있던 유휴지를 매입하여 산림녹지과 도시숲 조정사업과 함께 도시재생숲 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시민이 기증한 적피배롱나무, 황금골술 등 특이수목과 다양한 나무 식재로 불거리를 제공하고, 꽃무릇 등 16여종의 자생화를 삭재하여 사시사철 다양한 꽃을 볼 수 있는 자연 친화 공간이 조성되었습니다. 도시재생숲은 가든존, 피크닉존, 포레스트존, 다이나믹존까지 테마별로 다양하게 조성되어 있답니다. 또한 다양한 문화공연도 이루어지고 있어 주민들의 문화와 건강까지 찾을 수 있는 군산시 중앙동 도시재생 뉴딜사업의 큰 성과입니다.
해망로를 따라 동쪽 경포천 방향으로 이어간다.
째보선창 입구에서 해망로를 따라 이어오고 있다.
경포천의 서래교 입구 삼거리에서 서해랑길은 오른쪽 횡단보도를 건너 해망로를 따라 서래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금암동에서 중동으로 넘어왔다. 대각선 맞은편 해망로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맞은편으로 온 뒤 다시 바로 앞 횡단보도를 건넜다. 오른쪽은 경포천 서래교로 넘어가는 강변로이며, 서해랑길은 뒤돌아서서 해망로를 따라 서래포구마을로 향한다.
해망로를 따라가다가 해망로에서 왼쪽으로 꺾어 서래포구마을로 진입한다.
해망로에서 왼쪽 서래5길로 진입한다.
서래5길을 따라 중동(仲洞) 지역 샘터마을을 통과한다. 이 지역 전체를 서래포구 마을이라 이르는 것 같다.
군산시 중동은 중앙동에서 관할하는 7개의 법정동 중 하나로 중앙동의 동쪽에 위치한다. 중동이라는 지명은 조선 후기 지도와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1932년 전라북도 옥구군 미면 경장리 일부가 군산부에 편입되면서 천조정이라 하였고, 이후 중정(仲町)이라 불렸다. 원래 전라북도 옥구군 미면 지역이다. 1949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군산시 중동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북쪽으로 금강 하구와 인접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경포천이 흐르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에 샘터경로당과 벼락장군 만신집이 있다.
왼쪽에 샘터경로당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동(仲洞) 지역에서도 이곳은 샘터마을인 것 같다. 해안에 자리한 지역에는 만신집들이 많았는데 요즘 만산집들이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군산 중동에서 벼락장군 만신집을 만나게 되었다.
해망로에서 서래5길로 들어와, 자동차 오른쪽 뒤에 샘터경로당, 그 오른쪽 앞에 벼락장군 만신집을 거쳐 중동이발관 앞으로 왔다.
서래5길을 따라가면 오른쪽 주택 벽면에 벽화, 왼쪽 철판 울타리에 중동 지역을 소개하는 사진들과 설명안내판이 붙어 있다.
군산 중심에 위치한 살기 좋은 마을, 중동 : 중동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확인되지 않지만 군산의 중심위치이자 과거 어촌의 중심마을이었기에 중동이라는 명칭으로 불렸을 것이라 추측한다. 이곳은 북쪽으로 금암동, 남쪽으로 대명동, 동쪽으로 경암동, 서쪽으로 신영동과 이웃하고 있다. 중앙동 관할 법정동 가운데 중동은 군산의 원도심 지역에 속하며 주거지역을 이루고 있다. 일제 강점기 호남평야의 쌀을 바탕으로 한국주정이 운영되었으나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1980년대까지 중동은 군산시 동부 어판장의 배후 지역으로 신영동에서 금암동 째보선창까지 이어지는 어업 관련 및 상거래의 한 축을 이루었으나 현재는 군산 내항의 기능 약화로 어업 관련 기능은 사라졌으며, 군산 공설 시장 배후 지역으로 일부 기능하고 있다. 중동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전통 문화 행사로는 중동당제(堂祭)가 있다. 중동 당제는 매년 1월 14일에 이뤄지는데, 『동국여지승람』[1481]의 기록을 바탕으로 볼 때 조선시대부터 지속된 당제라고 추측된다. 현재는 중동 노인회관 2층에 마련된 당집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옛날에는 산신제와 당제를 지낸 후에 거리제와 용왕제까지 지냈으나 지금은 거리제와 용왕제는 지내지 않고 규모를 축소하여 제를 행하고 있다.(설명안내판)
