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두 회에서 은행의 설계도가 그려졌다. 열 한 가지 원칙이 정해지고 숙제 넷이 남았다.
그런데 설계도가 그려졌다고 기구가 서는 것은 아니다. 그 기구가 내린 결정을 무엇으로 집행할 것인가. 지난 회 말미에서 메디치가 두 사람에게 되물은 것이 그 물음이었다. 이 기구에는 경찰도 군대도 과세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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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대의 북아메리카
여기서 한 시대를 돌아본다. 미국 초기의 13개 주가 각자 화폐를 찍고 서로에게 관세를 물리며 다투던 시절이다. 연합규약이라는 문서는 있었으나 아무것도 강제하지 못했다. 의회가 결의해도 각 주가 따를지 말지를 정했고 대개 따르지 않았다. 결정은 내려지는데 집행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의 국제 질서와 닮은 데가 있다. 그 시절을 살아낸 네 사람에게서 이 회차의 뼈대를 가져온다.
해밀턴이 남긴 말이 이 회차의 제목이다. "법은 칼이 없으면 종잇조각이다." 그가 한 일도 그 명제의 실행이었다. 연방은행을 세우고 각 주의 부채를 인수해 종이 위의 연합을 이익의 연합으로 바꾼 것이다.
매디슨은 반대쪽을 지켰다. 사람의 정부는 야심으로 야심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한 사람을 뽑아 권력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권력끼리 서로 견제하게 만드는 설계다. 그는 연방과 주의 이중 주권을 두어 연방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 못하게 했다. 칸트가 세계정부를 경계하며 연맹을 제안한 것과 같은 조심스러움이다. 설계도의 여섯째 원칙이 거기서 나왔다. 평가는 지역이 하고, 검증은 상위 단위가 교차로 하며, 발행만 연방이 맡는다. 특히 발권력이 그렇다. 세상에 돈을 만드는 권한만큼 포획의 유혹이 큰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머지 둘은 제1부의 바탕이 된 사람들이다. 제퍼슨은 1813년의 한 편지에서 촛불로 다른 촛불을 켜도 내 불이 어두워지지 않는다고 썼다. 쓴다고 줄어들지 않는 것은 사유(私有)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페인은 1797년 『토지 분배의 정의』에서, 개간으로 생긴 개량가치는 그 일을 한 사람의 것이나 토지 자체의 가치는 공동체의 것이므로 소유자는 그 몫을 치러야 한다고 했다. 그 몫을 모아 모든 사람에게 자선이 아니라 권리로서 나누자고도 했다. 앞의 둘이 권력의 구조를 말했다면 이 둘은 재정의 원천을 말한 셈이다.
다만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네 사람의 세계에는 지구라는 개념이 없었다. 토지를 공동의 것으로 보았으나 그것은 인간 공동체의 몫이라는 뜻이었지, 숲과 습지와 바다가 스스로 몫을 받는다는 발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의 연방은 하나의 나라였다. 열세 개 주는 같은 언어를 쓰고 비슷한 법 전통을 가졌으며 함께 전쟁을 치렀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것은 190여 개 나라의 문제다. 원리는 취하되 설계는 새로 한다.
그 칼은 어디서 오는가
이제 해밀턴의 물음으로 돌아가자. 세계 차원의 기구에 칼은 무엇인가. 군대를 두자는 제안이 흔히 나온다. 하책이다. 어느 나라도 자기 주권에 병력을 들이밀 수 있는 기구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고, 설령 만들어져도 그것을 지휘하는 자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권력이 된다. 매디슨이 경계한 바가 정확히 그것이다. 그리고 실은 필요하지도 않다.
2022년의 일을 떠올려보자. 러시아의 침공 직후 서방은 러시아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를 동결하고 주요 은행을 국제 결제망에서 배제했다. 총 한 발 쏘지 않은 조치였으나 효과는 웬만한 군사 작전보다 컸다. 오늘의 세계에서 결제망 배제는 심각한 타격이다. 무역 대금을 주고받을 수 없고 해외 자산에 접근할 수 없으며 국제 금융 시장에서 돈을 빌릴 수 없다. 데이터도 마찬가지다. 위성 항법과 클라우드와 국제 통신망에서 끊기면 현대 국가의 상당한 기능이 멈춘다. 그러니 칼은 이미 있다. 다만 지금은 한 나라가 자기 판단으로 휘두른다.
