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마 섬(일본어:端島)은 일본나가사키 현나가사키 시에 있는 무인도이다. 섬의 모습이 마치 군함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군칸지마(軍艦島, 군함도)라고도 불린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을 강제 징용하여 석탄 노동을 시킨 곳이기도 하며 또한 1960년대까지 탄광 도시로서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폐산 이후 주민들이 이주하였으며, 섬에는 당시의 건물들이 그대
로 남아 있었다. 일본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신청을 하였으나, 한국의 반대로 지정에 난항을 겪었다. 그후 강제 노역에 대해 명시를 하겠다는 조건을 통해 간신히 등재하였으나, 직후 태도를 바꾸어 강제 노동의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나가사키 항으로부터 남서쪽 해상 약 18.5 킬로미터의 위치에 있다. 일본 최초로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섰다. 옛 다카시마 정의 중심으로 탄광으로 번영했던 다카시마로부터는 남서쪽으로 약 2.5 킬로미터의 거리로, 나가사키 반도로부터는 약 4.5 킬로미터 떨어져있다. 하시마
섬과 다카시마 사이에는 나카노시마(中ノ島)라는 작은 무인도가 있고, 이곳에도 탄광이 건설되었지만 수 년 후 폐광되어 섬은 하시마의 주민이 공원이나 화장장, 장지로 사용하였다. 그 외 하시마 섬의 남서쪽에는 미츠세(三ツ瀬)라는 암초가 있어서, 하시마 탄광에서 궤도를 늘려서 그 구역의 해저 탄광에서도 채광을 행했다.
하시마 섬은 본래 현재의 3분의 1 정도의 면적밖에 안 되는 작은 여울이었다. 그 작은 여울과 주위의 암초, 사주를 1897년(메이지 30년)에서 1931년(쇼와 6년)에 걸쳐 행해진 6회의 매립 공사를 통해 확장한 것이 현재의 하시마 섬이다. 크기는 남북으로 약 480 미터, 동서로 약 160 미
터로, 면적은 약 6.3 헥타르, 해안선의 전체 길이는 약 1200 미터이다. 남북으로 가늘고 길며, 해안선은 직선적으로 섬 전체가 호안 제방으로 둘러싸여 있다. 섬 중앙부에는 매립 전의 암산이 남북에 걸쳐 있으며, 그 서측과 북측 및 산정에는 주택 등의 생활에 관한 시설이, 동측과 북측에는 탄광에 관한 시설이 있었다.
하시마 섬을 무대로 한 1949년(쇼와 24년)작 영화 미도리나키시마(緑なき島)의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섬에는 식물이 극히 적어서, 주민은 본토로부터 토사를 옮겨와 옥상 정원을 짓고 가정에도 선인장을 시작으로 관엽식물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폐광 후의 조사에 따르면 이십여 항목의 식물이 확인되어 있는데, 특히 왕모시풀(쐐기풀과), 갯기름나물(미나리과), Boehmeria holosericea(벼과) 세 종류가 하시마 섬의 주된 식물로 거론되어 있다.
행정구역의 변화
에도 시대에는 막부령인 소노기 군 다카하마 촌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경계에 대한 논쟁이 있어서, 1773년(안에이 2년), ‘막부령, 사가령 모두 하시마에 간섭하지 않는다’라고 결정되었다. 1889년 4월 1일 정촌제 시행에 따라 니시소노기 군 다카하마 촌 하시마 명이 된다. 1955년 4월 1일 다카하마 촌이 노모 촌, 와키미사키 촌, 가바시마 촌과 합병되어 노모자키 정(현재의 나가사키 시)가 성립했을 때, 하시마 섬은 다카하마 촌에서 분리되어 다카시마 촌에 편입되었다. 2005년 1월 4일 다카시마 촌이 나가사키 시에 편입되어, 현재의 행정구역은 나가사키 시 다카시마 촌 하시마가 되었다.
