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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덴(아테네. Athens)[도착] 고린도를 빠져나와 인류 역사에 의회 민주정치를 탄생시킨 아덴으로 향했다. 지나는 길에 고린도 운하가 나온다. 본래 약 8㎞길이의 목제궤도가 만들어 작은 배는 실어 나르고 큰 배의 짐은 운반하여 다른 배로 실어 날랐다. 현재는 길이 6.4㎞, 폭 22m, 깊이 8m의 훌륭한 운하가 굴착되었다. 운하의 폭이 좁아 큰배는 예인선에 의해 한때는 겐그리아 만으로 또 한때는 고린도만으로 번갈아 배들이 건너가고 있다. 본래 이 운하는 1세기 네로 황제가 유태인들을 잡아다가 처음 굴착하기 시작했는데 암반을 계속 파 내려가지 못하고 중단한 것을 1881년 프랑스의 회사에 의해 기공되어 1893년 그리스 회사에 의해 완공되었다고 하는데 정말인지는 모르겠다. 그 위로 철교가 하나 누워 있고 지난번 들렸을 때는 차도 1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2개의 다리가 놓아져 있는 것이 보인다. 잠시 차에서 내려 수차례에 걸쳐 운하를 파 내려간 흔적을 둘러보고 아크로폴리스로 향했다. 아덴은 고대 헬라의 가장 저명한 도시국가이며 또 그 중심시역의 명칭으로 현재 그리스의 수도이기도 하다. 도시 국가로서의 고대 아덴의 영역은 중부 희랍의 앗티카 전토를 포함하고, 스팔타와 더불어 예외적으로 광대하였지만, 그래도 총 면적은 약 2,550㎢였다. 쓸모 있는 경지는 약600㎢로서 일반적으로 척박하였으나 과수 재배에는 적합하고, 또 동남단의 라우레이온의 풍부한 은 광산이 아덴을 부강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아덴'이란 명칭은 아마 그 수호신 아테나(Athena)에서 유래한 것이다. 처음 아덴 시가의 중심에 있는 구릉지 아크로폴리스(Acropolis,avkrovpoli")의 언덕에서 신석기 시대의 도기가 출토된 것은 이 지역에 석기시대 말기(BC 3000 이전)에 취락이 있었던 것을 나타내고 있다. 뮤케네 문명이 지배한 청동기 시대 말기에 해당하는 헤라디크 후기(BC 1600-1100경)까지 아크로폴리스에 왕성히 건축되고 거석의 성벽으로 방비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 유적에 의해 증명되었다. 그리스는 전설의 영웅 데세우스(Theseus)의 공적에 의하며 중심 시역 아덴이 귀족의 집중 거주와 정권장악에 의해 도시 국가로서의 통일이 완성되었다. 그후 아덴의 정치가 초기의 왕정에 대신하여 귀족들이 권력을 나누어 독점하는 아르콘 제도가 생겼다. BC 621년 드라콘(Dracon)의 성문법이 공포되어 형벌은 엄하게 다스려지고 현존 체제를 유지하는 아르콘 입장에 섰다. 차차 자유인의 참정권이 확대되고 투표에 의한 의회가 성립되고 주민의 투표에 의하여 선출된 의원은 과도한 권력의 이동을 막게 되었다. 시인이며 입법가인 솔론에 이은 BC 508년의 민주정치의 창시자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에 의해 아테네의 민주정치의 기초가 놓여졌다. BC 5세기 초엽 바사(페르샤)와의 전쟁에서 마라톤 전투(BC 490)와 살라미스해전(BC 480)에서 아덴의 보병과 해군이 바사군 격멸하며 아덴은 스파르타를 앞질러 헬라 제일의 국가가 되었다. 고대 민주 정체의 이상이었던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의 구별을 없애기 위해 나라를 다스리는 장군을 제비로 뽑아 임기 1년으로 중임을 허용하지 않기로 하는가 하면 또 종래의 보수 세력의 아성이었던 아레오파고스 회의의 권한은 박탈되고, 국민회의가 국가의 최고 결의기관, 평의회가 그 의안의 예비 심의기관, 민중재판소가 사법의 최고기관으로 되었다. 이 민중기관이 철학자이며 사상가인 소크라데스에게 독배를 마시게 하는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당시 민중의 힘은 권력자 이상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BC 323) 다음 아덴은 마게도냐의 그늘에서 피하고자 그들과 싸웠으나 다시 패하고 마게도냐 군이 진주하게 되어 자유를 잃었고 그 후에도 마게도냐 및 아가야 동맹의 외부 세력의 틈바구니에 끼어 독립회복의 시도도 실현하지 못하고 경제적인 번영에도 실패했다. 그러나 학예와 철학의 도시로서의 명성은 유지하고 있었다. 로마의 세력이 뻗쳐 올 때에 로마에 반항하였다가 로마의 장군 스라에게 유린되었다. 그러나 그 후 아덴은 로마에게 충실한 태도를 취하므로 로마도 아덴에게 명목상의 독립을 인정하였으나 결국은 2세기 로마의 속주로 로마의 흥망성쇄에 따라 움직이는 나라가 되었다. 4세기 이후 그리스도교 문화를 꽃피우며 동방정교회의 총 본산이 되었다. 15세기 이슬람 오스만 트루크의 침공으로 그 지배 하에 있다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해방되었다. 아덴에 도착하여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아래의 작은 언덕 아래오바고에 올랐다. 언덕은 사람이 하도 올라 반질반질 윤이 나는 돌산으로 과거로부터 이곳은 논객들의 자기주장을 펼치며 논쟁으로 하루를 시작해 논쟁으로 일과를 끝내는 장소였다고 한다. 로마 제정기 시대였던 1세기 사도 바울은 제 2차 전도여행 때 아덴을 방문하여 회당과 아레오바고에서 복음 전도를 시도했다. 신에 대한 논쟁으로 스도이고학파 및 에비구레오파의 철학자들과 논쟁으로 바울의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열변을 토했지만 그들에게는 수많은 신들 중에 또 하나의 잡신으로밖에 들려지지 않았다. 그래도 아레오바고의 관원 디오누시오와 디마리 등 소수의 신자를 얻는 결실을 있긴 했다.