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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적잖이 중국을 오가며 수많은 한국인들을 만났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정체를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묘한 경계선에 선 이들이었다.
한 마디로 상당수의 사업가들은, 사업과 사기의 경계선에 서 있었다.
물론 이렇게 단정해 말하면 해외에 계신 분들을 욕보이는 언사가 될 수도 있는데,
실제 중국에서 사업을 해본 제 친척 한분은 내게 이렇게 정리했다.
"아, 그게 아주 간단해요.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는 시스템이지...
그런데 그건 전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 아닐까?
그게 성공하면 사업가가 되는 거고, 실패해서 돈을 잃으면 사기꾼이 되는 것은,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거의 모두 사업을 위해 건너온 사람이고,
당연히 실패 경험이 많으니
그렇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겠지...."
심양에 도착한 첫날 밤 박 어르신을 통해 사업가 A씨를 만나게 됐다.
그를 호위하던 조선족들은 그를 '회장님'이라 불렀다.
그는 매우 세련된 표정에 말씨 그리고 한국에서의 화려한 인맥,
게다가 중국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다.
그리고 대화가 끝나가던 무렵 그는 나에게 이런 제안을 건냈다.
"내일 특별한 일정이 있나요?
없으면 나랑 같이 내가 어떤 사업을 하는 지, 따라다니면서 구경하는 건 어때요?"
아니 이리 고마울 데가.
평소 한국인 사업가들의 활동이 궁금했던 차에,
나는 내가 오히려 데려가 달라고 부탁해야 맞다며 그 제안을 덥썩 수락했다.
그리고 그는 새벽 6시 30분에 내가 묵은 민박집으로 차를 몰고 왔다.
새벽 6시30분에 호텔 위에서 바라본 시타(西塔)의 풍경.
처음에 서탑이라고 하길래, 어떤 탑일지 상상이 안갔는데 이렇게 위에서 내려다 보니
단박에 이해됨.
저런 형식의 탑의 기원은 다름아닌 티벳불교다.
애당초 티벳불교는 중국과 큰 연관성이 없었는데,
몽골족인 원나라가 티벳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급성장,
원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칸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만주족 황제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원-청 시대 귀족 종교로 성행했다.
심양은 만주족의 수도였으니 만큼 티벳불교 양식이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왠지 낯설다.
심양의 종합체육관이 차창을 스쳐 지나간다.
베이징 올림픽 영향인지 지붕이 돔처럼 덮힌 최신식 시설을 갖췄다.
그리고 거리를 청소하는 세련된 여성 청소부.
첫 번째 행선지는 한 예술학교와의 교류협력 건이었다.
그를 잘 모르는 나는 묵묵하게 그의 사업활동을 지켜보기로 작심하다.
그럼에도 너무 궁금해 나는 그에게 중국 대학과의 협력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사업성이 있냐는 질문이었다.
"물론이죠. 한국의 SKY대학을 빼고는 거의 전 대학이 중국의 대학과
교류를 원하고 있어요.
남들보다 먼저 학생교류 MOU 것을 얻어 내면 한국대학들이 좋아하는 거죠."
그가 말하는 사업이란 교환학생을 뜻했나 보다.
차는 어느새 요녕성 예술직업학교에 도착해 있었다.
이 학교는 우리나라 전문대 수준 이하의 캠퍼스를 갖고 있었다.
학교 소개코너를 보니 학생들은 직업 예능인(춤-노래-댄스-전통음악 등)의 코스로 사회진출을 하고 있었다.
안내가 되 들어간 교장실은 그럴싸했다. 교장과 부교장 모두 근사하게 생긴 이들이었다.
그가 소개해준 예술학교 교장은 이곳 심양에서 예술극장 극장장을 오래한 사람이라고 했다.
공산당 간부 출신이라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아주 말끔하고, 손도 부드럽고 말도 그럴싸 했다.
인사가 끝나고 협상이 진행됐다.
A회장은 몇몇 대학이름을 거명하고 교환학생 제도를 설명했다.
그리고 이 학교들과의 상호협력 MOU를 체결하자고 제안한다.
자신이 나서면 한국 대학으로 학생들을 적잖이 보낼 수 있을 것이란 얘기다.
(간단해 보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학생이 오가는 일이기 때문. 아마도 인력 송출에 관련된 일이라 쉬운 일이아니다)
협상의 모습: A회장(가려서 안보임)은 한국어로 통역하며 수행한 조선족
설명을 들은 교장은 간곡한 표현으로 일단은 어렵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우선 학교가 이사를 하고 4년제로의 승격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그게 확정이 된 다음 한국대학들과과 교류협력을 체결해도 늦지 않다는 것.
물론 일리있는 말이다.