시간여행 추억만들기 서래포구마을 : 서래포구 또는 경포는 오늘날 군산시 중동 지역으로 혹은 슬애포구로도 알려진 포구이다. 과거에는 중동농협 길 건너편 쪽이 배를 대는 포구였고 그 인근에 초가집이 꽉 들어찬 어촌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서래산(전 군산역 뒤 바위산)을 등지고 군산 최대의 자연하천인 경포천을 앞에 둔 어촌마을이었는데 당시 마을 주민들은 자신들의 마을을 슬애라고 불렀다. 슬애란 서래의 군산식 발음인데 그 뜻은 서울에 가는 포구라는 뜻이다. 이 슬애를 한문으로 기록하려니 서울 경(京)에, 포구 포(浦) 자를 사용하여 경포(京浦)라 부른 것이다. 군산포가 조창을 중심으로 한 관용포구였다면 서울로 가는 포구였다는 경포는 조선시대 군산의 어업과 상무역이 가장 활발했던 민간인 포구였다. 700여 개의 배가 드나들었던 이곳은 실뱀장어, 꽃게, 주꾸미 등 어획물을 수확하며 과거 군산 수산업의 중흥기를 이끌어 왔던 곳이었다.(설명안내판)
우산장수와 짚신장수 : 옛날에 우산장수와 짚신장수를 아들로 둔 어머니가 있었는데, 비가 오면 짚신장수 아들이 공칠 것을 걱정하고, 날이 맑으면 우산장수 아들이 공칠 것을 걱정했다고 한다. 비가 오면 우산장수가 돈을 벌 것이고, 날이 좋으면 짚신장수가 돈을 잘 벌 것인데 부모 입장에서는 잘되는 아들보다 잘 안되는 아들 걱정이 더 큰 겠이겠다.
어머니 : 당신께서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고 자식 걱정에 한시도 편치 않으신 분, 당신은 어머니 입니다.
서래5길 담벽에 지난 시절의 세간살이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편지 받아 들어가요 편지 받아 들어가요 : 고종 32년 근대 우편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우체사가 설치되었는데, 이곳에서 편지를 전달해 주는 사람이 바로 지금의 우체부인 체전부라 하였다. 서래포구는 서울과의 배편으로 인해 서울 소식이 전해졌는데, 이곳에서도 일찍부터 체전부가 있었을 것이라 전해진다.
설명안내판, 벽화와 사진 등이 게시가 끝나는 서래5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서래안2길을 따라간다.
조선후기에는 농업 생산력이 높아지고 수공업 생산이 다양해지면서 상품 유통이 활성화되었다. 또한 당시 조선에 상업행위에 묶여 있던 수공업자들이 자유롭게 물건을 만들고, 사게 될 수 있으면서 그들의 경제 사정이 좋아졌다. 이들은 서울의 시전뿐만 아니라, 서래포구와 같이 상업행위와 자유로운 유통을 했던 곳에서는 특히, 더 많은 활동을 볼 수 있었다. 서래포구와 서래장터는 이러한 상인과 수공업자들의 활동 무대였던 것이다.
중동이발관 앞에서 서래5길을 따라 게시된 사진과 벽화 등을 살피면서 걸어왔다.
서래5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서래안2길을 따라간다. 서래안2길 왼쪽에 펼쳐진 마을이 실제적인 서래포구마을인 것 같다.
국민서관 도서 판매점이 건물 1층에 있다. 국민서관은 어린이용 도서를 중심으로 출간하는 출판사이다.
중앙파출소를 지나면 서래포구마을 복합커뮤니티센터가 나온다.
서래포구마을 복합커뮤니티센터를 왼쪽으로 돌아가면 광장에 당집과 쉼터정자가 있다.
복합커뮤니티센터 옆 광장에 중동 당산제(仲洞 堂山祭) 당집이 새로 지어져 자리하고 있다.
중동당제는 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군산의 유일한 동제(洞祭)로 제(祭)의 목적은 주민의 안녕과 복(福)을 축원하고,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였음을 제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농토는 대부분 주택 단지가 되었으나 어업은 지금도 이곳 주민들의 경제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당제는 분향·강신·헌작·독축 순으로 진행된다. 옛날에는 책 한 권 분량의 축문을 다 읽었으나 지금은 앞부분만 읽는다. 제관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소지를 올리고 제를 지내는 동안은 풍물치는 사람들은 대기하고 있다가 제가 끝나면 주민들이 올라와 음복하고 풍물 가락에 맞춰 흥겹게 어울린다. 서래산에 있던 당집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기와집이었고, 그 옆에 당지기 할머니가 살면서 당을 지켰다고 한다. 당제의 대상은 산신과 당할아버지, 할머니, 이공(公), 오공(公), 조공(公) 등으로 정월 열나홀에 지냈으나, 요즘은 대보름날 지낸다. 현재 당에 모신 신령들 화상은 현 위치로 옮기면서 새로 그려서 모셨고,서래산의 당집화상은 보존되고 있지 않다. 제관은 2명이며, 정월 대보름 며칠 전부터 동네 아주머니들이 목욕재계하고 술과 음식을 정성껏 준비했다고 한다. 제사가 끝나면 주민들은 풍물패를 앞세우고 거리제를 지냈으며, 만조가 되는 시간에 맞춰 금강의 지류인 경포천 변[깨꼬랑]에 돼지 머리와 음식을 차려놓고 풍어제[용왕제]를 지냈는데, 요즘도 비슷한 절차로 진행된다.(설명안내판)
경포천이 앞에 흐르고 경포천 건너편에 군산천연가스발전소가 있다.
