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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주
[李共珠, 1896~1991]
주요약력
본명은 경자(慶子). 법호는 구타원(九陀圓). 법훈은 종사. 필명은 청하(淸河). 1896년 12월에 서울 대조동 112통 8호에서 부친 유태(裕泰)와 모친 민자연화(閔自然華)의 3남 3녀 중 차녀로 출생. 원불교 초창기의 대표적인 여성교역자의 한 사람. 대한제국의 황실에서 시독(侍讀)을 하는 등의 신구지식을 갖추었다. 1924년(원기9) 서울에서 소태산대종사를 만나 제자가 된 후 법문수필 등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여 법낭(法囊)이라는 별호를 받았다.
교서 발간 등으로 초창기 교단의 호법주, 경제적 기초 확립과 기관ㆍ시설의 창립ㆍ후원 등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공덕주였다. 전무출신을 서원하여 여자수위단원으로 제1대 성업봉찬회 회장, 감찰원장 등 교단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문화교화 등에 기여했다. 만년의 91세 때인 1986년(원기71)에는 필생사업으로 진행해 오던 《원불교 제1대 창립유공인역사》(전7권)를 편찬하여 자비로 출판했다. 1991년(원기76) 대종사탄생100주년까지 교단발전사의 현장을 지킨 인물로, 일생을 자료의 수집ㆍ보관, 사료정리에 공을 들여 교단사와 관련한 귀중한 유품을 다수 남겼다.
생애와 활동
어려서부터 자질이 총명예지(聰明叡智)했고 강의고결(剛毅高潔)한 기상을 가졌다. 1902년에 부친으로부터 한글을 배워 깨쳤고, 1907년에 한국여성 최초의 미국유학생인 허난사(許蘭史)에게 한문ㆍ산술ㆍ초급영어를 배우고, 이듬해에 이화학당 초등과에 입학했다가, 동덕여학교로 전학했다. 1909년에서 1913년까지 대한제국 황실의 윤(尹)황후의 시독으로 창덕궁에 입궐하여 《논어》ㆍ《심상소학독본》 등을 공부했다. 1913년부터 1916년까지 경성여자보통학교(현 경기여고) 본과를 수료했다.
1916년 박장성(朴將星)과 결혼하여 이듬해에 장남 남기(南基, 법명 昌基)를 낳고, 1920년에 차남 동기(東基)를 낳았으나, 1922년에 부군이 별세했다. 1924년(원기9) 교단 창립총회를 마친 다음 익산총부 건설을 시작하면서 서울교화가 개척되었는데, 10월 26일 상경한 소태산을 이공주는 모친인 민자연화ㆍ언니 이성각ㆍ조카 김영신과 함께 창신동에서 배알하고, 박공명선(朴孔明善)의 연원으로 입교했다. 1927년(원기12) 5월에 교단최초의 수양교과서 《수양연구요론》(소태산 술)을 편집ㆍ출판했으며, 영산 방언공사에 따른 부채를 탕감했다.
이듬해 창립 제1대 제1회 총회에서 공부계 특신부, 사업계 정2등의 유공인에 해당했다. 1930년(원기15) 4월 민자연화의 추천으로 출가하여 서울교당 교무로 발령받고, 같은 달 26일 임시 여자수위단 조직과 함께 중앙단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5월 1일부터 9일까지 이동진화 등과 함께 소태산을 배종하여 금강산을 탐승하고, ‘세계적 명산 금강산 탐승기’(《월말통신》 제32호)를 발표하여 당시 수필한 법문 등을 전했다. 1932년(원기17) 5월, 사재를 털어 서울교당 부지를 마련하여 신축하고, 7월 장남 박창기를 데리고 중앙총부에 와서 전무출신 시켰다.
1934년(원기19) 연구ㆍ통신부장에 임명되어 기관지 《회보》 편집을 담당하여 전후 7년간 진력했다. 1940년(원기25) 송도성ㆍ서대원 등과 함께 《정전》 편수위원이 되었고, 이듬해 교무부장에 임명되었다.
