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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애의 명화 감상-2-
1. The Last Station (2009)
톨스토이의생애 MIchael Hoffman(1956~ )감독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y, 1829~1910)
모스코바 남쪽 160KM 덜어진 톨스토이 가문의 영지 야스나야폴랴나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친척들의 손에서 자라며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16세때 모스코바와 상트페테르부르그 공부를 하였으나 고향으로 돌아와 영지를
가꾸고 있었다
1854년 삶을 좀먹는 욕망에서 탈출하려는 극단적 결심으로 택한 입대후
전쟁은 톨스토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르포기사를 잡지에 연재하면서
자주 죽음의 그림자와 만났고 1855년 3월 5일 자 일기엔
<나는 위대한 이념을 발견했다. 이는 교리가 아닌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인간을 화합시키는 새로운 종교이다.
이 이념의 실현에 내 전 생애를 바쳐야겠다.>
지성적인 가정의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Sophia Andreevna Behrs 1844~1919)
를 만나 1862년 16세의 소피야와 결혼하게 되는데 결혼 전날 톨스토이가 내민
일기장으로 인해 위기를 맞는다.
특히 수많은 여성과 맺은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묘사는 적나라해서 어린 신부가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깊은 고민에 빠져 결혼 자체를 망설이던 소피야는 결혼 후에도
서로의 일기를 공개하는 조건으로 그간의 일들을 모두 눈감아 주기로 한다.
15년간 13명의 자녀를 낳을 정도로 작가의 아내로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다
1864년 <전쟁과 평화>의 집필을 시작하여 5년동안 계속했는데 소피아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고 무려 58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엄청난 분량의 대작을
정리 하였다
<전쟁과 평화>가 발표되자 <일리아드>를 능가하는 유럽 문학의 최대 걸작이라고 했다
러시아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에 맞서 싸우는 러시아인들의 저항을 4부작으로 나눠
소개하고 있는 책 속에는 실제 인물과 가공의 인물들이 서로 교묘하게 뒤섞여있다.
애욕으로 가득한 안드레이 공작, 순진한 공상가 피에르, 생명력 넘치고 사랑스러운
나타샤를 중심으로 3대에 걸친 세 가문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특히 달빛 창가에서 몽상에 빠진 나타샤의 모습은 톨스토이가 추구하는 진선미의
출발점인 동시에 종착점이다.
톨스토이는 “어떤 힘이 역사를 움직이는가?”라는 무거운 주제에 답을 구하고 있다.
그는 소설을 통해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영웅이 아니라 민중이라고 정의한다.
《일리아드》가 영웅의 대서사시라면 《전쟁과 평화》는 민중의 이야기였다.
소설 속에서 영웅은 명성뿐인 공허한 꼭두각시로 묘사되고 있다.
나폴레옹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안나 카레리나>는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한 대 서사극을 장편소설로 시도한
작품이다. 아내 소피야와 좋았던 시절의 소소한 기억들을 소설화한 작품으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구로 시작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이유가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150여 명의 인물은 그에 걸맞게 다양한 삶의 무늬를 보여준다
‘안나 카레리나’는 모든 것을 다 갖춘 귀족 부인이었다. 모두가 부러워했지만
삶은 지루했고 남편 카레린은 고루했다.
화사한 미모는 그녀를 사교계의 꽃으로 만들었다. 어느 날 젊고 매력적인 브론스키는
사랑을 표현하는 일에 망설임이 없었다.
안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브론스키와 함께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지만
얼마안가서 브론스키의 열정이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톨스토이가 안나를 통해 도시의 화려함 뒤에 감춰진 불행한 삶을 그렸다면
키티와 레빈은 시골살이의 행복함이 담겨있다.