경포는 오늘날 군산시 중동 로터리 지역으로 서래 포구, 혹은 슬애 포구로도 알려진 포구이다. 당시에는 현재 중동 농협 건너편이 배를 대는 포구였고, 인근은 초가집이 꽉 들어찬 어촌 마을이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서래산[예전 군산역 뒤 바위산]을 등지고, 군산 최대의 자연 하천인 경포천을 앞에 둔 어촌 마을이었는데, 당시 마을 주민들은 자신들의 마을을 슬애라고 불렀다. ‘슬애’란 ‘서래’의 군산식 발음인데, 서울에 가는 포구라는 뜻이다. ‘슬애’를 한문으로 기록하려니 ‘서울 경(京)’에 ‘포구 포(浦)’를 사용하여 ‘경포’라 부른 것이다. 군산포가 조창을 중심으로 한 관용 포구였다면, 경포는 조선 시대 군산의 어업과 상무역이 가장 활발했던 민간인 포구였다. 경포에는 경장시라는 오일장이 열렸다. 경장 시장은 경포에서 경포천을 따라 조금 안쪽으로 올라가 현재의 경장동 예그린 아파트 인근에 위치하였다. 일명 설애 장터라고도 불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경포천 위로 강변로의 서래교가 놓여 있고, 경포천은 금강에 합수한다. 경포천 정비 작업이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음식 준비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어부 아저씨들도 배에 달았던 만선기를 빼들고 당산제로 갑니다. 정성껏 만든 제사상에 올릴 음식도 지게에 그득하게 싣고 흥겹게 노래하며 올라가요."
경포천 소래포구마을 입구에서 경포천변길을 따라 올라가서 경포교를 건너 군산경찰서 앞쪽으로 진행한다.
군산의 중심 하천 경포천이 군산 중심부를 돌아 흘러오고 있다. 서해랑길은 경포천의 경포교를 건너 이어간다.
군산시 개정면에서 군산시 경암동에 이르는 금강 수계권 지방 하천인 경포천은 군산시 옥산면 금성산[123m] 북쪽 산록 일원에서 발원한다. 군산시 개정면 옥석리 156-31번지를 기점으로 북쪽으로 흘러 군산시 경암동 경포 배수 갑문을 종점으로 금강 하구에 유입하는 하천이다. 경포천의 경사도는 매우 낮으며 장군봉[86m]의 남쪽 기슭으로 흐르면서 개정들, 미장들을 이룬다. 하류는 경장동·경암동 등의 시가지를 흘러 도심 하천의 모습을 보인다. 유역에 석교뜰을 이루고 개정뜰에서 유입되는 하천과 합류하며 아흔 아홉 다리를 지나 현재 군산 경찰서 부근의 금강 하구에 유입된다. 경포천은 1982년 10월 11일 지방 하천으로 지정되었다. 하천의 총연장은 8.92㎞, 수립 연장은 8.92㎞, 유역 면적 54.6㎢이다. 인공 하천으로 대간선 수로화가 되어 있으며, 시가지의 배수로 역할을 하는 하천이다. 직할 하천의 표본이며, 시가지를 관통할 때 오폐수 유입량이 증가하여 현재 오염이 심하다. 군산시는 신도심 수송 택지를 가로지르는 경포천을 정비해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계획안에는 297억 원을 들여 경포천[2.25㎞]의 강폭을 현재의 40m에서 55m로 확장하여 상습 침수 피해 완화, 교량 2개소와 갑문 1개소 설치, 4.5㎞ 길이의 둔치 조성이 포함되어 있다. 경포천 정비 사업이 마무리되면 경포천 유역 인근 10여 개의 읍·면·동 저지대와 농경지의 침수가 크게 완화되며, 수질 개선과 함께 친수 공간의 확보로 주변 환경이 개선될 것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중동에서 경암동(京岩洞)으로 넘어왔다. 구암3.1로를 따라 경포교를 건너 군산경찰서 앞을 통과한다.