1943년(원기28) 5월 16일 소태산의 시질(示疾)에서 6월 1일 열반 및 상ㆍ장례에 이르기까지 가까이서 보필했다. 1945년(원기30)에 총부교감에 임명되었고, ‘구타원’ 법호를 받았다. 1950년(원기35) 제1대 성업봉찬회장에 임명되어 1953년(원기38)에 대회를 마치도록까지 각종사업을 전개했다. 이해에 감찰원장에 임명되었다.
1957년(원기42)에 대봉도 법훈장을 수증하고, 1962년(원기47)에 서울사무소장에 임명되었다. 1965년(원기51)에 감찰원장, 1971년(원기56)에 서울수도원장에 임명되었다.
1986년(원기71) 12월 교단창립 제2대 및 대종사탄생100주년 성업봉찬회의 결성과 함께 회장에 임명되었고, 《원불교 제1대 창립유공인역사》 7권을 자비로 편집ㆍ출간했다. 1988년(원기73)에 종사 법훈장을 수증하고, 만년에 총부수도원과 서울수도원을 내왕하면서 서울보화당한의원 등의 경영을 이끌다가 1991년(원기76) 1월 2일에 열반했다. 세수는 96세, 법랍은 61년으로, 공부성적은 종사위, 사업성적 정특등, 원성적 정특등이었다.
업적
이공주는 학교교육이 처음 시행되던 근대의 격변기에 신구지식과 함께 지도력을 겸비한 여성으로서 소태산을 배알하고 돈독한 신심을 바쳤다.
특히 갖추어진 재력가로서 공심과 공부심을 발휘함으로써 원불교의 창립기에 있어서 눈부신 활동을 전개했다. 출가와 더불어 교단요직에 임하여 100세에 가까운 생애를 살면서 교단발전의 현장을 지킨 인물이다. 따라서 타고난 총명함과 성실성, 그리고 갖추어진 경제력에 신심ㆍ공심ㆍ공부심을 갖추어 공부계와 사업계를 가리지 않고 교단의 대소사에 그의 역할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하겠지만, 두드러진 업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소태산의 법문수필이다. 그의 법문수필은 1927년(원기12) 5월, 기관지인 《월말통신》 창간호의 ‘약자로서 강자되는 법문’이 비롯이다. 이는 오늘의 ‘강자약자 진화상 요법’이며, 소태산의 대각 후에 행한 ‘최초법어’ 중의 하나로 《정전》에 수록되었다. 이후 그는 소태산이 준 별호 ‘법낭’에 걸맞게 많은 법문을 듣고 기록하고 발표했다. ‘좌선에 대한 법문’(《회보》 제15호), ‘돈 버는 방식’(동18), ‘사은사요의 필요성’(동26) 등은 교리체계로 《정전》에 편성되고, ‘나의 가르침은 인도상 요법이 주체이다’(동24), ‘나는 용심법을 가르치노라’(동33) 등은 교리의 활용법으로 《대종경》에 채록되었다.
② 경전ㆍ교서 및 기관지 등 서적의 발간이다. 1927년의 《수양연구요론》과 1931년(원기16)의 《보경 육대요령》 발간을 주도한 것이 경전ㆍ교서라면, 1931년의 《통치조단규약》과 1933년(원기18)의 《회보》는 법전ㆍ기관지의 발간이다. 1940년(원기25) 《정전》 편수위원으로 참여한 것처럼, 이후 교서의 편정과 발간에 직접 참여하며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③ 초창기 교단의 경제적 토대마련과 기관ㆍ시설의 건립ㆍ후원이다. 1919년(원기4)에 이룬 영산방언답에 소출이 충분치 않음에 따라 누적된 부채를 1928년(원기13)의 1회 결산 전에 탕감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의 기관ㆍ교당ㆍ시설 등에 그의 손이 두루 미쳤다. 수도원ㆍ중앙훈련원 등의 중앙총부 기관ㆍ시설, 서울교당ㆍ서울회관ㆍ서울수도원ㆍ서울보화당 등의 서울 시관ㆍ시설, 삼동훈련원ㆍ제주국제훈련원ㆍ소남훈련원 등의 훈련기관에 대해 설립ㆍ운영ㆍ재정지원 등의 여러 방법으로 참여하고 후원한 것이 그 예이다.
