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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 120호 평론>
<평론>
허준 ‘동의보감’ 다큐멘터리 방영으로 오해를 수정하라
-이철호 저 허준 ‘동의보감’ 중심으로-
박 혜 숙
서 론
역사는 정사와 야사가 있다. 신라의 역사책은 김부식이 《삼국사기》 정사를 썼고, 승려 일연은 《삼국유사》 야사를 썼다. 중국 삼국시대의 역사도 진수의 《삼국지》가 정사라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야사이다. 일반인은 딱딱한 정사보다 흥미로운 이야기 야사로 입력되기가 쉬워, 머릿속에 기억되고 있는 일들이 사실과 다를 때가 많다.
필자도 이런 문제가 두려워 이문열의 《삼국지 평역》 10권을 샅샅이 읽으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였는지 구분하려 했는데, 지금도 머릿속엔 제갈량이 바람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기도하고 역풍이 불면서 대승하는 장면이 생생하다. 《삼국지》 정사에는 제갈량이 그곳에 계절풍이 부는 자연현상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기록한 것을 이용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동의보감》은 의성 허준이 일생을 걸고 저술해 완성된 의서로 1613년 11월 개주갑인자 목활자로 인쇄, 간행됐다. 책 이름은 ‘동의(東醫)’란 동쪽의 의학 조선의 의학을 뜻하고, ‘보감(寶鑑)’이란 보배 거울이란 뜻으로 귀감(龜鑑)과 같은 뜻으로 오늘날 약효를 입증하는 우리나라 전통의서로 대한민국 국보 제319-3호로 제정되었다.
그리고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 유럽에까지 영향을 준 최고 의서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특히 허준의 성홍열 관찰 보고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최초이고 세계적으로도 최초의 그룹에 속하여 세계질병 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허준은 《동의보감》 집례에서 말하길, 의약의 도가 끊이지 않았는데, 사대사상이 팽배해 중국의학을 신봉하는 세태에 맞섰다. 우리 산천에 나는 약초를 우리 이름으로 써야, 병고에 시달리는 백성이 약이 부족해도, 그 약초를 채취해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다.
중국과는 자연환경, 동식물, 음식, 질병 등이 다르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보고 우리 현실에 맞는 부분만 채택하는 주체사상이 투철했다. 당대에 최고는 중국의 고양생이 쓴 《찬로맥결》이었는데 인용하지 않았다. 신토불이 향약을 중시하고, 우리나라의 약초를 연구하여 민족의학의 토대를 이루었다. 의서는 대부분 사람의 병만 다스린다. 마음을 고칠 줄 모르니 근본을 모르고 말단 말류만 손질한다며 질병 예방에 힘썼다.
허준이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 되니, 그의 생애가 방송을 통해 드라마로 9번 방영되고 《집념》 영화도 나왔다. 드라마나 영화 등은 재미있게 전개해야 시청자나 관람객의 주목을 받으니까 허구적 장치를 한다. 그런데 그 사실이 인상적으로 각인되고 반복되다보니 사실과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많다. 하루 빨리 다큐멘터리로 방영되어 오해를 수정해야 한다.
본 론
얼마 전 허준 《동의보감》 3권을 읽었다. 이철호 저자의 장편다큐멘터리로 한의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 한의학도, 교수들, 의학상식이 부족한 일반인들을 위해 썼다. 명의 한의사인 그가 만난 많은 환자들에게서 찾은 임상 중심으로 심혈을 기울여 쓴 책이다.
선조는 허준에게 명해 단독으로 편찬토록 하되 시급한 의학책인 출산에 관한 《언해태산집요》 보물 제1088호와, 《언해구급방》 응급조치용 약방문과 《언해두창집요》 급성 발진성 질환인 두창에 대한 전문 의서를 썼다. 내장방서(內藏方書) 500권을 내줘 편찬에 고증할 수 있게 했다.
