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 / 맹태영]
슬그머니 중산층 틈에 끼여 살아가는 일은
웬만큼 두꺼운 철판을 얼굴에 깔지 않으면 하지 못할 일
늦은 시간 시큼한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온 남편을 보면
열이 오르고 부글부글 끓어 당장 쫓아내고 싶지만
정신없이 쓰러진 사람을 겨우 앉혀 냉수를 먹이고
혼잣말로 ‘그래, 속 깊은 내가 참자!’ 하며 열린 뚜껑을 닫고
미움 반, 미안 반의 중불로 은근하게 내려보다가
내일 아침 찌개는 묵은지에 꽁치통조림 넣은
시원하고 얼큰한 김치찌개를 끓여주자고 다짐했다
이튿날, 식은 냄비처럼 차갑게 '아침 드세요!' 그렇게 말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성큼성큼 내게로 와
냄비 손잡이를 잡듯이 내 두 귀를 잡고
입술로 푹 한입 내 삭은 속을 떠먹을 것이다
거나한 아침이 끝나면,
허물 허물해진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두꺼운 냄비의 철판을 닦을 것이다. 반질반질 윤이 나도록
l해설l
詩를 짓기 위한 첫 단계는 詩想인데 시상이란 시적인 생각이나 상념을 말하며, 어떤 상황이나 물체, 현상, 눈에 보이는 것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순간적인 발상 등을 詩의 세계로 끌어들여서 몰입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냄비'라는 물체를 보면서 그곳에 아내를 대비하여 시적인 발상으로 접근, 詩 짓기를 했으며 아내와 냄비의 연관성을 묘하게 표현한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해설자의 눈길을 끈 문장은 '거나한 아침이 끝나면 허물 허물해진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입니다. 거나한 아침이란 무엇일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오히려 아무 일이 없었다고 했을까? 그것은 무슨 일이 있었다는 역설입니다.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면서, 일상의 상황을 재미있고, 현실감 있게 표현한 맹태영 시인의 '냄비'를 감상하세요.
-김정숙 시인·수필가-
https://story.kakao.com/ch/pusanpoem/KPGgAPs4mba/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