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의 탄생>을 보고
영화다운 영화를 본 기억이 얼마나 되었을까? 한국에 돌아와 이런저런 영화들을 비디오로 보았는데, 그다지 만족할 만한 것이 없었다. 진짜 영화를 만난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까? 그러다 어제 <가족의 탄생>을 보았고, 유레카처럼 반가웠다.
내용과 형식 모든 면에서, 나는 모처럼 내 마음 속에 별 다섯을 줄 영화를 만났다. 내 생각엔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의 고전인 <안토니아스 라인>보다 낫다. 낫다는 표현이 지나치더라도 절대 꿀리지 않는다. 한국 영화가 어느새 이런 수준의 작품을 쑥쑥 내는지, 내 생각에도 대견하다.
왜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안토니아스 라인>을 떠올렸고, 이 영화가 그 영화보다 차라리 낫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뒤에 말하겠지만 역시 문화적 차이에 기반하고 있는 ‘한’과 관련된 사랑의 힘 때문이다.
이 영화는 세 개의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한판의 그림이다. 처음에 그 모자이크들은 서로 별개인 것 같다. 하지만 끝으로 이어지며 결국 유기적 실체를 드러낸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그 작업이 완성된다. 그리고 마지막, 극장이라면 상영이 끝나고 객석 불이 켜지고 관객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그 때, 자막엔 스텝 소개가 나오며 거기서 이 영화는 또 한 번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 자막 장면, 한 역의 플랫폼을 서성이며 등장인물들이 서로 누군가를 찾거나 기다리는 타인으로 서성이는 것 그것은 우리들의 영원한 현재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을 감독은 ‘가족’이라는 말로 압축하는 것 같다. 즉 우리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지만 마음을 열면 누구나 의미 있는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얼핏 상투적인 도덕주의 설교가 아닌가?
하지만 이 멋진 제목 ‘가족의 탄생’에 걸맞게, 한 가족이 탄생하는 과정을 이제 유심히 살펴보자. 첫 번째 에피소드의 중심엔 문소리가 있다. 돌아온 전과자 동생이 데려온 여자는 엄마 같이 늙은 술집여자(고두심)이고, 그들을 따라 술집여자의 전남편의 전 부인이 버린 어린 여자아이가 온다. 문소리는 동생 때문에 결혼도 하지 못하고 떡볶기 집을 열어 살고 있었는데, 결국 말썽쟁이 동생이 가출하고 오고갈 데 없는 전직 술집여자와 여자아이를 거두어 같이 살게 된다.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문소리)가 닫힌 마음을 열고 남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려운 갈등의 시간을 며칠간 되풀이되는 말없는 밥상 장면으로 보여준다. 그야말로 가슴에 맺힌 한을 삭히고 삭힌 뒤 쓸어내려야만 가능한 일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남의 집 남자의 작은 마누라로 숨어살며 배다른 사내아이를 낳아 길러 사는 엄마(김혜옥) 때문에 삐뚜로 나가며 하루빨리 한국을 떠나고만 싶어 하는 여자(공효진)의 이야기다. 늘 엄마를 원망하고 히스테리를 부리지만 그녀의 마음 밑바닥은 따뜻하다. 결국 불치병에 걸린 엄마가 죽고, 엄마가 남겨준 유년의 추억이 담긴 상자를 열어보며 여자는 흐느껴 운다. 그리고 그녀는 일본행을 포기한 채 배다른 남동생을 데리고 가장이 되어 처녀로서 가난한 살림살이를 해나가게 된다. 재기 넘치고 발랄한 처녀가 자신의 꿈을 접는다는 것은 비통하고 쓰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첫 에피소드의 어린 계집아이와 두 번째 에피소드의 철없는 어린 남동생이 성장해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한 가족이 된다는 얘기로 끝난다. 마지막 에피소드의 여자주인공은 사랑이 많아 ‘헤픈 여자’로 그려진다. 여자(정유미)는 남자친구에게 묻는다. ‘헤프다는 게 그렇게 나빠요?’
