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오리 가족의 수난
김재광
필자의 집 주위에는 호안 도로를 따라 바다가 썰물이 지면 갯벌에서 바다오리들은 먹이 찾아 부지런히 움직인다. 한차례 먹이를 먹고 밀물이 몰려와 바다가 만조가 되면 오리들은 바람에 물결치는 파도에 몸을 싣고 둥둥 떠다니며 유유자적하는 시인들이다.
어떨 때는 기지개를 켜고 객 객 큰소리로 농장에 일하는 농군 나하고 친구 하자 큰 소리로 운
다. 그러면 필자는 그래그래 일 끝나고 친구 하자
보름달이 떠오르고 밀물이 가득하면 물결치는 파도마다 은구슬 옥구슬 만들어 눈이 부시고
보름달의 달빛은 바닷물에 은빛으로 빛난다.
겨울이오면 왔다가 봄이 되면 떠나는 계절 오리 때가 아니라 우리 집 부근에 사는 오리 때는
철새가 아니고 아주 터를 잡아 사는 가족단위의 오리들이다. 5~6마리씩 3~4마리씩 무리를 지어
사람이 많이 왕래하지 않은 아침저녁이면 호안 도로 가까이 와서 먹이를 찾아다닌다.
항상 말없는 벗이였던 오리가 요즈음은 전혀 오지 않는다.
며칠 전 봉고차가 우리 집 부근에 멈추더니 문을 열고 펑하는 소리와 함께 오리한 마리가 나둥그러져 물 위에서 파닥거린다. 이 사람 들은 한 마리 잡았다 하며 달려가 주어오는 것이다.
저는 화가 나서 이런 법이 어디 있소 당신들처럼 오리를 해치는 사람들이라면 오리들은 이 근처에 오지도 않고 저 넓은 갯벌에 인간이 멀리 있는 곳에 놀지 가까이 오지 않을 것이요
다시는 이 부근에서 사냥해서는 안대요 하고 다짐을 두었다 그 오리 가족들은 얼마나 놀라고 슬퍼했을까 어미 오리 아니면 새끼 잃은 불행한 오리가족이 자꾸만 눈앞을 스쳐 간다
지난가을에는 인부를 사서 과수원에 일을 시켜놓고 간식거리를 사가지고 집에 오니 과수원 밑에 호안 도로에 승용차 2대가 서 있고 포수들이 엽총을 들고 과수원 쪽으로 총을 겨누고 있다
깜짝 놀라 이게 무슨 짓이요 과수원 나무들이 크게 자라 사람이 잘 보이지 않은데 당 작에 나가시오. 이 사람들은 기분이 안 좋은지 과수원 옆산으로 엽총을 난사한다
집을 지키는 개는 오줌을 질금질금 싸며 소들은 귀를 세우고 아주 불안하게 안절부절못한다
저는 사냥꾼들에게 소리쳤다. 한우들이 임신하여 있는데 낙태할 위험이 크다 빨리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자 이 사람들은 달갑지 않은 인상으로 옆 산으로 가고 있다
사냥 허가가있다 하드래도 인가나 축사가 가까운 곳에서는 사냥을 못 하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방송에 실수로 사냥총에 맞아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럴 수가 있나? 한다 사냥 허가 할 때는 기관에서 기본적인 교육을 시켜서 허가를 주어야 할 것이다.
---------
2) 친화적인 염소
김재광
옛날부터 염소를 키워봤지만 이렇게 사람과 친화적인 동물인지는 미처 몰랐었다. 막내 누나 한 분이 동생 염소 사다가 몸보신 하기는 어렵고 새끼염소 한 마리 줄 테니 과수원 길에 매 두고 키우라고 했다.