④ 교단의 제도 정착기에 있어서 교단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지도력을 발휘한 점이다. 초창기 여성교역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수위단원ㆍ성업봉찬회장ㆍ감찰원장ㆍ수도원장 등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인재를 육성하고, 교단의 역사자료를 수집ㆍ정리하며 지도자의 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저술과 사상
이공주는 글을 해독한 이후 일생을 기록과 함께 했다. 특히 1909년 5월 14일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는 일생 동안 계속된 데다 고스란히 남아 있어 자신의 생애는 물론 교단사의 정리에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다.
그의 저술은 소태산의 법문수필에서부터 시ㆍ논설ㆍ역사기록 등 다양하며 활자화가 이루어진 것은 물론 수고본(手稿本)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남아 있다.
저술은 교단적인 역사물에 위의 《원불교 제일대 창립유공인역사》 7권(1986)ㆍ《원불교연혁》(1953) 등이 있고, 자신의 문집에 《한 마음 한 길로》ㆍ《금강산의 주인》ㆍ《세계가 함께 보는 구슬》(1984), 요절한 장남 박창기(山朴昌基, 1917~1950)의 문집인 《묵산정사문집》(1985)이 있다.
구타원종사기념사업회에서는 일기장과 교단사 관련자료를 묶어 《구타원이공주종사 소장 원불교교단사 자료집성(九陀圓李共珠宗師所藏圓佛敎敎團史資料集成)》 전8권(2005)을 영인발행하고, 사진첩 《구타원 이공주종사》 2권(2006), 그리고 법문수필집으로 《일원상을 모본하라》ㆍ《인생과 수양》(2007), 열반관련 자료와 후인들의 회고담을 모아 추모문집으로 《새 회상 도덕박사 세계의 큰스승》(2007)을 발행했다. 원불교 초창기 교단사와 함께 전개된 그의 사상은 원불교 교리를 믿고 실천한 신심ㆍ공심ㆍ공부심의 결과이며, 이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새 회상과 주세불관이다. 소태산을 만나 주세불로 모시고 새 회상의 건설에 참여하여 교리ㆍ제도의 체계화에 앞장서 오면서 교서편정ㆍ역사정리ㆍ성가작사 등을 통해 그 사상을 실천하고, 그 법통을 이어 역대 종법사에 대한 사제의 도리를 다했다.
둘째, 철저한 역사ㆍ문화의식의 소유자였다. 기록문화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사료정리ㆍ유물수집ㆍ계몽의식고취 등에 모범을 보였다. 교단의 기관ㆍ인물에 대한 서적ㆍ역사ㆍ사진 등의 자료는 상당한 부분이 그를 통해 전승되었다.
셋째, 인재육성에 매진한 열린 교육관의 소유자였다. 바른 정신과 자질이 확인되면 인재로 길러 적재적소에서 역할할 수 있도록 직접지도와 함께 사비를 털어 장학금을 베풀었다. 교단의 지도자로서 열린 교육관을 가짐으로서 학식과 능력을 기르는 가풍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했다.
넷째, 탁월한 공익주의자였다. 자신은 철저한 근검주의를 실천하면서도 교단 전체를 살피면서 공익에 필요한 일이면 큰 금액을 주저 없이 제공했다.
따라서 교단의 대소사는 항상 그와 상의가 되고, 그렇게 하여 호법주ㆍ공덕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아들 박창기가 전무출신 하였다.〈梁賢秀〉
초창기 교단의 경제적 토대가 되고, 소태산 대종사의 법낭(法囊)으로 훗날 〈대종경〉 편찬에 큰 힘이 됐던 구타원 이공주 종사. 그의 생애와 활동을 마산교당 정명숙 교무가 ‘원불교 여성 10대 제자’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구타원은 1896년 서울 대조동(현 종묘)에서 부친 이유태와 모친 민자연화의 3남3녀 중 차녀로 출생했다. 부친은 조선 중기 문신인 이항복의 후손으로 일찍이 부정부패에 시달린 벼슬길을 멀리하고 지조를 지킨 선비였고, 모친은 생각이 매우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부인이었다.
부모의 정신을 물러받은 구타원은 어려서부터 자질은 총명예지하고 기상은 강의고결했다. 어려서 천자문과 소학을 배운 후 10세에는 한문, 산술, 초급영어를 배웠다. 1909년에서 1913년 대한제국 황실의 윤비황후의 시독으로 창덕궁에 입궐하여 1910년 퇴궁하기까지 만 6년간 궁중의 법도와 한문, 일어 등을 공부했다.
