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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러시안
김 경 욱
불시착
화성 궤도에 진입할 무렵이었다. 그때까지는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순조로운 비행이었다. 지나치게 순조로운 나머지 어딘지 불안스럽기까지 한 비행 이었던 것이다. 사실, 내 스물일곱의 생애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게 갑자기 중대한 일이나 사건 같은 것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는 징후는 없었다고 해두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구와 달을 하루에 열두 번 왕복하는 정기 여객선 ‘허니문’의 객실 로비의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지구를 무심 히 바라보는 것 같은 삶을 살아온 것이다. ‘허니문’의 창밖으로 보이는 지구는 더 이상 지난날의 푸른 별이 아니었다. 지구는 눈에 띄게 황폐해져가고 있었다. 지구인들은 기회만 닿으면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려 했다.
서기 2317년 11월 30일.
화성 궤도에 진입할 바로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계기판 모니터에 표시된 날짜를 확인했다. 그리고 이십칠 년 동안 심연 속의 고래처럼 숨을 죽이고 있던 그 정체 모를 불안이 용암처럼 들끓으면서 마침내 황폐한 기억의 각질을 뚫고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우주선의 동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를 쓰며 이를 악물었다. 자동항법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었다. 계기판의 많은 바늘들이 미친 듯이 좌우로 요동쳤다. 나는 자동항법 시스템을 중단시키고 수동항법 시스템으로 전환했다. 여전히 우주선은 우주폭풍이라도 만난 것처럼 예정 된 고도와 궤도에서 이탈한 채 흔들거렸다.
나는 고도를 유지하기 위해 레버를 힘껏 끌어당겼지만 우주선의 진동은 점점 심해지는 것이었다. 만일 이십칠 년 동안의 순조로움이 ‘무슨 일’인가를 잉태하고 있었다면 그 ‘무슨 일’이란 분명히 이 상황일 것이라고 나는 제법 확신을 가지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확신도 진동하는 우주선의 밸런스를 회복시킬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의 본질에 밸런스 따위는 에당초 존재하지 않는 법이니까.
는 정상적인 스물일곱 살의 우주비행사가 취할 수 있는 조치들을 모두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우주선을 이미 집어삼킨 그 ‘무슨 일’은 여간해서는 다시 우주선을 놓아주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광활한 우주공간으로 구조 신호를 다급하게 쏘아 올렸다. 내가 우주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전부였다. 내가 띄운 전파는 다크 블루의 우주공간 속으로 작은 풀벌레의 울음소리처럼 하염없이 스며들고 있었다.
빨리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나는 우주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상태로 착륙을 시도하는 건 달에 해수욕장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짓이라고 판단했다.
나는 얼마간의 산소가 내장된 우주복을 서둘러 입고 헬멧을 착용했다. 그리고 우주선을 화성 궤도로 진입시켰다. 화성 기지와의 연락을 몇 차례 시도해보았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구조 신호를 누군가가 받았기를 바랄 도리밖에 없었다. 우주선은 요동을 멈추지 않은 채 화성을 향해 곧장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나는 전방을 주의 깊게 응시하며 최대한으로 우주선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브레이크 레버를 잡아당겼다.
잠시 후, 화성 표면이 육안으로 관측되었다. 그 순간, 나는 왼손으로 비상탈출 버튼을 힘껏 늘눌렀다. 동시에 천장의 비상 도어가 열리고 조종석과 함께 나는 우주선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우주선이 화살처럼 화성 표면으로 날아가 붉은 불기둥을 피워 올리며 폭발하는 것을 나는 낙하산에 매달려 지켜보아야 했다. 그것은 그다지 유쾌한 광경은 아니었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우주선의 폭발을 지켜본 건 그것이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몰던 우주선이 아닌가. 나는 희미한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는 불기둥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실로 오랜만에 내쉰 한숨이었다.
화성의 표면은 고요했다. 그것은 거대한 사막이었다. 풀 한 포기도 보이지 않았다. 생명체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벌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발을 디딘 곳은 제법 높게 솟아오른 구릉지대였다. 끝없이 펼쳐진 붉은 사막에 엷은 어둠이 서서히 밀려들었다.
낙하산을 정리하고 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오른쪽 무릎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우주선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무릎을 다친 것이었다. 나는 외마디 비명을 삼키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도저히 걸음을 옮길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걷는 것을 포기하고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았다. 포기하는 일이 많은 하루라고 나는 생각했다.