이 3종의 책은 그해에 지어서 바쳤으나 허준은 공무로 바빠서 《동의보감》 편찬은 1608년이 되도록 절반도 끝내지 못했다. 같은 해 선조가 승하하자 그 책임을 물어 허준은 의주로 유배됐다. 유배 이후 연구에 전념한 시간을 얻은 허준은 단시간에 책의 절반 이상을 써냈다.
1609년 말 귀양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온 허준은 이듬해인 1610년 8월 완성된 의서를 광해군에게 바쳤다. 광해군은 허준이 선왕의 유업을 완수했다고 해 그에게 좋은 말 1필을 상으로 내렸다. 전란 직후라 출판 사정이 좋지 않아 3년 뒤에야 출판될 수 있었다.
허준은 양생(養生) 사상을 중심으로 해 중국 의학 이론과 처방의 난맥상을 바로잡고 향약(鄕藥) 사용의 이점을 최대화하며 최소한의 약으로 최대한의 의학적 효과를 얻으려고 힘썼다. 이는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 사회를 회복하는데 획기적인 의학을 제공한 것이었다.
드디어 《동의보감》은 1610년(광해군 2년) 8월 6일(음력), 허준(許浚)이 25권에 이르는 방대한 의서를 완성했다. 왕명으로 체계화된 한의학을 중심으로 동방 의학을 집대성하고자 한 저술에 착수한 지 14년 만이었다. 《동의보감》은 목차 2권, 의학 내용 23권으로 5편으로 구성되었는데 그것은 「내경편(內景篇)」(6권) 「외형편(外形篇)」(4권) 「잡병편(雜病篇)」(11권) 「탕액편(湯液篇)」(3권) 「침구편(鍼灸篇)」(1권) 등이다.
서자로 태어나 출세가도를 달리다, 허준이 선조의 의주 피난길에 동행하며 선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임진왜란 공신 책봉에서 3등에 책정되며 종1품 숭록대부에 올랐다. 그러나 선조 승하의 책임을 지고 유배됐다가 돌아온 뒤에는 권세 없는 평범한 내의로 지내다 1615년에 조용히 삶을 마쳤다. 조정에서는 그를 정1품 보국숭록대부로 추증했다.
우리는 그동안 허준에 대해 방영된 드라마에 어느 배우의 허준을 기억하는가? 《집념》(MBC, 1975년, 배우:김무생), 《동의보감》(MBC, 1991년, 배우:서인석), 《허준》(MBC, 1999년~2000년, 배우:전광렬), 《왕의 여자》(SBS, 2003년~2004년, 배우:최병학), 《향단전》(MBC, 2007년, 배우:임현식), 《구암 허준》(MBC, 2013년, 배우:김주혁, 강한별), 《별에서 온 그대》(SBS, 2013년~2014년, 배우:박영규), 《마녀보감》(JTBC, 2016년, 배우:윤시윤, 김갑수), 《명불허전》(tvN, 2017년, 배우:엄효섭) 등이다.
영화는 《집념》을 1976년 배우 이순재가 허준으로 연기했다. 이로 인해 매력적인 인물 구암 허준의 생애에 대해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고 지자체가 발달하며 정확하지 않은 자료가 그와 관련된 관광지 여러 곳에 가면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고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어, 다큐멘터리로 꼼꼼한 고증을 통해 오해를 수정해야 한다.
첫째, TV 드라마에 허준이 유의태를 스승으로 그리고 있지만, 유의태란 의원은 허준보다 100년 이상 늦은 시기에 활동했으며 허준과는 관계가 없다. 허준은 1572년(선조 5년) 당시 종4품 내의원첨정이었다는 기록이 최초이며, 1573년에는 정3품 통훈대부와 내의원에 올랐다. 1575년부터 선조를 진료하는 어의가 되었다.