그가 21세 때 박장성과 결혼했으나 장남 남기(법명 창기), 차남 동기를 낳고 급성폐결핵으로 1922년 남편은 별세했다.
27세 젊은 나이로 갑자기 남편을 잃은 이공주는 커다란 슬픔에 빠져 인생의 무상함을 절감하다 소태산을 만나게 된다.
소태산과 구타원의 역사적 만남은 원기9년 11월이었다. 소태산의 두 번째 상경길이었다. 육타원 이동진화가 마련한 동대문 밖 창신동 수양처를 미타원 박공명선의 소개로 모친 민자연화, 언니 이성각과 더불어 방문하여 소태산 대종사께 귀의하였다. 이 때 대종사는 이공주에게 공주(共珠)라는 법명을 내리며 말했다.
“구슬이란 매우 보배로운 것이요. 그러나 구슬도 한 두 사람만이 가지고 보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이 가지고 보는 것이 더욱 가치 있고 보배로운 것이며 그대의 법명을 공주라 하는 것은 세계 인류가 모두 함께 보는 보배로운 구슬이 되어 달라는 뜻입니다.”
당시 소태산의 제자 중 구타원은 학식과 재질이 뛰어나 소태산의 법문 수필로 회보에 발표하는 등 회원들에게 수행의 길잡이가 됐다.
그의 법문수필은 원기12년 5월 기관지인 <월말통신> 창간호의 ‘약자로서 강자되는 법문’을 비롯해, ‘좌선에 대한법문’(<회보>15), ‘돈 버는 방식’, ‘사은사요의 필요성’, 등은 교리체계로 〈정전〉에 편성됐다. 또 ‘나의 가르침은 인도상 요법이 주체이다’, ‘나는 용심법을 가르치노라’ 등은 〈대종경〉에 채록됐다.
이러한 구타원에 대해 소태산은 “이공주께서 나의 법을 가장 많이 설해 주었다. 공주는 나의 법낭이다”며 “공주는 낙언성실(落言成實)하고 투필성자(投筆成字)한다”고 칭찬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법낭이란 아호가 생겼다.
또한 구타원은 글을 해독한 이후 일생을 기록과 함께 했다. 특히 1909년 5월14일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는 일생 동안 계속된 데다 고스란히 남아 있어 자신의 생애는 물론 교단사의 정리에 있어서도 매우 유용했다.
필명이 청하였으며 그의 저술은 소태산의 법문수필에서부터 시·논설·역사기록 등 다양하며 활자화가 이루어진 것은 물론 수고본(手稿本)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남아 있다. 구타원의 이러한 행적은 원불교 기록문화의 효시이기도 했다.
재력가이기도 했던 구타원은 큰아들인 묵산 박창기 대봉도와 함께 부군 박장성으로부터 물려받은 일천 여 마지기의 재산을 교단 경계운영에 보태 큰 도움을 줬다. 초기 각종 교서 인쇄비용과 ‘회보’ 발행 비용이며, 총부 대각전 신축, 제1대 성업봉찬사업 등에 희사한 공로로 원기42년 제1차 법훈여식전에서 대봉도의 원훈을 정산종사로부터 증여받는다.
이후에도 개교반백년기념사업, 교단인재양성, 해외교화후원, 제2대말 및 대종사탄생백주년성업봉찬 등 수많은 교단사의 중추적 역할을 다했다.
구타원은 만년에 총부수도원과 서울수도원을 내왕하면서 서울보화당한의원 등 경영을 이끌다가 원기76년 1월2일 열반한다. 출가와 더불어 교단요직에 임하여 100세 가까운 생애를 살면서 교단발전의 현장을 지킨 인물로 원불교 창립기부터 공부와 사업 양방면에서 눈부신 활동을 전개한 점은 후래 제자들이 높이 배워야 할 점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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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의 유래
원기 11년(1926) 12월 경, 소태산 대종사는 서울교당에서 이공주에게 재가 선법과 고락의 원인에 대한 법문을 설해주었다. 일심으로 법문을 다 듣고난 이공주가 말했다.