그래서 키운 것이 5~6년 동안 자꾸 새끼가 불어나서 키우는 과정에 한 번이라도 옮겨 매어주려고 끌고 가면 따라오다가도 반대 길로 쏜살같이 달리는가 하면 염소고삐 잡은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옷을 망쳐놓고 발목을 고삐로 감아 사람 엎어트리는가 하는 등 하는 것마다 놀부 심청 같아 필자는 마음에 안 들어 애당초 염소는 아내에게 먹이 주고 옮겨 매라고 하였다
방정맞은 염소는 나는 관계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2년 전 숫염소가 없어 동서네 집에서 숫염소 새끼를 가져와 1년을 기르니 큰 염소가 되었다. 요사이 이 염소와 교감을 나누면서 염소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외양간에서 먹이를 줄 때면 곧장 따라와서 사료 먹고 졸졸 따라다니면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과수원에서 일하다 잠깐 쉴 때면 숫염소가 찾아온다. 또 먹이 줄까 하고 찾아온 줄만 알았더니 아니 웬일인가 조심조심 가까이 다가오더니 나의 동정을 살핀다. 요리보고 저리 보고 뿔을 들어 살짝살짝 건드려 오더니 나는 가만히 놔두고 웃고만 있었더니 나의 옷을 가만가만 씹어보더니 나중에는 옷을 물고 개 모양으로 잡아도 당겨보고 결국은 나의 귀를 살짝 물어본다.
나는 깜짝 놀라 밀어냈더니 아이 응석 부리듯 더 가까이 와서 몸을 비벼댄다. 그러더니 앞발 들어 저이끼리 싸움할 때처럼 뿔을 세워 받는가 했더니 받지 않고 두세 차례 장난하자는 표현인가 하여 나도 머리를 들어 가만히 뿔에다 갔다 댔더니 좋아서 계속 장난 하고자 한다.
참 웃기는 놈이다. 나는 참으로 요사이 과수원 일 하다 염소가 찾아오면 으레 몇 분씩 장난을 친다. 염소와 몇 분씩 장난하고 나면 마음이 즐거워진다. 미물인 짐승도 이러할진대 우리 사회도 한 사람의 잘못된 점만 탓하지 말고 장점을 칭찬하여 잘못된 점을 반성할 수 있는 계기를 주고 사람마다 장점을 살려 서로 쓰러 주고 안아주는 사회가 된다면 아름답고 즐거운 사회가 될 것이다.
------
3) 어머니
김재광
사십 년 전 우리 완도는 김 생산으로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일본 수출 길이 막히고 서해안에 김생산이 개발 대면서 완도의 김 전성기는 끝났습니다 내가 사는 마을은 어장 자리도 협소하고 자리가 나빠 바다 소득이 시원치 안했습니다. 필자는 농토도 가진 것이 없어 어떻게 살가 하다가 과수원을 해 보겠다는 결심으로 산을 매입하여 유자 나무 단감나무 사과나무를 심어 시험 재배하면서 집에서 1500m나 떨어져 날마다 관리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어머니에게 과수원 부근으로 이사하여 살자고 설득했으나 어머님은 다 늙어 동무도 없는 곳에 어떻게 산다냐하며 반대했습니다. 저는 과수 사이에 농작물도 심고 축산도 하여 소득을 올릴 수 있다고 설득을 계속하여 어렵게 어머님 모시고 과수원 곁에 집을 짓고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님은 이웃도 친구도 없는 곳에서 노년을 아들 때문에 무척이나 외롭게 살다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 98년 봄이였습니다. 면 소재지에 볼일이 있어 트럭을 타고 집에 오는 중에 이웃 동네 할아버지 한 분이 손을 들어 바쁜 중에 태웠다. 바쁜 중이었지만 어르신 이웃 동네까지 태워다 드리는데 어르신 하신 말씀이 자네 모친 잘 계신가? 아직도 건강하신가? 자네는 잘 될 것이네! 라고 해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열세 살 먹었을 때 동네 길에서 쓰러졌는데 자네 모친께서 길을 지나가다 보시고 일으켜 세워 두붓 집에 가서 따끈한 순두부 한 그릇을 얻어 먹이고 매일 아침마다 와서 1개월을 먹으란다.
