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명상 이사장 마가 스님
40년 고독의 심연서 길어 올린 자비심으로 세상을 맑혀가다
‘버림받은 자식’ 아버지 향한 분노 오대산서 자살시도
맨발 인도 여정서 죽음·공포 벗어나 환한 미소 찾아
풀리지 않는 의문 안고, 선지식 청화 스님 친견, ‘자비법희’ 올곧이 체험
선·위빠사나 접목한
‘자비명상’ 전국 확산
국민 멘토로 자리매김
자비, 실천할 때만 의미 있어
‘감사한 일’ 하루 1004가지
“그 사람이 천사요 보살!”
인도여행 길에서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며 머금은 ‘환한 미소’를 지금도 잃지 않는다.
태안사 조실 청화(淸華, ‘1종식·장좌불와 50년’ 실천한 선지식) 스님 앞에 섰다.(1997)
삼배를 올리니 맞절로 받으신다. 절을 마치고 말없이 앉았다.
납자의 얼굴을 지긋이 응시한 청화 스님이 한 마디 이른다.
“자네는 출가 전에 어떻게 살았나?”
윽!
턱 막힌 가슴의 좁은 틈 사이로 유년의 기억이 비집고 들어 왔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이웃집 아주머니와 도시로 나가 살림을 차렸다.
초등학교 1학년 소풍날, 함께 길을 나선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마을 뒷산으로 내달렸더랬다.
‘친구들은 아버지·어머니와 함께 소풍 가는데….’라는 말 대신 쭈그려 앉아
소나무 가지로 땅바닥만 헤집었다. 어머니는 숨죽인 채 눈물만 흘렸다.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은 질풍노도기로 접어들며 분노로 바뀌어 갔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자식!”
상처투성이의 고등학생이 위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광주의 한 교회였다.
‘목사의 길을 가자!’ 장성에서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한 걸음에 교회로 달려가
‘절대 불가’를 통고했다.
“그렇단 말이지. 내가 자살하면 아버지는 평생 후회하며 살겠지!”
1년 동안 수면제 70알을 모아 강원도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별다른 연고나 추억이 있어서가 아니다. 고향 땅에서 가장 먼 길을 택했을 뿐이다.
20여알씩 나눠 입 안에 털어 넣자 생의 무대를 거둬가는 장막이 내려오듯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3일 후 눈을 떴다. 죽음의 언저리에 이른 학생을 한 스님이 발견한 것이다.
“자네는 부처님 가피로 다시 태어났으니 남은 생은 부처님에게 바치게.”
목사의 길을 가려했던 청년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수행자의 길로 들어섰다.(1982)
청화 스님 한 마디에 먹먹해진 가슴을 안고 태안사에 머물렀다.
한 달 하고도 보름이 넘어가던 어느 날.
“대자대비를 펴야 할 납자가 아버지 한 분을 용서 못 했단 말인가!”
‘그 무엇’이 막힌 가슴을 뚫고 터져나왔다.
아버지를 향했던 분노·원망이 화롯불에 눈 녹듯 사라지며
숨죽여 흘렸던 어머니의 눈물보다 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무릎을 꿇었다.
“어머님, 감사합니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자비의 숭고함을 체득한 순간이다. 청화 스님을 다시 마주했다.
“이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펼치시게!”
미움·분노에 휩싸인 사람들을 자비심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
마가 스님은 선과 위빠사나 수행에서 갈무리 한 경험을 접목해
가장 한국적인 ‘자비명상’ 프로그램을 구축했다.
공주 마곡사에 최초의 ‘자비명상 템플스테이’를 열었던 장본인이 마가 스님이다.(2002)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똬리튼 ‘응어리’를 스스로 풀게한 후
자비 실천의 길로 인도하는 ‘자비명상’은 급속도로 유명세를 탔다.
당시 고졸 학력임에도 중앙대 강단(교양학부 겸임교수)에 선
마가 스님은 ‘내 마음 바로보기’ 수업을 만 8년(2003∼2011)이나 이어갔다.
개설 초기 150명이던 수강생은 몇 년 사이에 10배로 확대됐는데,
정원을 대폭 늘려도 수강신청이 어려워 ‘수강신청 1초 만에 마감되는 스님’으로 불렸다.
마가 스님이 개설한 ‘자비명상 지도자과정’을 통해서는
현재 스님 280명, 재가자 150명이 배출됐다.