바위에 앉아 숨을 고르며 천천히 내가 처한 상황을 점검해보았다. 내게는 화성의 기지를 찾아갈 만한 장비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곳과 연락을 취할 방법도 없었다. 더군다나 다리를 다쳐 꼼짝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내가 지니고 있는 산소는 불과 열 시간 정도를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모든 상황을 고려해볼 때 결론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사실, 내게 다른 선택의 여지조차 없었던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해도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내가 우주선에서 탈출하기 직전 쏘아 올린 구조 신호를 받고 누군가가 찾아와 주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열 시간분의 산소를 천천히 소모해가며. 만일 그동안 누군가가 나를 발견한다면 살아날 것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엔 화성의 이름 모를 사막 언저리에서 너무나 순조로웠던 스물일곱 해의 생을 마감해야 할 것이다.
빌어먹을, 산소가 부족해서 죽게 되다니.
산소가 없어서 죽는다는 건 생각만 해도 정말 끔찍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누가 산소 따위가 없어서 죽을 것이라고 상상이라도 할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우주선과 함께 화성 표면에 코를 박고 죽는 편이 더 그럴듯한 죽음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후회 같은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앞으로 열 시간의 여유가 내게 주어졌고 내 입장으로 말하자면 죽을 가능성과 구조되어 살아날 가능성은 반반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소 결핍에 의한 죽음은 죽음의 본질과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오히려 죽음의 본질에 가장 근접한 것인지도.
나는 바위에서 내려와 등을 기대고 누웠다. 한기가 온몸에 엄습해 왔다. 붉은 사막은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한가롭기 그지없는 시간을 맞고 있는 셈이었다. 바람 한 점 없는 화성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 움직임이 완전히 제거된 공간이었다. 너무나 고요한 나머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홀로그램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무릎에 느껴지는 통증만 아니었다면 눈앞의 상황을 홀로그램이라고 믿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절박한 상황이었지만 정신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달 표면처럼. 그리고 그 고요함 속에서 화성 궤도에 진입했을 때 고개를 들던 불안감처럼 이상한 감정이 뭉클거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확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우주의 어둠 속에서 작아져 가는 지구를 돌아볼 때 간혹 느끼곤 하던 까닭 모를 심적인 동요
내 의식은 북극의 빙하처럼 명징해지기만 했다. 마치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몇백만 년 전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야간열차
덜커덩, 덜커덩.
열차는 희망이나 절망의 흔적마저도 사라져버린, 마른 삭정이 같은 내 저물어가는 이십 대의 어느 일요일 늦은 오후의 권태를 싣고 서울로, 서울로 달려가고 있었다.
남춘천 역을 출발한 열차는 강촌역을 지나치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어디론가 흘러내려 가는 강물과 야트막한 능선들이 오밀조밀한 곡선을 그려내고 있었고 드문드문 1층, 2층 건물들이 보였다. 11월의 바람은 열차의 창문을 쉴 새 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방음시설이 잘 된 실내에서 듣는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를 위한 소나타」의 선율처럼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바람 소리가 반드시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를 위한 소나타」처럼 들릴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거센 심장의 박동 수리 같기도 했고 언뜻 들으면 재즈 보컬리스트의 애드리브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바람에 창문이 흔들리며 내는 소리는 그때의 내 심리 상태에 따라 여러 가지 소리로 해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소리의 본질이 변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푸른 잉크빛 어둠이 능선을 따라 서서히 강물 위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해는 능선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 흔적은 희미한 오렌지 빛으로 남아 있었다. 그 엷은 오렌지빛은 안개처럼 사위*를 감싸 안으며 점차 수축하고 있었다.
모든 것들, 다시 말해서 본질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창밖의 세계에 있으며 창 이편의 세계는 그 본질의 그림자나 잔상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나이는 스물일곱이었지만 그 스물일곱이라는 나이의 본질은 이미 내게 속해 있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곤 했다. 어쩌면 그 본질이라는 것은 창밖의 세계에 속해 있으며 늘, 창밖의 풍경처럼 나를 따라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유난히 결혼식이 많은 달이었다. 그 달의 주말은 대부분 결혼식장에서 보냈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정도였다.
이 세기가 저물기 전에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21세기에 결혼하는 것도 그리 나쁠 것은 없어 보였다. 적어도 내겐. 20세기에 하든, 21세기에 하든, 결혼식이란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라고 해서 결혼식이라는 행사의 속성이 변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결혼식이란 일부러 서두르거나 미루거나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고 싶고, 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다. 그뿐이다. 결혼식의 본질이란 그런 것이다.
힘겨운 숨을 토해내며 열차를 따라오던 엷은 오렌지빛의 노을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이제 더욱 짙어가는 어둠만이 이름 모를 들판을 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창밖의 어둠이 짙어갈수록 유리창에 투영되는 내 얼굴의 아우트라인이 선명 해지고 있었다.