바로 그들의 이야기가 톨스토이 자신과 소피야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 부부는 시골에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그 바람에 러시아 전역에서 집 없는 사람들 병자와 농민들이 도움을 바라고
톨스토이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러시아 제정 말기 화려한 관능을 추구하는 귀족들과 소박한 시골살이라는
그들의삶으로 이루어진 《안나 카레리나》는 톨스토이와 소피야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았던 시절의 소소한 기억들이 깃들어 있다.
1870년대 후반, 톨스토이는 돌연 ‘회심(回心)’을 선언한다.
모든 예술은 위선이며 위선적인 글쓰기는 중단하겠다는 절필을 선언한 것이다.
당시 톨스토이의 내면은 ‘삶의 무상’에 대한 고뇌로 요동치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리는 죽음 앞에서 자신의 문학이 별 의미가
없다고 느끼고 깊은 회의에 빠져든다
이후 평화주의를 선언하면서 기존방식의 글쓰기를 중단했다.
또한 러시아 주류 정교회를 비판하면서 자기만의 종교를 창립했다.
여러 종교를 혼합하여 창립된 보편 종교였으며 그는 사실상 교주였다.
그의 교리는 수많은 추종자를 양산해냈다.
심지어 다른 나라에도 그를 따르는 무리가 생겨났다.
그들은 톨스토이주의자를 자처하거나 톨스토이를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했다.
영국 식민통치에 저항하던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도
톨스토이와 주기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 일로 톨스토이는 러시아 국교회에서 파문당한다.
1882년 1월 톨스토이는 삶과 예술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
“예술이란 인생의 거울인데, 인생이 이토록 비참하다면 거울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러면서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자신부터 ‘가난한 농부의 삶’을 살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의 삶과 문학의 동반자임을 자처했던 소피야는
동의하지 않았다
일체의 형식과 권위를 부정하는 무저항주의자가 되는 것과 빈자들을 도와주는 것은
동의했으나 ‘청빈한 삶’까지는 좋았으나 전 재산을 버리고 극빈자가 되려는 것만큼은
반대하였다
1889년 저택에서 음악회를 열었는데 베토벤의 <크로이쳐 소나타>를 연주하든
음악가와 밀애를 나누는 소피아를 보고 톨스토이는 의심과 질투가 극에 달하여
불륜을 의심해 아내를 죽이는 남편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크로이처 소나타>를
발표하였다 <크로이처 소나타〉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9번 A장조의 제목으로
소피야가 젊은 음악가를 처음 만났을 때 연주된 곡이자 소설 속의 아내가 애인인
바이올리니스트와 합주한 곡이다
교육만이 양심을 일깨워주고 화합하는 삶을 만든다는 확신을가지고 학교를 세우고
직접 자연 속으로 뛰어들어 농노들의 몫이었던 농사에도 직접 참여한 것이다
이상 속에 살던 톨스토이에게 현실적인 소피야의 삶이 신선할 수 있었을 것이다.
톨스토이의 이상을 억누르고 현실감각을 유지하며 예술의 꽃을 피울 수 있도록 곁을
지킨 것도 소피야였다. 하지만 처음 느낀 청량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71세때 현실주의의 소피야와 되살아나기 시작하는 톨스토이 이상주의 사이의
괴리감은 위대한 걸작 《부활》을 만들어냈다..
귀족 청년 네플류도프는 친척 집에서 일하는 처녀 카추샤를 임신시킨다.
불장난으로 시작한 사랑이 임신으로 이어지자 네플류도프는 돈 몇 푼을 쥐어
준 후 사라져버린다. 버림받은 카추샤는 절망하며 7년 동안 창녀생활로 살아간다.
그러다가 살인 및 절도 혐의로 서게 된 법정에서 배심원으로 나타난 네플류도프와
만나게 된다. 그날 법정에서시베리아 강제 노동수용소에 4년간 복역하라는
선고를 받는 카추샤를 보고 네플류도프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여기고 모든 재산을 처분해 카추샤를 따라간다.
네플류도프라는 귀족의 양심이 황량한 시베리아 벌판에서 속죄의 정신으로 부활한 것이다.
