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에 ‘성황고개’가 있다. 성황城隍은 죽은 뒤의 영혼을 재판하고 마을을 지키는 중국인들의 신이었는데, 우리나라에 와서는 ‘서낭’이 됐고, 그 신을 모시는 집堂은 ‘서낭당堂’ 또는 ‘성황당’이라 불렀다. 즉 안동시 길안면에서 의성군 옥산면으로 넘어가는 재에 ‘성황고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안동과 옥산의 경계를 이룬 그 고개가 신이 버티고 서서 마을을 지킬 자리라는 뜻이다.
고개 정상에는 ‘천하 대장군’과 ‘지하 여장군’이 나란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물론 신앙의 대상은 아니고, 의성군이 재의 이름에 어울리는 설치물을 잘 찾아낸 결과이다. 게다가 보디페인팅Bodypainting(몸에 물감으로 그림이나 글자를 써넣은 미술 행위)까지 하고 있는 두 대장군은 붉은 사과를 입에 물거나 머리에 이고 있다. ‘옥사과’로 유명한 ‘옥산면에 들어왔다’ 표시의 이정표로는 아주 제격이다. 특히 지하 여장군의 보디페인팅 ‘의성 옥사과 세계 제일’은 나그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내려가면서부터 온통 사과밭이다. 옥산면의 길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가로수로는 잎이 넓어 오염된 공기를 잘 다스려내는 플라타너스가 최고’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로수로는 사과나무가 단연 제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잎사귀도 어느 정도 넓고, 꽃과 열매로 봄부터 늦가을까지 ‘경치’를 만들어주는 사과나무만한 가로수가 또 어디 있을까!
본래 사과나무는 겨울에 삼한사온이 뚜렷한 지역을 좋아해서 우리나라에서는 ‘대구 사과’로 이름을 날린 경산 지역을 최대의 ‘거주지’로 삼았다. 그런데 지구 온난화 때문에 대구 일대의 기후가 더워지면서 살기에 좋지가 않자 북쪽으로 ‘이사’를 했다. 1983년에 출간된 뿌리깊은나무의 《한국의 발견- 경상북도》는 이를 잘 설명해준다. 이 책 347쪽의 해당 부분을 대략 뜻 중심으로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한서寒暑의 차이가 심한 기후 조건이 사과 재배에 알맞아 대구사과가 유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1979년부터는 〈대구 능금〉이라는 상표도 〈경북 능금〉으로 바뀌었다.
본문에 ‘사과’와 ‘능금’이 뒤섞여 있어 뭔가 혼란스럽다. 사과와 능금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식물학자들이 붙인 학명學名을 찾아보면 서로 다르다. 사과는 ‘Ma lus pumila Miller’, 능금은 ‘Malus asiatica Nakai’이다. ‘사과’와 ‘능금’의 소리가 다르고, ‘Malus pumila Miller’와 ‘Malus asiatica Nakai’의 발음 역시 다르니 이 두 과일은 다른 것이다.
능금은 ‘우리나라 사과’로 이해하면 되겠다. 본래 한자로 적을 때에는 ‘林檎(임금)’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하기 좋게 ‘능금’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후 글자로 적어야 할 경우에도 ‘능금’으로 썼다. 한자 어원으로는, 향기가 좋아 숲林 속의 새禽들이 찾아와서 먹는 과일이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능금나무 檎(금)’이 ‘새禽’와 ‘나무木’가 붙은 글자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사과沙果는 ‘모래沙밭처럼 물이 쉽게 빠지는 땅에서 잘 자라는 과果일’이라는 의미다.
사과는 사과, 능금은 '우리나라 사과'
옥산은 사과로 유명하다. 사과나무는 물이 잘 빠지는 땅에 심어야 하므로 흔히 완만한 언덕이나 산비탈에 재배한다. 이런 땅은 밤에 만들어진 냉랭한 공기가 계곡을 타고 쉽게 빠져나가 봄철 사과꽃과 어린 열매의 냉해 피해를 막아준다. 물론 옥산면의 동쪽에 있는 청송군이 사과 재배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것도 같은 조건에 힘입은 결과이다.
옥산면에서는 유리창을 닫고 달려도 사과 향기가 차 안 가득 들어찬다. 어찌 차창을 활짝 열고 달리지 않으랴! 옥산면을 지나는 930번 지방도와 79번 지방도는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이지만, 나그네의 마음은 그저 사과밭 가운데를 지나가고 있는 것만 같다. 앞뒤좌우 사방에 온통 사과 열매가 탐스럽게 달려 있고, 그 향이 하늘과 땅을 진동한다. 사과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이곳의 산비탈들은 정말 옥玉과 같이 아름다운 산山이렸다!
‘옥산’이라는 이름은 공민왕이 붙였다고 한다. 옥산면 소재지 동쪽의 산에서 푸른빛 옥이 발견돼 사람들이 그것을 공민왕에게 바치자, 왕이 크게 기뻐하면서 본래 마전麻田으로 불려오던 이름을 옥산으로 바꾸게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옥산에는 ‘푸른 옥’이 많이 난다. 여름철에만 볼 수 있는 푸른 빛깔의 고운 옥이다. 도로변부터 산 중턱에까지 푸른 옥들이 무성하다. 사과밭의 푸르고 싱싱한 열매들이 바로 그 옥이다. 옥들은 가을이 되면 빨갛게 빛난다. 옥산의 가을, 사과향을 맡으러 이곳을 찾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한 ‘자연의 답사자’가 되지 못한다.
