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수인기 5권-2 #78***
대륙은 지금 완연한 만추(晩秋)의 가을로 접어든 시기였지만 북녘의 대초원(大草原)은 벌써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후하~!”
이른 아침 하얀 입김이 나는 쌀쌀한 흑막의 제일도시 제평(齊平)은 오늘도 분주한 하루가 시작했다. 이제 초로의 나이에 들어선 풍채 좋은 상인은 아직 그 강건함을 자랑이라도 하듯 제평의 대로(大路)를 당당하고 힘 있는 발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십니까? 무 장자님.”
“아침부터 바쁘구먼.”
“지금 바쁘지 않으면 겨울을 쫄쫄 굶을 것인데 바빠야지요.”
“그래, 지금 열심히 해야 겨울이 길지 않겠지.”
이미 장사를 시작해 흥정하는 사람들 사이를 걷는 상인에게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아는 척을 하며 인사를 건네왔다. 제평의 상인 무호우(武呼宇)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자신의 점포로 길을 재촉했다.
지금 제평은 고양이 손이 아쉬울 만큼 바쁠 때였다. 바로 길고 긴 흑막의 겨울을 준비하는 시기이기 때문이었다. 봄부터 살찌운 말이나 가축, 그리고 여분의 가죽이나 모피, 치즈, 말린 고기 등 유목을 하여 생산된 것을 차(茶)와 의복, 곡식 등과 바꾸는 장이 서기 때문이었다. 흑막의 각 지역에서 모인 물산은 제평에 모여 큰 상인들의 손을 통해 대량으로 거래되곤 했다.
제평, 아니 흑막에서 가장 큰 향료 상인 무호우는 현재 제평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였다. 중원으로 통하는 북지성의 대종도(大縱道)가 ‘정립천하의 난’으로 길이 막히자 그 길을 통해 들어오던 중원과 연결되는 상로가 막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자 차와 곡류의 가격이 폭등했고 동해의 뱃길로 들어오는 것만으론 제평의 수요를 따라잡지 못했다. 단순히 가격이 오른 문제가 아니라 식량 수급에 문제가 생길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호우가 대량의 곡류와 차 등을 대량으로 풀어 말과 가축 등을 그만큼 사들이게 되자 다소 가격이 오른 형태에서 해결되어 그의 영향력이 크게 증가되었다.
“어르신 오십니까?”
“으음, 수고하네.”
후각을 자극하는 알싸한 향신료의 냄새가 진동하는 무호우의 점포엔 제평의 일반 백성을 상대로 소량 판매하는 각종 향신료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 작은 점포가 흑막의 거의 대부분의 향료 상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몇 해 전부터 제평에 향신료가 싼값에 풀리고 이제는 흑막 전체에서 사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육류를 많이 먹고 또한 즐기는 흑막 사람들이지만 육류 특유의 노린내가 좋을 리 없었고, 한겨울 얼큰한 고기 국물을 먹어본 사람이라면 반드시 다시 찾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지금 무호우가 취급하는 것은 향신료뿐만이 아니었다. 동업자이자 사실상 무호우 자신이 속한 토금전장에서 되도록 많은 말과 가축, 모피 등의 상품을 원했기에 그것에 신경쓰느라 요즘은 장사는 사환에게 맡겨 처리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서류를 정리하고 곡류를 취급하는 것만으로도 무호우에게는 막대한 이윤이 남는 장사였다. 거기다 제평은 물론 흑막의 초원 상권이 그의 손에 반쯤 쥐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어르신, 원주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원주에서? 어서 모셔라!”
오늘도 바쁘게 장당 적게는 수천 냥에서 많게는 수십만 냥의 거래 내용을 담고 있는 서류를 검토하느라 정신이 없던 무호우는 원주에서 사람이 왔다는 말에 모든 일을 뒤로 미루었다.
“어서 오십시오. 오시는 길이 험한데 고생은 안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무 장자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토금전장에서 제평 총관직을 맡고 있는 석은추(晳銀追)는 근 두 달 만에 무호우를 찾았다. 석은추는 중경 토금전장과 제평의 토금전장 대리인인 무호우 사이를 왕복하는 일을 임무로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토금전장에 대한 무호우의 창구 역할을 하는 인물이었지만 무호우에게는 어마어마한 물량의 상품을 총괄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6000여 필의 군마를 수송하거나 반란 지역이나 다름없는 후려 남경에서 올해도 어김없이 충분한 양의 향신료를 가져온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토금전장에서 부탁한 것은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만일 석 대인이 나서주지 않았다면 흑막의 백성들이 참으로 힘들어질 뻔했습니다.”
“아닙니다. 장사치가 장사를 하는 것인데요. 그리고 이번에 무 장자님을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으로의 일이라면….”
“지금 사방에서 난리가 나서 사실상 길이 끊긴 곳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어찌 되려는지 원….”
“그래서 저희 토금전장에서 한 가지 일을 벌여보려 합니다.”
무호우는 은근한 석은추의 말에 호기심을 느꼈다. 지금까지 서로 아쉬운 소리을 한 적이 없었기에 토금전장에서 뭔가 원한다는 것을 상인으로서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무슨 일을….”
“길을 지나기 힘들어졌으니 뱃길을 닦아야 하겠지요.”
“뱃길이라고요?”
뱃길이란 말에 무호우는 얼른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평은 대륙 한가운데 있는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토금전장이었다. 헛소리라 호통을 치며 돌려보낼 상대가 아니었다.