역사
19세기까지
19세기에 석탄의 존재가 확인되었고, 1890년부터 미쓰비시 재벌의 소유가 되었다. 석탄 채굴을 위해 주위를 매립하였고 다이쇼 시대 이후에는 철근 콘크리트조의 주택이 건설되었다. 해상에서 본 실루엣이 마치 일본 해군의 전함을 닮아 군칸지마로 불려왔다.
20세기
1916년에는 일본에서 최초로 철근 콘크리트조의 집합주택 '30호동'이 건설되었다. 5년 후인 1921년에 나가사키 신문도 당시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건설중이었던 일본 해군의 전함과 비슷하다는 의미로 군칸지마라고 불렀기 때문에, 군칸지마라는 통칭은 다이쇼 시대 무렵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아직 철근 콘크리트조의 고층 아파트는 적었고, 대부분은 목조 단층집이나 2층집이었다.
태평양 전쟁이후 1940년 부터 1945년 까지 조선인 약 800명이 강제동원 되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석탄을 생산할 인구수가 부족하자, 일본 정부는 한국에 실시된 '국가 총동원법'을 통해 한국의 젊은이들을 강제 징용했다. 그들은 하루 12시간씩 탄광에서 노역을 했다. 인구가 전성기를 맞았던 1960년에는 5,267명이 하시마 섬에 거주하여, 인구 밀도는 제곱 킬로미터 당 83,6
00명으로 도쿄 23구의 9배 이상에 달했다. 탄광 시설, 주택 외에 초중학교, 점포, 병원, 사원, 영화관, 이발소, 미용실, 사교장 등이 있어 섬 안은 완벽한 도시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화장장, 장지, 충분한 넓이와 시설이 있는 공원은 섬 안에 없어서, 하시마 섬과 다카시마 사이에 있는 나카노시마에 건설되었다.
1960년 이후에는 주요 에너지가 석탄에서 석유로 바뀌어감에 따라 쇠퇴해갔다. 1965년에 미츠세 구역의 신광이 개발되어 일시기 회복되었지만, 1970년대 이후의 에너지 정책의 영향을 받아 1974년 1월 15일 폐산하였다. 폐산시에는 약 2,000명까지 줄었던 주민은 4월 20일까지 모두 섬을 떠나, 하시마 섬은 무인도가 되었다. 다카시마 광업소의 잔무정리 등 탄광 관련 시설의 해체 작업은 1974년 말까지 이어졌다.
현황
근대화 유산으로서, 그리고 다이쇼 시대로부터 쇼와 시대에 이르는 집합주택의 잔존물로서도 주목받고 있다. 폐허 붐의 일환으로서도 여러 차례 화제에 오른다. 현재는 무인화에 따라 건물의 붕괴가 진행되고 있다. 외벽의 붕괴 개소에 대해서는 일부 콘크리트로 수복이 진행되고 있다.
섬은 미쓰비시 마테리얼이 소유하고 있었지만, 2001년에 다카시마 정에 무상으로 양도되어 현재는 나가사키 시의 소유지가 되었다. 건물의 노후화, 폐허화에 따라 위험한 곳이 많아, 섬 안으로의 출입은 오랫동안 금지되었다. 2005년 8월 23일, 보도 관계자에 한해 특별히 상륙이 허가되어 황폐화가 진행되는 도내 각소의 모습이 각 매체에 소개되었다. 도내의 건축물은 아직 정
비되지 않은 곳이 많지만 어느 정도는 한전면에서의 문제가 해결되어, 2008년 나가사키 시에서 '나가사키 시 하시마 견학 시설 조례'와 '하시마에의 출입의 제한에 관한 조례'가 성립되었다. 이로써 섬의 남부에 정비된 견학 통로에 한해, 2009년 4월 22일부터 관광객의 상륙, 견학이 가능해졌다. 이후 1개월간 4,601여 명, 1년간 59,000여 명이 상륙했다.
