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도행전 강해(78) 2026. 9. 6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행17:28-34
<바울이 선포한 하나님>
아덴은 당시 헬라 철학의 중심지로서, 당시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도시를 홀로 돌아보다가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하여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였고, 심지어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바울은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연설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진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구체적으로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5가지로 요약해 설명하였습니다.
첫째, 바울이 전파하는 하나님은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둘째, 바울이 전파하는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모두 다스릴 수 있는 천지의 주재이십니다.
셋째, 바울이 전파하는 하나님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신전에 갇혀계시지 않습니다.
넷째, 바울이 전파하는 하나님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 없으신 분이십니다.
다섯째, 바울이 전파하는 하나님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는 분이십니다.
한 마디로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은 인간 세상을 초월해 계시는 ‘절대자’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초월해 계셔서 아무 관계가 없는 분이 아니십니다. 바울은 이어서 그 하나님은 우리 인간(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시는가에 대해서도 설명하였습니다.
첫째, 그 하나님이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들었다’(26)고 증언하였습니다(모든 인류를 자녀 삼으심).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신분적, 인종적, 성별 간의 차별이 없음을 선포한 것입니다(‘기독교의 신앙의 핵심 가치’).
둘째,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다’(26)고 증언함으로써, 그 하나님이 인간의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여 오시는 역사의 주인이심을 선포하였습니다. 개인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셋째, 그 하나님은 멀리 계시거나, 숨어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손으로 더듬어 알 수 있는 정도로 가까이 계신 분이시라(27)고 선포하였습니다. 물론 피조물이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완벽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나아가 성령님께서 우리 몸을 성전 삼으셔서, 내주하시기에 우리는 체험(은사)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그렇기에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를 결론 맺습니다.
28절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참 중요한 고백입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힘입어 존재합니다. 그분이 창조하시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생명(호흡)을 주시고, 유지시켜 주시기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동한다’는 말은 ‘움직이고 활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계획과 사업도 주님의 은혜 아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맘대로 사는 것 같아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생>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29). ‘소생’이라는 말은 ‘~에게서 난 자’란 뜻입니다. 즉 우리 인간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자’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이미 헬라의 철학자들에게 익숙한 표현입니다.
28절b “...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BC 3세기 길리기아 시인 아라투스(Aratus)의 시 <페노메나(Phaenomena)>에, 제우스를 가리켜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아라투스는 범신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헬라의 신들은 그 아버지 신과 어머니 신 사이의 소생으로 태어납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 인간들도 신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소생’이며, 따라서 인간들은 나면서부터 신성을 소유한 존재라고 보는 것이 아라투스의 생각입니다. 바울이 설교하던 당시, 헬라의 철학자들은 이 아라투스의 시를 즐겨 암송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용어를 인용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려 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 당시 헬라의 문화와 철학에 싶은 지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헬라의 철학자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소생’과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소생’은 그 의미가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소생’이 인간의 신적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쓴 것이라면,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소생’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소생’이지, 어떤 신적인 속성을 가진 존재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가 달라져야>
자, 예배하는 대상이 달라지면, 예배하는 방법도 달라져야 합니다.
29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지금까지 헬라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 같은 재료를 이용하여,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그 어떤 형상(우상)으로 만들어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예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하나님의 소생’, 즉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존재하게 한 창조주를 신상(우상)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손으로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예배한다면, 그것은 ‘신성모독’ 그 자체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창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 산에서 계약을 맺을 때에, 십계명을 통해 금지하신 것입니다.
출 20:4~5a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그 어떤 모양으로도 ‘살아계신 하나님’, ‘영이신 하나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낼 수는 없습니다.
