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니하
단군학회 제34차 학술 발표회 “기독교와 단군”에 마고김황 혜숙 교수님께서 초대되어 2005년 6월 25일 14:00 - 18:00 중앙일보 세미나실에서 “마고문화와 고조선”이라는 논문을 발표 하셨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늦게나마 참석하게 되어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드립니다.
발표회에는 3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앞서 발표된 2편의 기독교와 관련 단군에 대한 논문 발표와 논평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교수님의 논문발표와 이에 대하여 항공대학교 우 실하 교수님께서 논평을 하여 주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단군학회 성격과 학술발표 형식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하시어 교수님이 준비한 글은 일반 시민을 상대로 하는 강의 형식으로 준비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약 30-40여명의 학자들 앞에서 단군신화는 웅녀신화로 바뀌어 역사화 되어야 한다고 당당히 밝혀 세우셨고 상당한 지지와 동의도 이끌어 내셨습니다.
여기에 참석하신 분들은 아마도 너무 뜻밖의 발표가 나오자 신선한 감각(new code) 으로 받아 들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국내에는 이제사 처음으로 논쟁의 씨를 던져 놓은것 뿐입니다.
교수님의 논문에 대한 격려와 감사를 드리는 분들도 계셨지만 비평자 나 질문자 공히 학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부도지와 한단고기에 외 다른 방증자료( 고고학, 민속학, 신화학 등) 제시를 요구 하셨고 이에 교수님께서는 세계 학계에서의 한국학의 왜소함과 그 비중에 대하여 울분을 토 하셨습니다.
magoism은 始原의 “마고주의” 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과 관계되는 학문을 망라한 종합 인문학으로서 기존의 시간, 공간, 인종, 종족, 지역, 종교를 뛰어넘는 새로운 이론 틀로서 뒷받침 되어 주어야 보편화된 세계주의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첨부한 사진에서와 같이 교수님은 너무 가냘프고 곱디고운 우리 겨레의 한 여인이십니다. 그러나 그 가냘픈 여인에게는 마고의 큰힘이 내재되어 있을 줄 압니다. 우리 모두 마고를 접하고 느끼게 되면 그 힘을 같이 공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는 우리 모두 하나 되어 교수님에 대한 현실적인 지원과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입니다.
아래에 교수님 논문에 대한 우실하 교수님의 논평을 올립니다. 이 논평이 그래도 국내 학계의 동의를 이끌어 내고 논쟁 할수 있는 국내 학계의 시각이라 사료되며 이 논평에서 질문하는 답을 구하는 것이 우리 마고 교실의 첫 번째 일이라 생각되어 집니다. 회원님들의 많은 첨여와 의견을 바라옵니다.
고맙습니다.
<마고문화와 고조선>에 대한 논평문
우실하 (항공대 교수 www.gaonnuri.co.kr), (woosilha@yahoo.co.kr)
황혜숙 님의 논문을 읽으면서 고대 동북문화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논의를 이끌어 내는 <부도지>와 <한단고기>의 사료적 신빙성이나 가치의 논란은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라는 점도 분명하다. 논문에서 황선생님은 "고조선은 신화가 아니라 역사로 대접을 받아야 당연하다. 아래에서 간략하게나마 종교여성학적 입장에서 고조선에 관한 신비를 벗겨보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논평자도 고조선은 역사로 다루어져야한다고 본다. 그러나 종교여성학의 입장이 아니라 역사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부도지>나 <한단고기>에 의존해서 역사로 다루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래에서는 논문의 구체적인 부분들을 살펴보면서 논평을 해보기로 한다.
1. "<부도지>와 <한단고기>는 마고문화를 연구하는데 두 가지 중요한 경전이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책은 여전히 학계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지 않고 있다. 필자는 <부도지>와 <한단고기>가 사료적 가치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여러가지 이유로 아직도 부진한 한국 인문학의 상황 때문에 이 두 책이 계속 국내외 학자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다고 본다. "
(1). <부도지>와 <한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가?
(2). '사료적 가치'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부진한 우리의 인문학의 상황' 때문에 이 책들이 외면당한다고 하였는데, 그 인문적 상황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3). 이런 책들의 사료적 가치를 다양한 방법으로 입증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2. “그동안 한국학이 한국역사, 한국문화, 한국사상, 한국종교, 한국철학, 한국인류학 등의 분야에서 최소한의 학문적 깊이를 유지하고 있었더라면, 지금쯤 <부도지>와 <한단고기>에 대한 찬반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1) 최소한의 학문적 깊이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
(2) <한단고기>에 대한 사료적 가치 논쟁은 초기에 많이 있었고,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3. “한국역사가들의 여전히 부도지와 한단고기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변하고 있는 동안......”