《부활》은 톨스토이의 마지막 장편소설인 동시에 예술적 유서다.
전편에 걸쳐 인간 연민의 시적 무드가 깔리며 각자 마음속의 신을 보게 된다.
1910년 10월 어느 날 여든 살을 훌쩍 넘은 나이에 가출을 결행한 것이다.
늦은 밤, 집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편지 한 통을 남긴다.
사랑하는 소피야. 떠나게 되어 미안하오. 신념과 생활의 불일치로 너무 괴롭소.
나는 더 이상 지금처럼 호사스럽게 살 수 없을 것 같구려.
당신에게 불만이 있어서 떠나는 것은 아니니 너무 나무라지는 마시오.
내 남은 세월을 고독과 침묵 속에 보내고 싶소.
나도 당신이 나와 같지 않다고 하여 나무라지는 않겠소.
내게 준 당신의 모든 것을 늘 감사한 마음으로 추억하리다.
잘 있어요, 내 사랑 소피야.
톨스토이는 주치의와 막내딸만 데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으로 가서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3등 열차에 올라탔다. 가다가 지치면 쉬었다가 다시 떠나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여정이었다. 여행 중에 딸과 주치의에게 잠언 같은 이야기도 남겼다.
이해하려면 먼저 사랑해라.
내가 이해하는 모든 것은 내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 이 시간,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는 그 일이다.
러시아의 추위가 열차 안에 가득했지만 톨스토이는 행복했다.
따뜻한 집보다 더 평온했다. 하지만 고령의 몸은 추위를 견디기엔 너무 연약했다.
결국 독감에 걸려 랴잔 역과 우랄 역 사이에 있는 아스타포보(현 톨스토이 역)라는
자그만 시골 역에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역장이 집을 빌려줘 하룻밤을 보냈다.
그곳에서 쉬고 날이 밝으면 누이가 원장으로 있는 수도원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인 11월 7일 새벽 주치의가 톨스토이를 깨웠으나 이미 생을
마감한 후였다. 전 세계 언론이 그의 죽음을 톱뉴스로 보도했다.
그의 마지막을 보려고 수많은 사람이 역장 집으로 모여들었다.
눈발이 날리는 매서운 겨울 날씨에도 시신을 운구하는 열차가 잠시 멈추는 역
앞 광장에는 캠프를 친 사람들로 넘쳐났다.
상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모든 활동이 조문으로 정지되어 버렸다.
고향에 도착한 톨스토이의 시신은 소피야와 엄청난 인파의 흐느낌 속에 고향의
땅에 소박한 무덤으로 묻혔다.
생전에 자주 토로하던 남편의 말이 떠올라 소피야는 오열했다.
“내가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날마다 재산이 늘어나는 이 큰 농장,
그런데도 나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존경과 칭송을 받는
이 순간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이야······.”
차이코브스키(1840~1893)와 톨스토이 (1829~1910) 의 안단테 칸타빌라
Tchaikovsky String Quartet No.1 in D - Mvt 2 (Andante cantabile)
Borodin Quartet
차이코브스키는 31세때인 1871년 현악4중주 1번을 작곡하였는데 제2악장은
너무나 유명한 안단데 칸타빌라이다
우크라이나의 카멘가에 사는 여동생 집의 창밖에서 들려오는 장인의 노래소리가
남러시아의 민요라는 것을 알고 이를 토대로 2악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곡이 너무나 유명하여 5년후 첼로와 현을 위한 곡으로 편곡하여 1876년 12월
모스코바를 방문한 톨스토이를 위하여 루빈슈타인은 작은 음악회를 게최하였는데
차이코브스키의 작품 현악 4중주 1번 2악장 안단테 칸타빌라가 적절히 정제된
슬라브정서가 아름답게 표현되면서 연주되자 작곡가 옆자리에 앉은 톨수토이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를 지켜본 차이코브스키는 작고가로써 최고의 영광과 감동을 받은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2. 표트르 차이콥스키
차이코프스키 이태리 기상곡 Op.45
P.I.Tchaikovsky: Capricho Italiano op. 45 - Sinfónica de Galicia -
Jesús López Cobos, director
1840년 보트킨스크 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여 났으며 1848년에 그의 집안이
페테르부르크에 이사하자 그곳에서 체계 있는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부친의 의사대로 법률학교 졸업 후에는 법무성의 서기로 근무했으나
음악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1863년에 관리 생할을 사직했으나 1864년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이 문을 연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1868년 부터
본격적인 작곡 활동에 들어갔다.