『대종사님께서 지난 번에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염불과 좌선하기에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젊은 나이라 소리내어 염불하기가 매우 쑥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러니 짧은 글 한 구절을 주시면 틈틈히 외우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젊은 여자라 소리내어 염불하기가 쑥스럽다고? 그런 생각을 버려야만 큰 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염불하기가 부끄럽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성불하겠다는 말인가.
서가모니 부처님 때에 있었던 일이다. 부귀한 집에서 귀엽게 자란 처녀가 역시 부귀한 집으로 시집을 갔다. 며느리는 친정에서도 하녀들이 모든 일을 다 해주었기 때문에 편안하게 자랐고, 시집에서도 역시 하녀들이 많아서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부탁하여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해도 좋다고 승낙을 얻었다. 시어머니 생각으로는 귀중한 새 며느리가 편히 놀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새 며느리는 잠자고 식사하는 시간 이외에는 놀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염불을 하는 것이었다. 시어머니는 젊은 며느리가 청승맞게 무슨 염불을 하느냐고 하면서 편히 놀기를 권했다. 그러나 새 며느리는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미리 죽음의 준비를 위해서 열심히 염불한다고 했다.
며느리가 열심히 염불을 하자 시어머니도 차츰 따라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하녀들과 머슴들까지도 일하면서 입으로 염불을 했다. 온 집안 식구가 다 염불을 한 것이다. 결국 며느리를 비롯해 모든 식구들이 큰 도인이 되었다고 한다.』
대종사는 서가모니 부처님 당대의 일화까지 예로 들어가면서 염불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말했다.
『정 그렇다면 내가 글 한 구절을 주겠다. "거래각도무궁화 보보일체대성경(去來覺道無窮花 步步一切大聖經)" 이라고 지성으로 외워라. 그러면 일심이 잘 되어져 어떤 공덕이 나타날 것이다.』
며칠 후 성성원이 서울교당으로 왔다. 대종사가 말했다.
『공주는 젊은 여자가 소리내어 염불하기가 쑥스럽다고 하면서 짧은 글 한 구절을 달라기에 거래각도무궁화 보보일체대성경이라 주었다. 성원이는 어떠냐?』『그럼 저에게도 글 한 구절을 주시면 일심으로 외우겠습니다.』
『성원에게는 「영천영지영보장생 만세멸도상독로(永天永地永保長生 萬世滅度常獨露」라고 주겠다. 공주처럼 지성으로 외워 보아라.』
몇 년이 지난 후 대종사는 법횟날 총부 대각전에서 대중들에게 말했다.
『내가 어제밤에 한 꿈을 꾸었다. 대각전에서 우꾼우꾼하는 소리가 나는데, 대중들이 「영천영지영보장생 만세멸도상독로 거래각도무궁화 보보일체대성경」이라 외우고 있었다. 그리고 개각전 지붕에서는 서기(瑞氣)가 하늘에까지 길게 뻗쳐 있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이 글을 천도재 지낼 때에 외우도록 하여라. 이름을 성주(聖呪)라 하자. 영혼 천도에 큰 위력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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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와 도덕박사
소태산 대종사가 이공주를 처음 만난 이듬해인 원기 10년(1925) 12월 23일, 서울 계동에서 이공주의 30회 생일기념을 축하해 주었다. 박사시화·민자연화·이성각 등도 자리를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대종사는 이공주의 장차 소원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공주는 장차 어떠한 일을 하고 싶은가? 공주가 가장 가치있고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저는 장차 일천만 한국 여성을 위해 헌신 봉공하고 싶습니다. 이 땅의 여성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남성들로부터 억눌리고 짓밟히며 사람 대접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러한 여성들의 권리를 회복해 주고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풀어주고 싶습니다.』『허허! 그렇다면 여성 해방 운동가가 되고 싶다는 것인데,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가?』『일본으로 유학가서 문학박사가 되겠습니다.』『문학박사가 된 다음에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문학박사만 되고나면 일천만 여성을 계몽시켜 다 좋은 길로 이끌어줄 방법이 열릴 것 같습니다. 아직 그 이상은 더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겨우 일천만 여성을 위해서 문학박사가 되고싶은 것이 공주의 가장 큰 포부란 말이군. 나는 공주가 뜻이 넓고 생각이 깊은 큰 인물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겨우 담뱃대통 속같이 소견이 좁군. 일천만 여성이 비록 많은 것 같으나 수십억의 인류에 비하면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고, 더욱이 태·란·습·화 사생과, 천도·인도·축생·수라·아귀·지옥의 육도중생과 미물 곤충 등 수수 억억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넓은 바닷가의 모래 한 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겨우 일천만 한국여성을 위해 문학박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무슨 큰 포부나 품은 듯이 착각하다니 정말 우습다. 그런 좁은 생각일랑 아예 버리고 차라리 도덕박사가 되어서 만생령을 널리 제도하려는 큰 뜻을 품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장차 세계는 문학박사·철학박사·의학박사니 하는 학문의 박사는 흔해 빠져서 마치 시골길에 돌멩이가 발길에 채이듯 할 것이다.
