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도나무 아래서] 진수완
씬 1 포도원 풍경(D)
포도나무에 탐스럽게 매달려 있는 포도송이들.
알알마다 투명한 빗물을 머금은 모양이 싱그러워 보인다.
가만히 포도 한알을 따내는 손...
따낸 포도알을 입 안으로 가져가 터뜨리는 지호.
그 단맛에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번지는데서.
타이틀 포도나무 아래서
씬 2 포도밭(D)
포도잎새 사이로 바쁘게 움직이는 일손들.
가위로 대 밑둥을 잘라내며 수확하는 중이다.
바구니 한가득 수확한 포도송이를 들고 이동하던 태웅모.
문득 얼굴에 반가운 기색.
태웅모 지호왔구나.
지호 (막 포도송이에서 몰래 따낸 포도알을 입에
넣다가 켁켁댄다. 수습하고 돌아서서 씨익
웃으며) 안녕하세요?
태웅모 (웃으며 바구니 내려놓는) 맛있지? 많이 먹어.
(포도 한 알 치마에 문질러서 닦아주며)
아주 단맛이 제대루 들었다.
지호 (쑥스럽게 웃으며 받고) 그러네요 정말. (먹는)
태웅모 (포도상자 앞에 앉으며) 어디, 갔다 오는 길야?
지호 (같이 쭈그리고 앉아 포도 상자에 담는
작업 도우며) 아버지 약 짓구 오는 길에
한 번 들러 봤어요. 엊저녁에 또 한바탕
퍼부었잖아요. 올여름 내내 양동이루 갖다
퍼 붓더니만 아직두내릴 비가 남은
모양이예요.
태웅모 다행히 여름 내내 그 비 다 맞구 이 정도
수확이면 괜찮은 편야.
느이 아버지가 했을때보단 못해두...
아버진 좀 어떠셔.
지호 ... 그렇죠 뭐.
태웅모 ... 그 건강했던 양반이 쓰러질 줄 누가
알았겠냐.
젊은 날 다 바쳐 일군 포도밭 딸년들
시집보내느라 띠어먹구,
당신 약값으루 띠어 먹구. 그 덕에 이게 결국
내 차지가 됐지만서두 좋게 넘겨 받은게
아니라 맘이 편치만은 않다 나두.
지호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태웅모 그 눔의 병이 도둑이다. 옛말 틀린거 하나 ?어.
지호 ... (화제 바꾸는) 참, 태웅이 결혼준비는 잘
되가요?
태웅모 나야 여기 일 때문에 통 신경 못쓰지.
지들끼리 알아서 준비중이야.
선정인 아예 우리집서 산다 요즘.
그러고 보니 니들 중학교때 죄 같은 반이었지?
지호 예. 삼학년때요.
태웅모 (안쓰러운) 너두 슬슬 연애두 좀 하구 그래야
할텐데...
느아버지가 딸년 발목 붙들게 생겼으니
큰일이다.
지호 (그저 웃는)
씬 3 태웅네 마당(D)
마루 끝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지호, 청첩장을 열어보고 있
다.
신랑 김태웅, 신부 유선정이라는 글자가 박혀있다.
지호 미소 지으며 보는데,
선정 (E) (밝은) 어? 언제 왔어?
지호 퍼뜩 고개 들어 보면 함께 들어서고 있는 선정과
태웅.
지호 (자리에서 일어서며) 늬들 얼굴 보기 힘들다
요즘. 그렇게 바뻐?
태웅 아주 죽겠다 죽겠어.
(물 한바가지 떠서 마시고) 머리카락 뽑아서
열두명만 더 만들어내구 싶은 심정이야 지금.
선정 (지호 옆에 앉다가) 어으 저 엄살.
입때껏 하는거 하나 없이 거저 먹구
있었으믄서.
지호 (웃다가) 어디서 오는 길이야?
태웅 빨래줄에 걸린 수건으로 세수한 얼굴 닦으며)
어... 선생님 찾아뵙구 주례 부탁드리구 오는
길이야.
지호 많이 늙으셨지?
태웅 올해가 정년이신데 그럼.(지호가 보다 놔둔
청첩장에 눈길 가며) 청첩장 괜찮디?
지호 청첩장이 괜찮구 말구가 어딨어?
다 그게 그거지.
선정 (얼른 끼어들며) 그치? 별 개성없지?
(태웅을 턱끝으로 가리키며) 저 잘난 안목으루
고른거란다 이게. 그러니 중학교때부터
미술점수가 맨날 꼬래비였지.
태웅 (비웃는) 허응, 김선정. 그대는 그렇게
당당하게 남의 점수 비웃을 처지가
아니었을텐데.
선정 (발끈) 내가 어때서. 니가 내 점수 봤어?
지호 그만들 좀 해라 쯤. 니들은 어째 아직두
열여섯이냐.
꺾어진 오십을 넘긴 애들이 어떻게 된게 여태
열여섯살 근처야 여태.
태웅 내 말이 그말이다.
선정 두 말하면 잡소리지.
태웅 으유, 말을 말아야지 내가.
지호 (웃는데)
태웅 참, 지호 너 오늘 시간 좀 있냐?
지호 밥순이가 밥시간만 맞추면 되지 뭐.
왜 뭐 좀 도와줘?
씬 4 지호네 집 외경(저녁)
씬 5 지호의 방(저녁)
상펴놓고 앉아 청첩장 봉투 위에 붓펜으로 정성껏 주소와
이름을 적어넣고 있는 지호. 붓(펜)글씨 솜씨가 제법이다.
졸업앨범 뒤에 적힌 주소록을 보고 동창들에게 청첩장 보내
는 작업을 하고 있는 중. 막 완성된 봉투는 한쪽에 쌓아놓
고 새봉투를 꺼내 다음 주소를 확인하는데.
손가락으로 주소를 짚어 내려가던 지호, 문득 고개를 갸웃
한다.
어찌된 일인지 그 주소만 칼로 오려져 뻥 뚫려있다.
지호 삼십구번...? 삼십번대면 남자번혼데....
지호 앞장의 졸업사진들을 확인해본다.
손가락으로 쭈욱 훑어내려가던 지호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맺힌다.
깍쟁이 같은 선정의 사진... 장난꾸러기 같은 태웅의 사진...
그 속에 귀여운 모습의 지호 사진...
지호 (잠시 추억에 잠긴 듯 미소지었다가 정신
차리고 문제의 주인공을 찾기 시작한다)
삼십구번... 삼십구번...
사진들을 쭈욱 훑어내려가던 지호의 손이 순간 멈칫한다.
사진 역시 뻥 뚫려있다.
지호 (뚫린 구멍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 넣어보며) ?
(궁금한데)
아버지 (E)(안방에서) 자냐. (건너 오라는 뜻)
지호 아니요. 지금 가요.(나가고)
씬 6 아버지 방(저녁)
지호 방문 열고 들어와 익숙한 솜씨로 소변기를 이불 밑으
로 집어 넣어준다. 천장을 향해 똑바로 누워있는 아버지.
아버지 (꼬장꼬장한) 미리 들어와 넣어주면
염라대왕이 잡아가냐.
지호 (능숙하게 짜증 받아내며 순하게) 왜 또 뭐가
틀렸어요 제가?
아버지 한 두 번 해보는 일야?
지호 (아버지 소변 볼 동안 바닥 걸레질 하며)
태웅이 청첩장 써주구 있었어요.
중삼때 한반이었던 짝꿍이랑 이번에
결혼하잖아요.
아버지두 아시죠 왜. 선정이라구 눈 큰애.
아버지 ...
지호 중삼때 담임 선생님이 주례 서주신다구
했는데, 그 분이 또 이번에
정년퇴임이시잖아요. 모처럼 이 핑계 저핑계
갖다부쳐 한 번 모여보자구요.
아버지 (상관없이) 소변기 빼내구 요껍데기나 갈아
끼워.
지호 (계속 바닥 닦으며) 겨우 하루 됐어요 아버지.
하루 더 깔구 주무세요.
아버지 찝찝해. 갈어 지금.
지호 글쎄 아침 저녁으루 선선해서 아직
괜찮다니까요.
아버지 난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눕히면서 키웠다
늬들.
지호 예에. 고생한 보람없이 싸가지 없는 딸이라
죄송한데요.
소변 보실 때마다 요껍데기 갈라구 하시면
저 허리 휘어요.
새파란 딸년이 허리 구부정정해갖구 왔다갔다
하는 꼴 보구 싶으세요?
아버지 (버럭) 갈아 끼우라면 끼우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어!
지호 (놀라서) 아버지. 도대체 오늘 왜 그러세요.
아버지 지려서 척척해. 갈어 얼른.
지호 예?