1877년에 그의 여제자였던 안토니나와의 결혼에 실패하고 이혼한 뒤
극도의 신경 쇠약 때문에 학교 생활과 작곡 활동에 많은 지장을 받았다.
1876년부터 그의 예술을 사랑하고 있던 폰 메크 미망인으로부터 매년 상당한
연구비와 생활비를 받게 되었는데, 그는 평생 동안 부인을 만날 기회가
없었으며 경제적 정신적으로 절대적인 원조를 얻을 수가 있었다.
이 무렵부터 작품활동에 전념하여 제 1 피아노 협주곡(1875), 발레《백조의 호수》
(1876), 가극 《에프게니 오네긴》(1878), 바이올린 협주곡(1878)
서곡《1812년》(1880), 《이탈리아 기상곡》(1880), 《현악 세레나데》(1880),
《잠자는 숲 속의 미녀》(1889), 《호두까기 인형》(1892) , 7곡의 교향곡 중
제4번(1877), 제5번(1888), 등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893년 제6번 <비창>을
페테르부르그에서 초연한 후 한 귀족의 조카와의 동성애 관계가 알려지면서
비소를 마시고 자살하고 만다
그의 음악은 러시아적인 향수를 바탕으로 한 서유럽적이며 낭만적인
음악이라는 말을 듣는 19세기 러시아 최대의 작곡가이다.
Overture 1812
Tchaikovsky- Ouverture 1812 | Prinsengrachtconcert 2013
<서곡 1812년>의 작곡 동기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의뢰로 작곡되어 18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릴 산업 예술
박람회의 축전 음악으로 초연 당시 이 작품은 큰 호평을 받지 못했다.
이 작품에 대해 “아무런 애정도 없이 작곡했기에 예술적 가치가 없는 크고
시끄러운 작품”이라고 말하면서 스스로가 신랄하게 혹평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차이콥스키에게 엄청난 부를 주었으며
오늘날 차이콥스키를 대표하는 작품의 하나가 되었다.
음악의 배경은 1812년 나폴레옹은 60만의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략하여
모스크바를 점령한다. 그러나 러시아 군의 반격과 추위와 굶주림으로
나폴레옹 군은 러시아에서 퇴각한다.
〈서곡 ‘1812년’〉은 바로 이 역사적 사실을 음악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은 5개의 주제로 묘사되었으며 여기에는 현재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 러시아 민요, 러시아 국가 〈주여,
차르를 보호 하소서〉가 사용되었다.
〈라 마르세예즈〉는 이미 1795년 국가로 선택되었지만 1805년 나폴레옹이 이를
금지하였으며, 공식적인 프랑스 국가로 다시 채택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주여, 차르를 보호 하소서〉는 차이콥스키 시대의 러시아 국가였다.
이 두 선율의 적절한 사용은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의 순간과 퇴각이 시간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작품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제1부분은 비올라와 첼로로 연주되는
러시아 정교 성가 〈주여, 당신의 백성을 구하소서〉이다.
이 성가에 가사를 붙여 합창으로 노래하기도 한다.
제2부분은 보다 빠르고 활기 있는 주제로 오보에, 클라리넷, 호른으로 연주된다.