그리하여 매일 두붓 집에 찾아가 순두부 한 그릇씩을 먹어서인지 내 어지런 병이 나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네 모친께서 콩 한 말을 두붓 집에 갔다가 주면서 "저 아이는 영양실조 같으니 매일 아침 오면 순두부 한 그릇씩 주시오" 하셨다더군. 친척도 아닌 나를 그렇게 생각해준 자네 모친 마음씨를 항상 마음에 두고 지냈네. 칠순이 다된 어르신이 말씀하시며, 자네 어머니의 은덕을 자네가 받을 것이라고 하시였습니다.
필자는 이 얘기를 듣고 인간이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의식 주라고 들었습니다. 인간은 먹지 못하면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시절에는 먹고사는 곡식이 중요했고 가난한 사람이 많아 훈훈한 인정이 절실한 시대인데 이 할아버지가 60년을 지나도록 잊지 않고 자식인 나에게 이런 말을 전하여 줄까 다시 곰곰이 생각하게 하였다. 우리나라는 부자나라가 되어 외국에 가는 것을 이웃집 가는 것 처럼 하지만 같은 단군의자손인 이북 동포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니 아주딱한 일입니다.
오래된 얘기지만 어머님은 이웃과 친척을 많이 배려하면서 사신 것으로 알고 있다. 이웃이나 친척이 병자가 생기면 쌀로 식혜를 만들어 병자를 많이 위문하신 것을 보았다 집이 가난 하여 쌀로 식혜를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지금은 쌀값도 저렴하지만, 그때는 쌀값도 비싼데 쌀농사도 안 지은 집에서 어디서 쌀이 날까 하고 지켜봤더니 반말 정도 담을 수 있는 주둥이가 아주 좁은 토기에 담아 보관했다가 쌀이 꼭 필요할 때 내어다 식혜를 만들어 병자를 위문 했던 것이다 그때는 배고픈 시절이라 쌀을 내어다 먹을까 봐 손이 안 들어간 토기에 담아놓고 사용하신 것 같다.
친척이나 동네에 초상이 나면 상주 옷과 상가를 도와 장사지내도록 일한다 제가 알고 보니 옛날 삼베로 만든 상주 옷은 누구나 만든 것이 아니라 옛날 법칙에 따라 상주 옷을 만드는데 동네에 상주 옷을 만드는 사람이 별로 없어 수고를 아끼지 안 했던 것이다. 1980도이전에는 자녀 결혼식을 하면 신랑 옷이나 신부 옷은 솜씨가 있는사람이 한복 옷을 만들어 일생에 한 번밖에 없는 결혼식에 입어야 했기에 결혼하는 날짜 만 받으면 으레 어머님이 도맡아 하시였다.
며칠을 밤세워 하여도 일당을 받는 것이 아니다. 결혼식 끝나면 결혼 당사자 어머님이 음식 좀 가지고 와서 답례 인사를 하시는 시대였다.
한번은 어머님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가난한 사람하고 친하고 부자하고는 친하지 안 나요. 부자하고 친하면 덕도 보고 할 것인데요 하자 어머니는 너의 외갓집도 옛날에는 진사 집 후손으로 부자로 살고 너의 집도 동네에서 부자였다. 너의 할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가 15살에 결혼하여 철이 없어 재산을 모두 없애고 너의 형님의 전사로 마음과 몸이 병들어 생활이 궁핍하여 가진 것이 없다 보니 가난한 사람의 심정을 알게 되었다.