그가 아버지 곁을 떠나 경상도의 명의 유의태에게 의학을 배웠다고 나오나, 이는 어디까지나 소설 상의 이야기일 뿐이다. '유의태'라는 사람은 가공인물이고, 그 모델로 보이는 유이태라는 인물은 한참 후인 숙종 대의 인물이다. 허준이 어디서 어떻게 의학을 배웠는지는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 알 도리가 없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의 곁을 떠나지 않고 모셔서, 전후 호성공신 3등에 제수되었다. 게다가 임진왜란에는 류성룡, 이덕형, 이항복, 이원익, 이산해와 더불어 피난가지 않고 자진해서 조정에 남아 선조를 모셨다. 드라마 등에서 의료기록을 빼내서 늦게 선조에게 도착한 탓에 선조가 삐쳤다는 내용은 창작이다.
둘째, 드라마엔 허준이 평안도 용천에서 태어나 경남 산음(산청)에서 자란 것으로 방영되었다. 하지만,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에서 출생했다. 양천 허씨 시조 허선문의 20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상우수사를 지낸 허곤이며 아버지는 용천부사를 지낸 허륜(許碖)이다. 어머니는 허륜의 소실 영광 김 씨다. 이복형으로 허옥(許沃)이 있으며, 바로 아랫동생인 허징(許澂)은 같은 어머니가 낳은 동복형제로, 허준은 허륜의 차남이다.
허징도 형 못지않게 비범한 인물로 서자이면서도 문과에 급제하고, 선조 시절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의 딸과 결혼한다. 각종 기록에 '양천인(陽川人)'이라고 적혀 있다. 선조로부터 양평군(陽平君)이란 품계를 받은 것도 근거가 된다.
그의 고향인 현재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의 민간인통제구역(DMZ) 안에 허준과 부인 안동 김 씨 그리고 생모의 묘소가 있다. 6.25전쟁 이후 방치되다가 1991년 9월 27일 군사 협조 아래 서지학 및 회화사학자 이양재의 조사활동으로 발견되어, 9월 31일 KBS 취재진과 허준선생기념 사업회 창립준비위원회 임원들에게 처음 공개되었으며 이후 재정비되었다.
인근에는 허준의 8대손 허규 묘소까지 있다. 1992년 6월 5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28호 허준 묘로 지정되었고, 2006년 5월 군사안보 관광 구역으로 공개되었다.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구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셋째, 드라마에선 양예수가 허준을 괴롭히는 반동인물로 묘사된 곳이 많다. 하지만 기록 어디에도 그런 근거는 없다. 문학은 갈등구조를 갖고 주동인물과 사건을 벌여야 재미있어서 허구적으로 쓴 것이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동의보감》은 1596년 선조의 왕명으로 내의원(內醫院)에 편찬국을 두고 허준을 비롯해 어의(御醫) 양예수, 이명원, 김응탁, 정예남 등과 민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유의 정작 등이 공동으로 편찬 작업에 참여했다가 정유재란으로 중단되었다. 양예수는 당대의 신의(神醫)로 평가받은 어의였고, 정작은 민간의 도교적 양생술의 대가였다.
1578년(선조 11년)에는 심신이 허약해진 선조임금의 건강이 회복되어 내의원 책임자와 어의들이 포상을 받았다. 이때 허준은 태의 양예수(楊禮壽)· 안덕수(安德秀) 등과 함께 사슴가죽 1장을 선물로 하사받았다. 이후 구안와사에 걸려 입이 돌아간 공빈 김 씨의 남동생을 진료하여 완쾌시켰고, 1590년 허준이 왕자 신성군(인빈 김 씨의 아들)을 살린 공으로 당상관(정3품 통정대부 이상을 말함)으로 승진했다.
허준이 당상관이 되자 삼사와 의금부에서 일제히 나서서 탄핵했다. 왕자를 치료한 것은 의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비록 공이 있다 해도 의관에게 당상의 가자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므로 취소할 것을 왕에게 여러 번 간청했으나 선조는 듣지 않았다.
