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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계12:!7
최근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그 길을 준비하려는 제게 강한 기름부음으로 임한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의 '여자의 남은 자손'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습니다.
'여자'는 누구이고 '남은 자'는 누구인가?
여러가지 해석을 할 수 있겠으나 분명한 것은 성경은 '남은자', '구르터기'의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사6:12,10:20, 렘31:7, 욜2:31 등등)
결국 마지막 때에도 이 우상과 짐승에게 절하지 않은 남은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천국의 혼인잔치에 들어 갑니다.
그들이 남은 자요 이기는 자들입니다.
용(사단)은 이 여자의 남은 자손과 마지막 때에 전쟁을 벌입니다.
반드시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흑암과 더불어 싸우는 '남은 자손'이 있다는 것을...그리고 그 남은 자들이 되어야 함을...
다른 누구보다 제 자신이 그런 자가 되어야 함을 깊이 생각합니다.
그들이 누구인가를, 어떤 삶의 구조를 가진 자들인가 말씀을 통해서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저 시류에 전해져 오는 이론들, 막연한 생각들, 교리나 전통에 그저 흘러 떠내려 가서는 안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이 이 막연한 흐름에 그저 방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전략이며 유대인들이 패망한 것입니다.
그 망하는 자들은 복음을 흐리고 가리우고 미혹하는 영들로서 진리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을 예비해야 하는지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의 지혜와 총명을 구하며
정확히 읽고 정리해야 합니다.
아버지께 지혜를 구하여 슬기로운(지혜로운)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따라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여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롬10:2,3
유대인들의 넘어짐이 열심이 없었고 하나님을, 메시아를 구하지 않음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들이 예배와 성경공부와 예배, 기도, 금식, 구제를 지키고자 하는 열정이 부재하지 않았음을 익히 압니다.
그들의 열심은 우리보다 훨씬 더 했습니다.
다만 그 진리의 본질, 그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한 채...'자기 의'를 힘써 행하다가
안타깝게도 메시아,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말세를 당한 우리의 거울'(고전10:11)입니다.
진정 심각하게 그 거울을 투사해서 우리의 현실을 깊이 돌아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진리가 말하는 그 진정성을 알고자 하는 열정이 중요함을 다시 생각합니다.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
계12:!7
어느 날,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던 이 말씀이 강하게 영혼에 들어 왔습니다.
남은 자손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입니다.
그 두가지가 정확히 구분되어 있습니다.
어찌보면 그저 상식같아 보이는 이 말씀이 왜 그토록 강하게 나를 사로잡았을까요?
저는 그것에 대해서 진리의 성령님께 지혜와 깨달음을 아침마다 구하고 구했습니다.
진정으로 남은 자가 되고 싶어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수 없이 나누고 나누었지만 저는 이 주님의 말씀을 매우 중요시 여깁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모든 진리 가운데 인도하십니다(요16:13).
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하고 기가 막힌 보혜사의 역사인지요?
2천년 전에 오셔서 하늘의 비밀과 사랑과 진리를 가르치시고 이 땅에 그 나라의 능력과 본질을
부어 주신 예수님은 이제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 역사를 계속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님을 구하고 그분께 가르침을 구하는 일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구하는 이들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구하지 않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게 구하던 며칠 후, 전주에서 사역하는 L 목사님이 오랫만에 연락을 했습니다.
"최근에 교제하는 목사님이 계신데...요한 계시록을 그렇게 건강하고 깊게 강의하는 분은 처읍입니다...
형님하고도 교제를 하시면 좋을 것 같은데.."
저를 형님으로 부르는 L목사님은 그 분이 쓴 책과 강의를 들은 것을 말하며 만나기를 청했습니다.
저는 주님의 재림을 나누는 이 작업에서 언젠가는 계시록을 다루어야 하기에 흔쾌히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약속을 했습니다.
"계시록은 어려운 성경이 아니고 그냥 읽기만 해도 축복을 받는 귀한 것인데...
이것을 너무 해석하려고 하는 것 때문에 더 혼란해지고 이단들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만난 K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마침 그전에 그분이 쓴 책을 읽은 적이 있어서 더욱 관심을 가지고 겸손히 듣고자 하였습니다.
K목사님은 성경을 깊이 알고 싶은 열정에 미국의 유수한 신학교를 다녔지만 갈증을 해소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정통 제사장 출신의 후손인 메시아닉 주를 만나 그제서야 성경을 깊이 배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1:3
"계시록은 원래 해석하는 책이 아니고 아시아의 일곱교회의 예배에서 설교로서 읽었던 편지입니다...
로마서처럼 이것은 예배에 사용된 것임으로 누구나 읽어도 이해가 되는 그런 내용인데...
히브리의 문장 구조로 쓰여진 이것을 후에 헬라의 철학과 사상, 신학으로 읽으려 하니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파악이 안되자 교부들이 해석을 시도하면서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K목사님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데 매우 흥분되고 전율마저 느꼈습니다.