이 자리를 주선한 박 어르신은 이곳 심양에서 문학인으로 활동한 분이다.
문학인, 그것도 소수민족 문학인이 돈을 벌었을리 없다.
그러나 중국인 인맥은 조금 갖고 있다. 그것을 가지고 나이 후반전을 살아온 셈이다.
A회장은 집요했다.
간단하게 친하게 지내자고 받아쳤다.
우선 싸인을 하면 친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
일단 사인이 급하다는 뜻이다.
그 사인이 있다면 한국에 뭔가 보여줄 데가 있다는 뜻이리라.
순간 그가 일종의 브로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글쎄. 그는 마치 협력대학을 수집하는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노련한 중국인 교장을 설득하기는 힘들었다.
간단하게 패퇴했다.
여기서 느낀점 하나.
중국어를 모른 채 남의 인맥으로 사업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깨닫다.
A회장은 중국을 잘 안다고 하지만 중국어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별로 좋은 자세가 아니다. 물론 육십대라지만 중국에서 10년을 살았는데 그래선 곤란했다.
학교를 빠져나오니 심양 외각지대에 대규모 아파트 타운이 등장했다.
한국의 SR신성건설이라는 회사가 호기롭게 건설한 한국형 아파트 단지란다.
중국에서 저 정도 규모의 아파트 단지를 분양한다는 것이
도대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중국에서 사업을 한다는 것.
한국인이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것보다, 수 백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수 많은 한국인이 꾸역꾸역 중국으로 몰려간다.
물론 그것은 도전적 DNA를 가진 사업가들의 천성이다.
그 곳에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승용차가 심양시 외곽으로 빠져나간다.
심양은 사방으로 거의 뻥~뚫린 평야에 위치한 도시다.
심양에서 평생을 살아온 박 어르신은 이렇게 말할 정도다.
"내가 어릴적 책을 보니 '산'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어, 주변에 산이 있어야 산을 이해하지..."
이 나무들은 방풍림이라고 했다.
평야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을 막아 농사가 잘 되게 하기 위함이란다.
방풍림의 규모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거대했다.
A회장 일행의 2차 공략지는 심양 인근의 한 면사무소라 했다.
평야가 끝이 아니 마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집집마다 들어선 볏단이 인상적이다.
사실 우리 어릴적에도 시골에는 어디나 볏단이 저렇게 집 모양으로 쌓여 있었다.
특히 겨울에는 저 볏단을 갖고 불도 때고 아주 요긴하게 사용했었다.
농촌의 겨울풍경, 특히 동북삼성은 을씨년스러웠다.
눈이 녹은 물로 길은 흙탕물로 뒤덮였고, 정리되지 못한 길은 승용차 통행까지 불편하게 만들었다.
자. 다시 한 면사무소에 도착하다.
중국은 시/군 단위 아래에 '진'이라는 행정구역이 존재한단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면 단위인데, 인구나 관할구역의 넒이가 우리나라 면보다는 조금 넓다고 한다.
우리가 면장이면, 중국은 진장인 셈이다.
중국의 농촌이 주로 진으로 구성된 것을 생각해 보면
진장이나 진사무소 관리들의 권한과 파워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일 터이다.
진장실로 찾아간 일행은
진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속내를 비친다.
"이 마을, 지역에도 한국으로 나가 돈을 벌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 아니오.
우리가 그 일을 도와주겠소. 한국어 선생님을 대주겠소.
한국의 제도가 바뀐건 알고 있지요? 한국어 시험을 통과해야 5년 정도의
한국행이 가능합니다."
순간 나는 이들이 인력 송출사업을 하려는 것임을 알아챘다.
중국 관리들과의 협상 시작
물론 이 사업이 공짜는 아니다. 돈이 되는 사업이다.
어떻게 돈이 될까?
우선 중국인들이 한국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최소한 3개월 코스의 수업이 필요하다.
A회장은 그 비용을 이렇게 잡았다
* 4000위안+교재비 300위안=> 3개월 어학학습비
* 5000위안 => 한국행 확정이후 직업원 알선비
일단 중국인 한명이 한국으로 건너가기 까지는 1만위안,
한국돈으로 약 180만원이 필요한 셈이다.
중국 돈으로 대단히 많은 돈이다.
물론 달콤한 열매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일단 한달에 120만원 이상 벌수 있다고 말한다.
주말 잔업까지 다 포함한 액수다.
한국에서도 생활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30만원이 필요하다.
한달에 90만원을 송금한다고 5년간 5000만원 정도는 벌 수 있게 된다고 말하면 된다.
이 과정에서 송출업체가 챙기는 돈은 적어도 절반 이상이다.
그러니 1000명을 송출한다면 1인당 100만원의 돈이 생긴다면 10억이 넘는 큰돈이다.