이 주제는 전투에 임하는 러시아 군대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 선율은 나폴레옹 군이 러시아 진영에
나타난 것을 표현하였다.
4번째와 5번째에 나오는 주제는 모두 러시아 민요와 민요풍의 선율로 러시아를
묘사하였다.
노브고로드(Novgoroad) 지방의 민요를 사용한 4번째 주제가 조용하게
제시되며 다소 밝은 민요풍의 5번째 선율이 이어 나온다.
이 두 개의 선율은 전쟁전의 러시아 국민들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마지막 제3부분은 프랑스 군대와 러시아 군대와의 격렬한 전투를 묘사한 장면으로
두 나라를 대표하는 두 개의 선율이 교차하며 연주된다.
초반에 우세하게 들리던 〈라 마르세예즈〉가 점차적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프랑스군의 퇴각을 묘사한다.
여기에 정규 관현악곡에 쓰이지 않는 대포소리와 조종소리가 제정 러시아의
국가 〈주여, 차르를 보호 하소서〉와 함께 더블포르티시모로 제시되어
러시아 군의 승리를 보여주며 곡을 끝맺는다.
마지막의 대포 장면은 대포를 사용(DG, 1989 녹음판)할 때도 있지만 연주에 따라
녹음된 대포소리, 총소리, 큰 나무 망치, 베이스 드럼이나 탐탐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3.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
그의 어머니는 18세기 표트르 대제 의 총애를 받은 아브람 페드로비치 간나발
장군의 손녀였다 외증조부 간니발은 아프리카 출신의 노예였으나 표트르대제에
의해 속량받아 군인이 되었고 실력을 인정받아 표트르대제는 그의 세례 때
대부(代父)가 되어주기도 했다 한다
곱슬머리와 검은 피부를 가진 푸시킨은 자신의 몸속에 지중해 러시아 프랑스어에
가장 뛰어나 10세경에 이미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
그는 유모를 통해서 러시아 민중의 삶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러시아의 옛날 이야기 및 설화가 그를 대 시인으로 성공시키는 데 큰 역활을 헀다
1817년(18세) 외무성에 들어 가 방탕한 생활을 보냈으나 명석한 판단력으로
자유주의적 정신으로 농노 제도 및 전제정치를 공격하는 시 《자유》(1817),
《마을》(1819) 등을 발표했는데 1820년 이로 인하여 남러시아로 추방당했다
그해 설화를 주제로 하면서 구어를 대담하게 채용한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
발표하여서 러시아 시에 새 경지를 개척하는 동시에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추방생활 중 《카프카스의 포로》(1822))《집시》(1823), 《바흐치사라이의 샘》
(1824) 등 낭만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서사시 및 서정시를 썼으나
1825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거주는 허용되었으나 위험인물로
취급되어 황제의 직접 검열을 받아야만 했다
1830년애는《벨킨 이야기》(1830) 1833년에는 시형식 소설 <예브게니 오네킨>를
완성하고 리얼리즘이 였보였다, <스페이드 여왕>(1834), 소설 <대위의 딸>을
집필하면서 새로운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1831년 미모로 소문난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결혼을 하고 관직에 등용되어
표트르 대제 치세의 역사를 쓰도록 위촉받았다. 1834년 그의 아내 나탈리야와
황제 표트르 간의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1837년 귀족들이 나탈리야가 부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날조된 소문을 내어
푸시킨은 나탈리야가 바람을 피운다고 지목한 프랑스인 귀족 단테스와 부득이
결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그의 나이 37세에 비운의 죽음을 당했다.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의 기초는 그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그는 ‘러시아 국민
문학의 아버지’, ‘위대한 국민 시인’ 등으로 불린다.
역시 "삶이 그대를 속이드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말라"라고 남긴 명언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 한것이 아닌지 --
모스코바 시내에 기념관이 있고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상트 페테르
부르그 인근의 황제마을 이름을 푸쉬킨 마을이라고 명명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