그 헤프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는 따뜻한 아궁이 역할을 한다. 그녀들의 '헤픔'은 상식과 도덕의 잣대를 훌쩍 뛰어넘어 이질적인 것을 하나로 뭉뚱그린다. 그것은 엉터리 남정네들이 축내기에는 너무나 강한 힘을 안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이 영화에서 남자들은 참으로 무능력하고 엉터리다. 그래서 가족은 정상적인 남자와 여자라는 부부 관계를 중심으로 이뤄지지 않고 여자인 엄마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남자가 아예 없거나, 있어도 별 구실을 하지 못하고 일만 저지른다. 그게 근현대 한국 남자들의 모습이 아닌가? 나라를 빼앗기고 상놈으로 무시 받고, 착취당하며 굽실대다 안방에서 아내에게 분풀이나 하는 절망한 남자들.
아무튼 이 영화의 초점은 여자에 있다. 그리고 이 여자들은 여느 여자들과는 다른 소위 스캔들의 여자다. 첫 에피소드의 술집여자, 그리고 두 번째 에피소드의 숨겨진 작은마누라. 하지만 그 여자들은 어느 어미들에 못지않다. 술집여자는 제 딸도 아니면서 버려진 여자아이를 받아들이고, 작은마누라는 숨어살며 남편과 씨 다른 아이들에게 극진하다. 그들이 없다면 어떻게 소위 정상적인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이 살아갈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아직도 남성중심의 가부장제가 나은 혈통주의에 의해 제 핏줄을 받아야 가족이 될 수 있고, 핏줄이 아니면 절대 가족이 될 수 없다는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가족관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이고 도덕이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도 아이들이 버려지고, 일찍부터 시작된 해외입양아 수출이 지금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시집살이의 고난도 조선 중기부터 이 땅에 고착된 유교적 가족주의가 왜곡되어 나타난 현상이다. 제 몸에서 난 핏줄만 소중하다고 생각하니, 제 핏줄의 아들엔 집착이 더욱 강해지고, 남의 핏줄인 며느리는 제 자식이 아니니 한없이 얄밉고 얄미운 거다. 그러니 이 땅의 여인들이 남성들의 몸종 같은 처지로 같은 고생을 했음에도 시어미는 며느리 잡어 먹는 호랑이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런 유교적 가족주의가 전부는 아니었다. 비록 합리적 판단에 의해서는 아니지만, 인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팔자려니 하고 제 자식이 아닌 아이를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남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제 가슴의 한스런 응어리를 삭히고, 가슴을 크게 쓸어내려야 했다. 즉 자기를 죽이고 더 넓어진 우리로서의 자기로 거듭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일을 한국의 여자들은 해내곤 했다. 그것이 핍박받는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었던 힘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회심(回心)이다. 기존의 작은 ‘나’를 죽이고 ‘너’를 받아들여 더 큰 ‘나’인 ‘우리(가족)’가 되는 것이다.
이쯤에서 <안토니아스 라인>을 다시 떠올려보자. 3대에 걸쳐 할머니, 어머니, 손녀가 결혼을 하지 않고, 아기를 원하면 남자와 동침을 하여 아기를 갖고 자유롭게 산다. 얼마나 합리적이고 자유롭고 아름다운 삶인가? 미국과 유럽인의 해외입양 문제만 해도 그렇다. 경제적 안정 위에 기독교적 사랑과 합리적 이성이 어느 정도 뒷받침된 그들은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을 기꺼이 맞이해 가족으로 키운다. 우리처럼 핏줄 아닌 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게 어려워 보이지는 않는다.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도 기꺼이 맞이하니 말이다.
하지만 뭣이 찢어지게 가난했고, 유교적 가족주의에 깊이 세뇌 되어 있는 한국인에게 남을 제 자식으로 맞이한다는 것은 아직도 피눈물 나는 고통이 따르는 일이다. 자기가 찢어져 해체되지 않으면 어렵다. 서양의 백인들이 보면 참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한’을 이해하겠는가? 그것은 머리가 아니라 몸과 가슴의 일이다.
결국 작가가 얘기하는 사랑이란 종교적 사랑처럼 보편적이고 폭 넓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지지리 못살고 살 부대끼며 살았던 이 땅의 사람들이 다른 핏줄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숙명의 시험이었다.
아직 우리들에겐 마음에 자리 하나 내주는 게 그렇게 어렵다.
보석 같은 영화를 만나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