군산시 경암동(京岩洞)은 법정동이자 행정동으로, 군산 시청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경암'이라는 명칭은 조선 시대 지도와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경암'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해당 지역의 이전 명칭인 '구암'에서 '암'과 '경포'에서 '경'을 따서 만들었다는 설과 서래장터 가까이에 있는 서래산에 화강암으로 된 돌산이 있었는데, 서래포구(京浦)에 있는 돌산이라 하여 '경암(京岩)'이라 했다는 설 두 가지가 있다. 군산시 경암동 지역은 조선 시대 옥구현 북면과 임피현 서사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임피군 서사면 구암리와 조천리 등을 통합해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를 개설하였다. 1937년에는 군산부 구암정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47년 군산시 구암동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후 1954년에는 구암동의 일부와 경포동을 병합해 전라북도 군산시 경암동을 개설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경포천이 금강에 합수하고 있으며 그 위에 강변로의 서래교가 놓여 있다. 경포천 서쪽에 서래포구마을, 그 동쪽 언덕에 군산 천연가스발전소가 자리하고 있다.
경장동·경암동 등의 시가지를 흘러온 경포천은 경암동 경포 배수갑문을 종점으로 금강으로 유입한다.
지난 시절 흥성했던 경포 서래포구를 상상해 본다.
뒤쪽에 보이는 경암사거리에서 해망로를 왼쪽으로 따라가면 군산고속터미널과 시외버스터미널이 있다.
군산경찰서는 1945년 10월 21일에 국립 경찰 전라북도 경찰부 군산경찰서로 출발, 1993년 9월 15일에 경찰서 청사를 군산시 중앙로에서 군산시 경암동 634-8번지로 준공·이전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군산화력발전소는1968년 준공해서 환경 오염 등의 이유로 2004년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2007년 4월 24일 발파 해체 공법으로 해체돼 40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 2007년 6월 착공해 2009년 5월 건립된 한국 서부 전력 L.N.G. 복합 화력 발전소가 운영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군산 로컬푸드 복합센터가 2023년 6월 10부터 임시 개장한 뒤 6월 27일 오후 3시에 정식 개장했다고 한다. 어제였군.
(군산=연합뉴스) 홍인철 기자 = 전북 군산시는 지역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로컬푸드 복합센터를 오는 6월 27일 정식 개장한다고 17일 밝혔다. 25억원이 투입된 로컬푸드 복합센터는 경암동 일대 3천600여㎡에 직매장과 카페를 갖추고 이달 중순부터 시범 운영을 해왔다.480여 농가가 참여하는 이 센터는 재단법인 군산 먹거리 통합지원센터에서 관리한다. 시 관계자는 "이 센터는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의 지역 내 소비로 농산물 순환유통 시스템을 구축하고 안전하고 건강한 먹거리를 도시민과 공유함으로써 농산물의 안정적인 판로 확보에도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왼쪽에 군산 로컬푸드 복합센터 6.27(화) 개장을 알리는 알림막이 펼쳐져 있다. 서해랑길은 구암3.1로를 따라 경암동 동쪽 지역을 통과한다. 앞에 보이는 진포사거리 입구 건너편에 경암동 철길마을이 있다.
군산시 경암동의 북쪽은 금강 하구에 접하고 있으며, 경암동의 서쪽에 있는 경포천이 북쪽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관통한다. 경암동은 군산시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금강과 접하고 있다. 동쪽은 구암동, 서쪽은 흥남동, 남쪽은 조촌동, 북쪽은 금강 건너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과 이웃한다. 1980년 제 3토지 구획 정리 지구로서 주거 지역과 준공업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경암 로터리 및 군산 고속버스 터미널과 군산 시외버스 터미널이 자리잡고 있는 교통 중심 지역이다. 2001년에 이마트 군산점이 들어서면서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군산의 상업 중심지가 되어가고 있다. 교육 시설로 중앙에 구암 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고, 군산 경찰서가 위치해 있는 지역이다. 군산 화력 발전소 자리에 2009년 L.N.G. 복합 화력 발전소가 재건립되어 운영중에 있으며, 경암동 철길마을은 관광객과 사진 작가들이 많이 찾는 명소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구암3.1로 군산 로컬푸드 복합센터를 지난다. 서해랑길은 진미면 막국수집을 지나 진포사거리에서 횡당보도를 건너는데, 길손은 바로 앞 구암3.1로 횡단보도를 건너 맞은편 보도를 따라간다.
서해랑길 정상 코스는 진포사거리 횡단보도에서 구암3.1로를 건너 이쪽으로 온다. 천상천녀 만신집 앞을 지나 경암동 철길마을 입구로 향한다.
왼쪽 동서 도로는 구암3.1로, 오른쪽 남북 도로는 진포로, 진포로 횡단보도를 건너 경암동 철길마을 입구로 간다.
경암동 철길마을 경암동 철길로 진입한다. 철로 왼쪽 건물은 주로 2층 구조, 그 오른쪽 건물은 화장실이나 창고라고 한다.