아버지 요에 오줌 지렸다구. 못 알아 들어?
지호 (에? 해서 보다가) 싸셨어요? 요 위에요?
(후다닥 이불 들춰보는)
아버지 (수치심에 눈 감는) ...
지호 (이불 내리고 어이없는) 아, 아버지. 나오는거
모르셨어요?
(급해지는) 그게... 그러니까, 참았다가
일보는게 마음대루 조절이 안되는 거예요? 예?
아버지 귀따거 죽겠어. 소변기나 빼내 얼른!
지호 ... (암담해지는)
씬 7 마루(저녁)
이불뭉치 들고 나오는 지호.
등 뒤로 손돌려 방문을 닫는다.
문득 아버지 방을 한 번 돌아본다.
아버지에 대한 안쓰러움과 자신에 대한 연민.
그 자리에 지친듯 축 쳐져 앉는다
씬 8 지호네 마당(N)
밤... 바람...
빨래줄 위에는 벌써 빨아 널어놓은 하얀 이불 홑청.
문득 그 위로 툭, 그어지는 빗줄기.
이어 내리기 시작하는 비.
씬 9 지호의 방(N)
이불 위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는 지호.
청첩장을 쓰다가 잠이 든 모양으로 머리 맡에는 쓰다만 봉
투가
어지럽게 널려있고... 혼자서 웅얼거리고 있는 라디오.
지금 전국적으로 또 한차례의 비가 내리고 있다는 소식인
데요....
이번엔 별 피해없이 지나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신청곡
하나 들려드리죠....
음악 흐르기 시작하면 잠들어 있는 지호의 위로,
은호 (E) (16세의 은호 목소리로) 지호야,
일어나. 일어나 보라 니까...
씬 10 자매의 방(현재는 지호의 방)(꿈 또는 회상/N)
단잠에서 깨고 싶지 않은 듯 잔뜩 찡그린채 누워있는 지호
(16세).
은호 (계속 흔드는) 일어나봐 좀.
지호 (졸린 눈 비비며 일어나 앉는) 왜그래에...?
은호 너 무슨 잠을 그렇게 자아? 빗소리 안들려?
지호 몰라... 졸려 죽겠어. (옆으로 쓰러지는데)
은호 우리 포도밭 다 떠내려간단 말야!
그제서야 눈 번쩍 뜨는 지호.
후다닥 일어나 방문(또는 창문)을 활짝 열어 젖힌다.
위협적으로 내리고 있는 굵은 빗줄기.
씬 11 포도원 입구
(꿈 또는 회상/N)
우비차림의 은호와 지호 달려온다.
걱정스럽게 모여있는 동네 사람들...
트럭 한대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려와 끼익 멈춰선다.
우비를 입은 어른들 몇명이 장비를 들고 내린다.
그 속에 건강한 아버지의 모습도 보인다.
은호 아빠!
아버지 사람들과 함께 포도원 쪽으로 가다가 돌아 본다.
은호와 지호 달려온다.
아버지 나오지 말라니까 왜 나왔어.
은호 걱정되서 잠이 와야지.
아버지 괜찮으니까 들어가. 얼른.
아버지 은호의 등에 손대며 약간 밀듯이 돌려놓고 가려는데
뒤에서 가만히 아버지의 우비자락을 붙드는 손.
아버지 (? 해서 돌아보면)
지호 (걱정스러운) ... 우리집 괜찮을까?
아버지 괜찮아. 빗줄기가 가늘어지니까 더 이상
피해는 없을꺼야.
지호 ....
아버지 (미소) 아빠 믿어 임마.
지호 (그제서야 웃는)
씬 12 지호의 방(현재)
잠들어 있는 지호.
열여섯살의 지호처럼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씬 13 포도원 입구(N)
(꿈 또는 회상)
빗줄기는 조금 가늘어져 있다.
적당한 곳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지호와 은호.
포도원 쪽에서 작업을 마친 몇 명의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
다.
그 속에서 태웅을 발견한 지호.
태웅에게 간다.
뒤따라 가는 은호.
지호 태웅아.
태웅 어. 왔냐.
은호 괜찮어?
태웅 다른 집들은 괜찮은데... (침울해지는)
성진이넨 반이 흙에 쓸려내려갔어....
지호 ...성진이...?
태웅 음. 최성진말야. (턱짓으로 가리킨다)
지호, 태웅이 턱짓으로 가리키는 곳을 본다.
포도원 쪽에서 내려오는 사람들.
가지고 내려온 장비를 트럭 위에 실는다.
그 속에 옆모습으로 보이는 성진. (우비 모자에 가려 아직
얼굴은 보이지 않고) 아버지를 도와 장비를 실고 있다. 그
모습 위로,
태웅 (E) 성진이넨 지대가 좀 낮잖아.
피해가 크겠더라...
지호 가만히 성진을 보고 있다.
문득 시선을 느낀 성진... 이쪽을 돌아본다.
지호 흠칫, 숨이 멎는다.
가만히 빗속에 젖어가고 있는 성진...
무표정한 얼굴로 지호를 바라보는 그 모습에서 스틸.
빗소리 과장되게 덮히면서 천천히 F.O...
씬 14 태웅네 마루(현재/D)
봉투 위에 붓펜으로 최성진이라는 이름이 쓰여지고 있
다.
선정과 태웅은 상 위에 지호가 써온 청첩장 봉투 펼쳐놓고
우표붙이는 작업중. 완성된 봉투를 멀리 떨어뜨려 놓고 보
는 지호.
잘써졌나? 고개 갸웃해서 보는데 그 봉투 탁, 채가는 손.
선정 됐어, 아주 훌륭해. (하고는 기계적으로 우표
탁, 붙여서 옆에 던져놓는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지호, 방금 주소를 베껴 쓰던 졸업
앨범을 넘겨본다. 지호의 앨범에는 텅 비어있던 곳에 성진
의 사진.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잘생긴 아이다.
태웅 (우표 붙이다가 힐끗 지호 보고는 웃는)
도대체 성진이 주소하구 사진만 후벼 파낸
이유가 뭐냐 잔인하게스리.
선정 (끼어드는) 몰랐어? 둘이 중학교때
앙숙이었잖아.
태웅 (지호에게) 그랬어?
지호 (멋적게 웃는) 그랬나?
선정 어머머 재 좀 봐. 졸업앨범 받자마자 씩씩대며
도려 내는거
내가 옆에서 빤히 봤는데두 딴청이다.
지호 (웃는) 넌 별걸 다 기억한다.
태웅 그런 일이 다 있었어? 하하.
성진이가 니 쌍둥이 언니 좋아하는 건
알았는데,
선정 은호?
태웅 응. 은호. 은호 좋아하는거 까진 알았는데
지호랑 앙숙인건 또 몰랐네. 이게 몇 년만에
밝혀지는 진실이냐 응?
지호 올까?
태웅 올껄.
선정 태웅이랑 같은 부대에 있었잖아.
지호 (몰랐다) 그랬어?
태웅 같이 눈물 젖은 짬밥으면서 고생 많이 했지.
지호 많이 변했든?
태웅 그대로지 뭐. 의대 갔더라구, 한의대.
지호 ...
태웅 그 자식 아마 내 전화 한통화면 오늘밤이라두
말 달려서 올껄?
선정 맞다아. 지호 너 오늘 은호한테 전화 좀
걸어라.
지호 왜?
선정 은호 온다 그럼 남자 애들 많이 올꺼 아냐.
은호 덕에 흥행에 성공 한 번 해보자 야.
태웅 야 야. 얘는 촌스럽게. 요즘 어떤 남자가
중학교 여자애를 가슴에 품구 사냐. 것두
시골학교 여자애를.
지호 ...
씬 15 마당(D)
생각에 잠긴 듯 고개 푹 꺾고 들어서는 지호.
문득 멈춰서서 고개 드는데 그 시선에 들어오는,
수돗가 한켠에 씻어서 세워놓은 소변기와 대변기. 쌓여있는
빨래감들.
지호, 사는게 지친다는 식으로 푸우우- 한숨을 내쉬는데
마루에서 울리는 전화벨소리. 터덜터덜 그 걸음 그대로 안
채로.
씬 16 마루(D)
수화기 집어드는 지호.
지호 여보세요? 어... (시큰둥한) 은호니?
아버지 (E)누구냐?
지호 은호 전화요 아버지.
아버지 (E) 언니한테 은호가 뭐야 은호가.
지호 겨우 육분 먼저 났어요. 학교서 한반인
적두 있었구만 이름 좀 부르면 어때요.
닳는것두 아닌데. (해놓고) 어... 아냐...
말해 계속.
씬 17 은호의 사무실(D)
책상 위의 서류따위 넘겨 보면서 전화 하고 있는 은호.
