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롯의 딸 살로메는 관능적인 춤을 추고 나서 헤롯에게 요한의 목을 요구하였다. 요한은 죽는다.
살로메가 요한에게 사랑을 거절당한 것이 이유라고 한다.
<살로메>는 오스카 와일드의 시극으로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내용을 소재로 하였다. 형수(헤로디아스)를 부인으로 맞았지만 그녀가 데리고 온 의붓딸 살로메에게 마음을 뻬앗기고 있었다. 유혹하였으나 살로메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살로메는 민중에게 설교하는 요한을 보고 한 눈에 반하였으나 요한은 꿈적도 않았다. 이때 살로메가 언젠가는 입을 맞추리라고 선언하였다. 헤롯이 살로메에게 춤을 청하자. 하나의 약속만 하면 추겠다고 하였다. 춤을 추고 나서 요한의 목을 요구하였다. 헤롯이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결국 요한의 목은 쟁반에 받쳐저서 살로에에게 주어졌다. 살로메는 쟁반을 들고 어두운 방에 들어가서 입을 맞추었다.

모로는 신화를 주제로 하여 아카데믹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신화가 갖고 있는 상징성을 살렸을 뿐 아나리
많은 해석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 그림도 스핑크스를 요염한 여자상으로 표현하고, 동물적인 몸으로 표현하였다.
스핑크스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삼손의 뿌리는 헤라클레스라고 한다.
데리라는 삼손의 머리를 깎으므로 힘을 제거한다.
모로에게 여자는 부정적으로 표현하였다. 살로매. 스핑크스, 데리다 등 요부적인 요소가 강한 여인이다.
남자들이 목숨을 잃을 만치 빠지는 여자는 이런 요부라 고 하였다.
구스타브 모로(1826-1898)
전통적인 아카데미즘의 교육을 받은 그는 1850년대부터 살롱전에 출품하므로 화가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866년 이후로는 전시회를 가진 일이 없다.
모로는 공부를 많이 하는 화가였다. 문학, 철학, 고고학, 시지학, 카톨릭, 고대 신화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였다. 이와같은 지적 탐구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을 신비하고, 이국적이며, 정교하게 그렸다. 그의 그림은 고전주의 양식인 아카데미즘이 바탕이지만 내용에서는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은 죽음, 고통, 그리움 등의 인간이 겪고, 고뇌하는 분위기를 짙게 느끼도록 해준다. 또 미래의 환상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하였다. 이와같은 작품의 호소력으로 상징주의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모로는 회화는 문학적이어서 안되고 회화적이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의 그림은 문학적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데카당하고, 요부적인 여성의 이미지는 당시 상징주의 작가들이 많이 다루던 주제였다. 이들은 특정한 여인보다는 살로메, 세멜레, 메데네아 같이 집념적인 사랑과, 결국은 파멸로 치닫는 숙명적인 여인(femme fatale) 의 이미지를 즐겨 그렸다. 비록 신화나 성경, 역사 속의 여성 이미지라 하더라도 여성의 아름다움은 난폭할 수 있다는 것과, 미의 유혹이 남성에게 복수와 욕망, 거세와 죽음으로 이끌어 갈 수 있음을 상징하였다.
이와같은 여성의 이미지는 당시 거세게 일어나던 여성운동과는 배치된다. 하지만 당시의 반여성주의 운동의 시선을 갖고 있던 남성의 시선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모로가 제작한 살로메는 요부의 이미지를 하나의 전형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들의 주제는 낭만주의 기법으로, 표현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분위기는 상징적이다.
모로는 말하기를 ‘사진적 이미지는 기록에 불과하고, 하나의 정보일뿐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과 느끼는 것만 믿는다.’라고 하였다. 공상과 이미지를 추구한 그의 그림은 이후에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공감을 얻는다.
이후에 모로는 그림의 표면에 물감을 아주 거칠고, 두껍게 칠한다. 그의 표현주의에 가까울 정도이다. 이러한 기법은 제자들에게 전수된다. 마티스, 조르쥬 루오가 그들이다.
1826년에 건축가인 아버지와 음악가인 어머니 사이에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대체로 자유로운 편이었다. 어머니는 세심하게 보살피는 유형이었다. 초등학고, 중학교 때부터 데생에 소질을 나타냈다. 1846년에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하여 아카데미즘의 미술 수업을 받았다. 로마상에 도전하였으나 실패하자 학교를 그만 두었다.
1870년에는 보불전쟁에 참여하였다. 모로는 병약한 편이었다. 재대도 나약한 몸 때문에 의가사 제대를 하였다. 그러나 모로는 군에 갔다 온 후에 상장히 자신감을 가지고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1884년에 어머니가 죽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모로는 어머니의 보호아래 살아오댜시피 하였다. 이로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작품에 설명을 세세하게 붙이는 것도 귀가 먹은 어머니를 위해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 표현한 것은 어머니의 사랑과는 다르게, 여성의 사악함을 표현하였다.
1892년에는 에콜 드 보자르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제자들의 재능을 최대한 인정하여 화가로 지도하는 교수로서 그의 능력은 뛰어났다, 그의 제자에는 유명한 화가들이 많다. 마티스,. 마르케, 카모, 만귀느, 르네, 레판, 사바테, 부뤼네 등이 있다.
1903년 위암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