1944년 전라북도 군산시 경암동에 준공하여 페이퍼 코리아 공장과 군산역을 연결하는 철로 주변의 마을을 총괄하여 경암동 철길마을이라 이른다. 경암동 철길은 페이퍼 코리아 공장과 군산역을 연결하는 총 연장 2.5㎞ 철도이다. 1944년 일제 강점기 개설된 철도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동네를 이루었고 19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경암동 철길은 1950년대 중반까지는 '북선 제지 철도'로 불렸으며, 1970년대 초까지는 '고려 제지 철도', 그 이후에는 '세대 제지선' 혹은 '세풍 철도'로 불리다 세풍그룹이 부도나면서 새로 인수한 업체 이름을 따서 현재는 '페이퍼 코리아선'으로 불리고 있다. 철길마을 건축물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에 건축된 것이 대부분이며 벽 색깔은 대부분 푸른색, 자주색, 노란색 계열의 파스텔 톤으로 칠해져 있다. 문의 모양이 다양하여 알루미늄으로 만든 문, 판자로 만든 문, 양철로 만든 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골목 양편으로 건축물들이 나란히 서 있는데 오른편의 건물과 왼편의 건물이 외형상으로 확연히 구분된다. 오른편의 건물들은 2층 구조가 많고 왼편의 건물들은 주로 화장실이거나 창고로 사용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철길 양쪽으로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군데군데 향수를 일으키는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경촌1길을 가로질러 계속 철길을 따라간다.
2층에 '추억여행' 카페&상점이 있다.
경촌안1길을 가로질러 해바라기가 피어나는 철길을 계속 걸어간다. 교복을 입은 남녀학생들이 철길을 가는 모습이 상상된다.
인원 수 상관없이 장당 8천원이라고 한다. 낭만파는 교복을 대여받아 입고 옛 학창시절의 추억에 잠길 법도 하다.
안내판이 찢어져 전체를 읽을 수가 없다. 탐방객들이 마을을 잘 알 수 있도록 새로 설치해야 한다.
마당으로 기차가 지나던 경암동 철길마을 : 총 길이 2.5km인 이 철길은 1944년 4월 4일, 신문용지 제조업체인 페이퍼코리아(주)가 생산품과 원료를 실어 나르기 위해 5~10량의 컨테이너와 박스 차량이 연결된 화물열차가 오전 8시 30분~10시, 오전 10시 30분~12시 사이에 마을을 지나갔으며, 마을 중간 차단기가 있는 곳... 모두 합쳐 건널목이 열한 개나 되었고, 사람 사는 동네를 지나야 했기 때문 속도... 기차가 지날 때에는 역무원 세 명이 기차 앞에 타서 호루라기를 불고 고함을 쳐 사람들의 통행을 막았으며, 그 사이 주민들은 밖에 널어놓았던 고취 등 세간을 들여놓고 강아지도 집으로 들어갔다. 시속 10km 정도의 느린 열차는 2008년 7월 1일 통행을 완전히 끊었다. 비록 기차는 사라졌지만, 소유의 경계가 없는 문과 벽...고즈넉한 마을 일상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현재 철길마을은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꿈'의...'남자가 사랑할 때' 촬영지와 사진 애호가들의 출사지로 유명하다.
왼쪽에 경암철길마을 관광안내소, 오른쪽에 철길마을 쉼터가 있다. 철길 끝에서 왼쪽으로 꺾어 연안사거리로 향한다.
열차가 어디쯤 올까? 소년이 철로에 귀를 대고 철로의 울림을 듣는다.
군산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경암동철길마을 : 어린시절 목청껏 부르던 "기찻길옆 오막살이~~!"라는 노래가 절로 생각나는 이곳은 철로와 집의 거리가 1m 남짓도 안되는 사이를 비집고 들어 앉은 철로가 일상이라는 삶과 어우러져 어색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절묘한 곳이다. 사진작가들이 주로 찾았던 이곳은 최근 연인들이 추억을 담는 장소로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진포사거리 경암동 철길마을 출입구에서 연안사거리 출입구까지 10분도 안 걸려 바삐 지나왔다.
동서로 이어지는 구암3.1로 횡단보도를 건너 남북으로 이어지는 조촌로를 따라 금강으로 나간다.
구암3.1로 횡단보도를 건너 경암동 철길마을을 뒤돌아보았다. 경암동 왼쪽 뒤는 조촌동이다.
군산시 조촌동은 행정동으로 법정동인 조촌동과 경장동을 관할한다. '조촌(助村)'이라는 명칭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호구 총수』에 서사면 조촌리로 처음 등장한다. 군산시 관문에 위치한 신 개발 지역으로 군산시청을 비롯하여 전주 지방 검찰청 군산 지청, 군산 교육 지원청 등 각급 공공 기관이 집중 소재한 행정 타운이 위치해 있다. 아파트 및 연립 주택[27개] 등이 들어서 행정과 주거 복합 지역으로 발전 중에 있기도 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군산시 경암동 조촌로를 따라 금강 강변으로 나간다.