일부에서 세계유산 등록 운동이 진행되어, 2006년 8월에는 일본 경제산업성이 하시마 섬을 포함한 메이지 시대의 산업 시설을 지역 관광 자원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계 유산 등록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2008년 9월 '규슈, 야마구치의 근대화 산업 유산군'의 일부로서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추가 기재가 확정되었고, 2009년 1월 기재되었으며, 2015년 6월에 정식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교통편
가까이에서 바라본 풍경
섬 안에는 비행장 등이 없기 때문에, 하시마 섬으로의 교통기관은 주민이 있던 시절에도 현재도 선박밖에 없다. 1962년까지는 미쓰비시가 사선을 운행하였고, 노모상선이 나가사키 항으로부터 이오지마 정, 다카시마 등을 경유하여 하시마 섬에 이르는 항로를 운행했다. 1970년에는 1일 12회 왕복, 나가사키까지의 소요 시간은 50분이었다.
이들 항로는 섬이 무인도가 됨에 따라 폐지되어 현존하지 않지만, 폐허나 근대화 유산으로서의 하시마 섬이 주목되기 시작함에 따라 섬 주위를 순환하는 유람선이 나가사키 항 등으로부터 운항되게 되었다. 상륙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상륙을 시도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 경우 수상 택시 등이 이용되었다.
나가사키 시의 '나가사키시 하시마 견학 시설 조례'와와 '하시마로의 출입의 제한에 관한 조례'에 따라, 견학 가능 지역은 일부에 제한되지만 2009년 4월 22일부터 관광객이 상륙, 견학할 수 있게 되었다. 여행 회사나 해운 회사가 상륙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야마사해운이나 다카시마해상교통의 상륙 투어(나가사키 항 → 하시마 → 나가사키 항)의 경우, 요금은 나가사키 시에 지불하는 시설 이용료를 포함 성인 4,300엔이다.
하시마 섬,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
하시마 섬에서 19세기 후반 탄광이 개발됐고, 일제 강점기때 섬 내부에 개발된 ‘하시마탄광’은 지하 1km가 넘는 해저 탄광이었다. 탄광 안은 매우 좁고 온도가 45도를 넘나들었다. 유독가스가 수시로 분출되기도 하며, 작업 도중 해수가 쏟아져 들어오는 혹독한 환경과 노동조건 때문에 일명 '감옥섬'으로 불렸다. 당시 강제 동원된 800여명의 조선인이 철저히 격리된 채 122명이 숨졌다는 기록도 있다.
지리적 여건
하시마 섬은 본래 현재의 3분의 1 정도의 면적밖에 안 되는 작은 여울이었다. 그 작은 여울과 주위의 암초 등을 1897년에서 1931년까지 6회의 매립 공사를 통해 확장한 것이 현재의 하시마 섬이다. 크기는 남북으로 약 480 미터, 동서로 약 160 미터로, 면적은 약 6.3 헥타르, 해안선의 전체 길이는 약 1200m다.
1890년부터 미쓰비시 재벌이 소유하게 됐고, 석탄 채굴을 위해 주위를 매립했다. 이후에는 철근 콘크리트조의 주택도 건설됐다. 1916년에는 일본에서 최초로 철근 콘크리트조의 집합주택 '30호동'이 건설됐다.
하시마 탄광에서는 좋은 품질의 ‘강점탄’이 채굴돼 일본 내에서는 근대화를 이끈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탄광이 전성기를 맞았던 1941년에는 석탄 약 41만 톤을 캐냈다. 탄광 시설, 주택 외에 초중학교, 점포, 병원, 사원, 영화관, 이발소, 미용실, 사교장 등이 있어 섬 안은 완벽한 도시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1974년 1월 15일 폐산했는데, 약 2000명까지 줄었던 주민들이 결국 모두 섬을 떠나 무인도가 되었다.