지호와는 달리 세련되고 화려한 모습.
은호 응... 알구 있어. 다음주 토요일이라며....
금방 선정이가 전화했었어.(서류 정리해서
파일에 꽂아놓고 자판기 커피 한모금 마시며)
안그래두 담주 목요일쯤 집에 내려가려구...
이번 광고땜에 여름 휴가 반납했었잖아. 응....
(피곤한 듯 안경 벗고 눈 누르며) 이틀째야.
낼까지 카피 나와야 하거든.... 꼬박 밤샘이지
머. 아버지는 어떠셔?
씬 18 아버지방(D)
장농에 기댄채 약간 삐딱하게 앉아있는 아버지, 전화선 끌
어 당기며 방으로 이동 중인 지호를 보고 있다.
무릎 위에 쿠션 올려놓고 책 받쳐 읽던 중.
지호 잠깐 기다려. 바꿔줄게. 아까부터 바꿔달라는
눈치셔...
몰라. 또 내 욕 하시려나 부지 뭐.
(아버지 옆에 전화기 내려 놓으며)
니 목소리 들으면서 내 욕하는게 취미잖아
우리 아버지.
아버지 (못마땅한) 쯔쯔쯔.
지호 받아보세요. (수화기 귀에 대주려는데)
아버지 (멀쩡한 손으로 직접 잡아다가 귀에 붙이고는
지호를 대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로)은호냐? 그래 애비다.... 괜찮다.
글쎄 괜찮어.
지호 ... (보다가 아버지 머리맡에 널려있는 책이며,
신문 따위 정리하는)
아버지 느언니들 하고 형부가 때 되면 꼭 약값하라구
돈을 보내오잖니.... 그러게 말이다.
지들 살기두 힘들텐데 괜히 걔들만 고생시킨다
내가.
지호 (물주전자와 컵 챙겨들던 손 멈추고 보는)
아버지 너두 꼬박꼬박 생활비 대느라 힘들지?
그 나이에 변변한 옷재미두 못보구...
지호 ... (챙겨들고 나간다)
씬 19 마루(D)
방문 열고 나오는 지호.
한쪽에 물쟁반 내려놓고 마루 끝에 털썩 앉는다.
아버지 (E) 저런.... 너 회사일 힘들어서 큰일이다.
무슨 놈의 회사가 잠을 안재워 그래.... 담주에?
목요일?
잘했다. 와서 푹 쉬었다 가...
가만히 마당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지호.
늘 겪는 일이지만 아버지에 대한 섭섭한 감정.
학생주임 (E) 아무리 이란성 쌍둥이라지만 어째 이렇게
다르냐. 응?
씬 20 교무실 (회상/D)
학생주임 앞에 일렬로 쭈욱 서있는 대여섯명의 학생들과 지
호.
학생주임 (지호 앞을 왔다갔다 하며 약올리는) 깔끔하지,
공부 잘하지, 싹싹하지,
뭣보다 여자답지. (강조) 은!호!는 그런데
. (지호 앞에 딱 멈춰서서)
지호 넌 여학생 실내화가 이게 뭐야 임마. 어?
어디 땅굴파다 왔어?
지호 실내화 신은 발을 뒤로 해서 양말에 쓱쓱 닦아본다.
슬쩍 다른 쪽을 의식하듯 쳐다보는 지호.
저만치 창가쪽... 담임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성진
의 모습...
학주 니들도 마찬가지야. 내일까지 다시 빨아와!
알았어?
일동 네...
학주 가봐.
일동 (꾸벅 인사하고 나가는데)
학주 서지호.
지호 네?
학주 넌 삶아와 임마!
쿡, 짧게 터지는 웃음소리.
지호 반사적으로 성진쪽을 본다.
담임 말을 경청하는 척 서있지만 성진, 입가에 웃음을 감추
려 애쓰고 있다.
지호 무지하게 자존심 상한다.
씬 21 운동장(회상/D)
체육시간. 남학생들 교사와 함께 편을 나누어 농구시합하고
있다.
다음 차례 기다리며 스탠드에 앉아있는 여학생들.
힐끔힐끔 성진의 플레이를 눈으로 쫓고 있는 지호,
실내화건으로 기가 죽어있는 모습이다.
성진, 리바운드한 골을 태웅에게 패스한다.
태웅 잽싸게 받아 골대에 넣는 순간,
선정 (지호 옆에 앉았다가 벌떡 일어나며)
우와! 김태웅 화이팅!!!
남학생들 깔깔 웃으며 태웅 놀리고, 태웅 쪽팔려 죽겠다는
표정이다.
다시 게임 시작되면 오두방정을 떨다가 그제서야 자리에 앉
는 선정,
선정 (시선은 여전히 태웅쪽에 두고) 얼굴 좀 펴라.
한두번 있는 일이냐. 은호랑 한반일땐 더
했잖아.
지호 ...
선정 (여전히 시선은 태웅에게) 그러지 말구 아예
비교의 대상이 되지않게 넌 은호랑 전혀 다른
길을 걷는건 어떨까. 공부쪽이야 이미 게임
끝난거니까 일찌감치 손놓구, 넌 그 뭐냐...
그래, 농구, 농구같은거 해봄 어떨까.
이때 통.통.통. 튕겨와 지호 앞에서 멈추는 농구공.
선정 (E) (연결) 체육선생님이 넌 패스가 강하고
정확하다면서 소질있다구 했었잖어 왜.
남학생들 공 보내달라고 손짓하고 있다.
지호 공을 잡고 일어나 문득 성진쪽을 본다.
성진, 옆에 녀석과 뭔가 얘기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그 모습이 괜히 자기를 비웃는거 같아 기분 나쁘다.
지호 공을 던진다.
날아가는 공.
정확하게 성진의 얼굴에 가서 맞는다.
지호 통쾌한 듯 미소 지으며 돌아서는데 꺄아악 여학생들의
비명소리.
반사적으로 홱, 돌아보는 지호의 표정이 하얗게 굳는다.
씬 22 복도(회상/D)
얼굴이 온통 코피로 범벅이 된 성진, 고개를 뒤로 젖힌 상
태에서 남학생 몇명에게 이끌려 양호실로 가고있다.
모두들 들어 가고 나면 복도 끝에서 나타나는 지호.
겁에 질려 삐질삐질 새어나오는 눈물.
씬 23 양호실(회상/D)
방과후. 조용한 학교.
코에 솜 쑤셔넣은 성진, 이마에 얼음 주머니 올려놓고 잠들
어 있다.
삐꺽... 양호실 문이 열리고 지호가 들어온다.
조용히 침대 앞 의자에 앉는 지호..
잠시 그대로 앉아 바라보는 지호... 문득 성진 얼굴 가까이
로 다가간다.
그렇게 가만히 숨을 죽인채로 바라보는데 순간 번쩍 눈을
뜨는 성진.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빼는 지호.
얼음 주머니 내려놓고 일어나는 성진.
코에 솜뭉치 빼버리더니 가방들고 나가려는데,
지호 저기,
성진 (멈추고 보는)
지호 미,미안하다.
성진 ... (보다가 나가려)
지호 (급해져서) 부탁이 있어.
성진 (다시 본다)
지호 그,그럴리야 없겠지만 니들 부,부모님이 말야...
혹시 우리 아버지한테 따지 신다거나 그러면...
(슬쩍 눈치 살피다가 에라, 염치 불구하고
애원하는) 난 죽어. 알겠지만 우리집에서
내 입지가 말이다, 귀염둥이 쪽보다는
애물단지 쪽에 가깝거든. 그,그러니까 내 말은
뭐냐,
하는데 퍽 날아오는 성진의 가방.
지호 얼껼에 받고는 에? 해서 보면
성진 거래 트자는거지?
씬 24 길(회상/저녁)
한적한 길.
성진이 두 팔을 쭈욱 기지개 펴며 걷고 있다.
그 뒤를 두 개의 배낭을 앞 뒤로 맨 지호가 낑낑대며 따르
고 있다.
어느순간 씩씩대며 뛰어가 성진을 가로막는 지호.
지호 거래가 성사되려면 조건이 조건다워야
된다는거 몰라?
성진 맘에 안들어? 너 힘쎄잖아.
지호 눈 한 번 질끈 감았다 뜨더니 성진의 가방 바닥에 던
져놓고 씩씩대며 간다. 한참을 가다가 어떤 느낌에 돌아보
는 지호.
성진 가방을 줍는 자세에서 한손으로 코를 막고 있다.
손가락 사이로 다시 흘러내리는 콧피.
지호 미치겠네.... 울상이 되어 다시 성진에게로 간다.
씬 25 물가(회상/D)
성진 흐르는 물에 피를 닦아내고 있다.