군산 중소유통공동도매물류센터가 2023년 5월에 개장했다고 한다.
(군산=연합뉴스) 홍인철 기자 = 전북 군산시는 공동구매를 통해 소상공인들에게 물품을 저렴하게 공급하는 중소유통공동도매물류센터 건립 공사가 마무리됨에 따라 2023년 5월 중순 개장한다고 4일 밝혔다. 110억원이 투입돼 군산시 경암동 옛 화물차 공용주차장에 들어서는 물류센터는 1만2천㎡ 규모로 건물 2동(5천㎡)을 갖췄다. 군산수퍼마켓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이 물류센터에서는 소상공인들이 개별적으로 사들이는 것보다 15% 정도 싸게 물품을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에 따라 소매가격도 다소 낮아져 지역 물가 안정에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된다. 사업자 등록증을 가진 군산시민 중 조합원과 법인 등이 물류센터를 이용할 수 있다. 냉동·냉장 설비, 물류창고, 배송장, 검품장, 사무실, 회의실 등을 갖춘 물류센터는 농수축산물, 공산품 등의 상품을 취급할 예정이다. 시 관계자는 "도매물류센터가 지역의 물가 안정에 이바지하고 골목 경제를 굳건히 지켜나가는 파수꾼이 되어 지역 순환 경제의 마중물 기능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촌로에서 왼쪽 뒤에 보이는 강변로 횡단보도를 건너 강변로 금강변으로 간다.
오른쪽 도로는 경포천 하구 서래교에서 이어져오는 강변로이다.
경암동에서 구암동으로 넘어와 강변로를 따라 금강(錦江) 하굿둑 방향으로 진행한다. 2008년 2월 20일 착공하여 2016년 12월 31에 완공된 군산시 금암동-구암동 군장산단 연안도로를 '강변로'라고 명명하였다.
강변로 동쪽 구암동 지역에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서고 있다. 왼쪽 뒤에 구암교회가 보인다.
군산시 구암동(龜岩洞)은 본래 임피군 서사면 지역으로 서북쪽에 거북이 형상의 구암산(龜岩山)이 있어 이를 바탕으로 '구암'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구암동(龜岩洞)'이라는 지명은 조선 후기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다. 구암동은 조선시대에는 임피현 서사면과 북일면에 속하였다. 1914년 3월 1일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임피군 서사면 마지리와 외산리 등을 병합하여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를 개설하였고, 1937년에는 군산부 구암동이 되었고, 1973년 7월 1일 군산시 행정 구역이 확장되면서 성산면 내흥리를 내흥동으로 편입하여 법정동으로 관할하고 있다. 군산시 구암동의 남쪽으로 고도 80m 내외의 구릉성 산지가 분포하고 북으로는 금강 변에 소규모 충적 평야가 펼쳐져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은 오른쪽 구암산 앞을 지나 금강 강변길을 올라가서 왼쪽 금강 하굿둑 갑문교를 건너 서천군 마서면으로 넘어간다.
일제 강점기 호남선의 개통과 육로 교통의 발달이 있기 전까지는 금강(錦江) 하구에 위치한 군산 지역을 기점으로 금강 유역 내륙 깊숙이 강경·청주·대전 지역 인근의 부강(芙江)까지 배가 오르내리며 교통로와 물류의 주요 유통로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백제 시대부터 내륙 수로로 중요하였던 금강은 19세기 말경부터 경부선과 호남선이 개통될 때까지 하운(河運)이 절정에 이르렀다. 충청남도 강경읍은 1899년에 군산이 개항되면서 군산과 부여·공주·부강(芙江)을 연결하는 중계 하항(河港), 또는 금강 유역의 물산 대집산지로 발전하였다. 강경의 정기 시장은 대구와 평양의 시장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시장의 하나로 급성장하였다. 군산에서는 주로 수산물과 면포·석유·성냥·사탕 등의 수입품이, 부여·공주·부강에서는 쌀을 주로 하는 농산물이 금강을 통하여 강경으로 운송되었다. 쌀은 군산을 거쳐 일본으로 수출되었는데, 군산에서 부강까지 올라가는 데는 3,4일, 반대로 내려가는 데는 1,2일이 걸렸다. 경부선이 부설될 때 부강까지 철도 부설 재료들을 선박으로 운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05년에 부강(芙江)을 경유하는 경부선이 개통되고, 1912년에 호남선의 일부 구간인 대전-강경-익산 구간과 군산선이 개통됨으로써 금강의 수운과 강경의 정기 시장은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금강 건너편 오른쪽은 충남 서천군 마서면, 왼쪽은 장항읍 지역이다. 왼쪽에 동백대교가 보인다.