(1). 재야사학계에서 끊임없이 이 책들의 사료적 가치를 방증하는 자료를 찾고 있다.
(2). 발표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종교 신화학 전공자라서 이 책들을 쉽게 다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학자의 입장에서는 발표자처럼 사료적 가치에 대한 입증 없이 다룰 수는 없는 것이다.
4. “고조선은 신화가 아니라 역사로 대접을 받아야 당연하다. 아래에서 간략 게나마 종교 여성학적 입장에서 고조선에 관한 신비를 벗겨보고자 한다.”
(1). 논평자도 고조선은 역사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종교 여성학의 입장이 아니라 역사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쉬운 선언이 아니다.
5. “마고문화학(마고의 전통을 연구하는 모든 노력을 포함)의 입장에서 보면 단군신화는 웅녀신화라고 불러야 옳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단고기>가 1986년 경 정식으로 출판되기 전까지 한국인들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신화 기록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삼국유사>의 단군신화가 <한단고기>의 웅녀신화에 의해서 조명을 받아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한단고기>가 웅녀신화를 근거로 한국역사와 정치적 정통성을 기록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재야 학자들은 거의 없다. 재야학자들은 삼국사기의 저자 일연과 비슷하게 혹은 그보다도 더 가부장적인 관점에서 여성중심적 한국역사를 왜곡하고 소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까지도 인정하지 못하면서.”
(1). 단군신화를 웅녀신화로 부를 수 있는 가능성을 열려 있다.
(2). 그러나 <삼국유사>등 더 오래된 기록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명백한 고고학적 발굴결과나, 이보다 더 오래된 신빙성 있는 문헌 기록에 의한 것이다.
(3). <한단고기>와 <부도지>의 신뢰성으로 유사기록을 뒤집는 것은 아직은 무리다.
(4). 웅녀신화로 불러야하는 더 신빙성 있는 방증자료를 제시해야한다.
6. “범족은 사나운 약탈자들의 집단이었고, 웅족은 고집이 센 여성중심적 지도력을 가진 집단이었다. 두 집단의 대결은 동굴에서 시험되었다. 결국 웅족이 대결에서 이겨서 웅족의 지도자인 웅녀가 한웅이 되었다. 그리고 웅녀가 낳은 자식이 정통 황손으로 족보에 기록되었다.”
“필자는 동북아시아의 역사에서 첫 무녀들이 여성들이라는 점과 마고신화에서 나오는 모계 승계전통을 고려해서 단군조선까지의 한국의 건국영웅들이 여성들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다섯 명의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마고와 궁희의 주권을 승계했다고 본다.”
(1). 단군조선까지의 역대 왕들도 여성이었다는 것은 모계 사회라는 시기를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한 주장이라고 본다.
(2). 기원전 3500년 전까지 올라가는 홍산문화 시기 옥기(玉器)에 보이는 여러 복합 토템에는 가슴이 풍만하고 둔부가 발달된 100% 여성모습의 신상이다. 정식 고고 발굴된 우하량 유적지의 여신상이나 비너스 상들도 있다.
(3). 논평자의 입장에서는 발표자가 <부도지>나 <한단고기>의 기록에만 의지하지 말고 이런 고고학적 발굴 성과들을 구체적으로 활용하기를 바란다.
7.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이고 어머니는 웅씨의 왕녀이며 신묘(B.C.2370)년 오월 2일 인시에 밝달나무 밑에서 태어났다. 14세 되던 갑진(B.C. 2357)년에 웅씨의 왕은 그가 신상하다 함을 듣고 그로써 비왕으로 삼고 대읍의 다스림을 대행하도록 하였다.”(<한단고기>)
“단군은 <부도지>에 의하면 마고의 후손 통치자, 황궁, 유인, 한인, 한웅이 그랬던 것처럼 무속적 의례를 전수받고 천부삼인을 최고 통치자의 표지로 물려받았다.”
“웅족은 한국말기에 북쪽에서 이주한 마고의 주권을 대표하는 고대 한국의 정통 여임금족이다. 한국말기에 범족이 사회적인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것을 평정하려고 내려왔다고 보인다.”
“결국 웅족의 여왕이 동정출산을 하게 되자 사회적 혼란이 종결되었다. 마침내 웅녀는 한웅으로 받들리게 되었고 범족은 먼 곳으로 추방되었다. 이것은 기원전 4000년경 일어난 일이다.