그 진장은 자신은 잘 모르겠다며 담당 주임을 소개했다.
대외협력 담당자인 셈인데 풍채가 당당했다.
알고나니 그의 풍채는 군대에서 단련된 것이었다.
중국의 모든 공무원은 군대와 연결돼있고, 다시 당과 연결돼 있었다. 군=당=공무원 일체인 셈이다.
군에서 우수한 인재가 다시 지방공무원으로 유입되는 형국. 꽤나 매력적인 시스템이다.
그와의 협상은 간단치 않았다.
조그만 심양의 변두리 마을에도 평양식당이 존재했다.
심양에만 이 같은 평양식당이 수십개가 된다고 했다.
한 여성 종업원이 문 앞에서 서 있었다.
그녀의 자태가 너무 고와 한 동안 멍하니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 관리는 5000위안이라는 큰 돈에 대한 보장책을 요구했다.
당연한 요청이었다.
학습비만 부담하고 만일 한국에서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경우,
그 파장은 만만치 않다.
결국 A회장 일행과 관리는 인근 식당으로 향했다.
인력 송출 사업은 양쪽에 큰 이득이 되는 사업이다.
한국은 매년 수 천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인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권리가 강화되면서 4대 보험과 최저임금이 보장되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분명 5년 뒤에는 돌아가야 한다.
과거에도 송출비리는 커다란 사회문제였다.
제도의 변화로 그 비리를 조금 줄여보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번의 시도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점심의 술자리에서 벌어진 무의미한 말타툼 때문이었다.
매우 재미있는 자리였는데, 그 기억은 기록하기가 간단치 않다.
서로 매우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가던 중, A회장이 이 관리를 자극하는 말을 던졌기 때문이다.
A회장이 보기에 이 사업은 중국인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 관리를 자극하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중국 공무원들은 인민을 위하는 것 같지 않다.
우리나라도 20년 전에는 공무원들이 대개 그랬다...우리 제안을 받아들여라..."
이 폭탄 발언에 술자리는 아수라장이 됐다.
그는 중국인들을 교화시키려고 한 셈이다.
든는 나 까지도 순간 움찔했지만, 바보같은 참모들은 그 말을 그대도 중국 공무원에게 전달해준 것이다.
공개적으로 모욕이 이뤄지자 이 자리를 주선한 박 어르신은 자리를 뛰쳐 나갔고,
그 중국인 관리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어수선해졌다.
덩달아 나는 이 둘을 화해시키기 위해,
그 관리에게 "너는 참 대장부다, 너는 참 멋지다, 당신은 최고의 공무원" 이 따위 말을 지껄이며
그에게 술을 건네야 했다.
한 자동차 공장 부지.
이 부지를 소개한 박 어르신은, 예전 일제시대에 이 부지가 경성방직 심양 공장이 있던 자리라고 소개했다.
여기서 일하던 한국인 직공들은, 이후 러시아 적군이 심양으로 쳐들오 오자 모두들 강간을 당했다며 분개했다.
심양의 시타(서탑)지역 유흥가 모습.
심양으로 돌아오는 길은 예상대로 쓸쓸했다.
A회장은 소득없이 자신의 본거지로 되돌아 갔고,
이 자리를 주선한 박 어르신은 다시는 그 사람과 거래 안하겠다며 씩씩거렸다.
"내가 중국인 인맥 팔아 이렇게 살고 있지만, 저 A회장이 성공 못하고 실패하는
이유는 너무 명백해"
중국어도 안되지, 한국 방식으로 사업하려고 하지....
심양의 시타 지역 물가는 살인적인 수준이다.
서울 강북지역의 물가와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이 곳에도 불황의 파고가 몰려왔다.
환율이 폭등하자 한국에서 돈을 송금받아 사업하는 이들은 거의 쫓겨날 처지가 됐다.
그리하여 시타 지역의 한국인들도 힘을 잃고 헤매이고 있었다.
중국에서의 사업이란
1단계는 대개 투자로 시작된다.
한국에서 싸간 돈으로 열심히 공장도 짓고 농사도 짓는 단계다.
2단계는 대개 계속 까먹는 시기다.
3단계는 수익이 나지 않자 투자를 줄이고, 중국 내에서 자력갱생을 도모한다.
4단계는 이 마저도 실패하고 브로커로 나서는 단계다.
중국에서의 인맥과 경험을 바탕으로 무언가 연결하는 단계다.
A회장은 이미 4단계로 건너온 분이었다.
무언가 연결을 통해 중간 수수료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과연 이 분은 어떻게 다시 과거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을까?
안쓰럽고 미묘한 감정이 교차한 하루였다.
출처 : 우리가 아는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