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없는 나무
김 구영
과거에는 양반과 상민의 구별이 있었다. 상민은 돈을 벌면 양반이나 갖고 있는 족보를 큰돈을 들여 만들기도 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5형제분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위로형님들의 모습은 나는 보지 못했으나 아버지의 바로 윗 형님은 몇 번인가,우리 집에 오셨다.
내 고향은 지금의 청주시 오송읍 봉산리 인데 지금은 제이 생명공업단지가 되어 아파트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다. 한 때는 청풍 김씨 집성촌 이었고, 100가구가 넘게 살았고 세도가 당당한 판사 댁이 세 가구 있었다고 한다.
고향집은 안채와 사랑채가 일자집으로 마주보고 있었고 집 한 채에 방은 아랫방 윗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마루는 방 앞에 연결되어 서로 바라보고 있어, 그 거리는 15미터 정도 떨어졌다. 안채와 사랑채 마루에 앉아 큰 소리로 말해야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하루는 큰아버지께서 오셨다. 우리 집에 오시면 항시 조용히 계시다가 가시고 하였는데, 언제 가는 나를 붙잡고 논어에는 이런 말이 있는데, 공자님 말씀은 이렇고, 맹자는 어떠했다는 식으로 나에게 이야기를 해 주셨다.
내가 어릴 때 기억이라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은 안 나지만 다정하게 대해 주셨던 기억은 난다. 이분이 셋 쩨 큰아버지로 성남 면에 사셨다.
제일 어르신 큰아버지는 같은 동네 윗말에 사셨는데 나는 얼굴도 보지 못 했지만 전해들은 말로는 큰집에서 잠시 훈장임을 하셨다 한다.
둘 제 큰아버지는 한양 땅에 사셨고 역시 얼굴도 못 보았고, 둘 쩨 큰집에 같은 돌림자를 쓰는 사촌 형님이 계셨는데 ,삼촌인 아버지보다 나이가 한두 살 적었고. 제일 큰집 사촌 형님은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 집 오면 항시 우리 아버지를 삼촌으로 지성으로 모셨다
큰집과 우리 집은 같은 동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우리 어머니가 처음 시집 와서는 큰 집에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어, 아버지께서 모심을 때 모를 심어주기로 하고 장래 쌀 얻어다 구명(救命)하였다 한다.
그 후에도 가난은 벗어날 수 없어 큰 집 형님은 서울로 기술 배우러 갔다.
기술은 둘 쩨 큰집 누군가의 소개로 미장공을 배우게 되었다. 그 후로 집에 돌아와 아버지가 먹여 살인 큰집 식구는 큰집 장조카 덕분에 자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오 형제분의 막내 분 이였는데 위에 셋 분은 유학자 같이, 양반처지에 막노동은 안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어릴 때 서당에 가라고하면 낫을 찾아 지개에 꽂고는 산으로 향하였다 한다.
그 시절은 상민과 양반 구별이 무너질 때인데 집안은 먹을 것이 궁색했고, 겨울이면 땔 나무가 없어 쩔쩔 매였다 한다. 낮과 갈퀴를 짊어지고 산으로 향하는 막내아들을 누구도 붙잡아 서당에 가라는 사람은 없고 나무해오는 것만 반가웠던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지금의 초등학교 수업도 받지 못하고 말았다. 그 후 결혼도 하고 농사꾼의 가장이 된 것이다.
어머니는 양반집 막내아들이라는 말만 믿고 결혼하였다 한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아버지가 젊었을 때 나무을 해 장에 같다 팔아 쌀을 사먹던 시절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나뭇짐은 어느 누구의 나뭇짐보다도 예쁘고 커서 쉽게 팔고 집에 왔다 한다.
나무는 조치원에서도, 청주에서도 팔았다 한다. 청주 가면 조치원보다 값을 더 많이 처서 받을 수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 전날 해다 놓은 나뭇짐을 새벽에 일어나 청주 본전 통까지 지고 가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땔나무가 없는 안방마님들이, 머리위에 해가 올라오면 나무를 구입하기 위해 장터를 나온다고 했다. 나뭇짐을 사겠다는 부인의 승낙이 떨어지면 부인의 뒤를 따라 나뭇짐을 내려놓고, 오던 길을 다시 되 돌아오면 해가 중천을 넘어 기울어 가고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로 부터 들은 이야기를 적다보니 칠십이 넘은 늙은이가 회상하기에는 모자람이 많지만 지금에 생각하면 힘들게 살아가신 분들의 이야기가 우리 부모 뿐 이겠냐만 나무해다 팔아 목숨 연명한 사람이 그 시절에는 많았다 한다.
지금 세상은 돈 있는 사람은 살기가 편할지 모른다. 돈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몰자한(沒字漢 무식쟁이)이는 남의 하수인을 면할 수 없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살이 고달프다고 눈물을 왜 흘려, 진한 행복 참사랑은 마음먹기 달여더라”하는 유행가 가사가 있지만, 백년도 못사는 인생 세상만사 얽힌 사연은 욕심과 근심 걱정 빼면 홀가분할 것이다.
한 평생을 살면서 옆에서 지켜본 자식의 입장에서는 늙어서나 젊어서나 우리 아버지는 욕심과 걱정이 없었던 행복한 사람같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살이 못 배우고, 힘들다고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
시간 없어 편히 쉴 여유가 없었기 때문 일 것이다.
뿌리가 튼튼한 가문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농사 짖어 먹을 논밭이라도 유산 받은 것이 있다면 살아가기가 어떠했을까? 나의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는 세금을 못 내어 토지를 세금으로 대납하였다 한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집안에 가난의 허세(虛勢) 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기울어 가는 가문에서 어린자식이 해오는 땔나무에 얼은 몸을 녹이는 처지가 되면 부모 마음은 어떠했을까?
사람은 배운 능력과 재주를 이용하여 평생을 먹고 산다. 양반이라는 허세로 삶의 방법을 깨우치지 못한 사람은 밥도 먹지 말고 살아야한다.
나무도 온갖 풍파와 바람, 추위를 견디면서 성장한다. 뿌리 없는 나무는 죽는다. 뿌리가 약한 나무도 옮겨 심으면 죽을 확률도 있다.
인간도 뿌리가 튼튼한 집안에서 탄생한 사람은 잘 먹고 잘살아 간다.
못 배우고 받은 재산도 없는 사람은 ‘뿌리 없는 사람이다.‘
아버지가 사시던 옛날에는 먹고, 자고, 입고, 추위를 이기는 것이 큰 문제였다. 이것만큼 중하고 귀한 것은 없었다.
자연을 이용한 먹고 사는 기술은 물과 햇볕이다. 물과 따뜻한 봄볕은 만물의 뿌리를 만들 수 있었다.
살기 위한 방법에 불타는 인간은 먹을 것을 생산하는데 힘썼던 것이다. 최고의 생활수단 앞에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 ‘가장배우기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도 삶의 기술자 앞에는 육체를 굳세게 하는 운동 이였으며, 가난은 세상 살아가는 정신을 단단히 할 뿐이다. 달인은 그 분야의 최고의 기술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나는 삶의 뿌리를 더욱 크게 키워 보고 싶다. 문학이 무엇이냐?, 자서전 예술이 사람을 성숙시켜 줄 수는 있어도 우리 몸을 유지 시켜주는 에너지원이 될 수는 없다. 먹고사는 것이 중요 하지만, 정신적인 문제가 제기되는 현대 문명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