지호 (퉁명스럽게) 머리를 뒤로 젖히구 있어봐.
성진 그건 잘못된 민간요법이야. 잘못되면 피가
기관지로 역류해서
큰일 나는 수가 있어.
지호 (꼬는 소리) 좋겠다. 아는거 많아서. 집에
가서 동의보감이나 한권 써.
성진 내 꿈도 그래.
지호 ?
성진 한의사 될꺼거든.
지호 ... (처음 듣는 얘기다)
성진 손수건 있으면 좀 빌려줘라.
지호 (있을 리가 없다. 가방에서 체육복 꺼내
던져주며) 대,대충 이걸루 닦어.
성진 ... (받고는 한심한 듯) 여학생이 손수건두
없냐.
성진 지호의 체육복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얼굴로 가져간다.
지호, 어쩐지 숨이 멎는것만 같다.
지호의 체육복으로 얼굴을 닦는 성진.
지호의 시선으로 보이는 성진의 옆모습...
성진 거래는 아직 유효한거지?
지호 ...?
성진 (뒷주머니에서 편지를 한통 꺼내더니 지호
앞에 내민다)
지호 (순간 가슴이 뛰는데)
성진 이거 은호한테 좀 전해주라.
지호 ! (어두워지는) ...
(그러나 곧 표정 수습하고 내민 편지
잡으려는데)
성진 (약올리듯 얼른 그 손 피하며) 설마 읽어보는
건 아니겠지?
지호 (약오르지만 점잖게) 너 날 뭘루 보는거야.
씬 26 부엌(회상/D)
끓고있는 물주전자.
하얀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는 주둥이에 성진의 편지가 대어
져 있다.
은호 (E) 지호야!
지호 (후다닥 편지 뒤로 감추는)
은호 (들어오는) 너 빨래 하다 말구 뭐해?
지호 어? 어... 지금 할꺼야.
은호 ? (지호의 등 뒤에 시선 주며) ...뭐야?
지호 (시침떼는)뭐? 아아. 이거? (편지 주며) ....누가
너 좀 전해달래더라.
은호 누가.
지호 (풀이 죽은) 몰라... 읽어보면 알꺼 아냐.
(나간다)
은호 ? (편지 이리저리 살펴보는)
씬 27 마당 (회상/D)
지호의 체육복이 맑은 물에 헹궈지고 있다.
체육복을 꼭 짜서 탁탁, 털어내던 지호.
가만히 눈을 감고 냄새를 맡아본다.
잠시 그대로 있는 지호...
옷걸이에 원형 그대로 입혀져 빨래줄에 걸리는 지호의 체육
복.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가끔 바람에 흔들린다.
씬 28 기차역 공중전화
부스 (현재/D)
지호, 아버지와 전화하고 있다.
지호 네. 아직 안왔어요... 집에도 아직 안 들어온거
보면 엇갈린건 아니네요. 그럼 다음 기차까지
기다려보구 들어갈께요. 혹시 은호한테 전화
오면 그렇게 전해주세요. 예. 끊어요 아버지
(전화 끊고 역쪽으로 간다)
씬 29 역(저녁)
지호, 기둥에 기대어 무료하게 발장난 하고 있다.
문득 고개를 드는 지호.
저만치 기차가 들어오고 있다
...,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들.
눈으로 열심히 은호를 찾고 있던 지호의 시선이 한곳에서
멈춘다.
저만치 배낭을 매고 걸어오고 있는 남자...
양미간을 모아 뚫어져라 바라보던 지호 어쩐 일인지 기둥
뒤로 숨는다.
잠시 후, 고개를 살짝 내밀어 살피는 지호. 남자는 이미 사
라지고 없다.
어쩐지 섭섭한 마음에 힘없이 돌아서는데, 그 앞에 떡 버티
고 있는 남자.
성진 (미소) 서지호. 맞지?
지호 (애매하게 웃는)
씬 30 길(저녁)
성진과 지호, 걸어오고 있다.
어색함과 반가움이 적절히 섞인 분위기.
성진 넌 하나두 안변했다. 중학교때 그대루야.
지호 ...그래?
성진 쭈욱 여기서 지냈니?
지호 응.
성진 대학 졸업하자마자 바루 내려왔구나 그럼.
지호 ... 아니.
성진 ?
지호 나...졸업 못했어. 이학년때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셨거든.
성진 어...그랬구나...
지호 (분위기 바꾸려는) 여?는 동안 태웅이네
있을거니?
성진 우리집 놔두고 왜. 오랜만에 포도나 실컷 먹구
가려구 일찍 내려왔어.
지호 ? 포도원, 판거 아니었어?
성진 지금 주인이 우리 외삼촌이거든.
지호 어어. 그랬구나.
성진 참, 올해 느이집 포도농사 잘 됐니?
지호 ...
성진 ? (표정 살피고는)...비피해가 심했던
모양이구나. 하긴 나라 절반이 물에 말아 놓은
꼴이 됐으니 뭐.
지호 우리 이제 포도원 안해. 태웅이네 한테 넘겼어.
성진 어... 미안. 자꾸 실수하네 이거.
지호 (웃는) 괜찮아. 모르는게 당연하지. 십년만인데.
성진 ...
지호 ...
성진 (어색한) 큼, 아까 누구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지호 어? 어... 은호.
성진 은호? 아, 니네 쌍둥이 언니. 은호 소식은
좀 들었다. 야무지구 당찬건 여전한가 보더라?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 한다며.
지호 ......응.
씬 31 마당(N)
지호 터벅터벅 걸어 들어오는데,
방에서 들려오는 은호의 웃음소리.
가지런히 놓여있는 은호의 신발.
지호 기막히고 화나는...
씬 32 아버지방(N)
지호, 문 열고 들어서다가 멈칫 선다.
장롱에 기대 앉아있는 아버지 옆에 꽃다발, 케?상자, 옷봉투
따위 늘어놓고 앉아있는 은호.
아버지 몸에 사온 스웨터 대보고 있던 중.
은호 꼭 영화배우 같으세요. (웃다가 지호 보고)
어 왔니?
지호 어 왔니? 사람을 반나절 동안 기차역에
세워둬 놓군 어 왔니?
은호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나서 표를 일찍
끊었거든. 오는 길에 학교 들러서 선생님 뵙구
오는 길이야. (아버지에게) 저한테 특별히
잘해주셨었잖아요. 퇴임하신다니까 그 동안
쭈욱 연락 끊구 지낸거 죄송해서 거기부터
들렸어요.
언짢지 않으시죠 아버지?
아버지 언짢긴. 잘했다. (지호에게) 얘, 언니 밥부터 좀
차려줘라.
지호 (퉁명, 쏘지는 말고) 부엌 어딘지 몰라?
니가 차려 먹어. 차려서 나두 좀 주구.
(나가는)
아버지 저 녀석이 근데.
은호 됐어요 아버지. (뒤따라 나가는)
씬 33 지호의 방(N)
지호 (들어와 장농에서 이불, 베개 꺼내 눕는다)
은호 (들어와 앉으며) 사람 괜히 죄인 만드네 얘가.
그러게 나오란 소리두 안했는데 왜 괜히 나가
기합받구 들어와.
지호 ... 밥차려줘?
은호 아냐. 선생님이랑 대충 먹었어.
지호 그럼 나 좀 잘게. (눈 감는)
은호 근데, 아버지 좀 마르신거 같다.
지호 (눈 뜨는)
은호 (E) 정기적으루 병원은 모시구 다니니?
지호 ... (거슬리는) 그렇게 못 미더우면 니가 와서
모시든지.
은호 (입 다물고 노려보는)
씬 34 아침 외경
아침 이슬을 머금은 포도송이들.
씬 35 부엌(D)
지호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중이다.
가스불 위에는 이미 김이 나는 국냄비가 올려져 있고, 냉장
고에 붙여 놓은 아버지 식이요법 식단을 손으로 짚어가며
반찬 재료를 준비하고 있다.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들리고. 잠시후 들어서는 은호.
은호 벌써 아침 준비하니? 천천히 하지 왜.
아직 시간두 이른데.
지호 (냉장고에서 야채 꺼내 개수대로)우린
괜찮지만 아버진 때맞춰 식사해야 돼.
은호 (기특해서 보는)
지호 (야채 다듬으며) 감동하지마.
나 편하자구 부지런 떠는거니까.
제때 식사하셔야 대소변이 정확해서 내가
다른일 보기가 편해.
(돌아서서 은호 보며) 들어가 더 자.
여긴 내가 할테니까.
은호 아냐. (개수대로 와서 야채 집으며)
있는 동안은 나두 너 도울게. 그 동안 너 혼자
너무 힘들었잖아.