옥산에는 겨울 명소도 있다. 1982년 10월에 만들어진 금봉지金鳳池라는 호수가 바로 그곳이다. 834m의 금봉산 자락이 동서남북을 가리고 있는 한복판 계곡에 역삼각형 모양으로 길게 들어앉은 이 호수는 햇볕이 들어올 겨를조차 별로 없다. 덕분에 겨울에는 두껍게 꽁꽁 얼어붙은 얼음 천국이 되어서 사람들을 부른다. 아이 어른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은 금봉지에 몰려들어 얼음장에 동그란 구멍을 내고는 파리낚시를 집어넣은 채 고기가 물려들기를 기다린다. 이 손님들을 위해 금봉지에서 지도상의 직선 거리로 30km나 떨어진 의성IC 아래 봉양면 입구에서부터 낚시도구들을 팔고 있으니,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곳의 ‘겨울낚시’가 얼마나 유명한지는 충분히 짐작을 하고도 남을 것이다.
금봉지 일대는 가을의 아름다운 단풍으로도 크게 알려져 있다. 호수 양옆으로 떨어질 듯 고개를 숙인 채 나무들이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여인처럼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정경이 장관이다. 곱게 단풍 든 가을 나무들이 형형색색으로 맑은 물에 비친 풍경 또한 나그네의 발목을 붙들어 잡을 만큼 매혹적이다. 못둑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호젓이 감상하는 주월사住月寺 방향의 오색찬란도 이곳에 와보지 않은 이들에게 말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아름다움이다. 산림청이 어째서 금봉지 저 안 깊은 산속에 자연휴양림을 건설했는지 호수만 보아도 짐작이 된다.
계곡 속 깊은 그늘 금봉지, 겨울 낚시터로 유명
금봉산 자연휴양림 뒷산에는 공민왕이 머물면서 반란군을 없앴던 성터도 있다. 그래서 이 골짜기를 성골城谷(성곡)이라 하고, 성터를 ‘금학리 성지城址’라 부른다. 성터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은 성골을 따라 930번 지방도로까지 내려가면 금학리라는 마을에 닿기 때문이다.
금학리라는 이름은 옛날에 황금金빛 학鶴이 날아왔다고 해서 생겨났다. 금학리와 금봉지를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들도 황학산, 청학산이다. 금학리 중에서도 학소鶴巢는 학鶴의 분위기를 가장 생생하게 살려준다. 학의 집巢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금학리 개울가의 이 기암절벽은 옛날 수백 마리의 학이 집을 짓고 아름답게 살았던 곳이다. 바위의 모양도 학이 날아오르는 모습 그대로다.
학들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의성군 신평면 중률리에 해마다 수도 없이 날아드는 ‘의성 군조郡鳥’ 왜가리들이 바로 그들인지도 모른다.
금학리에는 오늘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학들이 머물고 있다. 날지 않을 뿐, 길가 나뭇가지 위에 줄지어 앉아 있다. 차를 몰고 금봉지 쪽으로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새들을 보며 놀라지 않는 이가 없다. 새들이 무리를 지어 앉아 있는 지점의 담배포 할머니는 가던 길을 멈춘 채 ‘놀란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는 나그네에게 “여기 솟대들, 테레비에 세 번이나 나왔니더!”라며 자랑을 한다.
금학리 도로변에는 수천 마리 솟대
수백 마리의 새를 얹은 솟대들이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서 있다. 이 보기 드문 풍경을 만든 이는 금학리의 김수씨이다. 그는 집 안에도 갖가지 나무조각 등을 직접 제작해 전시하고 있는 농민 예술가다. 본업이 농부이지만 솟대까지 만들어 금학리를 ‘테레비에 세 번이나 나오는’ 명소로 만들었다.
‘긴 장대’를 뜻하는 솟대는 옛날 삼한 시대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늘신에게 제사를 지낸 곳인 소도蘇塗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므로 소도에서 비롯된 솟대에도 종교적 의미가 있다. 옛사람들은 공동체에 경사나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마을 사이에 경계선이 필요할 때, 풍년을 기원하는 등 제사를 지낼 때에 솟대를 세웠다. 요즘도 굿을 하는 집 앞에 가면 긴 대나무를 세워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도 솟대로 보면 된다.
솟대 꼭대기에는 흔히 새를 얹었다. 새 중에서도 특히 오리를 많이 얹었다. 오리는 하늘도 날고, 땅위도 걸어다니고, 물에 떠다니기도 한다. 우주의 삼재三才에 두루 다니는 동물이라는 점에서 신과도 통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진다. 홍수가 나도 문제될 게 없고, 알도 한꺼번에 많이 낳기도 한다. 안전과 풍요의 상징인 것이다.
금학리에는 지금도 여전히 학이 날고…
금학리 솟대들 위에는 물론 오리만 얹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솟대들이 꼭 종교적 의미를 가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길가에 줄지어 세워져 있는 솟대들은 금학리라는 이름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학이 다시 날아왔구나!
역사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전통이 어떻게 부활하는지를 금학리의 솟대는 잘 보여준다. 생뚱맞은 것을 ‘자기 것’인 양 억지로 선전할 것이 아니라, 지나간 세월이 남긴 ‘이곳’의 문화유산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이 옳다. ‘구슬玉’과 푸른 ‘산山’이라는 이름을 가진 옥산은 ‘옥사과’와 푸른 호수. 자연 휴양림과 같은 친환경 이미지를 앞세워 어지러운 현대 사회를 잘 헤쳐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