내외명철(內外明徹)한 내공이 깊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얼굴과 낙하산은 펴야 삽니다!” “힐링(Healing)하려면 자신을 킬링(Killing)해야 합니다!”
“제주도보다 더 멋진 섬은 ‘그래도’입니다.” “2+2=4. 이해하고 또 이해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참신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비유를 들어 보이며 자비의 진면목을 유쾌하게 풀어내는
마가 스님은 법륜·혜민·정목 스님들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는 ‘국민멘토’다.
마가 스님은 출가 직후 도선사 어린이여름학교를 지도했다.
깨달음도 시절인연이 닿아야 한다고 했다.
태안사 ‘자비 법희(慈悲 法喜)’ 이전의 또 다른 일대사 인연이 분명 있었을 법했다.
마가 스님은 출가 10주년을 기념해 도반들과 떠난 인도순례(1995)를 회상했다.
부처님 법 직접 느껴보자고 떠난 순례길 이었지만 세 명의 의견은 늘 엇갈렸다.
유독 번잡함을 멀리해 온 마가 스님은 카투만두에서 도반들로부터 스스로 떨어져 나왔다.
네팔의 룸비니를 지나 인도 뉴델리에 도착해 게스트하우스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홀로 다니면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말도 안 통하는 낯선 사람들 속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보고는 고독감에 휩싸였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며 그 고독감은 죽음의 공포로 밀려 왔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아 방문조차 열 수 없었다.
스스윽!
벽과 천장을 타고 이리저리 기어다니는 도마뱀이 시야에 잡혔다.
“도마뱀도 저리 자유롭게 다니는데, 나는 문지방 하나 넘지 못하는구나!”
순간,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날카로운 눈빛이 도마뱀과 벽, 그리고 출입문에 꽂혔다.
‘성지순례하다 죽어도 괜찮아. 다음 생에 못다한 순례 이어가면 되는거야!’
어깨를 짓눌러 온 천근 돌덩어리가 떨어져 나간듯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일주일 만에 방문을 여니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환한 미소를 보이며 짧은 인사를 건넨다.
“헬로(Hello)!”
“그 인사 하나에 살아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실감했습니다.
오대산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가 보았던 저는 죽음만은 초탈한 줄 알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수좌시절 선사들의 생사일여(生死一如) 법문이 귀에 들리지 않았던 것도
저의 착각 때문인 듯싶습니다. 실은 살고 싶었던 겁니다. 그것도 엄청나게….
제 기억 속 가장 아름다운 미소로 남아있는 집 주인의 미소는
가사장삼을 수하고도 상대를 위한 미소 하나 보일 줄 몰랐던 저의 과거를 일깨웠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타인에게 웃음을 강요했던 겁니다. ‘나를 위해 웃으라고. 웃으란 말야!’”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걸었다. 무려 6개월동안 맨발로 길을 걸으며
낯선 사람들에게 “하이(Hi)” 하며 미소를 건넸다. 그들도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 길에서 한국인 목사도 만났는데,
인도로 떠나온 연유를 술회하듯 짧게 얘기하더란다.
“설교할 때마다 사랑을 실천하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사랑이 제 안에는 없지 뭡니까.”
신선하면서도 강렬한 충격이었다.
“제 안에도 자비가 있는지 의문이 일었습니다.
길을 걷다 내린 결론은 저 역시도 경전 속 자비를 보기만 했을 뿐
담으려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8개월의 인도 여행길에서 돌아 온 마가 스님은 자신의 내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공포, 죽음, 자유, 맨발, 미소, 그리고 자비! 분명 큰 것을 얻었는데
1%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지랑이 속에서 하늘거리기는 하는 데 잡히질 않는다.
그래도 꼭 잡아채야만 했기에 다시 길을 떠났고,
또 하나의 ‘긴 여정’ 끝에 닿은 곳이 태안사였다.
“아버지로 향한 분노, 도반들을 향한 거친 말, 신도들을 향한 위압적인 언행 등
그 모든 것들이 실은 폭력이었습니다.
인도 여정에서는 제 속에 자비가 없다는 것만 알았지
무자비·폭력이 가득했다는 사실은 간과했던 겁니다. 경전·법문 속 자비는 소용없습니다.
자비는 실천에 옮겼을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1%가 아니라 99%가 부족했던 겁니다.