지호 .... (본다)
은호 왜?
지호 아냐. 그럼 아버지 식사하시는 것 좀
도와드릴래? 나 오늘 아버지 약 찾으로 가야
되는데.
은호 그래. 너 편한대루 해. (일하고)
지호 ... (보는)
씬 36 선정의 방(D)
찾아온 약꾸러미 머리 위에 놓고 옆으로 누워있는 지호.
율무가루, 달걀 따위 늘어놓고 오이를 강판에 갈고 있는 선
정.
지호 (보다가) 미장원에서 하지 왜. 돈이 을마나
든다구.
선정 집에서두 하구 미장원에서두 하구 그래야
신부화장이 잘 먹어 얘. 너두 온 김에 하구
갈래?
지호 (천장을 향해 돌아 누우며) 됐다 무슨.
선정 쯔쯔. 저러니 누가 여자라구 할까. 시간 나면
맨날 배깔구 누울 곳만 찾으니.
지호 할 때가 되서 그런지 자꾸 쳐져서 그래.
선정 달거리 손님 꼬박꼬박 찾아오는거 보니 여잔
여자구나.
지호 ....선정아.
선정 뭐.
지호 내가 하나두 안변했니?
선정 안변했지 그럼.
지호 중학교때랑 하나두 안변했다구 하는거...
좋은 뜻일까?
선정 (오이 한입 와삭 베어물며) 글세...?
왜 누가 널더러 그렇대?
지호 아니... 그냥...
선정 기집애 뜬금없긴.
지호 선정아.... 돌아가신 우리엄마 말야.
선정 ? (느닷없다)
지호 위로 언니 둘에 은호랑 나...딸만 넷 두구 우리
할머니한테 엄청 구박덩어리였잖니.
선정 (깔깔 웃으며) 오죽하면 아들 동생 보자구
넌 치마두 안입혀 키웠겠니. 꼭 선머스마처럼
머리두 늘 뎅강머리였구.
지호 만약.... 만약에 말야, 나 대신 은호가 머리
짤리구, 치마 뺏겼으면... 그랬으면 지금이랑은
좀 많이 달랐을까?
선정 ... (보다가) 역사와 운명에 만약이란 없대잖니.
지호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은호 기집애,
늦게 나가면 내 팔짜 될꺼 미리 알구 뱃속에서
내 발목 붙든건 아닌가. 아님 내가 자구 있는
동안, 육분 먼저 일어나 순설 바꿔치기 한게
아닌가... 그런 생각...
선정 ...
지호 (피식 웃으며) 그것두 능력이겠지?
어쨋든 뱃속에서 부터 선견지명에 부지런하기
까지 했으니까.
선정 ... ?
지호 ...
씬 37 길(D)
약꾸러미 들고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는 지호. 멈칫 그 자리
에 선다.
저만치 함께 걸어오고 있는 은호와 성진, 무슨 얘기 끝인지
환하게 웃고 있다. 지호, 뒤 돌아서 오던 길 되짚어 가려는
데,
은호 (E)(발견하고) 지호야.
지호 (멈칫 서고)
은호 (달려와서) 약 찾아 오는거야?
지호 어... (하며 뒤도는데 눈 앞에 웃으며
다가오는 성진) ...
은호 어 참, 너 성진이 알지. 최성진. 중학교
삼학년땐가? 둘이 같은 반이었잖아.
지호 알지 그럼. (힐끔 성진 보는)
성진 (웃으며 지호 바라보는 위로)
은호 (E)우리집에 찾아왔더라구. 아버지 주무시길래
깨실까봐 나왔어.
은호 셋이 어디 분위기 좋은데 가서 차나 마시고
올래?
지호 아냐... 둘이 갔다와.
성진 왜에. 같이 가지.
지호 (웃는) 난 가서 할 일이 많아서 그래.
갈께... (뒤돌아서 가는)
성진 (보며) ......
씬 38 지호의 방(N)
지호 두사람의 이불 깔고 있고.
은호 막 세수한 얼굴에 로션 바르고 있다.
은호 중학교때 부터 입만 떨어지면 민간요법이
어쩌구 저쩌구 그러더니만 결국 한의대
갔더라구.
지호 ... (말없이 깔기만)
은호 학교두 가까웠는데 왜 우연이라두 한 번 안
부딪쳤나 몰라. 명함 한 장 줬더니 언제
점심이나 한 번 사달래서 서울 가면 한 번
보기로 했어.
지호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은호 ? 너 어디 아프니?
지호 아니. 피곤해서 그래. (눈 감는데)
은호 중학교때 나한테 편지 했던거 기억나냐구
그랬더니,(깔깔 웃는)
지호 (눈 뜨는) ...
은호 다른건 몰라두 그거 하난 확실하게 기억한다
그러더라.
지호 ... (눈 감는다)
씬 39 지호네 집 외경(새벽)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씬 40 마루(새벽)
불꺼진 마루.
화장실 물내려가는 소리.
지호, 아랫배를 움켜쥐고 기듯이 해서 화장실에서 나온다.
씬 41 지호의 방(새벽)
지호 방문 열고 거의 기어 들어와 진통제를 찾는다.
서랍 부시럭 거리는 소리에 부시시 깨는 은호.
은호 (놀라서) 너 왜 그래? 어디 아퍼?
지호 은호야. 나 물 좀...
은호 어 그래. (급하게 나가는)
지호 (진통제 찾아 입에 넣는데)
은호 (은호 물잔 들고 급히 들어오는)
너 혹시 맹장 아니야?
지호 아니야. (물 한모금 마시고 약 삼키는)
월중행사 중이야.
으으... (이불에 푹 꼬꾸라지며) 죽겠다.
은호 너 아직두니? ... 큰일이다 참. 결혼해서
애낳으면 괜찮아 진다던데.
지호 생리통 고치자구 애낳니?
은호 그런가? (웃고) 너 누워있어. 깬 김에 내가
아침 준비하께. (나가고)
지호 엄마아....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시간 경과)
지호, 땀에 흠뻑 젖어 잠들어 있는 모습이 안쓰러운데,
아버지 (E)지호야.
지호 (얼굴 찡그리는)
아버지 (E)지호야.
지호 (아파서 짜증스러운) 예에...
(힘들게 일어나 방문으로)
씬 42 아버지방(D)
지호 (문열고) 왜요 아버지.
아버지 나 목욕 좀 시켜라.
지호 지금요?
아버지 그럼 내년에 할래?
지호 은호는 어디 갔어요?
아버지 너한테 말하는데 은혼 왜 찾어?
지호 아버지 저 한 번만 살려주세요.
아버지 내가 칼들구 너 위협하냐 지금?
지호 저 지금 몸이 쫌 안좋아서 그래요.
아버지 몸이 근질거려서 그래. 하는 시늉만 내 그럼.
지호 이따가 은호 오면 은호한테 해달라구 하세요.
아버지 은호 좋아하시잖아요.
아버지 ...
지호 은호 있을땐 가만 계시다가 왜 은호 나갔다
싶음 억울한 종살이 시키듯이 자꾸 나만
불러들이는 건데요.
아버지 재밌어서 그런다. (재밌어서 그런게 아니다)
지호 (애원하는) 저 꾀부리는거 아니예요. 정말 몸이
안좋아서 그래요.
아버지 ...
지호 꼭 저 시키구 싶으시면 이따가, 자구 일어나서
구석구석 깨끗이
씻겨드릴께요. (문 닫고 지쳐서 나가는)
씬 43 지호의 방(N)
약기운 때문인지 조금 편안해진 얼굴로 잠들어 있는 지호.
어느순간 부시시 눈을 뜨는 지호. 벌써 어둑해진 방안.
지호 벌떡 일어나 앉아 시계를 확인한다. 일곱시다.
후다닥 일어나 나가는 지호.
씬 44 아버지방
지호 (조용히 문 열며) 아버지...
(미안한 얼굴로 들어서다가 그 자리에 멈칫
서는)
성진 (아버지 몸에 꽂아놓은 침 뽑다가 돌아보는)
어...? 집에 있었네?
지호 ......(어색하게 서있는데)
은호 (아버지 저녁상 들고 들어오는) 일어났니?
좀 어때 괜찮아?
지호 (성진 의식하며) 어..
은호 (상 내려놓으며) 남들 다하는거 넌 참 요란두
스럽다.
한달에 한 번씩 그 고생을 어떻게 치룰래.
지호 (은호를 툭, 치는)
은호 (했다가 무슨 뜻인지 알고 웃으며) 뭐 어때.
의사 될 사람인데.
성진 (말없이 침 뽑는)
은호 벌써 뽑는거야?
성진 식사하셔야잖아.
