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리스도 (1564)
피터 브뤼겔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the Elder, 1525-1569년)이 1564년에 그린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리스도>는 플랑드르의 자연과 일상의 삶 속에
종교적인 사건을 집어넣은 브뤼겔 특유의 종교화로,
그가 그린 작품 중에서 두 번째로 큰 그림이다.
이 작품은 1566년에 작성된 안트베르펜의 상인이며 은행가이자 미술 애호가였던
니콜라 욘헬링크(Niclaes Jonghelinck)의 목록에 있는
브뤼겔이 그린 16점의 그림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1566년에 안트베르펜 시의 소유로 넘어갔다가
1604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프라하 컬렉션에 기록되었다가
현재는 비엔나로 옮겨져 미술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브뤼겔의 이 작품을 접하면 그 구성이 상식을 초월한다.
이 장면을 그릴 때 대부분의 화가들은 전통적으로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숭고한 장면으로 그렸지만,
이 작품을 보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이 중앙에만 있을 뿐,
일단 주변이 전체적으로 어수선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 찾기 힘들 정도다.
화가는 군중들 사이에 있는 그리스도의 익명성을 강조해서 그린 것이다.
오히려 배경에 있는 우뚝 솟은 바위 풍경과
성모님과 예수님의 추종자들을 바위가 많은 전경에 인위적으로 배치한 것과
십자가 처형이 이루어질 언덕에 둥글게 모이는 사람들과
예수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극적인 사건들이 관람자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는데,
이런 것은 모두 매너리즘의 장치들이다.
배경을 이루는 풍경은 플랑드르의 자연주의를 나타낸다.
왼쪽에 있는 우뚝 솟은 바위 풍경은
요아킴 파티니르가 그린 안트베르펜의 풍경 전통을 따른다.
브뤼겔은 바위투성이의 예루살렘 성지를
플랑드르의 새로운 풍경에 옮겨놓은 것이다.
마차수레에 실려 끌려가는 두 죄수는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에 매달릴 두 강도이다.
두 사람은 죽기 전에 수도복을 입은 사제에게
십자가를 움켜쥐고 마지막 고해성사를 보고 있다.
앞에 있는 죄수는 하늘을 우러러 후회스러운 자기 삶을 통회하고 있다.
강도, 고해 사제들, 수레를 둘러싸고 있는 무시무시한 구경꾼들은
모두 현재의 복장을 하고 있다.
브뤼겔 시대에 공개 처형은 축제 분위기를 풍기는 행사였다.
여기서 브뤼겔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두려움과 비참함에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군중의 절대적인 무관심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왼쪽 아래에 군사들이 끌고 가는 사람은 키레네 사람 시몬이다.
그의 아내는 그가 십자가를 대신 지고가지 못하게 말리고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마저도 예수님께 아무 관심이 없다.
어떤 사람은 바람에 날라 간 모자를 줍기도 하고,
웅덩이를 잘 건너서 기뻐하기도 하며,
노점상의 물건을 훔쳐가기도 한다.
골고타 언덕에는 강도들을 못 박을 십자가가 두 개 서 있고,
언덕 중앙에는 인부 하나가 구덩이를 파고 있는데,
이곳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세울 작정이다.
전면에 시체가 아직 매달려 있는 바퀴 모양의 교수대와
까마귀가 먹지 못한 부서진 시체 잔해가 여전히 매달려 있다.
한 마리의 까마귀는 바퀴에 남은 시체 잔해를 보고 있고,
다른 까마귀들은 처형의 분위기를 감지하면서,
장차 있을 십자가 처형의 장소로 날아가고 있다.
구경꾼들도 말을 타거나 걸어서
십자가 처형이 있을 골고타 언덕으로 둥글게 모이고 있다.
수님을 제외하고 행렬의 인물들은 16세기 플랑드르 복장을 하고 있고,
오른쪽 전면에는 배경 인물들보다 크고 군중들로부터 분리된
성모님과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있다.
두 손에 깍지를 끼고 얼굴이 새까맣게 질려 기절하는 성모님과
그 주변에는 성모님을 부축하는 사도 요한,
붉은 망토로 눈물을 닦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
두 손 모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예수님의 이모 마리아와
뒤에서 흰 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는 베로니카가 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애도하는 그들은
십자가 처형 행렬에 가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못한 채
관람자들에게 슬픈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성모님과 예수님의 추종자들 뒤에 있는 수도자들도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깍지를 끼고 몸을 비틀어 슬퍼하고 있다.
그 뒤 오른쪽 끝 모서리에서 자색 모자를 쓰고 담담한 표정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흰옷을 입은 남자는 브뢰겔로 추정된다.
그는 자화상으로 이 그림에 서명을 한 것이다.
이 작품은 위대한 역사적 사건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상의 한 일부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