2001년 다카시마(高島) 주민들이 "황폐화되어가는 지역을 되살리자"며 하시마 탄광 등을 세계문화유산에 올리자는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2006년 전문가 그룹이 결성됐고, 2009년 일본 정부가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이 산업시설들을 올렸다.
일본, 강제징용 역사 외면한 채 세계유산 등재 추진
일본 정부는 1850년대부터 1910년까지 일본 남부 규슈(九州) 일대에 건설된 탄광·항만·제철소 등 23곳을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 유산'이라 이름 붙였다.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하시마섬의 땅 속 1000m까지 파고 들어가 하루 12시간씩 강제 노역을 했다. 오죽했으면 이 섬을 '지옥도'라고 부를 정도였다. 참고로 서울 여의도에 있는 63빌딩 높이가 250m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하시마 섬 등 스물세 곳의 유적이 모두 1910년 이전에 건설됐기 때문에 일본의 산업혁명 성과를 보여준다고 홍보하며 식민지배나 침략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주장만 되풀이해왔다.
그들은 일본 역사의 성취를 보여주기 위해 애쓸 뿐, 그 성취가 타국의 고통으로 이어진 다음 장(章)에 대해선 철저히 눈을 감았다. 심지어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은 한국 측이 강제징용 피해지가 세계문화유산이 되는 데 반대한다는 입장을 내놓자 "정치적 주장을 가지고 들어올 일이 아니다"라며 한국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일본이 하시마 섬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한다는 사실이 한국에는 2012년에야 알려졌다. 국무총리실 산하 민간위원회가 반대 입장을 밝히고 강제징용 사료를 공개했지만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사이 일본은 3000쪽이 넘는 방대한 보고서를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에 제출했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지난 2014년 10월 실사를 거쳐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에 적합 판정을 내렸다.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인 하시마 섬은 이달 초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일본, 국제무대서 日帝 강제노역 동원 첫 인정
일본은 이달 초 하시마(端島·일명 '군함도') 탄광 등 '메이지(明治) 산업혁명유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결정 회의에서 "일부 시설에 수많은 한국인이 자기 의사에 반해(against their will)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노역(forced to work)을 했다"고 밝혔다. 일본이 국제무대에서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사실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은 이 같은 내용을 발표하면서 "해당 시설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안내센터 설치 등의 조치를 하겠다"고 했다. 일본의 발표 내용은 메이지 산업유산을 세계유산에 등재하는 결정문에 주석(註釋) 형식으로 포함됐다. 위원회는 또 2017년까지 일본이 해당 시설에 이 같은 조치를 한 뒤 관련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했으며, 2018년 회의에서 그 이행 상황을 검토하기로 했다.
‘메이지 유산’은 규슈와 야마구치 지역 8개 현 11개 시에 있는 23개 시설이다. 이 중 하시마 탄광 등 7곳에는 공식 기록상으로 5만7900명의 조선인이 강제 동원됐고, 그 가운데 94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일본 미쓰비시 석탄광업의 주력 탄광이었던 하시마섬. 군함을 닮았다고 군함도라고도 불린다. 나가사키=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MBC ‘무한도전’이 숨겨진 역사의 아픔을 들춰 주목 받았다. 일본 근대화의 상징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하시마섬 등을 둘러싼 역사 왜곡을 다뤄 시청자의 많은 관심을 산 것.
12일 방송된 ‘무한도전’은 해외에 머물고 있는 동포에 고국의 음식을 전달하는 ‘배달의 무도’특집 최종회가 전파를 탔다. 이 때 방송인 하하가 찾은 곳이 하시마섬이다.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자들이 노역을 해 ‘감옥섬’이라 부르던 곳이다. 일본 기업 미쓰비시 중공업이 바다 속 탄광을 개발한다고 이용한 섬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 섬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하루 16시간씩 고된 작업을 했다. 해저 900m까지 내려가 섭씨 40℃가 넘는 무더운 갱도에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일했다. 강제동원피해자는 800여 명으로 추산되고, 이 중 사망자도 100명이 넘는다. “지옥이 따로 없다”는 게 하시마섬으로 끌려가 일을 했던 조선인 징용자 중 생존자인 김한수(98), 김형석(95) 씨가 들려준 얘기다.