낯선 들판 위에 떠 있는 그 얼굴은 내게 뭔가 말하려 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굳게 닫힌 입술은 스핑크스 동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말을 간절히 하려고 하는 눈빛처럼 보였다. 아주 중요한 말을.
경춘선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스물을 갓 넘을 무렵, 나는 저 들판을 지나쳤던 것이다. 그때, 나는 대학생 이었고 모든 것들이 불투명하고 막연하기만 하던 시절이었다. 레드 제플린을 들으며 밤새워 술을 마시던, 그런 시절이었다.
칠 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 바라보는 저 들판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어 보였지만 나 자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이를테면, 칠 년 전 이 길을 달리던 기차에 탔던 나와 오늘 다시, 이곳을 지나치는 기차를 탄 나는 다른 행성의 주민들처럼 거리감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그 칠 년의 세월 동안 이 기차가 달린 거리만큼. 그 양쪽 끄트머리에 칠 년 전의 나와 현재의 내가 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 칠 년을 이 기차가 달린 수천 수만 킬로미터의 거리가 둘 사이에는 존재하는 것이다. 달라지지 않는 건 차창 밖의 풍경뿐, 그리고 쓸쓸한 말들의 묘지. 하지 말았어야 할 말들과 해야 했을 말들의.
아주 많은 것들이 나로부터 빠져나갔을 것이다. 한 번 내게서 떨어져 나간 것들은 결코 다시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 수천, 수만, 아니 수억 킬로미터를 내가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들이 내게 돌아오지 않듯, 나 또한 그들에게 돌아갈 수 없다. 많은 문제들을 세월이 해결해 주지만 그 세월 때문에 풀리지 않는 매듭 같은 것도 있는 것이다.
나는 캔맥주를 샀다. 달리는 기차에서 마시는 맥주의 맛은 칠 년 전과 다름이 없었다. 나는 맥주를 조금씩 마시며 차창에 오버랩되는 그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이 내게 간절히 전하려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해내려 했다. 그 얼굴은 마치 다른 차원에서 달려온 메신저처럼, 아니 마라톤 평야를 질주해 온 병사처럼 내게 무슨 말인가를 외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저항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사로잡힌 듯 입을 꼬옥 다물고 있기만 했다. 그 굳어진 얼굴 위로 몇 개의 산봉우리와 건물들과 가로수가 스쳐 지나갔다.
나는 캔맥주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열차의 연결 통로에 기대어 섰다. 싸늘한 11월의 바람이 옷섶을 헤집고 달려들었다. 나는 지상으로 내리는 열차의 계단 끝에 손잡이를 잡고 섰다. 자리에 앉아 있을 때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열차의 속도감이 덜커덩거리는 굉음과 함께 온몸으로 전해졌다. 손을 뻗치기만 하면 닿을 것 같은 지구의 표면이 자꾸만 뒤로, 뒤로 쏜살같이 물러서고 있었다.
짙은 어둠 속으로 밀려가는 나무들과 지구의 표면을 바라보며 나는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빠져들었고 어쩌면 차창에 어린 얼굴이 내게 전하려 했던 말은 이런 말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를테면, 이봐, 자넨 뭔가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라고.
정확히 맞지는 않더라도 그런 비슷한 종류의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열아홉의 어느 여름밤 눈을 감았다가 다음 날 눈을 떠보니 스물일곱이 되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이 나의 진실일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내가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것 또한 진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잃어버렸단 말인가. 알 수 없다.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망각해온 나로선, 잃어버린 그 무엇을 모르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진실의 영역에서도 모든 것이 피타고라스 정리처럼 명쾌하지는 않은 법인가.
하지만 나는 결코 서두르거나 하지 않기로 한다. 내가 무언가를 잃어버렸고 진정 잃어버린 그 무엇이 내게 중요한 것이라면 나는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그 무엇을 깨닫지 못하고 내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그것이 내 생에 허락된 운명의 질량이라면.
청량리역 광장을 가로질러 걸으며 어느 먼 우주의 행성들의 사소한 떨림처럼 단속적으로 명멸해가는 네온사인을 망연히 바라보며 나는 이렇게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렇다, 나는 뭔가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리하여 난 스물일곱이 된 것이다.
블랙 러시안
1996년 11윌 14일 저녁 일곱 시, 신촌의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시간은 일곱 시였고 내 시계는 정확히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만나기로 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춘천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열차에서 문득 나를 태풍처럼 휘감았던 상실감은 이미 나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귀나 코와 같은 어떤 독립된 부분이 되어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상실감은 아주 오래전, 다시 말해서 내가 그것을 깨닫기 훨씬 전부터 고름처럼 내 몸에 들러붙어 있었던 것 같았다. 단지 내가 그 고름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었을 뿐인 것처럼. 하지만 나는 그 상실감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채 몇 날 밤을 뒤척였다. 그 며칠 동안 변함없이 퇴근길이면 다운타운을 어슬렁거리며 몇 잔의 위스키를 내 몸속으로 들려보냈다. 그리고 집 에 돌아오면 라디오 헤드나 펄잼을 듣거나 「영웅본색」 이나 「천국보다 낯선」을 보며 맥주를 마셨다.