내가 식량이나 돈이 없어 못 나누어 주어도 간장 된장 김치는 많이 담아 나누어 먹는 것이다. 우리 지역은 식량이 적으면 해산물을 채취하여 섞어 먹으면 식량을 많이 늘여 먹을 수 있어도 간장 된장이 없으면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가 없다. 그래서 간장 된장을 나누어 먹는 것이다. 하시였습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고향떠나 서울에 사는 사람이 모친상에 왔길래 공장일도 바쁜데 먼 곳를 왔느냐 했더니 자기 어머님이 아무리 바빠도 아무개 모친상이니 일 제백사 하고 꼭 내려 오너라 하면서 흉년에 식량이 떨어져 온식구가 굶어 죽게 되였는데 그집 모친께서 식량을 나누어주어 어려운고비를 넘겼다 하여 오게 되였다는 이얘기 들었으며 어머니 살어 생전 표창해야 한다며 동네에서 공로 표창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외가 조카들에게도 인기가 많았습니다. 외가집사람들은 명절이나 객지에서 있다가 고향에 오면 으레 어머님을 찾아보고 덕담을 듣고 갔으며 고향떠나 전북 익산에 사는 외사촌들은 자기 어머니 여행이나 구경 시켜줄 일이 생기면 어미님을 모셔가 외숙모님들과 똑같이 구경을 시켜주고 오래도록 계시다 오게 하였다. 어머님이 97세에 돌아가셨는데 살아계실 때까지 자꾸 찾아와 위문하시고 가시곤하였습니다. 지금 생각 하여보니 외숙모와 어머님은 시누올케 사인데 어떻게 이렇게 사이가 좋았을까 다시 한 번 생각 해볼 일입니다. 지금도 전북 익산에 외사촌 형님이 살고 계신 데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필자는 세상을 살면서 알게 모르게 어머님의 무언 교육에 실천하려고 노력했으나 잘 안 되었고 필자를 크게 도우려는 사람도 여러 번 있었으나 제가 그릇이 작아 받아드리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나의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몰라도 자연과 더불어 글을 집필하면서 살고자 합니다
-----------
4)
민족의 정기
김재광
우리나라는 수 천 년 동안 외세의 침략을 받아 많은 수난으로 백성들이 고통으로 살았는데 반세기 전 이념의 갈등으로 아니 해야 할 동족 상쟁으로 수백만이 죽고 수천만이 이산 가족으로 반세기 동안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고 사는 민족이 되였습니다. 동족 상쟁의 비극도 강대국들의 전쟁 노름에 우리 민족은 춤을 추는 꼴이 아니었는가 합니다. 잔혹한 일제 치하의 식민지가 끝나기 무섭게 한반도가 두 동강나 남북이 대치하는 비극이 상존 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은 이제는 다시 한 번 반성해보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조선 말기의 관료의 부패가 동학 난을 일으켜 일제의 승냥이를 불러 드려 동학군을 우금치에서 일본군의 조총으로 다 죽이고 일본놈들은 물러나지 않고 낭인들이 저질렀다는 핑계로 우리의 국모를 처참하게 살해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청일전쟁 노일전쟁을 일으켜 한반도를 차지하였던 사실을 우리 민족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민족의 수난의 시대에 훌륭한 인물도 필요하지만 나라가 어려울 때 살신성인하는 자세가 우리 국민 가슴속에 새겨야 앞으로 남북통일도 이루고 조국을 위해 내 한 몸 바친 영령들에게 보답이 될 것입니다.
육십 년이 지난 기억 속의 일입니다 아마4-5세가 되었던 필자가 어린아이였을 때 당시 군대에 간 형님이 휴가에 왔는데 형님은 저를 무척 사랑하여 귀여워 해주고 저는 하나밖에 없는 형님이어서 형님이 좋아 간대 마다 따라다닌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때 형님은 전쟁 중에 다리에 상처를 입어 완치가 되어 잠깐 휴가를 얻어 집에 들렸던 것입니다 형님의 철모를 쓰고 재롱을 부렸던 일이 기억이 생생합니다.
나중에 누나에게 들은 이 얘기지만 내가 전선에 나가면 살아 돌아올 확신이 없다 너희가 부모님 모시고 동생 잘 키우라 하였던 형님의 말씀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머릿속에 감돌고 있습니다. 그뒤 형님은 강원도 전선에서 영원이 돌아오지 못할 세상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때는 전쟁의 막바지에 달해 전쟁이 치열했습니다. 당시 내 기억에도 탈영병이 많아 헌병들이 탈영병 잡으려 온 것을 간간이 보았습니다.
