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8:1).
우리는
영광스러운 8장으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성경 전체를 반지에 비한다면 로마서는 보석에 해당하고, 8장은 보석 중에서도 반짝 빛나는 부분이라고들
말합니다. 8장은, “그러므로” 하고 시작이 됩니다. 이 “그러므로”가 어느 부분과 연결되는 접속사인가에 대해서 학자들은 고심하고
있습니다.
7장
마지막 부분과 연결시키기에는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 드린바와 같이, 6장과 7장은 바울이 5장까지 전한 복음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기 위해서 기록이 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8장을 “그러므로” 하고 시작하는 것은, 가까운 문맥으로는,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한, 7:6절과 결부가 되고, 로마서의 구조(構造)상으로는
5장 마지막과 결부가 되는 접속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하는 선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하고 선언한 5:20절과 연결이 되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①
사도는 8장에 들어오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定罪)함이
없나니”(1) 하고, 또다시 폭탄적(爆彈的)인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
저는 감히 폭탄적인 선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실은 그 이상의 선포인 것입니다. 이 선언은 비유컨대
원자폭탄보다도 더 위력이 큰 “사랑의 폭탄이요, 은혜의 폭탄”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
왜냐하면 7장에서 “죄 아래 팔려, 사로잡혀 가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하고 몸부림을
치는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요, 그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能力)이요”(1:16),
㉯ 하나님의 능력 중에서도,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엡 1:19)이라고, 최상급의 능력이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
8장의 나머지 부분은, 이 한 절에 대한 해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드립니다만, 8:1절의 말씀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이며, 폭탄적인 선언인지 아셔야할 만큼 알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②
“결코 정죄(定罪)함이
없나니” 하고 말씀합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결코 유죄판결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에 유죄판결을 받게 되면 감옥에 끌려가듯이,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는 “정죄함이 없다, 결코 없다” 하고
선언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아무나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만이 결코 유죄판결을 받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정죄함이 없습니다. 결코 없습니다.
③
이는 바울 사도의 창작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정죄함이 없다”는 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요
3:18),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하고, 정죄라는 말 대신에
심판(審判)이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
이점에서 조심해야할 점은 “정죄함이 없다”는 이 선언이, 죄를 밥 먹듯 하는 “죄에 거하는”(6:1) 자에게 면죄부(免罪符)를
주는 말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을 행함으로”(7:19) 탄식하며 몸부림치는 그런
자에게 자유(自由)함을
주는 말씀이라는 점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④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에 대해서 분명치가 못하고, 확신이 없는 듯이 보입니다. 정죄함이 없다면 언제까지 없는 것이냐? 그
범위는 어디까지냐?
㉠
예를 들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한 성도가 있다고 합시다. 그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만 실수하고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정죄되는 것인가? 아닌가? 정죄되었다가 그가 회개(悔改)하면
다시 정죄되지 않다가, 다시 넘어지면 정죄되고, 그래서 사망(死亡)으로
갔다가 다시 생명(生命)으로
옮겨지는, 왔다 갔다 하는 그렇게 되는 것인가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영원이 없습니다.
㉡
이점에서 조심해야할 점이 있는데, 실수하여 죄를 범한 자에게는, “정죄 감”이 있어야 마땅하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상한 마음으로 통회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정죄함이 없다”는 뜻은 그를 사탄의 영역인 “사망”으로 추방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구원이 취소가 되고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다루시는가?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4) 한 징계입니다.
죄를 범한 장본인은 상한 심령이 되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시 51:17)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징벌”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가 “생명에서 사망”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는 매를 맞아도 아버지에게 매를 맞는 것이요, 내 죄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망극하신 사랑에 대해 죄를 범한 것인 것이 됩니다.
⑤
그렇다면 어째서 정죄함이 없는가?
㉠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정죄를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를 이미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6:6)는 뜻입니다.
㉡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정죄의 반대는 칭의(稱義)이지,
성화(聖化)가
아니라는 점에 확고해야만 합니다.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정죄가 없는 것이지, 성화되었기 때문에 정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⑥
이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신 칭의(稱義)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일한 것도 없고, 경건치도 않은 자”(4:5)를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여겨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내용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3:24)입니다. 그런데 그가 실수하고 넘어졌다고 그 칭의가 취소된단 말입니까? 취소(取消)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可能性)은
그리스도께서 담당해주신 대속적인 죽음을 철회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래서 의롭다함을 얻은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
간교한 사탄은 우리를 정죄함에 빠뜨리려 무진 애를 쓸 것입니다. 그래서 무력화(無力化)시키려
합니다. 이에 대한 예가 스가랴 3장에 있습니다. 사탄이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對敵)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책망하시면서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간곳없이 사라지고 천사가 수종을 드는 것(슥 3:1-5)을 보게 됩니다.
⑦
사탄이 형제를 송사하거든, 8:1절을 가지고 대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그렇게 하면 이 말씀이
성령의 검이 되어 사탄의 궤계를 물리치게 될 것 입니다.
㉠
말씀을 마치기 전에 형제에게 묻고 싶은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 첫째는 형제의 마음속에 혹시라도, “그러면 죄를 범해도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그렇다면 다시 로마서
6장으로 돌아가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1-2) 한 말씀을 깊이 음미해 보아야만 합니다.
㉯ 둘째로 묻고 싶은 것은, 이 말씀을 듣고서도 아직도 정죄감에서 해방되지 못한 형제는 없습니까? 만일 있다면 그는 로마서 7장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좀더 정죄당하고, 결박당하고, 지옥에까지 떨어져 보아야만 합니다.
㉡
형제가 제아무리 힘쓰고 애쓴다 해도 결국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하고 항복하고,
건져주실 그리스도를 찾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⑧
그렇다면 성도들이 실수하고 넘어졌을 경우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율법에 대해서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근심을 끼치고
죄를 범한 것입니다.
㉠
정죄란 법이 있어야만 선고하는 것인데, 그리스도인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은혜(恩惠)에
대해서 죄를 범한 것입니다.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주신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
그 아들을 대신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여 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신 것만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의롭다고 여겨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맞이해
주신, 망극하신 그 사랑에 대해서 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를 알기 때문에 율법 하에 있을 때보다도 은혜 아래 있을 때가 더욱
성화(聖化)를
촉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
우리 주님은 이사야 선지자로 예언케 하신,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한 말씀을 읽으시고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형제여,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밖에는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