그 며칠 동안 나는 짙은 안개 속을 헤매고 있었다,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그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스물일곱, 짙은 안개 속’ 이라고 컵 받침대에 낙서를 하기도 했다.
1996년 11월 14일 저녁 일곱 시 칠 분, 나는 신촌의 복잡한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의 창가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며 테이블 위에 놓인 메뉴판을 뒤적거리고 있었고 .그 짙은 안개 속에서 불현듯 하나의 이정표가 솟아올랐다.
블랙 러시안.
나는 무심코 신음처럼 그렇게 내뱉었다.
블랙 러시안, 그것은 하나의 도어였다. 그 문을 밀치고 들어가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결국, 손잡이를 돌려야만 하는, 그런 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으로서는 그녀에게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셈이다. 분명한 것은 그 문을 밀치고 들어가면 어쩌면 내가 잃어버린 그 무엇을 찾게 되거나 최소한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는 있게 되리라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 문을 열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 표면의 삼분의 이 이상이 물로 덮인 행성에 스물일곱 해를 살면서 수영하는 법을 배우지 않은 나로서는.
블랙 러시안, 한 잔.
나는 주문을 받으러 온 웨이터에게 그렇게 말했다. 블랙 러시안은 칵테일 이름이었다. 덧붙이자면, 그녀가 늘 마시던 칵테일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나와 술을 마실 땐 언제나 블랙 러시안을 주문했었다. 그리고 나는 늘 위스키를 마셨다. 나는 그녀에게 왜 변함없이 블랙 러시안만 마시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건 내가 늘 위스키만 마시는 것과 비슷한 이유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내가 늘 위스키만 마시는 데에 특별한 이유는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 왜 블랙 러시안만 마시는 거죠? 라거나 블랙 러시안만 고집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라는 식으로 물어보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블랙 러시안은 초콜릿색이었다. 나는 이제까지 블랙 러시안을 한번도 마셔본 적이 없다. 그녀가 마시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을 따름이다.
나는 블랙 러시안을 천천히 마시며 그녀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신을 집중해서 그녀에 대해 생각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녀에 대한 기억들은 희미해지는 것이었다. 그녀를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되었고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 실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분명히 어느 특정한 기간 동안 내 주위에 머물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내 기억은 아즈텍이나 마야 문명의 잊힌 유적처럼 망각의 숲 속에 단지 희미한 흔적으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마치 예리한 메스로 그녀에 대한 기억이 저장되어 있는 내 뇌의 일부를 잘라내기라도 한 것처럼 완벽하게 나는 그녀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트로이 문명처럼 완벽하게 내게서 잊혀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완벽하게.
내게 만일 잃어버린 세계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잃어버린 세계를 다시 찾아야만 하고 찾으려 한다면 그녀를 먼저 찾아야만 할 것 같았다. 내 지난 생애의 어느 순간 어긋난 그 무엇으로 인해 나는 전혀 다른 세계로 떨어져 나가버렸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현재의 내 생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낯설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면 그 원인은 지난 생의 어느 순간에 엉킨 매듭 때문이리라. 나는 오랜만에 뭔가에 대해 확고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매듭은 풀어야만 한다.
스팅의 「Angel Eyes」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오리지 널 사운드 트랙 앨범에 수록된 곡이었다. 내가 블랙 러시안을 다 마시고 또 한 잔을 더 마시도록 만나기로 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시계를 보았다. 일곱 시 삼십이 분. 약속시간에서 삼십이 분이 더 흘렀다.
나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전화번호가 메모된 페이지를 뒤적거렸다. 그녀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유리 테이블 위에 놓인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고 그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뜨우, 뜨우.
두 번의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나는 스물두 살 이후 처음으로 수화기를 귀에 대고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지금 거신 전화는 결번이오니 다시 확인 바랍니다.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사무적인 어투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한 번 수첩에 적힌 전화번호와 이름을 확인 했다.
한은서 .
실로 오랜만에 떠올려보는 이름이었다. 나는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피우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다. 나는 열네 살 소년처럼 흥분하고 있었다.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작은 꿈틀거림 이 느껴졌고 그 꿈틀거림은 소용돌이가 되어 혈관을 따라 머리꼭지로 헬리콥터처럼 수직상승하구 있었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우고 나서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더욱 천천히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금고의 비밀번호를 입력 시키는 것처럼 신중하고 정확한 손놀림이었다.