그러나 도덕박사야 말로 가장 귀하고 가장 훌륭한 박사가 될 것이다. 장차 세계는 물질문명이 한없이 발달하지만, 인간의 도덕성은 크게 타락할 것이다. 도덕성을 회복시켜주는 도덕박사야 말로 가장 필요한 박사가 될 것이다.』
이공주로서는 한 가정이나 친족만이 아닌 한국의 일천만 여성을 위해 헌신 봉공하겠다면 대종사로부터 큰 칭찬을 받을 줄로 알았다. 여성으로서 그보다 더 큰 포부는 없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대종사는 담뱃대통 속 같이 좁은 소견이라고 꾸짖었다.
이후로 원불교에서는 도덕박사란 말이 생겼다. 오늘날 도덕박사가 가장 필요하고 소중하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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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타원 이공주 종사(1896~1991)
소태산 대종사의 법설을 가장 많이 수필 한 법낭(法囊) 구타원 이공주 종사가
소태산 대종사를 만난 것은 원기9년 (음)10월 소태산 대종사의 두 번째 상경길에 이뤄졌다.
육타원 이동진화가 마련한 동대문 밖 창신동 수양처를 미타원 박공명선의 소개로
모친 낙타원 민자연화, 언니 기타원 이성각과 더불어 방문, 소태산 대종사께 귀의하였다.
27세의 젊은 나이로 부군을 사별한 후 인생의 무상함을 절감하고 있던 때에
소태산 대종사와의 만남은 일대전화의 계기가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공주(共珠)라는 법명을 내리며 말하였다.
“구슬이란 매우 보배로운 것이요, 그러나 구슬도 한 두 사람만이 가지고 보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이 가지고 보는 것이 더욱 가치 있고 보배로운 것이며 그대의 법명을 공주(共珠)라 하는 것은 세계 인류가 모두 함께 보는 보배로운 구슬이 되어 달라는 뜻입니다.”
구타원 종사는 1896년 (음)12월 23일, 서울 대묘동(현 종묘)에서 이유태 선생과 낙타원 민자연화 정사의 3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구타원 종사는 6세때부터 가정에서 부친에게 한글을 배워 고대소설을 읽었으며,
8세때에는 천자문과 소학을 배웠다.
10세 때에는 근대 한국여성으로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었던 하란사로부터
한문, 산술,초급영문 등을 배우기 시작하여 하란사를 따라
이화학당 초등부에 입학하여 영어,성경 등을 배웠고,
11세때에는 외삼촌 민치장이 교장으로 있는 동덕여학교에 입학하였다.
동덕여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13세 되던 해 외삼촌으로부터 창덕궁 여관시보(女官試補) 추천을 받아
조선 마지막 황후 윤비(尹妃)의 시독(侍讀)으로 입궁하게 되었다.
17세시에는 한일합방으로 퇴궁하여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에 입학하여 수학하고 졸업한 후
일본에 유학하여 문학박사가 되려하였으나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로 실현할 수 없었다.
경성여고보를 졸업한 구타원 종사는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의 박장성과 결혼,
맏아들 창기(昌基, 묵산 대봉도)와 작은 아들 원기(圓基)를 두고 단란한 가정을 꾸몄으나
결혼 8년 만에 부군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군은 고향에서 근농회를 조직, 문맹퇴치운동과 농촌청년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하였으며,
3.1운동에 가담, 6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뜻한 바 있어 일본으로 유학, 동경 명치대학에 입학하였다.