왼쪽에 군산시 장계산과 월명공원, 수시탑이 가늠된다. 중앙에 동백대교, 동백대교 뒤에 옛 장항제련소 굴뚝이 솟아 있다.
강변로를 따라가는데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50m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100주년 기념관은 보이지 않고 구암교회가 오른쪽에 보인다. 군산 3.1운동 기념관은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일어난 군산 3.1 만세 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2008년 개관하여, 군산 지역 3.1 운동 관련 사진과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군산 구암교회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전킨에 의해 1899년 설립되었으며 1959년 현재의 석조 건물을 건축하였다고 한다. 군산 3.1운동은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 구암교회 교인들이 주동이 되어 거사했다고 한다.
구암동(龜岩洞)은군산시의 북쪽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금강 변을 끼고 있다. 동쪽은 경암동, 서쪽은 내흥동, 남쪽은 개정동, 북쪽은 금강 건너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과 이웃하고 있다. 국도 21호선이 중앙을 지나며 이 도로를 통해 군산시의 구도심 지역 또는 성산면, 임피면, 나포면 등의 농업 지역으로 접근할 수 있다. 구암동은 구암교회를 중심으로 한 호남 최초의 3·1 운동 발생 지역으로 3·1운동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는 고장이다. 준공업 지역으로 목재소, 합판, 종이 공장이 쇠퇴하면서 침체되고 있으나 연안 도로가 개통되고 군산역 역세권이 개발되면서 발전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구암동에서 내흥동(內興洞)으로 넘어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다. 왼쪽에 구암산, 중앙 뒤에 군산 시가지가 자리하고, 금강기맥 산줄기가 길게 벋어 내려 오른쪽 동백대교 끝 금강 하구로 꼬리를 내린다. 금강은 왼쪽으로 돌아 흘러서 서해 바다로 나간다. 군산 내항과 근대 역사문화공간이 가늠된다.
왼쪽은 전북 군산시, 오른쪽은 충남 서천군, 그 사이를 금강이 서해 바다로 흘러가고 있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는 금강과 군산을 배경으로 1930년대의 인간 군상을 보여주는 명작이다. 중앙 동백대교 뒤에 옛 장항제련소 굴뚝이 솟아 있다.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뒷산인 신무산의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군산시에서 서해로 흐르는 금강은 전국 주요 5대 강 가운데 하나이며, 남한에서는 낙동강·한강 다음 3번째로 큰 강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은 공주에 이르러서는 웅진강(熊津强), 부여에서는 백마강(白馬江), 하류에서는 고성진강(古城津江) 등으로 불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굽이치며 흐르는 강의 물결이 비단결 같다는 뜻으로 금강(錦江)이라 부르게 되었다. 금강 외에 호강(湖江)으로도 불린다. 금강은 노령산맥과 차령산맥 사이에서 여러 소지류들과 합류하여 대전광역시 대덕구 신탄진까지는 굽이져 흐르나, 충청남도 부여 지역부터는 커다란 강폭을 나타내며 대체로 평탄한 충적 평야를 지나 서해로 흘러든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충남 서천군 마서면(오른쪽)과 장항읍(왼쪽) 지역이 금강 하류 군산 건너편에 군산을 마주하여 자리한다.
위쪽에 금강 하굿둑이 보인다. 전라북도 군산시 성산면 성덕리와 충청남도 서천군 마서면 도삼리를 잇는 금강(錦江) 하굿둑은 1990년에 준공되었으며, 하굿둑 위로 금강갑문교 및 장항선 철도가 지난다.
금강은 군산시 나포면·성산면을 끼고 흘러 구암동·해망동 등지에서 서해와 합류한다. 금강 하류는 군산시 나포면을 지나 금강 하구인 군산시 성산면까지의 지역으로, 넓은 충적 평야를 통과하고 있다. 금강을 따라 발달한 충적 평야는 오래전부터 한반도 중부 지역의 주요 곡창지대로 알려져 왔으며, 지역 주민들의 풍요로운 삶의 터전이 되었다. 금강은 풍부한 유량과 넓은 강폭으로 오래전부터 서해와 내륙을 연결하는 교통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풍부한 금강의 수운(水運)을 바탕으로 오래전부터 포구가 발달하여 나포·서포·경포 등은 인적 자원의 이동뿐 아니라, 물적 자원의 내륙 지역 유통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조운제도의 정비와 함께 설치된 13개 조창 중의 한 곳인 진성창이 위치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군산창이 위치하였다. 1572년(중종 7)에 용안 득성창(得成倉)의 기능을 군산창으로 옮겨, 영광 법성창에서 수납하던 흥덕·고부·정읍·부안 등의 조세를 수납하던 호남의 대표적인 조창으로서 운영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군산시 내흥동 지역의 금강 강변길을 올라간다. 왼쪽 뒤에 금강 하굿둑이 보인다. 바로 위쪽에 진포시비공원이 있다.