힘을 절차 안으로
여기가 갈림길이다. 금융 제재가 한 나라의 결정으로 이루어지면 그것은 법이 아니라 힘이다. 제재의 정당성이 아무리 커도 결정 주체가 당사자인 한 그렇게 읽힌다. 그리고 지켜보는 쪽은 언제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그 뒤에 벌어진 일이 그것이다. 여러 나라 중앙은행이 금 보유를 늘리고 달러 밖의 결제 통로를 찾기 시작했다. 제재를 무기로 쓴 것이 그 무기의 신뢰를 스스로 갉아먹은 것이다. 같은 조치가 법정의 판결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성격이 달라진다. 누가 결정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반했느냐가 문제가 되고, 기준이 미리 공표되어 있으며, 당사자가 변론할 기회를 갖는다. 힘을 없앨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을 절차 안으로 들여올 수는 있다.
관할에 매이는 것은 '국경을 넘는 공유부'가 훼손된다. 대규모 생태 파괴, 기후 협약의 중대한 위반, 침략 행위. 국내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구성은 두 겹이다. 법률과 생태 분야의 전문가가 사실을 확정하고 법리를 적용하되, 추첨으로 선정된 시민 배심이 최종 판단에 참여한다. 전문가만으로 구성하면 그 전문가를 누가 선임하느냐가 곧 권력이 되기 때문이다.
집행은 이렇다. 유죄가 확정되면 해당 주체는 세계연방은행의 결제망에서 배제된다. 국제 공동 데이터망에 대한 접근도 제한된다. 필요한 경우 국제적으로 등록된 지대 지분이 동결되거나 공유부로 귀속된다. 군대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칼이다.
두 기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이제 이 회차의 핵심에 이른다. 위의 집행 수단이 작동하려면 그 결제망이 존재해야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것은 한 나라와 그 동맹이 운영하는 망이고 사용 여부는 그들이 정한다. 그러면 지구법정은 지금의 국제형사재판소와 같은 처지가 된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된다. 법정이 칼을 가지려면 은행이 있어야 한다. 거꾸로도 성립한다. 은행이 규율을 가지려면 법정이 있어야 한다. 발권력만큼 포획의 유혹이 큰 권력도 없는데 그것을 심판할 자리가 없으면 기구 자체가 새로운 패권이 된다. 어느 나라가 지대를 조작해 지분을 부풀리거나 발행 규칙이 자의적으로 바뀔 때 그것을 다툴 자리가 있어야 한다.
하나만으로는 어느 쪽도 서지 못한다. 다만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해서 한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은행의 발행 결정이 분쟁의 대상이 될 수 있는데 심판자가 같은 울타리 안에 있으면 독립성이 의심받는다. 집행하는 쪽과 심판하는 쪽이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 자체가 하나의 장치다. 뒤에 입지를 다룰 때 다시 짚겠다.
남는 물음들
누가 소추하는가. 검사에 해당하는 자리를 어떻게 구성할지, 개인이나 단체가 직접 제소할 수 있는지는 정하지 않았다. 오판을 어떻게 바로잡는가. 결제망 배제는 한 나라의 경제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그 나라의 시민 대다수는 결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지도자의 잘못을 국민이 지는 구조는 지금의 제재가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고, 절차 안으로 들여오더라도 그대로 남는다.
강대국이 이 법정의 관할을 받아들일 이유가 있는가. 답은 하나뿐이라고 본다. 기구가 먼저 굴러가기 시작해야 한다. 즉 세계연방은행의 결제망이 실제로 작동하고 그 안에서 거래하는 편이 이익이 되면, 그때 관할을 받아들이는 것이 참여의 조건이 된다. 세계무역기구의 분쟁해결절차가 그랬다. 강대국도 그 판정을 따랐는데, 이유는 도덕이 아니라 그 체제 안에 있는 편이 이익이기 때문이었다.
다음 회에서는 또 하나의 물음을 다룬다. 이 모든 것을 누가 결정하는가.
지대본위화폐와 세계연방은행은 지구주권적 사고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담론이다. 사진은 NA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