지호 (습관적으로 턱받이 챙겨들고 아버지
옆으로 가는데)
은호 (대신 턱받이 들고) 어,내가 할께 넌 들어가서
더 누워있어.
지호 ...
은호 (성진에게) 아직 식사 시간 안됐는데 미리
들구 들어온거야.
좀 기다려야 하니까 더 놓을 때 있음 좀 더
놓던지. 아버지 시간 맞춰서 드셔야 하거든.
지호 (그런 은호 보고 있다)
성진 그럼 그럴까.
은호 국이 뜨거워요 아버지. 적당히 식는 동안
다른쪽두 한 번 맞아보세요. 어디 불편한데
있으시면 말씀하시구요. 침선생 실력이 영
핫바린 아닌거 같죠? (웃는)
성진 (웃고) 그럼 한 번 뒤로 돌아보실까요?
지호, 세사람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나간다.
씬 45 마당(N)
터덜터덜 걸어나오는 지호.
마루 끝에 걸터앉는다.
문득 안방쪽을 한 번 돌아본다.
어쩔수 없이 파고드는 소외감과 열등감....
떨쳐내듯 일어나 빨래줄에 걸린 빨래 걷기 시작하는데,
은호 (E) 세상에... 아버지 이거 언제부터
그러셨어요. 말씀을 하시죠 왜에.
지호 ? (걷은 빨래 마루에 내려놓고 아버지 방으로)
씬 46 아버지방(N)
아버지 등을 위로해서 누워있고,
그 앞에 은호와 성진 아버지 등에 생긴 땀띠를 보고 있다.
지호 (들어서서 보는데)
은호 (성진에게) 이거 욕창 아니니?
성진 아니야. 그냥 땀띠야. 걱정하지 않아두 돼.
지호 (걱정스러워 성진 보며 좌불안석인데)
은호 욕창 될 수두 있는거잖어. (지호에게)
너는 도대체, 아버지 제때 목욕은
시켜드린거니?
지호 (순간 은호를 보는)
은호 아버지 가렵거나 쓰라리지 않으세요?
아버지 (어색하게 웃는) 괜찮데두 그러는구나.
괜찮어 글쎄.
성진 심하지 않으니까 됐어. 안그래두 방 온도가
좀 높다 싶었어.땀을 많이 흘리신거야.
은호 (아버지 분 발라 드리며) 하루종일 집에
있었으면서 목욕 좀 시켜드리지 뭐했어어.
지호 (점점 차오르는) ...
은호 (연결) 환자한텐 땀띠가 을마나 괴로운건데,
지호 그럼 니가 좀 해드리면 안되니?
은호 ?(본다)
성진 ?(본다)
지호 하루종일 집에 있었으면서 목욕 좀 시켜드리지
뭐했냐구?(울컥 솟는) 그래에. 나 하루종일이
아니라, 일년 삼백육십오일을 아버지 옆에서
아무것두 안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니가 좀
해드리지 그랬어 왜.
은호 (기막힌) 야... 서지호.
지호 나두 가끔,어쩌다 한 번이면, 케?상자 같은거
들구 내려와 심장이라두 빼줄 것처럼
방긋거리는거 할 수 있어. 아버지 아버지
부르면서 입 속에 혀처럼 달콤하게 굴 수
있다구.
은호 기막혀서... 너 지금 생색내는 거니?
지호 생색? 그래 내는거다. 너두 칠년을 소변기루
살아봐. 세탁기두 됐다가, 밥상두 됐다가,
때수건두 됐다가 그렇게 살아보라구. 생색
아니라 더한 것두 낼 수 있어 난. 난 그럴
자격있다구.
아버지 (엄한) 지호야!
지호 (OL) 아버지, 은호는 그렇게 아까우세요?
목욕한번 시키기가 그렇게 아까워서
나 깰때까지 기다렸다 이렇게 골탕먹이시는
거예요 지금?
성진 (처지가 난처해져) 저기, 지호야.
지호 너두 마찬가지야!
성진 (보는)
지호 하루종일 여자 꽁무니 ?아다니다가 선심이나
쓰듯 아무데나 꾹꾹 침꽂아 놓을려구
의대갔니? 여자한테 잘 보일려구 의대갔어 너?
은호 너 왜 그래 진짜. 내가 부탁했어.
내가 부탁해서 데려온거라구.
지호 (OL) 니가 뭔데 우리 아버지 몸에 손을 대.
우리 아버지 내꺼야. 오년동안 내꺼였으니까
내 허락 없인 아무도 손 못대. 알았어?
아무도 못건드린다구! (방문 거칠게 열고
나가는)
은호 서지호! (부르다가) 기집애 성깔은.. (성진에게)
성진아 니가 이해해. 재가 지금 신경이 좀
그래. 날카로울 때거든.
성진 ...
씬 47 길(N)
지호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걸어오고 있다.
지호 (E) (자조적으로) 잘했다 서지호. 아주 잘했어.
다리를 꺾어 놓은 것두 아니구, 발목 잡구
늘어지는 것두 아닌데, 지가 못나 지 스스로
주저 앉았으면서 누굴 탓하구 누굴 원망하니
지금. 어떻게 살래...그렇게 못난티 내구,
그렇게 다 들키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래...
열등감을 들킨거 같아 챙피하고 속상해 훌쩍이는 지호의 모
습 위로,
씬 48 성진네 집 앞(회상 /N)
문 열고 두리번 거리며 나오는 성진.
성진의 눈 앞에 불쑥 내밀어지는 편지봉투.
성진 ?해서 보면,
지호 (흥분해서) 이 짓 더는 못하겠어!
성진 (무표정으로 보는)
지호 니 눈엔 내가 향단이나 방자쯤으로 보이니?
니들이 춘향이 이도령인줄 알어?
성진 ... (픽, 웃는)
지호 이딴거 열다섯통이나 전해줬으면 내 할 일은
다 한거야.
이제부터 니가 직접 전해주던지 직접 가서
말을 하던지 니 마음대루 해!
성진 (그저 피식 웃으며 보는)
지호 (모르고 계속 흥분하며 연결) 지들 만나자구,
지들 사랑놀음에 애매한 까마귀 허리뼈만
부셔놓는 견우직녀같은 인간들이 제일 싫어!
성진 너...
지호 (씩씩대다가 ? 보면)
성진 (피식 웃으며) 혹시 질투하니?
지호 ...
성진 (조금 소리내어 웃는데)
지호 ... (보다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너같은 사람이야. 알아?
성진 (순간 굳는) ...그래? (편지 뺏어 들고는)
그럼 관두자 이제. (뒤돌아 가는)
지호 ...
씬 49 지호네 포도밭
(현재는 태웅네 포도원/N)
지호, 포도밭 걸상에 앉아있다.
포도 잎새 틈을 뚫고 흘러 들어오는 달빛.
지호 그렇게 무릎을 감싸 안은채 앉아있는데,
문득 부스럭 거리는 소리. 지호 ? 해서 보면,
포도 나무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 성진.
성진 여기 있었구나...
지호 ... (보는)
성진 앉아두 돼? ... (옆자리에 앉는) 아버지가 여기
있을꺼라구 하시더라.
지호 ...
잠시 긴 침묵.
벌레소리만...
지호 미안해.
성진 ... (보는)
지호 너한테 화난게 아니었어. 나한테 화가 난건데
괜히 은호랑 너한테 생트집 부린거야. 미안해...
성진 아니야...
지호 아버지 침 놔준거 고마워... 솔직히 실력은 쫌
의심이 가지만.
성진 (웃는)
지호 (웃다가)...여기 와있음 우리 아버지 건강했을
때 모습이 생각나서 서글퍼져.
성진 ... (본다)
지호 그래두 자꾸 오게 돼. 사람 심리란게
참 이상하지.
성진 그리운거야.
지호 가끔 내가 아들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그랬다면 이 포도원 남의 손에 넘기진
않았을텐데...
성진 여자건 남자건 불가항력이라는게 있는거잖아.
지호 (웃음) 넌 지켜냈었잖아.
성진 내가?
지호 중학교 삼학년땐가... 올해만큼이나 비가 많이
쏟아졌었잖아.
그때 느이집 피해가 가장 심각했었는데
그 와중에두 너 비피해땜에 별볼일 없어진
포도들 가져다가 우리반 애들한테 다
팔았었어.
... (아련히 미소짓는)
씬 50 교실 (회상/D)
아이들 반장에게 천원씩 돈을 내고 있다.
순간 교실 앞문이 벌컥 열린다.
아이들 시선이 일제히 집중된다.
포도알이 가득찬 바구니를 들고 들어서는 성진, 교탁위에
바구니를 탁, 내려놓는다.
성진 이 포도 사라.
아이들 ?