3학년 여름방학 때 일시 귀국한 부군은 호남지방 일대에서 민족사상 고취를 위한 순회강연회 도중
급성 폐결핵으로 순직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를 만나 부군을 잃은 슬픔을 딛고 새로운 인생을 발원한 구타원 종사는
계동집 사랑채로 소태산 대종사를 모셔다가 서울 제자들과 청법낙도의 생활을 할 때
소태산 대종사의 왕복여비 등 제반비용은 언제나 자담하였고,
소태산 대종사는 여기서 두 번이나 새해를 맞이하였다.
원기10년 구타원 종사의 30회 생일에 소태산 대종사는 박사시화, 이성각 등과 함께
구타원 종사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 자리에서
“공주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소? 공주가 가장 보람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무엇이요?”하고 물었다.
이에 구타원 종사는 “네, 저는 여학교 시절부터 1천만 조선 여성을 위하여 일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제 인격을 갖추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문학박사가 된 뒤에
글을 써서 조선 여성들을 계몽시켜 볼까 했습니다.”
구타원 종사가 여성 해방운동에 헌신하여 여권을 회복하고 싶었다는 뜻을 말하자.
그 말을 한참 듣고 있던 소태산 대종사가 말하였다.
“공주는 생각을 더욱 넓혀 도덕박사가 되어 세계 전체의 여성,
나아가 세계 전체의 인류를 제도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그 후 구타원 종사는 원기17년 출가하기위해 익산총부로 가기까지 서울교당 창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원기10년부터는 서울교당 주무, 원기15년부터는 재가로서 서울교당 교무로 전략을 다하던 중
돈암동에 6백여 평의 대지를 매수하여 교당 신축부지로 희사하였다.
구타원 종사는 출가한 후
소태산 대종사의 많은 법설을 수필하여 [회보]에 발표, 회원들에게 수행의 길잡이가 되게 하는 한편,
뒷날 [대종경] 편찬에도 귀중한 자료를 많이 제공하였다.
또한 소태산 대종사는 구타원 종사에게
“공주에게 나의 법을 가장 많이 설해주었다. 공주는 나의 법낭이다.”라며 ‘법낭’이란 아호를 내려 주었다.
이로부터 구타원 종사는 법낭이란 이름 그대로 법주머니의 역할을 잘 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러한 구타원 종사에게
“공주는 낙언성실(落言成實)하고 투필성자(投筆成字)한다”고 칭찬하였다.
[월말통신] 제1호에 ‘약자로 강자되는 법문’인 소태산 대종사의 법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월보][회보]등에 실린 구타원 종사의 수필 법설이 45편이나 된다.
또한 기관지에 발표하지 않았으나 수필한 많은 법문이 [청하문총]에 전해온다.
구타원 종사는 큰 아들인 묵산 박창기와 함께 부군으로부터 물려받은 일쳔여 마지기의 재산을 교단 경제운영에 적절히 사용하였다. 각종 초기교서 인쇄비용과 [회보]발행 비용이며, 총부 대각전 신축, 제1대 성업봉찬사업 등에 막대한 정재를 희사하여 원기42년 4월 26일. 제1차 법훈증여식에서 대봉도의 원훈을 정산 종사로부터 증여받았다. 그후에도 구타원 종사는 개교반백년기념사업 추진, 서울수도원과 서울보화당 설립, 서울회관 건립, 영산성지개발사업, 교단 인재양성, 해외 교화후원, 교단 제2대말 및 대종사 탄생 백주년성업봉찬 사업 등 수 맣은 교단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다하였다.
구타원 종사는 원기15년 소태산 대종사가 임시 여자수위단을 조직할 때 중앙위에 선임된 이후 줄곧
여자수위단 중앙으로 소태산 대종사, 정산 종사, 대산종사로 이어진 3대 주법을 보필,
교단의 정신적 지주로서 튼튼한 밑받침이 되었다. 구타원 종사는 원기76년 1월 2일, 96세로 열반하였다.