이 사실을 알고나니 조금은 ‘스님다운 스님’으로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태안사 일주문을 나서며 다짐했습니다.
부처님 덕에 승복 한 벌 입었고, 불자님들의 시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이 은혜 죽을 때까지 갚으리라!”
아버지를 그리며 땅을 헤집던 소년, 버림받았다는 상실감에 휘말렸던 청년,
도반들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인도의 골방 한 가운데 스스로 만든 죽음의 공포에 떨었던 수좌,
그리고 태안사로 걸음 한 눈 푸른 납자. 이 여정에 ‘보이지 않는 길’ 하나가 더 있었음을 알겠다.
고(苦)로부터의 벗어남은 결국 자신의 문제이기에 고독한 여정일 수밖에 없다.
마가 스님이 체득한 자비는 40년 고독의 길 끝에 마주한 심연(深淵)에서 길어 올린 감로수다
아주 근원적인 질문 하나를 드렸다. 명상이란 무엇인가?
“멈춤입니다. 멈추면 ‘지금’이 보이고,
지금을 직시하면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수행이 깊어질수록 소유·집착의 생활방식에서 무소유·방하착의 생활방식으로 전향합니다.
이 과정에서 ‘비움’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의상 스님의 법성게에 있듯이 ‘하늘 가득한 지혜·자비가 비처럼 내리건만
하나같이 제 그릇 크기만큼만 담을 뿐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雨寶益生滿虛空 衆生受器得利益)’입니다.
적게 비우면 적게 얻고, 크게 비우면 크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릇을 바다처럼 낮추고 허공처럼 비워 지혜·자비로 채워가면
세상이 달리 보이고, 자신의 삶 또한 달라집니다.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자신과 타인의 존귀함을 어떻게 일깨워주는지가 궁금했다.
“자신의 장점을 108가지 써 보라고 합니다. 그 누구도 한 번에 채울 수 없습니다.
가족, 친구, 도반들을 찾아가 보라고 합니다. ‘당신이 보기에 내 장점은 무엇입니까?’
시간은 걸리지만 결국 채워갑니다. 도반 중 누군가 자신에게도 물어 올 것입니다.
‘당신 보기에 제 장점은 무엇입니까?”
마가 스님의 자비명상 과정을 밟는 수행자는
하루에 감사한 일 세 가지를 적는 ‘감사노트’를 쓴다.
교통사고가 났지만 ‘죽음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라는 글이 있는가 하면
‘휠체어를 밀어드려도 괜찮겠느냐는 호의를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글이 있다.
또한 ‘오늘도 아침 해를 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글도 있다.
“내가 보인 성의를 상대가 받아 주면 감사한 일입니다. 공덕을 쌓는 불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고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나무와 꽃, 강과 바다, 태양과 달도 고마운 존재들입니다.
뭇 생명과 천체들이 나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알면
그 무엇 하나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나와 너, 꽃과 나무, 산과 강 모두 부처님 대하듯 해야 합니다.”
연기법을 통해 생명의 고귀함을 터득해야 한다는 뜻이다.
“저는 물론이고 불자님들에게도 ‘하루 감사 3’을 ‘하루 감사 1004’로 확장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86초마다 감사하거나, 감사할만한 언행을 한다면 그 사람이 천사요, 보살 아니겠습니까?”
마가 스님이 품고 있는 청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장점이나 특질들을 키워 정신적 고양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개인의 내적 변화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 변화에도 초점을 둔 명상이다.
사부대중에게 지침이 될 글 하나를 부탁드렸다.
“‘나무는 꽃을 떨궈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수목등도화 사재능결과, 강수류도사 강재능입해·
樹木等到花 謝才能結果 江水流到舍 江才能入海)’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놓아야 니르바나에 이르겠습니까?”
어깨가 떡 벌어진 얼룩 코끼리가 무리를 떠나 자유로이 숲속을 거니는
무소의 뿔처럼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 풀어내야 할 화두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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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 스님은
- 1982년 입산.
- 1985·88년 사미·비구계 수지.
- 1989년 중앙승가대 복지학과 졸업.
- 2003∼2011년 중앙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 현재 현성정사 주지. 사)자비명상 이사장. 직지사 연수원장.
저서로는 ‘알고 보면 괜찮은’, ‘고마워요 자비명상’,
‘ 내 안에서 찾는 붓다’ 등이 있다.
2019년 6월 12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