후에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동료에게 들은 이얘기지만 부하들을 보내고 최전방 고지에 안 갔으면 전사까지는 안 했다는 전우들의 얘기입니다.
아버지는 전사통지서를 받고 어떻게 살거나 하시며 저를 부둥켜안고 우시던 것이 어슴푸레 기억이 납니다. 형님의 전사로 인하여 아버지는 몸과 마음이 병들어 돌아가셨고 저는 현실을 비관하면서 아픈 상처를 안고 살아야만 했습나다. 전쟁은 끝나지만 저는어려운 가정사로 하고싶었던 학업을 중지했던 시절 목포에서 온 선생님은 자기 박봉을 덜어 저를 공부시켜준다고 두번이나 찾아온 성의도 받지 못했던 선생님의 호의에 늦게나마 감사드립니다.
저의가족은 유가족이기에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으며 노모를 모시고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데 당시 원호 처에서 농토 대부를 받아 논을 사들여 늙으신 어머님에게 쌀밥을 드시게 되었습니다. 어느 때 묻지 않은 공무원의 도움으로 농지구입 대부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간간이 민족의 독립과 겨레의 수호를 위해 숨져간 후손들이 어렵게 살고 있다는 방송을 듣게 되고 오히려 일제에 아부하고 살던 사람들이 고위직을 계승하고 민족의 수난을 외면했던 사람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역사적인 사실에 당혹하게 합니다.
우리는 역사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과 재산을 다 바치고 자손과 일가가 수난을 당한 유가족들이 힘들게 산대서야 그 누가 나라 애착과 사랑의 마음으로 지켜 나가갔습니까? 어떠한 일이 있어도 민족의 정기를 바로 잡아 후손들에게 본보기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들국화
소슬바람에 찬 서리 내리면 가을을
줍는 농부에 발걸음이 바빠지고
가을 이삭 줍는 어머님의 굽은 등이
서럽다
들국화 피면 온다 하던 형님은 서리가
하얗게 내려도 뒷산에 들국화 50년
피고 저도 오지 아니했습니다
강원도 이름 모를 산골짜기에
들국화에 반 했나 봅니다
전우를 놔두고 혼자 오기 어려워
오랜 세월을 못완나 봅니다
귀여운 누이동생들이 보고
싶지도 아니했나 봅니다
올해도 형님은 소식이 없고
뒷산에 두견새는 해마다
숙국 숙국 슬피 웁니다
검은 머리 파 뿌리 대도록
시련의 세월은 들국화
송이송이 머물고
청초한 그 향기는 끈질긴
목숨 붙들고 반만년 피고 지네
--------
5) 미완성농원
김재광
청해진 맑고 푸른 물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 꺼리는 곳 한반도 남단의 청정해역에 둘러싸인 작은 섬 고금도에 본 농원은 400년 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외적을 무찌르고자 중국 진린 장군과 노량 대 해전을 앞두고 6개월간 병사들의 훈련과 진을 쳐 조련했던 진도 강이 내려다보이는 매봉산 언덕에 아무도 찾아주는 이 없는 불모지에서 땀과 눈물을 묻고 청춘의 긴 세월을 보내며 꿈을 심고 희망을 가꾸어 온 지 30년 남짓한 지난날 들을 추억 속에 떠올립니다.