성진 구차스럽게 천원씩 돈 걷어 줄 생각 말구.
차라리 이거 세근씩만 사. 이거 최상품이
되려다가 막판에 좌절된 포도들인데,
지호 (집중해서 보는 위로)
성진 (E) 니들이 원하는 만큼 주문하면,
성진 십년 후에 최상품 포도주로 만들어서 줄께.
아이들 (웅성거리며 재밌겠다는 듯이 웃는)
씬 51 성진네 포도밭(회상/D)
사각사각 포도잎새가 부딪히는 소리.
누군가의 시선으로 보이는 포도밭. 아무도 없다.
그렇게 포도나무 뒤에 숨어 걸어가며 잎새 사이로 포도밭을
훔쳐보고 있는 지호인데,
성진 (E) 도둑고양이 처럼 숨지 말구 할말 있으면
말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는 지호.
바로 눈 앞에 무표정으로 서있는 성진.
한 손에 포도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서있다.
지호 큼, 괘,괜한 자존심 부리지 말구 걷어주는
돈이나 받지 그래.
성진 (보는)
지호 ... (그 눈빛에 조금 기죽어) 아,아깝지만
어쩔수 없잖아.
성진 ... (보다가) 농사는 자식 키우는거랑 똑같아.
자식이 죽었는데 아깝다. 이때껏 고생했는데
손해봤다, 그러는 부모 봤니?
지호 ...
성진 얘네들도 잘 커주지 못해 미안할꺼구,
나두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구 서루 그런거야.
부모 자식하구 똑같아. (평상쪽으로 가는)
지호 ... (보는데)
성진 (바구니 내려놓으며) 여긴 뭐하러 왔냐.
거래 끝났잖아 이제.
지호 나두... 큼, 나두 살게.
성진 ? (보는)
지호 나,나두 산다구. 그거.
성진 ... (보다가) 너한텐 안팔아.
지호 자존심 상한다. 잠시 서서 노려보듯 보다가 홱 돌아서
가려는데,
날아와 지호의 뒷통수에 맞고 떨어지는 빈바구니. 지호 돌
아보면,
성진 노동력 제공하면 공짜로 줄께.
지호 (머리 문지르며 보는) ...
(시간경과)
두 아이 마주 보듯 하고 앉아 포도송이에서 포도알을 따내
빈바구니에 담고 있다. (술 담으려는 작업)
어느순간 툭,툭, 떨어지는 빗줄기.
두 아이 비를 피해 뛰기 시작한다.
걸려 넘어지는 지호.
성진 멈추고 본다.
성진, 언뜻 다가가지 못하는데 지호, 제스스로 일어나 포도
나무 아래로 들어간다.
포도나무 아래서 비를 피하고 있는 두 아이.
포도즙이 두아이의 교복을 자주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문득 지호의 무릎을 보는 성진.
빨간 피가 송글송글 맺혀있다..
씬 52 포도밭(현재/N)
열여섯살 때 처럼 나란히 앉아있는 성진과 지호.
두 사람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맺혀있다.
지호 그때 그 술 정말 담았니?
성진 ... (피식 웃는)
지호 (웃는) 그럴줄 알았어.
성진 ... (문득 달빛을 올려다 보는데)
지호 (E) 그때 니가 한 말 때문에 자꾸 여기 오게
되나봐.
성진 (본다)
지호 차라리 빨리 끝나버렸으면 좋겠다 벼락 맞을
생각을 하다가두 여기와서 이러구 앉아 있으면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아버지두 미안할꺼다...
나두 잘 커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아버지두
딸들을 든든하게 지켜주지 못해 미안할꺼다...
아마 나보다 더 많이 미안할꺼다...그런 생각...
성진 ... (바라보며 미소짓는)
씬 53 지호네 마당(N)
지호 들어서다 멈칫 놀라 선다.
은호 평상에 앉아 훌쩍이고 있다.
지호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은호 (지호 보고 훌쩍이며) 지호야...
아버지... 아버지가...
지호 (쿵, 내려앉는) 아버지가 왜? 무슨 일 있어?
은호 아버지가 요 위에다... 요 위에다가...
지호야 우리 아버지 어떡하니?
지호 (그제서야 무슨 말인지 알고 안심하는)
은호 난 못들어 오게 하셔. 치워드린다구 해두
막무가내야.
지호 됐어. 진정하구 목욕물이나 좀 받아놔줘 응?
(들어가는)
씬 54 아버지방(N)
방 깨끗이 정리되어 있고,
지호, 깨끗이 씻긴 아버지 앉혀놓고 옷 입혀 드리고 있다.
아버지 어디 갔다 와?
지호 ... (아버지 한번 보고 옷단추 채우며)
알면서 건 왜 물으세요.
아버지 거긴 왜 자꾸 가.
지호 (머리 빗기며) ...
아버지 미련갖지 마라. 있어봐야 짐이나 되지.
돌볼 사람두 없구.
지호 (짐짓) 아버지나 미련 있지 전 없어요.
비올까, 눈올까 걱정 안해두 되구 좋지 뭐.
아버지 ...
지호 다 됐어요. (다 빗겨놓고 아버지 측은히
바라보다가) ... 이럴땐 아들 하나 있었으면
그런 생각 하시죠?
아버지 ...
지호 눕혀드릴까요? (눕히려는데)
아버지 ... 니가 아들이야.
지호 ? (해서 보는)
아버지 아들 왜 찾어. 늘그막에 맘놓구 기댈
나무 찾는거 아냐.
엉덩이에 난 종기 짜달라구 들이밀수
있는 사람 찾는거야.
아랫도리 뵈줘두 안 민망하구, 약한 모습
뵈줘두 이해하겠거니,
지호 (보는)
아버지 (연결) 그런 사람 하나 곁에 두구 싶은
욕심에서 아들 찾는거야.
세상뜨기 전 까지 외롭지 않게 해주면,
그럼 그게 아들이야.
지호 (가슴 한켠이 짠 해지는)
아버지 아무나 아랫도리 내보이는 사람 아니다.
지호 ... (보다가 웃으며) 나 참... 대단한 영광이네.
아버지 (웃으며) 영광이지 그럼.
지호 .... (아버지 아프게 바라 보는데서)
씬 55 지호의 방(N)
나란히 이불 덮고 누워 있는 자매.
두사람 다 잠이 안 오는 듯 천장을 향해 말똥말똥 눈을 뜨
고 있다.
그 침묵을 깨고,
은호 결혼식 전날이면 기분이 어떨까? ...
선정이 지금 잠 안오겠다. 그치.
지호 ...
은호 우린 결혼식 때 아버지 손 못잡구
들어가겠지...?
지호 ... (아픈)
은호 지호야... 나 있잖아. (조금 울먹이는)
나 정말 못된년이야.
지호 (고개 돌려 보는)
은호 아까 아버지 요 위에다 일보신거 보구 눈앞이
캄캄해지더라.
아버지가 걱정되서가 아니라 저 더러운걸
어떻게 치우나 그 걱정 땜에, (울먹) 도망가구
싶었어 나.
지호 ...
은호 아버지가 못 들어오게 하시는데 걱정하는
척 하면서두 속으론 얼마나 다행이라구
생각했는지 몰라. (울먹이는) 미안해...
너한테 정말 미안해.
지호 울지마... (울먹) 나두 똑같애. 너랑 다를거
하나두 없어.
그대로 누워서 울먹이는 두사람.
그렇게 훌쩍이다가 어느순간 눈이 마주치면 어색해서 피식
웃어버리는.
지호 은호야... 너두 잠 안오지?
은호 응.
지호 (일어나 앉으며) 우리 라면이나 끓여먹을래?
은호 (일어나며) 좋지.
(시간경과)
깨끗이 비워낸 라면냄비와 김치그릇.
빈 상 물려 놓고 앉아 커다란 상자 꺼내놓고 옛날 사진을
보고 있는 자매.
자매의 어릴 때 사진... 포도원에서의 건강한 아버지 모습을
찍은 사진...
중학교때 나란히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 등을 넘겨보며 깔
깔거리는 자매.
은호 (사진 보며) 난 중학교 때가 제일 예뻤던거
같애.
지호 난 끔찍했어. 남학생들 편지 중간에서
전달해주느라구.
은호 (문득) 내가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까?
지호 ...?
은호 내가 성진이 좋아했었다?
지호 (전혀 몰랐다) 진짜?
은호 몰랐지? 내가 먼저 편지 보낸 남학생은 아마
성진이가 처음이었을꺼야. 답장이 없어서
자존심 상해하구 있는데, 어느날 니가 답장을
들구 오더라?
근데 그 답장이라는게, (웃는)
지호 (궁금한데)
은호 가만 여기 어딘가 있을텐데.