'내흥동(內興洞)' 지명은 조선시대 행정 구역인 임피현 북일면 내흥리에서 비롯되었다. 1911년 옥구군에 편입되어 전라북도 옥구군 성산면 내흥리로 편제되었다. 1973년 7월 1일 군산시 행정구역이 확장되면서 옥구군 성산면 내흥리가 군산시 내흥동으로 재편되었고, 동시에 구암동이 관할하는 법정동으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군산시 내흥동은 북동쪽으로 오성산에서 갈라져 내려온 산줄기의 낮은 구릉 지대가 형성되어 있으며 서남쪽으로 평탄한 경작 지대가 펼쳐져 있다. 동(洞) 서쪽 끝에 남북 방향으로 금강(錦江)이 흐르고 있다. 내흥동은 군산시의 동(洞) 지역 가운데 동북쪽 끝에 위치하고, 대부분 농경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쪽으로 군산시 성산면 성덕리, 동남쪽으로 성산면 둔덕리와 아동리, 남쪽으로 군산시 구암동과 접하고, 서북쪽 금강 너머로 충청남도 서천군 마서면 당선리의 금강 하굿둑 관광지와 마주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금강 강변길에서 오른쪽 진포시비공원으로 들어가 시비들을 살피며 올라간다. 오른쪽 도로는 강변로이다.
군산시 진포시비공원은 내흥동 금강 하구 연안도로 옆에 자리한 공원으로 채만식 문학관에서 강변길을 따라 약 10분 정도 내려온 곳에 있다. 군산시에서 조성한 구불길 1코스 '비단강길'에 위치해 있다. '비단강길'은 비단처럼 펼쳐진 금강과 인접한 채만식 문학관, 금강 철새조망대, 오성산, 나포 십자들 등을 둘러보는 코스로 해당 코스에 진포시비공원이 조성되어 구불길을 여행하는 도보 여행자들의 휴식의 공간이자 군산 시민의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고독은 마치 비와도 같다./ 바다에서 저녁을 향해 올라온다./ 아득히 외떨어진 평야에서/ 언제나 고독한 하늘로 가선,/ 하늘에서 비로소 도시에 내린다.// 골목마다가 아침을 향해 돌아설 떼/ 아무것도 찾지 못한 육신들이/ 환멸과 비애에 갈라질 때//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서 자야 할 때/ 낮과 밤이 귀섞인 시간 속에서 비가 내린다.// 그러면 고독은 시냇물과 더불어 흘러가고...
내 고장 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집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두재표( 杜宰杓, 1860년∼1904년)는 조선 말기의 호남의 저명한 학자(巨儒)로 유고집인 <詩海集>이 전하고있다. 본관은 두릉(杜陵)이고, 옥구현(현 군산시) 회현면에서 출생하여,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강구하였다.
爲花潔白寶簪高(위화결백보잠고) 맑고 깨끗한 옥잠화 보배로운 비녀처럼 고귀해
百卉叢中亦一豪(백훼총중역일호) 온갖 꽃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오.
只將晚節隣庭菊(지장만절린정국) 가을 뜨락에 핀 국화와 이웃할 뿐
不向東風伴岸桃(불향동풍반안도) 언덕에 핀 복사꽃처럼 동풍을 바라보지 않는다오.
莫誇竹院新抽瑁(막과죽원신추모) 대나무야, 죽순을 새로 올린다고 자랑하지 마라
宛削藍田欲韱刀(완삭람전욕섬도) 채소밭에서 엷은 칼로 부드럽게 잘리리니.
紅顔難覓簪惟在(홍안난멱잠유재) 옥잠화야, 홍안은 찾기 어렵고 비녀만 꽂고 서 있어
謾使遊人夢想勞(만사유인몽상노) 왜 짐짓 나그네를 속여 수고로이 몽상케 하느뇨?
군산시 내흥동에 자리한 진포시비공원은 국내외 유명 시인들의 작품을 비석에 새겨 전시한 문화 공간이자 휴식 공간이다. 진포시비공원은 진포대첩의 승리를 기념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좀 더 나은 휴식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서 2007년 6월에 최초 개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진포시비공원은 1.5~2.5m 안팎의 자연석과 화강석의 시비에 신석정[부안], 이병훈[군산], 고은[군산] 등 전라북도 출신 세 명을 포함한 국내 유명 시인 14명과 외국 유명 시인 6명의 작품 등 국정 교과서나 세계 시인 사전에 수록된 시 작품을 새긴 42점의 시비를 구비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