이번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지난번과 똑같은 음성이 들려올 뿐이었다. 나는 다시 짙은 안개의 바다로 떠밀려 간 것이다.
다시 원점이다. 그녀는 슬라이드 필름처럼 내 인생에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내겐 그 슬라이드 필름의 잔상만을 남긴 채. 그리고 몇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잔상마저 꺼져가는 촛불처럼 사그라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에게로 향한 길은 멀어질 것이다. 안개는 짙어만 간다.
미로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내게 올아갈 곳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앞으로 더듬더듬 나아가야만 한다. 미로를 빠져나가기 위해선 모든 가능한 길을 가보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언제나 열정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는 것이다.
일곱 시 사십이 분, 나타나기로 한 사람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카페 ‘2층에서 본 거리’에서 나왔다.
흔적
다음 날 나는 기억을 더듬어 그녀가 일하던 회사로 찾아갔다.
밤새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고 그녀에 대한 기억들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몇 가지 단편적 인 인상들과 기억들이 슬라이드 화면처럼 얼핏 지나갔지만 전체적으로 아귀가 맞는 것 같지는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아주 또렷이 떠오르는 것들을 모아 전체적인 윤곽을 잡으려 했지만 하나하나 따로 놓았을 때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명하던 것들이 완결된 하나의 틀 속에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희미해져버리는 것이었다. 전체를 형성하는, 뭔가 아주 중요한 요소가 결여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퍼즐이었던 것이다. 그 단편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연결고리가 내 기억의 창고 속에는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의 고유한 본질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수한 파편들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그녀는 여행사에 근무했었다. 그녀가 일하던 사무실은 종로에 있었다. 몇 번인가 내가 그녀가 근무하는 그 여행사 앞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평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종로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여행사 사무실도 사람이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고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그녀의 모습을 찾았지만 사무실에 그녀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얼마간 입구에서 주위를 둘러보자 검정색 싱글을 입은 젊은 사내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는 여행사의 직원인 듯했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님, 뭘 도와드릴까요, 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의 미소와 말투는 CF모델의 그것처럼 세련되어 보였다.
나는 헛기침을 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저어, 한은서 씨를 찾아왔는데요.”
태어나서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한은서라는 이름을 내 입으로 말하고 보니 갑자기 그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돌연한 그리움에 나는 스스로 당황하고 있었다.
내 입에서 한은서라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CF 모델처럼 미소를 짓던, 검은 싱글을 입은 사내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빛에는 약간의 경계심이 내비치기까지 했다.
“실례지만, 어디서 오셨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약간 조심스러워졌다.
“대학 동창인데요, 며칠 후에 동창회가 있는데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아서 이렇게 직접 찾아왔습니다.”
물론 나는 은서의 대학 동창이 아니었다. 미리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내 입에서 그런 말이 아주 쉽게 튀어나온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그 사내에게 어떻게 설명 할 도리가 없기도 했다. 더구나 나 스스로도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처지에 빠져 있었으니까. 카레라이스 조리법이나 타이어 갈아 끼우는 방법처럼 명쾌하게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대뜸 블랙 러시안을 마셔본 적 있습니까, 라고 물을 수도 없었다. 만일 그렇게 묻는다면 그는 정색을 하며 선생님께선 약간의 휴식이 필요한 것 같군요. 뉴질랜드
나 하와이는 어떻습니까. 뭐, 괌이나 유럽 쪽도 괜찮겠지요,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 그분은 작년에 회사를 그만두셨습니다. 대학 동창이라면서,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나 보죠?”
그는 잔뜩 움츠리고 있다가 내게 날카롭게 반격을 한 셈이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 그에게 은서의 이름을 댔을 때의 경계심은 어느 정도 사라진 듯했다. 그러나 그의 말투는 여전히 조심스러웠고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아, 그건 서로 연락이 뜸해서, 동창회나 결혼식 같은 일이 있을 때만 연락을 하곤 했거든요. 그런데 여길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직장을 옮기기라도 했습니까? 혹시 연락처라도 알 수 있을까요?”
나는 약간 다급한 심정이 되었다. 뭔가가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자꾸 엉키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다가가려고 할수록 그녀의 세계는 내게서 멀어지려고 하는 것만 같았다.
“글쎄요. 워낙 갑작스럽게 그만두었거든요. 그리고 회사 그만두는 사람이 연락처 같은 걸 남기겠습니까. 연락처라면 오히려 그쪽에서 더 잘 알 것 같은데요.”