하늘만 바라보고 살면서도 때로는 하늘을 원망하고 세상을 탓하고 살아온 날들이 더 많았습니다. 지겹도록 끈질기게 달라붙은 가난이 싫어서 도망치려다 붙잡히고 그 가난을 이기려고 싸웠던 젊은 날들의 쓰라린 기억들 가을 한 철 흐드러진 들국화와 살고 엄동 설한에 정열의 화신인 양 피여난 동백꽃을 벗 삼아 위로를 받으며 살아온 날들 땀을 닦으며 내려다본 곳에 늘 그렇게 자리하던 시원스런 바다 나의 최고의 위안이었고 벗이었던 그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매봉산 가파른 산자락 내청춘의 모든 것을 묻고 땀과 눈물로 개간하면서 밤을 지새운 고통의 시간 들 늦가을 찬 서리 맞고 피어난 들국화 한 무더기 그들처럼 아무 자리에서나 의연히 살고자 다짐했지만 역시 힘들고 고난에 찬 날들이었습니다. 세상 모르고 겁 없이 뜻을 세우고 살아온 반평생 그동안 가슴속에 새겨둔 기억들을 더듬어 어눌한 글솜씨로 써보려 했지만, 그 역시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일 뿐 메마른 가슴을 적셔주는 단비는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망설이다 주저하다 잡은 편 끝에 부끄럼만이 고개를 내밀 줄 몰랐습니다 그래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던 하늘은 저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결 국 이제 새로운 시작이라는 걸 깨달은 저는 부끄럼도 잊어버린 채 넋두리 같은 푸념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명예와 지식을 얻고 행복을 누리며 서로 따듯한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서로 만남에서 시작되였습니다 필자는 어려운 고난과 역경 속에서 은사님의 격려로 투지와 인내를 배우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한 사람의 설득과 사랑의 가르침으로 나의 인생을 큰 잘못 없이 살아왔습니다. 또한 친구와 선후배님들의 책 선물로 다양한 지식과 힘을 길었습니다.
필자는 힘든 개척 생활을 할 때 친구 한 분이 마스시타 고노스케라는 책 한 권을 보내 주었습니다.
남의 작은 상점의 종업원에서 시작하여 세계 굴지의 대회사로 키워놓은 투지를 보고 많은 희망을 얻었으며 한번은 처남으로부터 동의보감을 보내와 시대의 어려움 속에서 서자로 태어나 역경을 이기고 의술을 깨우쳐 인술을 펴는 고매한 정신을 배우고 많은 사람으로 부터 다수의 책의 선물을 받아 희망을 잃지 않고 역경을 이겨내는 힘이 되었으며 삶과 꿈의 책자를 연중 보내주는 사람이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필자는 불모지 산을 개척하여 미래의 꿈을 가꾸는 과정에서 어려운 때는 인간이기에 마음이 약해지는 때도 있었지 만 희망에 부푼 미래의 꿈을 생각할 때 힘이 생기고 그 힘은 나의 꿈을 많이 진척시켰습니다
아직은 미완성인 농원을 언제쯤 성공할지 알 수 없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산다는 것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84년 한우파동으로 돈이 없어 수술을 못 해 자식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냈던 쓰라린 상처가 가슴에 멍들었지만 죽을 수 있는 용기만 있으면 무엇을 못하느냐고 다짐하고 인간이 하는 일에 불가능은 없다는 진리를 믿고 계속 노력 하고 있습니다
불모지 산이 옥토가 되고 과일이 나무마다 주렁주렁 열리고 산이 관상 림으로 숲이 되어 새들이 찾아와 둥지를 틀고 노래하며 사람들이 찾아와 꿈을 심는 꽃피는 동산으로 만들고자 오랜 세월을 보냈습니다. 앞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꿈과 혼이 살아 숨 쉬는 농원으로 길이 남기를 원 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과 같이 진실한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때가 올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 면은 인접해있는 약산면과 연육교가 완성 된 지 오래이며 육지 마량 간 고금대교도 교통 되어 육지가 되고 현재 고금도와 신지면을 연결하는 장보고 대교도 준공을 내년이면 교통 되어 대교 3개가 연육 된 곳은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 고금도일 것입니다