(상자 안을 뒤지는)
지호 (눈으로 함께 찾으며 집중하는)
은호 여기있다. (열다섯통의 편지 뭉치 꺼내는데)
아버지 (E) 자냐?
지호 (중요한 순간이라 안타까운) 아, 아니요,
가요.(일어서려는데)
은호 (잡으며) 아냐, 내가 갈께.
지호 (보면)
은호 내가 할께...(미소) 참회와 반성이야.
(나가는)
혼자 남은 지호. 편지 꾸러미에 눈길이 간다.
안방쪽 신경쓰며 슬그머니 편지 한통을 꺼내보는 지호.
봉투에서 천천히 편지지를 꺼내본다. 십년만에 펼쳐보는 편
지...
잔뜩 긴장한채 편지지 펼쳐보는데,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백지다!
지호 황당해져서 다음 편지 열어본다. 백지다.
열다섯통 모두 빠르게 열어본다. 전부 백지다.
지호 어이없어 보는데,
그 위로 성진의 플래시 컷- 씬 48 에서
너...혹시 질투하니?했던 장면.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피식 웃어버리는 지호.
황당하고, 기막히고, 괘씸한 기분...
지호 (괘씸한 표정으로) 이 나쁜 자식..
. (웃어버리는)
씬 56 하늘(D)
맑은 가을 하늘.
씬 57 결혼식장 몽타쥬
-결혼식장 입구.
턱시도 차림의 태웅 잔뜩 긴장한 채로 서서 이마의 땀닦아
가며 인사받고 있다. 동창들 반가운 얼굴로 다가와 태웅의
어깨를 턱턱, 치며 반가워한다.
-신부대기실.
웨딩드레스차림의 선정.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신랑자랑이
한창이다.
지호와 은호의 모습도 보이고. 이야기 나누다가 카메라 오
면 예쁜척 포즈를 취하는 동창들.
-결혼식장.
동창들이 터뜨리는 폭죽 속에 퇴장하고 있는 신랑 신부.
씬 58 태웅네 마당(N)
열댓명의 동창들, 마당에 자리 깔아놓고 술판을 벌였다.
똑같은 티셔츠를 입은 선정과 태웅이 가운데 자리에 앉아있
고, 은호,지호,성진 등이 적당히 섞여 앉아있다.
모두들 기분 좋게 취해가고 있는 밤...
동창1 야, 그런데 우리 선생님 너무 많이 늙으셨더라.
태웅 니 나이를 생각해 임마. 넌 아직 중삼인데
선생님만 늙었지?
동창2 (취한) 늙는다. 우리두 그렇게 늙어 이제.
그래두 태웅이 너 임마! 늙지 않는게 하나
있어!
동창들 (저 자식 또 시작이다. 저건 병이다 병. 어쩌구
하면서 술잔 돌고)
동창2 (아랑곳 않고) 고향! 절대 고향은 안 늙는다
이거야. 나 이번에 물난리 났을 때 고향걱정
증말 많이 했다.
동창3 저 자식이 원래 나라 걱정은 혼자 맡아서 하는
놈이거던.
동창2 또 있다! 술하구 친구! 술하구 친구는 임마,
늙는게 아니야.
이건 오래 될수록 좋다 이거야. 알어?
가슴 속에 오래 간직할 수록 그 맛과 향이
더 오래가는 법이거던. (갑자기 옆에 사람들목
거칠게 끌어당겨 안으며) 사랑스런 차식들!
(옆에 사람들 죽겠다고 켁켁 대고)
동창3 야 야. 근데 태웅아 술 없다.
선정아 술 떨어졌어. 더 없냐?
태웅 (일어서며) 사와야겠는데.
선정 이 시간에 어디 가서 술을 사와.
동창1 아. 이제 막 분위기가 무르익는구만.
(아쉬워하는데)
성진 (E) 나한테 좋은 술이 있어.
동창들 (성진에게 시선 집중되는)
성진 (의미있는 웃음)
동창들 ?해서 쳐다보는 얼굴 위로, 시작되는 음악.
(여행스케치 초등학교 동창회 가는길 정도)
씬 59 성진네 포도밭(N)
포도밭 바닥을 덮고 있는 짚단을 들어내는 성진.
성진 주위에 동그랗게 모여 짚단 속을 바라보고 있는 동창
들.
땅속 깊숙이 손을 집어 넣어 술병을 꺼내는 성진.
아주 오래된 포도주 병에는 1988년 구월, 김태웅 이라
는 라벨이 붙어있다. 성진 태웅에게 포도주병을 건네준다.
받아드는 태웅, 그제서야 그것이 무슨 술인지 알고 환한 미
소가 생긴다.
십년전 성진이 동창들에게 약속했던 포도주다.
계속해서 나오는 포도주병에는 같은 내용의 라벨이 붙어있
고,
건네받는 동창들의 얼굴에는 포도주 빛깔보다 짙은 기쁨이
밴다.
지호에게 건네지는 포도주병. 받아드는 지호... 가만히 성진
을 바라본다.
성진 미소 짓는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 위로,
씬 60 성진네 포도원
(회상/D)
(씬 51에서 이어지는)
포도나무 아래서 비를 피하고 있는 두 아이.
문득 지호의 무릎을 보는 성진.
빨간 피가 송글송글 맺혀있다.
성진의 시선을 의식한 지호 괜히 어색해지자,
지호 마른 흙 갖다 뿌리면 피가 멎는데...
성진 그건 잘못된 민간요법이야.
지호 (또 시작이다 싶은)
성진 (시선은 빗줄기에 둔 채로) 너...
지호 (보면)
성진 무릎 상처 치료에... 가장 좋은 방법이 실린
책이 뭔지 알어?
지호 (퉁명스레) 동의보감.
성진 ... 아니야.
지호 ...? (해서 보면)
성진 (그제서야 지호를 보며) 황순원의 소나기야.
하며 지호의 무릎으로 입술을 가져간다.
지호 그대로 굳고 만다.
빗소리... 첫키스의 느낌...
지호 심장이 멈출 것만 같다.
씬 61 태웅네 마당
(현재/N)
각자 자기 이름의 포도주를 따라 마시는 동창들...
한모금 마신 후 만족스러운 듯 환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
한명한명 카메라에 잡히고... 모두들 유쾌하게 웃으며 서로
술을 권하고, 받고, 마시는 따뜻한 풍경들... 어느순간 조용
히 자리에 일어서서 나가는 지호.
씬 62 태웅네 집 근처
적당한 곳(N)
두 뺨이 발그스레해진 지호 적당한 곳에 와서 앉는다.
술에서 깨려는 듯 심호흡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 보는데,
성진 (E) 많이 취하니?
지호 ? 해서 본다.
저쪽 구석에 언제부턴가 먼저 와서 앉아있는 성진.
성진 실은 나두 취한다. 술에 취하는게 아니라,
술에 담긴 고향에 취하구...추억에 취하구...
나랑 똑같이 나이 들어가는 친구들 모습에
취하구...
지호 ... (보는)
성진 다 쓸려가구 없을 줄 알았는데 여기,(가슴
한켠 툭툭 치며) 여기에 남아 있더라. 좋은
추억은 여기에 다 저장되어 있더라구. (웃는데)
지호 ...
성진 (일어서더니) 안들어갈래?
지호 .... 성진아...
성진 ? 해서 본다.
지호 불러놓고 잠시 그대로 있는다.
어느순간 따뜻한 미소를 짓는 지호,
지호 너 참 멋있어...
성진 ...
두 사람 잠시 그대로 있는데.
선정 두리번거리다 성진을 발견하고는 달려온다.
선정 성진아. 니가 어떻게 좀 해봐라.
김태웅 또 운다. 울면서 교가 불러.
미쳐 내가 진짜.
성진 교가? 하하... 차식.
(웃으며 들어가고)
선정 (지호 보며) 이 결혼 물려야 되는거
아니니 나?
지호 (웃으며 선정 어깨 감싸안고 들어간다)
씬 63 에필로그
태웅, 동창3과 어깨를 얼싸안고 교가를 부르고 있다.
역사를 창조하는 성문의 자랑아. 보라 당찬 기상과 패기
로 새시대를 열어간다~ (음은 마음대로 해서 부른다)
성진 둘 떼어놓으려다가 잘 안되자
내가 2절 가르쳐줄게 꼬셔서태웅을 끌어낸다.
그 순간 우루루 몰려드는 동창들.
신랑 발바닥을 때리자며 태웅을 끌고 나간다.
태웅 발목을 묶는 동창들의 모습과 그것만은 안된다며 필사
적으로 말리는 선정의 모습이 담기는데서...
( 포도나무 아래서 - 끝 - )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