나는 또다시 벽에 이마를 부딪힌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사내는 분명히 뭔가를 내게 숨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사내가 내게 숨기고 있는 것을 설령 털어놓는다고 해도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 사내가 내게 숨기고 있는 것은 뭔가 문제의 핵심, 혹은 본질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내가 그곳에 더 이상 머물 이유는 없었다. 나는 그 사내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목례를 보내고 돌아섰다. 출입문 양편 벽에는 드넓은 붉은 사막과 코발트빛 바다의 사진이 크게 확대되어 걸려 있었다.
여행사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한동안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두들 목적지가 확실히 정해진 듯한 발걸음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바람이 불어 라이터의 불꽃이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울 때까지 어디로 갈 것인지 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담배꽁초를 휴지통에 던지며 나는 인사동에 가서 위스키를 한잔하기로 했다. 아니면 블랙 러시안이라도.
신호등 쪽으로 걸어갈 때, 뒤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역행사에서 보았던 여직원이 긴히 할 말이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은서에 관해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것인 줄 눈치 챌 수 있었다.
“절 부르셨습니까?”
나는 그 여직원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담을 대신했다.
“은서, 찾으시는 진짜 목적이 뭐죠?”
그녀는 말투와는 다르게 여행사의 사내처럼 나를 경계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진짜 목적이라뇨? 동창회 때문에……”
나는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그녀의 유난히 커다란 눈망울은 이미 내 속마음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거짓말이 서툰 분이군요. 은서는 여대를 나왔거든요. 그리고 제 동창이기도 하구요.”
얼굴이 달아오르는 듯했다.
“길거리에서 이러지 말고 어디 들어가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내가 이런 제안을 하자 그녀는 난처해하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이렇게 자리를 비워서는 곤란하거든요. 빨리 돌아가야 될 처지라.”
나와 그녀는 신호등 앞 건물의 현관 쪽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초지종을 말하자면 굉장히 길어집니다. 그리고 저로서도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거든요. 이거 하나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저에겐 은서를 찾는 일이 무척 중요합니다. 특별한 목적 같은 건 없고, 그저 한번 만나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현재의 상황과 내 심정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은서는 갑자기 사라졌어요. 실종된 거라고 말할 수도…… 작년 이맘때쯤 홀연히 사라진 거예요. 마치 공룡들이 이 지구에서 사라져버린 것처럼. 경찰서에서 사람이 나와 사무실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묻기도 했죠. 은서 가족이 실종 신고를 했거든요. 별 이상한 낌새도 전혀 없었는데. 가족들에게조차 아무런 소식도 없나 봐요. 사람이 그렇게 완벽하게 사라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취를 감춰버린 거죠.”
그녀는 지금도 은서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사고 같은 거라도 당한 건 아닐까요?”
나는 우울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랬다면 벌써 경찰서로 연락이 왔을 테니까요.”
“사라지기 전에 전혀 이상한 눈치가 없었나요? 아주 사소한 거라두요. 아님, 평소와 다른 행동이나 말 같은 거 말입니다.”
그녀는 몇 분 동안 망설이고 나서 결국 입을 열었다.
“이런 말 들으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UFO에 대해서 어떻게 생 각하세요?”
그녀의 눈망울이 약간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었다.
“UFO라면 미확인 비행 물체…….”
나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찢겨 나간 기억의 페이지를 찾아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은서에 관한 기억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UFO는 블랙 러시안과 같은 것이다. 은서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난 UFO를 믿어요. UFO가 정말로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젠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건 신이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있다고 믿으면 존재하는 거죠. 그리고 UFO 같은 거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UFO 같은 게 있다고 해서 크게 나쁠 것도 없잖아요.”
그런데, UFO와 그녀의 실종과는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이런 말 하는 게 엉뚱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만……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거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네요. 이젠 그만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은서에게 해를 끼치거나 할 것 같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큰 도움이 못 돼서 죄송하군요. 무슨 이유 때문에 은서를 찾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은서를 빨리 찾기를 바라겠어요. 그럼 이만.”
그녀는 내게 가볍게 눈인사를 보내고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여행사 사무실 쪽으로 결음을 재촉했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이 인파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멍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초겨울, 어둠이, 트로이 목마에서 빠져나오는 그리스 병사들처럼, 포도를 걸어가는 행인들의 무심한 어깨 사이로 틈입해오는 도시에서, 나는 다시 철저히 혼자였다.