그랗기 때문에 예배하는 방법이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받기 원하시는 예배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4:23~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영과 진리로’란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로, '프뉴마'가 '성령'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간의 가장 높고 깊은 부분이고, '알레데이아'는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부합되는 것으로서(Meyer) 예수 안에 계시된 진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영'과 '진리'는 전치사 하나에 두 단어가 함께 연결되어 있어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외적인 형식(장소, 시간, 예배 제도)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 되며, 진리의 영(14:7)으로 인도되어 오직 영이신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 가운데서 예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예배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예배자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느냐에 따라 참과 거짓으로 구별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영이신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해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개를 요구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꼭 기억해야 할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거쳐야 하는 단계입니다.
30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알지 못하던 시대’란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하나님이 어떤 예배를 받기 원하시는지를 알지 못하던 때를 말합니다. 진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지 못해서 ‘우상을 섬긴’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간과하셨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간과’(看過)의 사전적 의미는 ‘대수롭지 않게 대강 보아 넘긴다’는 것이지만, 본문에서의 뜻은 그 시대의 무지에 대해 심판하지 않으셨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잘 몰라서 행했던 잘못에 대하여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반드시 이루어져야하는 단계입니다. ‘회개 없는 영접은 없습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번째로 외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선포였습니다. ‘회개’(repent)는 ‘방향 전환’입니다. ‘근본적인 삶의 변화’입니다.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삶의 목표, 삶의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변하는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 함을 의미합니다(한국교회의 최대 약점).
<정해진 심판>
이처럼 ‘회개’가 전제 조건이 되는 이유를 31절에서 설명합니다.
31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정하신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 이미 오래전에 정해놓으신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다’고 하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장차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날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삶의 변화, 즉 회개를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날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확실한 증거로 하나님은 ‘정하신 사람’ 즉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때에 예수님을 심판자로 세우셨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 반응 - 아덴에서 얻은 성도들>
이제 바울의 설교가 끝나자 아테네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32절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크게 세 가지 반응입니다.
첫째,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지적 교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둘째, 생각하면서 ‘다시 네 말을 들어보겠다’라며 여지를 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셋째,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33~34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비록 논쟁적인 설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이지만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디오누시오’는 ‘아레오바고 관리’였습니다. 유세비어스 교회사에 의하면 디오누시오는 후에 아테네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마리’라는 여자에 대해서는 특별히 알려지는 바가 없습니다. 혹자는 ‘디오누시오’의 아내였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확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외에도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아테네 선교를 통해서 몇몇 사람은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선교가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전도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오늘 당장 열매를 맺지 못하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농사를 짓는 농부가 바로 수확을 하는 것은 아님). 언제 열매를 맺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우리는 지금까지 아레오바고에서 행한 바울의 설교를 묵상했습니다. 다른 곳에서의 설교와 달리, 아레오바고에서의 바울의 설교는 하나님의 창조와 능력에 대해서는 철학적인 논리로 잘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메시지는 충분히 전하지 못하고 서둘러 끝낸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의 마음 상태가 ‘격분’해 있었기도 했고, 듣는 사람들도 도전적이었기 때문입니다(조롱하는 사람들).
그래서 전도라기 보다는 ‘변론’에 가까웠습니다. ‘변론’은 ‘말싸움’이요 ‘논리 싸움’입니다.
아마도 논쟁적인 분위기로 인해, 아레오바고 광장은 바울이 조용히 복음을 전할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어수선한 분위기로 인해, 바울은 서둘러 말씀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의 마음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메시지를 충분히 전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논쟁’과 ‘논리 싸움’은 승자와 패자를 만들고 분노만 더욱 증폭시킬 뿐, 그것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낼 수가 없습니다. 복음 전도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전하는 ‘사랑의 음성’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곧 아덴을 떠나서 고린도로 가서 선교하게 되는데, 후에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읽어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얻는 교훈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고전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이 이야기는 바울이 아덴에서 실패한 경험에 비추어보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나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은 모두 아레오바고에서 사용했던 ‘헬라 철학과 변론하는 방법’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아덴에서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고린도에서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을 전도했던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28)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실존입니다. 교만하지 말고,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우리의 삶 속에 아직도 완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세상적인 우상의 잔재들이 있다면, 이 시간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직 영과 진로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순간마다 겸손히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생명뿐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