‘무한도전’제작진은 웃음기를 빼고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하듯 진지하게 하시마섬 속 조선인 징용의 역사를 다뤄 공감을 샀다. 자연스럽게 메이지유신 산업혁명 유산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하시마섬의 아이러니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일본이 조선인 징용의 역사를 숨긴 채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추진한 일이다. ‘무한도전’제작진은 ‘일본이 하시마섬이 한국인을 강제 징용한 시기를 유네스코 등재 신청서에 제출할 때 1850년부터 1910년까지라고 게재했다’며 ‘이는 실제 한국인이 강제 징용한 시기인 1916년 이후와 다르다’는 내용을 내보냈다. 일본이 세계문화유산 등재 당시 강제 징용을 인정하기로 했다가 등재 확정 이후 입장을 바꾼 일도 조목조목 꼬집었다.
이 뿐이 아니다. ‘무한도전’은 하시마섬으로 끌려간 강제징용 희생자를 위한 공양탑이 다카시마섬에 있다는 또 다른 상처를 보여줘 시청자의 눈시울을 붉혔다. 일본 기업이 하시마섬의 사망자를 위한 공양탑을 세웠는데, 탑을 세운 장소가 열악하기 그지 없어서다. 하하는 두 시간 넘게 섬을 돌아다니고, 인기척이 닿지 않는 수풀을 뚫고서야 간신히 공양탑을 찾을 수 있었다. 위패마저 불태워져 희생자들의 신분도 알 수 없는 상황. 하하는 고국에서 가져 온 흰 쌀밥과 고깃국을 공양탑에 올려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했다. 하시마섬 조선인 징용자 중 생존자들이 “당시 흰 쌀밥과 고깃국이 가장 먹고 싶었다”는 말을 듣고 한 일이다.
하하와 함께 하시마섬과 다카시마섬을 찾은 한국홍보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다카시마 공양탑을 찾을 때는 정말이지 너무 힘든 과정이었다”며 “물어 물어 외진 곳에 있는 공양탑을 겨우 발견했다”며 공양탑 앞에 꾹꾹 누른 흰쌀 밥과 고깃국을 올려놓고 묵념을 하는데 정말 더 울컥 하더라”는 후기를 페이스북에 올려 당시의 상황을 시청자들에게 전했다. 더불어 “ ‘무한도전’을 통해 하시마섬과 다카시마섬의 진실이 많은 시청자들에게 이제서라도 널리 알려진 것 같아 정말 다행”이라며 “일본이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대외적으로 약속한 강제징용에 대한 정보센터 설치 등을 지킬 수 있도록 저는 계속 감시하고 압박해 나가려고 한다”는 계획도 들려줬다.
한국인들의 희생의 땅이 일본 근대화의 상징으로만 포장된 사실 등을 접한 시청자는 공분했다. 방송을 본 네티즌은 사회관계망서비스인 트위터 등에 ‘하시마섬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그저 남의 일이었는데 이런 무관심이 가장 큰 죄임을 깨달았다’(성빈****), ‘우리 손으로 공양탑 다시 세우자. 산골 깊숙이 아무도 못 찾는 곳에 덜렁 혼자 있는 공양탑을 보니 정말 분노가 차오른다’(la****), ‘유네스코 등재 이후 하시마 섬에 대해 많이 언급돼 반감을 가졌지만 내가 알아낸 것은 희생자 분들의 한의 반에도 못 미친 듯 하다. 공양탑도 알지 못한 내가 부끄럽다’(강****)등의 글을 올려 공감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