첫눈
며칠 후, 나는 은서가 정기적으로 다니던, UFO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했다. 작년엔가 그녀를 따라 한 번 가본 적이 있는 모임이었다. 어렵게 수소문을 해가며 그곳을 새삼스럽게 찾아간 이유는 내가 UFO를 믿어서가 아니라 은서의 실종에 관한 단서라도 얻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은서만 아니었다면 나는 UFO 같은 것엔 별 관심 없이 한평생을 그럭저럭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은서를 만난 그 순간부터 난 어쩔 수 없이 그 UFO라는 것과 이미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것이 UFO에 대한 내 솔직한 견해이다.
내가 찾아간 곳은 영등포의 어느 요가 학원이었다. 그 요가 학원은 푸른색 페인트의 색이 눈에 띄게 바랜 허름한 5층 건물의 5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도장엔 나까지 포함해서 스물네 명의 사람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둘러앉아 있었다.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학생에서부터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적어도 외형적인 면에서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에게서 이렇다 할 공통점 같은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전화번호부에서 무작위로 뽑아낸 스물네 명을 한자리에 모은다면 아마 이런 집단이 되겠구나 싶었다. 다시 말해서, 뭔가 동질감이나 공통된 기준 같은 것과는 아주 거리가 먼 집단이었다. 하지만 그 외형적인 이질감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 사이에는 묘한 유대감 같은 것이 충만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서는 어떻게 설명하기 어려운 열기가 느껴졌다.
정확히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은서를 따라 한 번 왔을 때 보았던 얼굴이 더러 보이기도 했지만 대부분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오래돼서 기억이 나지 않는 얼굴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서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당연한 일이다.
모두들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앉아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몇 분인지, 몇 시간인지 모를 견고한 침묵이 흘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의 적막감이 눈꺼풀을 짓눌렀다.
나는 눈을 감고 태초의 정적 같은 그 침묵의 공간 속에서 은서의 얼굴을 떠올렸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은 안개 저편에 존재했다. 수억만 광년이나 달려온 별빛처럼. 그녀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어쩌면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발목을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온 세상이 그대로 정지해버린 듯했다.
은서의 영상이 희미한 몇 개의 선과 점으로 흐려져갈 무렵, 명상은 끝났다. 사람들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한 얼굴들이었다. 수백 년 동안 냉동인간으로 지내다 마악 눈을 뜬다면 아마 저런 얼굴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명상이 끝난 후, 사람들은 특별한 규칙이나 형식 없이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이야기들이란 이런 것들이었다.
한밤중의 고속도로 상공에서 UFO처럼 보이는 발광체를 보았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심지어는 외계인의 메시지를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어떤 사내는 스스로 안젤라라고 이름을 밝힌 외계인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고 주장했다. 그 안젤라라는 외께인은 지구로부터 수천 광년 떨어진 아틀라, 라는 행성으로부터 왔으며 그 행성의 종족이 지구인의 조상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점차 다가오는 지구의 종말을 막기 위해 왔다고 밝혔다는 것이었다. 지구의 종말을 막기 위해서는 우주의 다른 생명체의 존재를 믿는 차람들의 정신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것과 그것을 확대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불가결하다는 것이었다.
안젤라, 라는 이름의 외계인과 텔레파시로 접촉을 하고 있다는 삼십 대의 키가 큰 사내는 은서와 함께 왔을 때도 보았던 사람이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특별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로서는 은서를 찾는 일 외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 일은 내게 절박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까마득하게 잊고 지내다 새삼스럽게 반드시 그녀를 다시 만나야만 할 이유를 선뜻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그녀를 다시 만나야 실마리가 풀릴 것 같았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들은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외계인, UFO, 접촉자, 지구, 종말, 구원 등의 단어들이 거침없이, 빈번하게 튀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대화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달리 할 말도 없었을뿐더러 하고 싶은 말도 없었기 때문이다. 단, 내가 입을 열어야만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혹시, 한은서라는 여잘 아십니까?
모임은 해가 질 무렵에야 끝났다. 삼삼오오 패거리를 이뤄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외계인과 텔레파시로 접촉을 한다고 하던 그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아주 평범한 인상이었다.
“실례합니다. 기억하지 못하실 테지만, 전에 한 번 뵌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사내에게 말했다.
“한은서 씨와 함께 오신 적 있죠?”
나는 그 사내가 나를 알아보는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가 은서를 알고 있다는 데에 약간의 흥분을 느꼈다. 어쩌면 이 사내는 은서의 행방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은서는 지금 어디에 있죠?”
내 말은 내 생각을 한 발짝 앞서가고 있었다.
“UFO를 믿으십니까?”
외계인의 메시지를 받는다는 그 사내는 대뜸 그렇게 물었다.
대체 은서와 UFO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오, 난 UFO 같은 건 아무래도 좋으니 은서를 빨리 찾고 싶을 뿐이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굳게 다물고 말았다.