“기원전 4000년 경의 범족의 반란은 새로운 왕권을 설립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웅녀신화는 범족이 웅족과의 대결에서 패배하여 사해의 먼 곳으로 쫓겨났다고 쓰고 있다.
“이렇게 범족 남성들의 반란은 평정되었다. 그러나 사해로 쫒겨갔던 범족이 다시 돌아 왔는지 이들은 여전히 한웅을 시조로 한 배달국의 주위에 맴돌면서 주거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단고기>에서 치우천황이라고 알려진 자오지한웅이 “이에 백성들과 더불어 범 무리들을 따로 떼어서 하삭에 살도록 하고는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살피게 하였다(임승국 변역, 178).” 는 기록을 발견하게 된다.“
“한국말기에 혼란을 일으켰던. 범족은 이제 치우천왕에 의해서 단국의 군사적 세력으로 흡수 된 것이다.”
(1). 이런 논의들은 <한단고기>나 <부도지>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기술이다.
(2). 먼 곳으로 추방된 범족이 정사 기록에 “범을 신으로 섬겼다”는 동예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가
8. “필자가 위에서 말한 해석이 억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단고기>의 네 편의 웅녀 신화를 찬찬히 읽어보기를 바란다. 그러면 필자의 임의적 해석이 들어간 곳이 한 군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웅녀를 한웅이라는 남성의 배우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한웅 자신으로 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필자는 한웅과 웅녀를 두 인물이 아니라 동일 인물로 본다.”
“웅족은 마고의 나라 통치권을 승계하는 정통 황족의 집단이었고 웅녀는 무속사제로서 여임금이었다.”
“웅족의 여성들은 동정임신을 시도했던 통치권을 가진 황족 무녀들이었음이 분명해 진다.”
“동정출산은 <부도지>의 마고신화를 참고하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지극히 정상이다. 왜 그러한가. 바로 마고와 두 딸 궁희 소희가 동정 출산을 한 삼신三神이었기 때문이다.”
(1). 재야사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이다.
(2). 만일 두 책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한다면 한웅과 웅녀가 동일인이라는 임의적 해석은 충분히 받아들일 만하다.
(3). 샤머니즘을 공유하고 있는 북유럽 신화에서는 ‘이그드라실’이라는 삼계를 연결하는 우주수 아래 ‘운명의 3 자매신’이 있고 만주족 창세신화인 <천궁대전>에도 창세 3여신이 삼위일체신으로 나온다. 이런 자료와의 비교 연구도 필요할 것이다.
9. “<부도지>의 마고신화는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의 건국신화에 처녀출산, 영웅이 알에서 태어나는 이야기의 기원을 설명해 준다. 서양의 기독교에서도 마리아의 동정출산으로 태어난 예수가 신의 아들로 인정되지 않은가? 똑같은 사고이다.”
“웅녀는 동정출산을 했기 때문에 신성과 통치권 둘 다를 인정받은 것이다. 마고와 궁희 소희처럼 웅녀도 자웅의 특성을 한몸에 가진 신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1). 난생, 동정출산 등의 기록은 ‘신화’로서 인정되는 것이지 역사자료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2). 발표자는 마고신화를 이야기 하지만 <한단고기>나 <부도지>등의 기록을 역사기록처럼 활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발표자는 앞에서 “고조선은 신화가 아니라 역사로 대접을 받아야 당연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정출산 사건을 그대로 인정 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상징으로 해석해주어야 할 것이다.
10. “놀랍게도 삼성기전 하권의 첫 번째 웅녀신화의 기록은 웅녀가 임시로 변하여 한이되”었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안함로의 기록은 웅녀가 한웅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마고 신화는 물론 웅녀의 동정출산을 고려하지 않은 후대의 가부장적 사고를 가진 사가와 번역자 , 주해자들은 이 부분을 옮기면서 이해가 어렵게 되자 임의적으로 변화, 왜곡시켰다. 삼성기전 하평의 첫 번째 웅녀 신화를 제외하고 그 이후로 전하는 모든 웅녀신화(<삼국유사>의 단국신화도 포함됨)에서는 한웅이 웅녀(곰)를 인간여성으로 변화하게 하고 그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노골적으로 가부장적 여성관을 드러내 주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한단고기>에서 웅녀와 웅족의 전통을 연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한웅 자신이 바로 웅녀요, 웅녀는 단국과 왕검조선을 물론 그 이후의 한국왕조의 여성통치권의 전통을 새롭게 공고하게 한 여임금이었음은 자명해진다. 그리고 웅녀가 세운 문명은 현대문명으로도 풀지 못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하고 평화로운 것이었고 전세계로 전파되었다.”
