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본부에 연꽃모양의 강진 청자를 기증했다
나는 추진위원회 시절부터 사업소 시절까지 좋은 청자를 만들기 위해 선전지 견학을 자주하곤 했다. 이 일은 추진위 시절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지역출신으로 언론사의 편집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사람의 도움으로 중국의 한 도시를 찾게 됐다.
상우현이라는 도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곳은 도자기를 굽던 가마터가 있었던 도시였다.
도시를 찾아가자 낯선 사람들의 방문이 많지 않았던 때문인지 주민들은 우리를 보고 경계하는 듯한 눈빛과 신기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 도시에는 대구 당전마을처럼 거리 곳곳에 도자기 파편이 널려있었다. 도자기 파편을 주워 살펴보는 모습을 보고 그곳 아이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파편들을 주워와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주민들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그곳의 도자기 파편들을 유심히 관찰하며 우리가 만드는 청자와 비교분석했다.
이때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마을에 커다란 묘가 있었는데 묘의 봉분 곳곳에도 도자기 파편들이 박혀있었다. 그 묘 봉분의 가운데에는 커다란 표지석이 세워져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무덤방식에 신기했다.
그곳을 함께간 사람으로부터 통일신라시대 장보고를 통해 이 도시에서 국내로 도자기 문화가 유입됐다는 내용을 전해들었다. 주변 지형을 살펴본 결과 물이 많고 도자기를 만들기 좋은 흙이 많았기때문인지 주위에는 기와공장이 많았지만 도자기 공장은 많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강진군의 청자사업은 발전해왔다. 그중에서도 1986년 청자사업소가 탄생하면서 강진의 청자사업은 본격적으로 활성화됐다. 사업소가 만들어지면서 행정업무 파트와 생산파트가 분리돼 운영되기 시작했다.
추진위원회 시절에는 일을 맡을 사람이 없다보니 생산업무와 행정업무까지 내가 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보니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았다.
하지만 청자사업소가 만들어지면서 군청 공무원이 소장으로 근무하고 소장을 중심으로 사무실이 만들어졌다. 사무실에서는 주로 행정업무를 도맡았고 나는 생산파트의 총괄을 맡았다.
이때부터는 강진군에서 정식으로 일년 예산을 세워 일정 계획에 따라 사업소가 운영되기 시작했고 나와 청자 생산을 했던 직원들에게도 많지는 않았지만 급여가 지급되기 시작했다.
사업소장을 비롯한 사무실 직원들과 논의하며 연간 생산계획을 수립했고 이를 통해 체계적으로 청자가 생산됐다.
청자사업소로 바뀐 이후 한가지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전두환 대통령 당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때 대통령의 동생이 새마을본부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이 시기 새마을본부로부터 사업소로 청자 작품 전시 요청이 들어온 것이었다.
이때 전남도내 지역별 특산품이 전시되는 행사였는데 강진은 당시 청자가 유명했기에 청자 전시 요청이 들어온 것이었다.
전시는 서울에서 열렸는데 여러 가지 청자 작품과 함께 메인작품으로 연꽃모양의 화려한 청자 항아리를 전시했다.
이때 대통령의 동생이 전시회를 찾았는데 여러 가지 부스중에서 청자를 전시중인 강진부스에는 전시기간동안 거의 매일 찾아오는 것이었다.
전시장을 찾아와 연꽃모양의 항아리를 유심히 관찰하고 돌아갔다. 몇일간 반복되자 대통령 동생을 수행하던 한 인물이 나를 찾아와 연꽃모양 청자를 기증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나는 함께 군과 상의한 끝에 개인이 아닌 새마을본부에 기증하는 형태로 해서 청자 작품을 전달해주었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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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청자사업 활성화(2022.12.8 강진일보)
레몬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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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6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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