“예. 이번에 저희 토금전장에서 북지성에 항구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금이 한정 없이 들어가는 일이라 저희 토금전장만으로 힘에 부치더군요.”
“….”
무호우는 석은추의 말을 듣고 생각에 빠졌다. 확실히 무호우 자신에게는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저토록 막대한 물류를 움직이는 토금전장에선 당금 천하 정세는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각처에 크고 작은 소요 때문에 길이 끊기거나 위험이 대폭 증가했으니 다른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꺼내든 패가 뱃길인데 혼자 하기 힘들다 함은 자신의 도움을 바라는 것인데….
석은추는 장고에 빠진 무호우 장자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지금 그의 머리 속에선 빠르게 손익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지만 석은추에게 맡겨진 임무는 무호우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다.
“제가 얼마나 도움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무호우의 결정은 처음부터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토금전장의 길이 끊기면 곧 자신의 길이 끊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토금전장의 신용이라면 전 재산을 걸 만했다. 그러나 석은추는 그런 무호우의 말에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말을 꺼냈다.
“사실 그 일은 천자가 직접 나서서 수년을 준비해 시행하여 10년이 지나도 이루기 힘든 일입니다.”
“…?”
“그러나 저희는 그 일을 3년 안에 끝내려 합니다. 항구를 만들고, 배를 건조하며 그 배를 호위할 수군을 창설합니다. 그리고 항구에 각종 물건을 생산하는 공방(工房)을 만들려 합니다.”
무호우는 석은추의 말을 듣고 토금전장이 벌이려는 일이 나라를 세우는 일과 버금가는 일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석은추의 설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저희 토금전장에선 천하칠대도(天下七大都) 오방상제(五方上齊)의 모든 상인 대부들에게 투자를 받고 있습니다. 사실 처음엔 토금전장의 신용으로 자금을 빌리려 했으나 너무도 엄청난 자금이 투입되기 때문에 이자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저희 토금전장을 중심으로 오방상제(五方上齊)의 상인들과 천하 전역에 걸친 대상계(大商契)입니다.”
“….”
계(契)란 예부터 있어온 상호 협조 조직의 한 가지로 여럿이 일정한 목적 아래 돈이나 물품을 추렴하여 운용하거나 금전의 융통을 목적으로하여 일정한 인원으로 구성된 조직을 말했다. 민간에서 흔히 혼인계(婚姻契)나 상포계(喪布契)로 경조사를 하는 데 이용되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토금전장이 추진하는 상인계(商人契)는 그 규모가 진정 어마어마했다. 오방상제(五方上齊)의 모든 상인이 참가한다면 천하의 한다하는 모든 상인들이 참가한다는 말이 되니 그야말로 대상계(大商契)였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대상계는 앞으로도 계속 존속시켜 3년 후엔 전장(錢場)에 맡기는 형식으로 운용할 생각입니다.”
“대단합니다그려…. 그렇다면 제가 나서서 제평의 상인들을 설득하는 것이 일이겠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3년 간 상계에 이름이 있고 그간 현금을 빼지 않는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혜택을 받게 됩니다.”
“혜택이라 하면…?”
“바로 뱃삯을 얼마간 깎아주게 되고 투자한 지분에 따라 최우선적으로 계원(契員)의 물건을 옮기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차후에 자금을 빌리는 것도 편의를 봐주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난세입니다. 저희 토금전장은 천하 전역에 그 힘을 뻗치고 있습니다. 어느 한곳에서 난리가 나 모든 기반을 잃더라도 토금전장에 맡겨놓은 재산이 있다면 다른 지역에 가서 찾으면 됩니다. 게다가 거래를 할 때도 장부 거래가 가능하니 여러모로 편하지요. 그리고 3년 간 묻어두는 자금 외에 다른 자금은 일반 전장에 맡겨둔 것처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존 전장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인데….”
“바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전장들이 투자자가 된다면 그 문제는 해결될 겁니다.”
말로는 쉬웠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토금전장이 제평의 상계는 물론 천하의 상권을 장악하게 되는 셈이 되었다. 무호우 입장에선 어차피 토금전장에 매인 몸이라 마찬가지여서 상관없지만 다른 대상(大商)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무호우의 걱정은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난세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무슨 사단이 벌어져 힘들게 모은 재산을 빼앗길지도 모릅니다. 대상들은 그 기반이 방대해 견딜 수 있지만 중소 상인은 기반이 있는 곳에서 일이 벌어지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 점을 생각해주십시오. 그리고 대상인들은 저의 장주님이 직접 나서서 설득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저희 토금전장에서는 1000만 냥의 자금을 준비해두고 있습니다.”
“천, 1천만 냥!”
무 장자는 석운추의 말에 눈을 크게 치떴다. 1000만 냥이면 제평의 모든 은자와 은 부스러기를 모은다 해도 반이나 채울까 말까 한 자금이었다. 그러나….
“자그마치 황금 100만 관에 달하는 자금을 이번 일을 위해 쓰이게 될 겁니다.”
“화, 황금으로 1000만 냥이었단 말이오?”
“예!”
황금(黃金)은 은(銀)의 100배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지역에 따라 금 한 냥이 은 120냥까지 나가기도 했다. 그렇다면 수군을 만들고 도시를 만드는 일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아니,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자금이 필요한지 궁금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자금인 것이다. 토금전장 제평 총관 석은추의 마지막 말은 무호우의 마음을 굳히게 하기에 충분했다. 자금이 크다면 그만큼 위험 부담이 적어질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