(1). 그런 왜곡의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을 재야사서가 아니라 다른 자료들로 입증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2).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는 것은 어떤 자료를 토대로 한 것인가 ?
11. “<한단고기>의 웅녀신화를 해석하면 마고의 나라 신권과 왕권을 계승한 웅족의 여임금이 북쪽(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지역으로 추정)에서 남쪽으로 내려와서 한국(7199~3989 BC)말기의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 태백산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단국이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한국역사는 최소한 기원전 719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단군조선(2333-235 BC) 이전에 단국(3898-2333 BC)이 있었고 단국이전에 한국(7199-3898 BC)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많은 재야학자들이 두 번째 동아시아의 고대 연합국을 배달국이라고 부르지만 필자는 단국이라고 부른다. 필자의 다른 저술 참고)”
(1). 발표자는 “고조선은 신화가 아니라 역사로 대접을 받아야 당연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국, 단국은 어떻게 보아야하는가?
(2). 단군조선(2333-235 BC)은 홍산문화 이후의 하가점하층 문화, 하가 점상층문화와 연결하는 시각들이 있다. 단국(3898-2333 BC)은 홍산문화시기와 많은 부분이 겹친다. 홍산문화를 단국의 일부로 볼 수 있는가.
12. “복희와 신농 황제 모두가 웅족의 후손이었다고 <한단고기>는 거듭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면 복희는 배달국의 황제 태우의 한웅의 막내라고 하고 또 “신시로부터 나와서 우사가 되었다”고 하고(임승국역, 176,177), 신농은 소전의 아들인데 소전은 소호와 웅씨에서 갈라져 나간 사람이라고 한다.(임승국역, 178,195) 또한 황제는 소전의 입양아였으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해서 헌구로 유배되었던 사람으로 기록한다.(임승국 번역, 196). 이렇게 우리는 복희와 신농, 황제가 모두 웅녀의 황족의 자손임을 알 수 있다.”
(1). 단순히 신화적 기록이 아니라면 이런 논의를 중국인들이 납득할 수 있는가.?
(2). 세계적인 상나라 전문가 장광직은 상문명을 이룬 이들이 북방에서 남하한 사람들이라고 보고 있고 이들은 하가 점하층문화와 연계되어 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들이 잇다. 물론 반대도 많다. 발표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13. “치우천황과 황제 헌원과의 전쟁은 73회나 계속된다. 연속되는 전쟁으로 인해서 결국 황제는 유망과 함께 동북아시아의 정치권을 잃게 된다.”
(1). 탁록대전에 대한 중국측의 기록에는 치우를 참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상반되는 사료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넘어갔는가?
(2) 하북성 탁록현에 가면 황제와 치우의 성뿐만이 아니라 황제천, 치우천 등 유적들이 남아있다. 최근에는 중국에서 탁록현의 황제천과 황제성 부근에 귀근원(歸을根 園)짓고 그 안에 중화삼조당(中和三祖堂)이 있으며, 삼조당 안에는 황제, 염제 , 치우를 그들 중화민족의 3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 (우실하 , 『동북공정의 선행작업들과 중국의 국가전략』(서울: 울력/시민의 신문, 2004) 참조)
14. “13대 사와라 한웅 (재위 기원전 2774~2709)이후 단국의 연합통치권이 이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치우로 이어지는 청구국이고 또 하나는 여로 이어지는 왕검체제이다. <한단고기>의 사가들이 치우를 자오지 천왕으로 묘사하는 것과 달리 실제로 단국의 통치권은 여에게로 승계되었을 확률이 더 크다. 왜냐하면, 여가 웅녀군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치우는 최고 통치권자로서의 웅족에 미치지 못하는 가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단국의 14대 한웅은 여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리고 더 분명한 것은 단국의 최고 통치권은 여를 통해서 곧 다시 웅족에게로 돌아온다 . 그래서 우리는 단구그이 마지막 왕을 단웅 혹은 웅씨의 왕이라고 부른다.”
(1). 이것을 방증할 수 있는 다른 기록이나 고고학적 유물들을 찾아내야할 것이다.
(2). 재야사서만의 기록을 비교하여 논의하는 것은 신화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일 뿐.
황선생님은 발표문의 말미에서 “앞으로 고조선의 역사와 문화는 이제 <부도지>, <한단고기> 라는 두 책의 고증적 차원을 넘어서서 그 자체로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논평자도 이런 다양한 각도의 연구들이 축적되어 고조선의 전모가 밝혀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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