*구타원 이공주 종사 관련 법문
인도품 17장, 변의품 1장, 천도품 4장, 선외록 사제제우장 20절, 최종선외장 2절, 교단수난장 10절, 경륜편 20장, 유촉편 36편, 한울안한이치에 제1편 법문과 일화 돌아오는 세상 80, 성가 19장, 성가116장, 성가117장
*구타원 이공주 종사 관련 일화
대종사의 서울 인연 -
익산총부를 건설하던 중 원기9년 (음)10월 27일, 소태산 대종사가 서울 동대문 밖 창신동에 있는 육타원 이동진화의 수양채 집에서 구타원 이공주, 낙타원 민자연화, 기타원 이성각, 융타원 김영신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찾아온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 같은 소태산 대종사는 찾아온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 같은 귀부인이 어떻게 이처럼 나 같은 시골사람을 찾아 왔소?
무척 큰 영광입니다. 보아하니 무엇인가 원하는 일이 있어 서 찾아온 것 같은데."
그러나 네 여인 모두가 무엇인가 말할 듯 하면서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한다.
"자, 주저하지 말고 말해보시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염주 깎는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구두나 비행기 만드는 법을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습니다."
이공주의 친정어머니 민자연화가 먼저 말씀 올렸다.
"인생살이에 대한 불만이나 가정살림에 대한 아쉬움은 별로 없습니다.
지금까지 한 평생을 그럭저럭 행복하게 잘 살아왔습니다. 옛 부처님 말씀에 인생이란 눈앞의 현세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삼세가 있다고 하시었습니다. 현세의 일은 직접 살아가고 있으니 어느 정도 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과거세 와 미래세의 일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과거•현재 •미래의 삼세 일을 다 알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민자연화의 큰딸 이성각이 말씀 올렸다.
"저는 일찍부터 부처님께 귀의하여 불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미륵하생경』 에 부처님 열반 후 정법•상법•계법의 삼천년을 지나면 용화회상이 열리고 미륵존불이 출세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사도가 분분해서 사도와 정도를 분별하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사도와 정도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두 분은 큰 법기입니다. 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살림이나 할 여인들이
이처럼 크고 중요한 삼세일과 사도와 정도에 대 해서 알고 싶다니 이건 보통일이 아닙니다."
다음으로 이공주가 말씀 올렸다.
"저는 과거•현재 미래의 삼세일과 사도와 정도에 대해서 다 알고 싶습니다.
저에게 두 가지 이치를 가르쳐 주시면 영생의 스승 님으로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그대들이 질문한 것은 내가 잘 알고 있는 이치이니 잘 가르쳐 주겠소.
우리는 서로 전생부터 소중한 법연이요, 오늘은 내 인생에 있어서 매우 뜻 깊은 날이요. 기쁘기 한량없소.
사랑하던 부모 형제가 서로 기약 없이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갑고 즐 접기 한이 없소.
나는 평소에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하면 상기(上氣)가 잘 되지만,
오늘은 하기(下氣) 가 되어 심신이 더욱 상쾌하오.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만난 인연으로 법명을 지어주겠소."
민자연화가 말씀 올렸다.
“저는 민대각화(閔大覺華)이구요, 큰딸은 이원각화(李圓覺華)입니다. 저희 둘은 백용성(白龍城) 스님의 신도들입니다. 시간을 좀 갖고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작은딸은 아직 아무 데도 귀의하지 않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법명을 내려 주시지요."
“그대의 이름이 무엇이요?"
“이경길(李瓊吉)이라 합니다."
"그대의 법명을 '공주(共珠)'라 합시다. 세계의 모든 인류가 함께 보는 보배로운 구슬이 되라는 뜻입니다."
이성각의 딸 김순득도 그 자리에서 법명을 '영신(永信)'이라 받았다.
민자연화와 이성각은 몇 달 후에 이공주의 연원으로 법명을 받고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들 네 사람을 제자로 얻고 삼대 사모녀(三代 四母女)를 함께 얻었다고 크게 기뻐하였다.
또한 이후로 소태산 대종사는
유덕하고 활달한 민자연화, 천진보살 이성각,
만화(萬化) 보살 또는 법낭(法囊) 이공주,
진묘(眞妙)한 김영신이라고 이들 네 제자를 칭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