이러한 앞날을 바라보고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신념을 버리지 않고 농원을 개척하며 좋은 날은 바다에 나가 미역과 김을 따서 생계를 유지하고 비바람이 부는 궂은 날에는 농원을 개척하며 유실수를 심을 때 키위는 망 다래 심었다 유자는 20년 30년 되어야 수확한다면서 저런 고생을 하니 차라리 도회지가서 막노동 하는 것이 좋을 거라며 비웃는 사람들도 있고 격려하는 사람은 고생 그만하고 팔아서 편이 살라고 했습니다
물론 사들이려는 사람도 있었으나 피땀으로 일군 농원을 돈으로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필자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좌절하지 않고 살아온 것입니다
경사도가 낮은 일부 땅은 유실수를 심고 경사진 위쪽은 관상수를 심어 후손들에게 희망과 꿈을 주는 꽃피는 농원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필자의 생각은 우리나라 곳곳에 지역 특성에 맞는 농원이 많이 만들어져 도시민과 농민이 한마음으로 외국 농산물수입개방으로부터 이겨내고 애국애족하는 국민이 되어 오천 년 지켜온 이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30년의 땀과 눈물은 불모지 땅을 농원으로 만들었지만 제가 바라는 남은 꿈은 실현이 될지 평생의 꿈으로 남을지 미지수입니다. 청춘은 다 지나가고 이제는 늙어가지만 내가 못다 한 일은 후손이나 뜻있는 사람이 뒤를 이어 불모지 땅도 가꾸기에 따라 영원한 꿈동산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아무리 세태가 변하여 세계화된다 해도 생명의 창고인 우리 농어촌은 어떠한 시련에도 살아남아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를 지키고 먹거리만큼은 우리 농축산물로 향토식 하는 관습을 물려주어 우리 식량은 우리가 지키는 국민이 되야 할 것입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스피노자의 명언을 가슴에 새기며 나의 생이 다 할 때까지 열심히 살고자 합니다.
---------
당선소감
김재광
필자는 어려운 과정에서 불모지 산을 개척하면서 어렵고 힘들 때 인생의 고비마다 낙서처럼 집필하였던 글을 정리하다 보니 시가 되고 수필이 되어 책이 되었으며 농원에서 생산되는 과일은 친환경으로 재배하면서 글을 쓰다 보니 실천 문학이 되어 춘추 문단에까지 등단하게 되어 본인의 기쁨과 더불어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어머님이 살아생전 이웃과 친인척과의 나눔의 정을 보고 들었지만 깊이 느끼지는 못하였습니다. 20년 전 우연이 이웃 동네 할아버지를 만나 할아버지 집에 모셔다드리는 과정에서 하신 말씀이 어머님의 은덕으로 자네는 잘살 것이라고 하여 무슨 말이요 수필에 콩 한 말의 의미를 조금 한 정성과 마음을 베푸는 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처럼 우리 인생도 인심도 흐르는 세월에 자꾸만 달라지는 세태이지만 한 줄의 글은 한 사람의 꿈과 희망을 불굴의 용기와 성공의 길을 열어주는 좋은 의리의 친구입니다. 의리를 배신하지 않고 영원한 친구로 산다면 좋은 글도 집필할 수 있는 성공하는 삶을 살지 않을까 합니다.
한 편의 시나 한 편의 수필이 그 시대의 올바른 평가나 진실성이 있어 사회 환경이나 우리 인생에 도움이 된다면 가치가 있는 글로 남을 것입니다. 자기의 재주와 진실을 다하여 집필하지만, 평가는 글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읽고 부족하면 채워 주고 넘치면 나누어 담는 독자들의 지도 편달을 바랍니다.
주제넘게 실천 문학을 한다고 마음만 앞세워 제대로 글도 쓰지도 못하는 필자를 문단에 등단하게 하여준 춘추 문학 관계자에게 감사드리며 앞으로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청해 농원 김재광
약력
한국 유기농업 중앙회 이사. 한국 유기농업 전남지부 부회장
전남 농협 중앙회 새 농민 수상자회 이사. 완도군 새 농민 수상자회 회장
완도군 고금 한국유기농업 지회 회장
국무총리 표창. 농협중앙회 새 농민 본상.
한국 유기농업 전국대회 표창 .
완도군 군민의 상. 군민 의 공로패 외 10여 회 표창.
완도군 신지식인 상
완도 문인협회 회원
저서 : 시집 들국화 피는 언덕. 그대가 바라는 행복은.
수필집 청해진 맑은 물에 사랑과 꿈을 실어
전문서적 유기농업 유자 재배 신기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