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5장은 도덕적인 문제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참 순수한 인물들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와 같이 누추한 내용을 쉽게 취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복의 문제를 말해야 할 성경에서 인간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음행은 심지어 아비의 아내를 범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고전5:1)
그런데 바울은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을 제시하기보다 문제에 대한 원인과
그 문제의 발전과정을 경고하고 누룩 없는 떡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고전5:6-8)
말씀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문제를 없애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그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어도 통한히 여기지 않음은
그들의 교만 때문인데(고전5:2) 이건 아직 육신에 속한 어린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고전3:2)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시는 믿음(고후13:5)이 있다면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신데(사11:2)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
곧 임재의식이 없으므로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하다 보니 그 모양이 됩니다.
바로 율법 아래에 있는 어린아이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모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의 경전은 이런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러한 인간의 치부를 노출시키는 건 그 타락한 결과를 치료하기 위한
처방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이란 제품의 사용설명서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그 목적이 거룩이기 때문에 바로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부패한 과정의 이야기는 타락한 인간을 치료하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면 집을 나간 탕자를 찾기 위해 아버지가 사창가를 돌아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부정하고 추잡스러운 인간의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고
성경의 권위가 약화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죄인과 병자의 구원을 다루는데 있어서
의사들이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온갖 오물을 다 감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더럽고 추잡한 부분을 다 드러내어 치료해 나아갑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은 이 후 나타나는 현상은 그 전 보다 더 많은
낭패를 맛보고 더 형편이 없는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운데 줄곧 부끄러운 일이 계속되는 걸 봅니다.
유대인은 그들의 조상 야곱의 12지파의 전통을 중요시합니다.
특히 장자의 계통을 우대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족보에는 치욕적인 사건이 많습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이지만(창35:23) 그가 서모 빌하를 범하는
일(창49:4, 대상5:1)로 인하여 장자의 이름뿐 그만 명분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빌하는 단과 납달리를 낳았으나 단은 형제들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형제 중에 히틀러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불행이 다윗의 집안에도 그대로 계속이 됩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비의 후궁들을 고의로 범합니다(삼하16:22이하)
아비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입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근친상간을 금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영으로 이미 고린도교회의 문제의 사람들을 꿰뚫고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눈이 있었는데 이것이 심판입니다.
바울이 주 예수의 이름 안에서 내 영이 너희와 함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고전5:3-4)
이를 미루어 볼 때에 주의 일꾼들은 주의 이름 안에 있는
영적인 권위를 위임을 받아서 치리를 해야 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치리 방법은 육신은 사탄에게 내어 주어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도록 하는 겁니다.(고전5:5)
사실 죽음이란 육신이란 옷을 입고 있다가 다른 옷을 갈아입는 것일 뿐입니다.
봄이 오면 겨울옷을 벗고 봄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듯이 죽음을 통해
육신의 껍데기를 벗고 새로운 옷을 갈아입습니다. 이것이 육신이 죽은 다음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철학이나 과학을 하는 사람들도 죽음이란 진화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뱃속에 있는 아기가 바깥세상을
본능적으로 그리워하듯 이 땅에서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신비를 그리워하는 게 정상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영적이기에 신적인 존재입니다. 귀신이든 성령이든 양쪽 하나입니다.
본성대로 신나게 산다며 귀신의 기운에 잡혀 살든지 성령에 잠겨 살든지 양자택일입니다.
육신은 사단에게 내어 주어 사망의 기운에 의해 우주의 먼지로 돌아가고 그 영은
주 예수의 날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에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바울의 치리입니다.
치리로 육신이 멸해진 사람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로 보면 이해가 쉽게 될 것입니다.(행5:1-11)
한국인 중에는 남자는 병치레가 20년, 여자는 30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하나님의 치리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인간이 가진 취약한 문제를 왜 심각하게 생각하는가?
그건 바로 고린도교회의 율법적인 성향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젖먹이들임에도 자기자랑이 많습니다(고전5:5)
성도들이 자랑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게 자신의 부끄러움인 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잘 못된 것을 모르는 것이 누룩이 되어 온 덩어리에 퍼지고 있습니다.(고전5:6)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자랑하고 자신을 자랑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 자랑이 틀린 겁니다.
따라서 간증을 할 때 주의 할 점은 오직 하나님만 높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와 같은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고 강력하게 권면합니다(고전5:7)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하니 떡 덩이도 그러하다고 하십니다(롬11:16)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해 누룩 없는 떡이 되어야 하는데 바로 거룩함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룩은 우리의 유월절이 되신 그리스도의 희생 곧 그의 죽음을 생각하라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 하나가 된 사실을 늘 기억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표지는 말씀과 성례전이라고 하는 말대로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 세례(침례)로 누룩 없는 떡이 되어 그리스도와
한 떡 한 몸 한 영이 된 사실을 항상 기념하므로 기억근육이 강해져야 합니다.
구약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반드시 대속물을 가지고 갑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양으로 드려진 후에는 죄인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긍휼과 복을 받으러 갑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죄인이 죄 사함을 받으려고
처음 십자가 앞에 나아올 때처럼 아버지여 죄인이옵니다 하면 안 됩니다.
죄인으로 출발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나를 그리스도 안에 확증을 받아야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 말로 하면 그리스도 안에 의롭게 된 자신의 인증샷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이 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유월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자격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명절을 지키되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이신 그리스도로 지키라고 권하고 있는 겁니다.
이 말은 완전함에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묵은 누룩은 율법적, 곧 유대적인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결코 인간의 죄 문제가 해결이 안 됩니다. 율법은 결국 죽입니다.
죄를 이기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내가 성령 안에서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새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고전5:7)
그러므로 교회 문제 해결을 위해 이렇게 하면 죄다 그래서 반드시
저렇게 해야 된다고 말해서는 결코 문제가 해결 되지 않는 법입니다.
봄의 향연을 펼치는 자연은 진정한 자유가 뭔지 보여주는 우리의 뜰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태의 흐름보다 자연의 흐름에 민감해야 합니다.
자연은 말은 없고 신호만 있을 뿐입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 안에서
이와 같이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인 영적인 원리와 분별과 이치를 가르쳐줍니다.
인간의 불행은 가난이나 무지 그리고 나쁜 환경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없기 때문일 겁니다. 그것 때문에 세상에 기대다가 넘어집니다.
보이는 세계의 높음이나 깊음이나 모든 만물은 다 인간의 차원입니다.
인간은 어디서나 주어진 환경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적응하고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시2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만 아니라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문제를 늘 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악의 관점에서 이와 같은 인간의 죄 문제를 볼 것이 아니라
거룩한 누룩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상태에서 인간의 문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도덕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도 사귀라 합니다 아니면 지구를 떠나야죠(고전5:10)
그렇지만 형제라 일컫는 자는 내어 쫓아라 말합니다(고전5:13)
이게 고린도교회의 죄 문제에 대한 바울의 치리와 그 처방입니다.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