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영남제일루 『嶺南樓』 한바퀴~~
2021. 4. 22. (목)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조선 3대 누각이 있다지요?
위로부터 평양 대동강의 부벽루,
밀양강의 영남루, 진주 남강의 촉석루...
그 중 영남루는 경부선을 지나면서 늘 바라 보이던 곳이어서
꼭 한번 가봐야겠다 싶었는데 이제서야 찾습니다.
점심시간 쯤 밀양에 도착해서 오로지 냉면만 하는
청원분식에 들러 배를 채우고 영남루에서
가장 가깝다는 자작나무카페 근처 주차장에 주차를 합니다.
영남루 마당에 들어서니 왼쪽으로 당장이라도
비상할 듯 처마를 치켜 세우고 있습니다.
영남루 왼쪽이 능파각, 오른쪽 아래 침류각...
바로 영남루(보물 제147호)입니다.
그 오른쪽에 일주문, 구조가 간결하고 시원스럽습니다.
뜻밖에 일주문이 있어 의아했는데
이 영남루는 최초로 고려말(1365년) 밀양 군수 김주가
신라 경덕왕(742년)에 지어졌던 영남사 절터에
세웠다고 하니 이해가 됩니다.
영남루 누각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천진궁의 정문인 만덕문(萬德門)을 들어섭니다.
천진궁, 단군과 역대 왕조를 세운 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입니다.
조선 현종 때인 1665년에 객사인 공진관의 부속건물로 세워졌으나
경종 때부터 공진관을 대신해 전패를 모시고 객사로 활용되었답니다.
영조 때는 불에 타기도 했는데 다시 지어졌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정기를 말살하기위해 위패를 땅에 묻고
헌병대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가슴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이 얹힌 구조로
중앙 맨 윗자리에는 단군 영정과 위패가 있고
동쪽 벽에는 부여, 고구려, 가야, 고려의 시조 위패가,
서쪽 벽에는 신라, 백제, 발해,
조선의 시조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1952년 단군봉안회가 생기면서 각 시조 왕의 위패를 모시고
대덕전이라 했다가, 1957년 이 건물을 크게 수리하면서
이름을 천진궁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합니다.
천진궁을 나와 영남루에 올랐습니다.
아래로 시원스럽게 펼쳐진 낙동강 전경,
기둥에 기대앉아 멍 때리기 딱입니다.
새들이 집을 못 짓게 그물이 쳐있어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 현판,
영남루를 재건축한 밀양 부사 이인재의 장남 이증석이 11살때 쓴 글씨라고
현판 좌측에 "癸卯初夏澣李憎石十一歲書
(계묘초하한이증석십일세서)"라 쓰여 있지요,
풀이 : 1843년 초여름 11세의 이증석이 쓰다.
이쪽 다른 嶺南樓(영남루) 현판,
여기도 7살짜리 이현석이 썼다고합니다.
이 큰 글씨를?
누각 천정 쪽에는 여러 현액이 걸려 있습니다.
江城如畵(강성영화) : 밀양강과 읍성이 한데 어울어져 그림 같다.
湧金樓(용금루) : 높은 절벽 위에 우뚝 솟아있는 아름다운 누각
顯敞觀(현창관) : 영남루에 오르니 넓고 높은 세상이 바라보인다.
각 기둥에 기대어 앉아도 밀양강이 내려다 보입니다.
누각을 내려와 마당에서 올려보니 커다란 세 현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영남루(영남루)가 가운데 있고
嶠南名樓(교남명루 : 문경새재 이남의 이름 높은 누각)
江左䧺府(강좌웅부 : 낙동강 왼쪽의 아름다운 고)가 좌우로 걸려 있습니다.
영남루와 객사였던 침류각을 연결하는 계단형 회랑
월랑(月廊)이 걸려 있습니다.
舞 鳳 寺(무봉사)
일주문에 절 이름이 걸려이쓴 무봉사는
통일신라 혜공왕 9년(773년)에 법조 스님이 영남사에 딸린
암자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무봉사 석조여래좌자상 | 보물 제493호
이 석조여래좌상은 무봉사 대웅전에 있는 불상으로,
영남사 절터에 남아있던 몸체와
근처에서 출토된 광배와 대좌를 거두어 모신 것이다.
네모난 얼굴에 가는 눈과 입, 넓적한 코,
짧은 목 등이 전체적으로 단정한 느낌을 준다.
광배에는 볼록한 두줄을 새겨 머리의 빛인 두광과
몸의 빛인 신광을 구분했고, 안에는 넝쿨과 연꽃,
밖에는 불꽃은 섬세하게 새겼다.
앞면에는 다섯 부처를 작게 새기고,
뒷면에는 약사여래를 도드라지게 조각했는데,
광배 뒷면에 약사여래을 새긴 사례는 매우 드물다.
하나의 돌로 만든 사각형 대좌에는 연꽃무늬를 단순하고 뚜렸하게 새겼다.
단정하고 양감 있게 표현된 신체, 간략한 주름, 꾸밈이 화려하고
복잡해진 광배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통일신라 후기 작품으로 보인다.
- 현지 안내도에서 -
사명대사 동상
사명대사 유정은 조선 중기 고승으로 속명은 응규, 호는 사명당이며 경남 밀양 출신이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김천 직지사로 출가하여 심묵의 제자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과 스승 휴정의 연락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에 되어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하였으며,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의령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1594년(선조 27) 왜장 기요사마의 진중을 네 차례 들어가 휴전협상을 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울산의 도산과 순천 예교에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1604년(선조 37)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
본으로 건너 가 도쿠가과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이듬해 전란 때 잡혀간 조선인 3,000여 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해인사에서 입적하였고,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 묘향산의 수충사에 배향되었다.
이 동상은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의 국난극복 의지와 애민정신을 기리기 위해
밀양 시민의 뜻을 모아 1971. 4. 25. 건립한 것이다.
- 현지 안내도에서 -
영남루 안내도
밀양읍성 | 경남 기념물 제167호
이 성은 조선 성종 때인 1497년에 쌓은 읍성으로 길이 약 1,000m, 높이 1.8m이다.
남쪽으로는 밀양강을 투고 쌓았으며 동복쪽은 산지에, 서남쪽은 평지에 성을 쌓았다.
성안에는 동헌, 객사 등의 관아와 우물 4개, 연못 1개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읍성 중 산당수가 임진왜란 직전에 만들어진 데 비해
밀양읍성은 100년 이상 일찍 만들어 졌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에 나라에서 전국적으로 성곽을 정비할 때
밀먕 부사였던 신잡리란 이가 성 주위를 파고 물을 끌어들여 못으로 만들었다.
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공격으로 무녀졌으나 1606년에 복구하였다.
우리날 읍성은 1910년에 일제가 철거령을 내리면서 헐렸는데
이 성도 1902년 경부선 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호 헐렸다.
이후 석재는 1929년 밀양교 건설 자재로 활용되었고,
6.25 전쟁 때에는 진지 구축용으로 쓰였다고 한다.
현재 성곽은 이동산과 아북산을 잇는 산등성이에 일부 남아 있다.
- 현지 안내도에서 -
박시춘 선생상
박시춘 선생의 애수의 소야곡 노래비
박시춘 선생 생가
영남루를 돌아보기 위해 주차했던 주차장으로...
감사합니다.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