1600년(선조 33년) 정2품 지중추부사를 겸직하던 수의(실직으로서 내의원의 최고서열) 양예수가 병사함에 따라 허준이 내의원 최선임자로 수의가 되었다. 1607년에는 임금의 병이 위중하고 잘 낫지 않았는데 이것은 허준이 약을 잘못 썼기 때문이라 하여 연일 조정에서 수의 허준을 벌주어야 된다는 여론이 강했으나 선조가 벌을 주기보다 의술을 다하게 해야 한다며 무마시켰다.
넷째, 드라마에선 의과에 급제하였다고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 의과 급제자 기록인 방목에는 허준의 이름이 없다. 이철호의 허준 『동의보감』에 보면 허준은 정기적으로 유희춘의 집을 드나들며 한약을 지어주고 사람들과 교제하였다. 1569년(선조 3년) 6월 그의 나이 31세 되던 해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의 부인의 병을 고쳤다.
유희춘은 이조판서 홍담에게 허준을 소개하였다. 1569년 이조판서 홍담(洪曇)과 미암 유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갔다. 비록 의과에 응시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동료 의관들보다 뛰어난 의술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례다.
1570년에는 유희춘의 병까지 치료하게 되어 한성부 장안에서 고관대작들에게 이름이 알려졌다. 허준은 종1품 양평군까지 올라갔다 다시 정1품에 가자된 것이다. 허준을 제외하면 잡과 출신으로 정1품까지 승진한 사람은 조선시대 500년을 통틀어 역관 출신인 오경석이 유일하다.
그가 개화기 직전 사람임을 감안하면, 중인의 몸으로 정1품에 오른 것은 대단한 것이 맞다. 아무리 지체 높은 명문가의 자제라고 정1품에 오르기는 엄청난 능력과 처세, 운도 겸비되어야 하는 것을 감안했을 때 중인이 그 자리까지 오르는 것은 현대로 비유하자면 9급 공무원 출신이 총리까지 승진하는 수준이다.
당시에도 백성들 사이에서 허준의 입지전적인 출세 스토리는 굉장한 화제가 되었고, 이것이 백성들 사이에 회자되면서 허준 설화가 전국 곳곳에서 전해지고, 이런 허준과 관련한 설화 혹은 전설들이 우리가 아는 소설과 드라마의 소재가 된 것이다.
다섯째, 그의 출생 연도에 대한 논란도 많은데 뒷받침할 자료가 더 나와야 한다. 한때 1543년생으로 알려졌으나 문장가 최립의 문집 《간이집》에 최립이 그가 의주로 귀양 가게 되던 1608년경의 일을 기록하면서, 허준이 자신과 동갑내기인 1539년생이라는 것을 언급한 것이 발견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허준(許浚)의 출생 연도를 1539년으로 인정하고 있으나, 1991년까지는 양천허씨 종친회의 족보에 기재된 1546년 설도 지배적이었다. 같은 해 이양재가 허준의 묘소를 발견한 이후부터 차츰 허준의 출생 연도에 관한 여러 학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당대 관찬 서적을 제외한 여러 서적에서 1546년(명종 2년), 1547년(명종 3년) 등으로 출생 연도에 대한 기록이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처음 허준의 출생 연도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이양재 교수로, 이후 이양재를 위시한 사학자들이 1999년에 조선 중기의 의례 서적 중 하나인 《태평회맹도》에 그의 출생 연도가 기해년(己亥年), 즉 1539년(중종 34년)생이라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또한 서울특별시 강서구에 위치한 허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내의원 명부인 《내의선생안》에는 허준의 출생연도가 1537년 정유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허준박물관의 김쾌정 관장은 당시 내의원의 기록이 태평회맹도의 기록보다 더 정확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내의선생안》은 1605년에 저술된 명부로 허준이 직접 서문을 달았고, 허준의 선계(아버지 론, 조부 곤, 증조부 지) 직계가 실려 있다.
또한 허준의 향년(享年)이 77세라고 기록하고 있다. 《태의원선생안》에서도 역시 허준의 출생연도를 1537년 정유년으로 밝히고 있다. 하지만 허준이 1537년생이라면 1615년에 숨을 거둘 당시 그의 나이는 79세여야 하므로 이는 《내의선생안》의 기록과는 다르다.