그 사내의 표정은 무덤덤한 것 같으면서도 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를 굉장히 안타까워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내가 계속 침묵을 지키자, 그 사내는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지금, 이곳과는 다른 시간과 공간의 존재에 대한 열망과 믿음, UFO란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르죠.”
나는 점점 더 알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사내를 뒤쫓아 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나는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 그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도시는 또다시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은서를 찾기 시작하고서부터 도시의 어둠과 나는 자주 맞닥뜨리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나는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열 발짝을 옮겼을 무렵, 나는 뭔가 강렬한 에너지 같은 게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에너지, 라는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건 확실히 내 시선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어떤 힘에 이끌려 차도 건너편 인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그곳엔 그녀, 은서가 행인들 틈에 묻혀 걷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옆모습을 보며 걸음을 멈추고˙말았다. 그녀는 어디론가 바삐 걷고 있었다. 나는 주위를 살폈다. 횡단보도는 보이지 않았다. 사차선의 도로는 차들로 꽉 막혀 있었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인도에서 빠져나와 반대편으로 건너가려 할 때였다. 그녀가 급히 지하도로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차도를 횡단하는 것을 단념하고 내가 걷고 있던 쪽의 지하도 입구로 뛰어들었다.
지하도 계단에서 넘어질 뻔했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지하도에 들어섰지만 은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하도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반대편 입구로 들어왔으나 엇갈릴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온몸에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지하도 층계에 주저앉았다. 오가는 사람들이 흘깃흘깃 쳐다보았다. 갑자기 심한 두통을 느꼈다. 나는 고개를 떨군 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얼마 후, 두통은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 등을 두드렸다.
“이봐 젊은이, 괜찮나?”
검정색 코트를 입은 중년 사내가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물었다.
“괜찮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그렇게 짤막하게 대답을 하고 비틀거리며 지하도 계단을 올라 다시 지상으로 나갔다.
머나먼 우주에서 날아든 운석처럼 눈이 지상으로 떼를 지어 추락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도시의 어둠 속으로 꼬리를 그리며 사라지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전에 내가 발을 딛고 있던 그곳은 광활한 우주의 어느 행성처럼 낯설고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운석 같은 눈처럼 그 낯선 행성에 불시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위는 더욱 어두워지고 주위의 모든 사물들이 뿌옇 게 흐려지고 있었다.
지구에 불시착하는, 수억 만 번째의 첫눈이었다.
근접 조우
점차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졸음이 집어삼킬 듯 밀려들었다. 어쩌면 나는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선잠에서 막 깨어난 듯,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한기를 느꼈다. 의식은 점점 가물거리고 있었다. 꿈이라면 빨리 깨어나고 싶었다. 즐거운 꿈은 아닐 테니까.
나는 잠들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잠들면 모든 게 끝장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숨은 점점 가빠지고 호흡이 곤란해졌다. 그리고 눈꺼풀이 무거워지 기만 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산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어둠은 점차 엷어지고 있었다. 푸른 잉크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붉은 사막 같은 화성의 표면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움직이는 건 하나도 없었다.
나는 푸른 잉크빛에 물들어 가는 그 사막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눈꺼풀이 감기면서 시야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그 푸른 잉크와 같은 스크린 위로 언뜻언뜻 낯선 영상들이 스쳐 갔다. 지구, 바삐 오가는 사람들, 죽음처럼 친숙한 어둠, 그리고 소리 없이 내리는 눈.
나는 푸른 어둠의 베일 위에 안개처럼 드리워지는 그 잔상들을 바라보며 지구를 떠난 이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특별히 슬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눈물은 이미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준비되어온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우주의 저편에서 날아든 속삭임처럼, 푸른 어둠의 장막 사이로 작은 우주선 하나가 날아오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모델의 우주선이었지만 지구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들었던 ‘Vegetarians’의 노래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바위에 기대며 일어서 조난 신호용 레이저빔을 쏘아 올렸다. 우주선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고 점차 내 시야에서 확대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은빛 동체의 한쪽에는 그 우주선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처음에는 알아볼 수 없는 크기였지만 내게로 다가옴에 따라 글씨를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그 은빛 동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BLACK RUSSIAN.
『내일을 여는 작가』 5호(1997. 1); 『베티를 만나러 가다』 (문학동네 1999)
김경욱(金勁旭)
1971년 전납 광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중편소설 「아웃사이더」 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뒤 영화적이고 음악적인 상상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인터넷 세대의 황량한 내면풍경을 형상화해왔다.
소설집 『바그다드 카페에는 커피가 없다』 『베티를 만나러 가다』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장국영이 죽었다고?』 , 장편소설 『아크로폴리스』 『모리슨 호텔』 『황금 사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