(행 17:16-34,살전 3:1). 파르테논 신전 (Parthenon) 아래오바고를 내려와 계단을 빙빙 돌아 아크로폴리스에 올랐다. 이곳에 유네스코 문화유산 1호가 자리하고 있다. 들어가는 현문부터 장엄한 기둥들이 사람들을 기죽게 만드는 데 지금도 한창 복구공사 중이다. 현문을 들어서면 언덕 왼쪽으로 여인들이 무거운 돌을 이고 서있는 조각이 지붕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인 에렉테이온이 일부가 허물어진채 자리하고 있다. 에레크테우스 등 3위의 신을 모신 내실과 전설상의 왕 큐크로푸스의 묘를 한 곳에 수용하기 위하여 BC 421년부터 BC 405년경에 걸쳐서 지어졌다. 동서로 뻗은 몸채의 동쪽 부분이 여신 아테네의 내실이 되고, 그 동쪽 끝에는 6개의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된 현관 복도가 있는 원형을 많이 갖고 있는 건물이다. 그것을 지나 바위 언덕 정상을 차지하고 앉은 아데나 여신의 신전 파르테논 신전이 웅장하게 하늘을 향하여 위용을 뽐내는 세계 문화재 파르테논 신전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리석으로 깎아 지은 건물이다. 지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고안된 진공 공법을 이용한 건물이라는데 지붕과 뒤 오른쪽의 기둥의 일부가 전쟁때 폭격을 맞아 파손되어 있다. 그래도 일부 남아 형체를 잃지 않고 수천 년을 견뎌 온 공들여 다듬은 기둥들이 어리석은(하나님은 다듬지 않은 돌을 원하신다) 과거를 이야기 해주고 있다. BC 479년에 바사(페르시아)인이 파괴한 옛 신전 자리에 아테네인이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에게 바친 신전이다. 도리스식 신전의 극치를 나타내는 걸작으로. 조영은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총감독 하에 설계는 익티노스, 공사는 칼리크라테스의 손으로 진행되어 BC 447년에 기공하여, BC 438년에 완성하였다. 플랜은 정면 8주식주랑으로 내부는 동서로 나뉘어 동쪽 전면에 전실을 두고 3면을 열주로 둘러싼 본전이 있다. 서쪽에는 후실에 이어져 파르테논(처녀의 실)이라 부르는 보물 창고가 있다. 또한 본전 외벽 상부 4면에는 길이 163 m에 이르는 이오니아식 프리즈 장식이 있었는데 지금은 130m가 남아있다. 이 프리즈는 아테나에게 바치는 장대한 파나테나이아의 대제를 부조한 것이며, 인물은 신들을 합쳐 총수 360여명에 이르고 말 219필을 헤아린다. 그 귀중한 잔존부분 가운데 아직도 건축에 남아 있는 일부와 아크로폴리스미술관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조각은 영국의 수집가인 토마스 엘긴경이 수집하여 '엘긴마블스'라는 컬렉션으로 대영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이들 대조각군은 거장 페이디아스가 직접 지도하여 아르카메네스 등 뛰어난 조각가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신전의 안정된 비례와 장중함은 고전시대 그리스정신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이 건물에 베네치아의 무뢰한들이 대포를 쏴대어 건물의 뒤쪽 일부가 지붕에서부터 내려 앉아 있다. 아크로폴리스 남쪽 언덕 밑으로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 신에게 바쳐진 원형 극장 디오니소스 축제 동안 연극이 상연되었던 곳으로 원래 나무와 흙으로 만들어졌던 건물을 리쿠르고스가 석조 건물로 재건축하였으나 지금은 좌석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다. 파르테논 신전 동쪽의 박물관으로 들어섰다. 신전에서 떨어져 나오고 치장되어 있던 돌조각들이 여러 점 전시되어 있지만 실질적인 유물들은 1, 2차 대전을 겪으며 유럽으로 다 실려 가버린 상태다. 파르테논 신전 뒤쪽으로 박물관을 신축할 예정이라는데 아직 묘연한 상태에 가건물처럼 보이는 초라한 건물에 대리석으로 깎여진 흉상과 화려한 조각품들이 과거 파르테논 신전이 얼마나 화려한 모습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 진열품들의 모습이 애처롭게 보인다. 아크로폴리스를 내려와 근대 올림픽의 처음 시작했던 올림픽 경기장으로 향했다. 주차장 둘레에 심겨진 월계수의 싱싱함을 뒤로하고 운동장으로 들어서자 그리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은 경기장 한쪽에 역대 올림픽을 치뤘던 도시의 이름을 차례로 적은 비석에 88년 서울의 이름이 보인다. 경기장을 빠져 나와 호텔로 향하는 길목이 로마 거리에 못하지 않은 고대 건물들이 즐비하다. 대학 건물이나 관공서의 건물은 대리석으로 치장되어 고풍스럽게 지어진 것이 참으로 아름답다. 내일은 다시 터키로 들어가야 한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며 과거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으로 동로마의 전성기와 오스만 트루크 시대의 문화 유적으로 터키 관광의 진수를 보여주는 도시 이스탄블로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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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친구! 아테네의 유적지 잘 보고 갑니다...존사진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