그 뒤 허준은 후진 양성과 의서 편찬 및 의서 수리 등을 맡다가, 1615년 음력 8월 17일(양력 10월 9일)에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다른 설에는 일본인 쓰기무라(三木榮)의 《조선의사연표》 p.337에는 허준이 1615년 8월 17일에 사망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여섯째, 허준이 서자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허준을 내의원에 천거한 미암 유희춘의 일기 《미암일기》에 따르면 김시흡이라는 인물을 거론하며 허준의 외삼촌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여기에서 이양재는 김시흡의 기술을 “적(嫡) 외삼촌”이라고 기록한 것에 의거하여, 허론의 재취부인 영광 김 씨도 서녀로서, 허준은 서자라고 주장했다.
또한, 허준의 동복동생으로 알려진 허징은 문과방복에 검색하면 문과에 급제한건 맞으나 따로 서자라고 표시되어있다. 조선시대엔 서자도 문과를 볼 수 있었다. 올라갈 수 있는 품계가 제한되어 있었을 뿐이다. 허준이 1573년에 이미 정3품 내의원정을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본래는 서자나 얼자 모두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나, 서자는 양첩 사이에서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1550년부터 과거 응시가 가능하도록 법이 바뀌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과거는 양반만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오해하는데, 법률상으로는 천민이 아닌 모든 사람이면 과거 응시 자격이 있었다.
아예 처음부터 서자가 아니고 후대의 족보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소수의 주장도 있지만, 이를 확실히 입증할 만한 물증은 없다. 따라서 서자였다는 게 중론인데, 서자라고 유별나게 차별받거나 가난하게 사는 그런 환경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서얼의 과거응시 제한 같은 사회적 차별과는 별개로, 서얼 개개인이 집안에서 받는 대우는 어디까지나 시대와 지역과 가풍에 따라 달랐다.
그래서 현대인의 통념과는 달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같은 사례는 생각보다 적었다. 만일 허준의 집안이 서자를 강하게 차별하는 집안이었다면, 같은 서자인 허징이 대접을 받았을 리가 없다. 임진왜란 이 후 재정적으로 어려워 돈이나 곡식을 받고 서얼 상민들의 신분을 상승시켜 그 수가 급격히 줄었다.
허준의 집안 허임은 《침구경험방》을 쓰며 일생동안 고심한 것을 적어 병을 고치고 생명을 살리는데 보탬이 되고자 했다. 허임이 양반 가문에서 천민으로 전락한 이유에 대해선 이철호가 지은 《동의보감》을 통해 처음 알았다. 그의 선조 허 씨 가문은 단종복위운동을 하다 사육신이 된 이개의 매부인 허조였다.
거사 동지로 체포되자 자결했고, 유성원, 이개, 허조 등의 땅은 공신이며 도승지였던 한명회에게 준다는 기록이 《세조실록》에 나와 있다. 집안은 하루아침에 노비로 전락하여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꿈을 잃지 않고 훌륭한 의술을 정진시켰고 의서를 많이 썼다. 문인 허균 허난설헌도 10촌 집안이다.
1598년(선조 31년),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상심이 심해 소화불량, 눈, 귀, 허리, 다리 등 온몸이 아프고 피로했다. 가을의 한랭한 기운은 예나 지금이나 몸을 부실하게 만든다. 임금을 위해 최고의 의사들이 포진하여 체력과 면역력을 키우려 노력하고, 치료를 해도 온몸 안 아픈 데가 없었던 선조를 생각하며 현재 우리를 돌아본다. 환절기엔 유난히 아픈 사람들이 많다. 기온 차가 10도 이상이 나면 몸이 적응이 안 되어 여러 가지 병을 유발한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 전쟁을 예지했던 이율곡, 전쟁 당시 유성룡, 이항복, 이덕형 이공기 등의 충성심으로 임진왜란 정유재란은 승리한 전쟁이 되었고 국방의 중요성과 애국심도 고취되었다. 세상사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건져 올린 것들이 존재함을 보며 그래서 세상은 살만하고 아무리 어려움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 후, 선조는 의인왕후 박 씨를 잃고 우울해 허준에게 궁궐을 떠나 어디론가 다녀오고 싶다고 말한다. 허준은 가을은 여름 내내 한껏 올라왔던 기운이 땅으로 돌아가는 때, 양인 남자에게서 음인 여자에게로 돌아가는 남자의 계절이다. 서늘한 기운은 봄과 여름에 솟은 양기를 수령 저장해둔다며 산양산삼을 주재료로 탕약을 올린다. 여성들도 부끄러움이 아픔보다 커 진찰을 못 받고 죽어가던 병폐를 없애려 중종 땐 어 의녀로 대장금이 왕후와 비빈들 진찰을 했다.
결 론
허준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을 15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동의보감』을 완성했으며 각종 의서를 썼다. 2009년 유네스코는 『동의보감』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허준 선생은 당대 최고의 명의로서 질병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의 아픔을 덜어주고자 성심성의를 다했다.
드라마에선 허구적 기법이 들어가므로 유의태가 스승이 아닌 것, 출생지 성장한 고향, 양예수 수의가 괴롭힌 게 아닌 것, 출생 연도, 의관 시험이 아닌 추천으로 내의원에 들어간 것, 서자에 대한 논란 등의 오해가 강하게 남아 있고 지자체마다 기록이 다른 것들도 다큐멘터리 방영으로 사실적 접근이 되길 바란다.
광해군의 두창을 치료하며 어의가 된 그는 광해군 때까지 의술을 펼치며 왕의 가족까지 돌보았고, 전염병이 창궐하면 현장에 가서 지휘하고, 어려움을 겪으며 자란 그는 여러 의술을 꾀하여 힘든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 병마로부터 지켜냈고 질병 예방에 힘썼다.
《동의보감》은 조선 한방 의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8세기에는 일본과 청나라에서도 간행될 만큼 높이 평가되었으며, 지금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고 있다.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 3권을 보면, 드라마 작가인 그가 4권으로 쓰려 했는데 사망하는 바람에 결말 부분이 미흡한 것을 이철호의 《동의보감》에선 귀양 후 조용히 의원직을 수행하고 생을 마쳤음도 다루어졌다.
이제 이철호 작가가 쓴 『태양인 이제마』가 드라마로 나오면서 시청자들이 사상 학에 제대로 관심을 갖게 되었듯이, 사실에 입각한 드라마가 나오고, 많은 독자가 책을 읽고 드라마를 보며 사실적인 것들은 제대로 알아야 편견을 고칠 수 있다.
동양의학의 경전, 국제적 의서인 허균의 《동의보감》을 이철호 한의사가 국보로 지정된《동의보감》과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등 수많은 자료와 신문기사 등 근거 서적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수없이 읽고 비교 검토한 후 필자의 판단과 한의학 지식, 오랜 임상경험 등을 더하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근거를 밝혀가며 쓴 책이 이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 본다. 의학 상식을 넓히고 건강을 돌보는데 기여하여 아플 때 활용해야 하는 필독서이다. 많은 사람들이 읽으며 고전 『동의보감』을 사실대로 이해하여 오해를 수정하길 바란다.
<참고> 이철호 『허준 동의보감』 3권
구글 위키 백과 ‘허준’
향미 한의원 한의사 ‘내가 한의사가 된 이유 - 소설 동의보감을 읽고’
이철호 ‘체질대로 삽시다’
네이버 블로그 ‘동의보감’
네이버 하이컨셉 스마트 프레젠테이션 ‘허준’
구글 ‘허준’외부필진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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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 응원합니다
한 주 행복하세요 🐾 감기조심하세요
네 허쥰 동의보감이 이철호 글로 다큐멘터리 제작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