오늘 수많은 이단들과 계시록의 뜻을 곡해하는 신학적 추구들이 대부분 히브리적인 사유와 문장,
예언들의 인용구조로 되어진 이 말씀을 자기들의 시각에서 아전인수로 풀었다는 것에서 얼마간의
충격도 느껴졌습니다.
계시록은 제게도 매우 어렵고 그 의미를 일반적으로 나누기가 용이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난해하고 복잡한 것은 피하고 다만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를 가진 자'(계12:11)에 대해서만
깊이 나누었습니다.
계시록은 진정 유월절처럼 어린 양의 피를 뿌린 자들이 마지막에 구원을 얻음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K목사님의 말을 듣고 읽어보니 계시록은 '읽는 자와 듣는 자들(성도들, 원문에는 복수로 되어 있음)과
기록한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심각하게 해석할 것이 아니라 읽고 듣기만 해도 하늘의 축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아시아의 일곱 교회와 다른 곳에서도 이 요한의 편지를 예배 시간에 편지를 받은 사자(메신저)가
읽어 줌으로 설교를 한 것입니다.
계시록을 살피니 정말 그런 구조로 되어 있었고 편안하게 읽기 시작하자 어려워 보이던 것들이
큰 감동과 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시의 성도들은 이 말씀을 듣기만 해도 이해를 했고 충분히 삶에서 적용하여 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난해한 것이 아니라 함께 읽고, 지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복을 누리라고 주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저는 계시록의 구조가 출애굽의 재앙과 다니엘서, 성전, 어린 양, 추수, 하나님 나라, 천국 잔치라는
구약의 중요한 모형과 언약을 다 담은 것임을 이미 깨닫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사역하는 아세르 인터레이트 목사님의 '구약속의 계시록'이란 글을 읽었는데
놀랍게도 계시록 안에는 거의 구약의 본질이 다 담겨 있었습니다.
특히 율법인 토라(모세5경)에 나타난 말씀의 핵심들이 계시록에 거의 들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계시록 안에는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의 천국 복음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교회가 읽지 못하게 사단이 훼방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남은 자'란 원어의 뜻이 '두루마리(하나님 말씀)의 시작부분과 동일한 맨 마지막 부분'이라 말을
더욱 실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처음과 나중이시며, 말씀 역시 그러합니다.
복음서와 다른 신약들이 제자들이 성령님의 조명으로 수집하고 정리하여 나눈 말씀이지만,
계시록은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계1:1)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중요합니다.
"계시록은 읽기만 해도...듣기만 해도...그것을 지킴으로 천국의 복을 누리는 것인데...
자기 틀로서 억지로 해석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교회가 가장 읽지 않는 말씀으로 가려져 버린 것입니다.
초대교회까지 이런 것이 적용되다가 헬라의 이방 교회가 되면서 히브리의 뿌리가 끊어지고
헬라철학의 틀을 가진 교부들이 히브리 문장 구조로 된 계시록을 읽으려 하니 이해가 안되고
거의가 암호처럼 되어져 보인 것이지요...그 때부터 해석을 시도하며넛 온갖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마귀의 전략에 교회가 당해온 것을 느꼈습니다.
아무튼 그들은 우리에게 가장 귀하고 본질 적인 진리와 축복을 교묘히 흐리고 가립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축복을 그동안 누리지 못한게 억울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계1:2
남은 자의 중요한 조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요한이 '계시를 통해 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교제를 하고 난 얼마 후에 전주에서 집회를 했는데 그 날 아침 계시록을 읽는 동안 이 말씀
내 영에 부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때에는 이 계시록을 교회가 읽고 그것을 지키는 역사가 열려야만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약속하신 그 축복, 이기는 자의 역사, 남은 자의 승리를 경험합니다."
저는 집회 가운데 이렇게 나누었는데 그 때 제 영과 몸에 불이 임했습니다.
계시록을 읽어야 함을, 하나님의 계명과 주님의 증거를 반드시 소유해야 함을 나눌 때마다
정말 온 몸이 불덩이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기뻐하시고 중요시 여기시는 구나..'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한동안 성령님께 가르침을 구했던 '여자의 남은 자손'이란 주제가 생각났습니다.
그것을 가르쳐 달라고 성령님께 구했는데, 갑자기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목사님과의 교제가 연결되고
계시록에 들어 가서 수건이 한거풀 벗겨지는 체험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제게 엄청난 변화를 주었습니다.
눈에 비늘이 벗겨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진리에 대한 새로운 지경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우리 성령님의 역사는 오묘합니다.
그래서 더욱 구하고 두드리고 찾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교제는 요한 계시록에 대한 장벽과 두려움을 한순간에 해소시켜 주었습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그냥 읽기만 해도 깊은 깨달음이 전해왔습니다.
(일단 계시록을 어렵게 여기거나 해석하려 하지 말고 그저 성령님께 의지하여 읽어 나가며
감동이 오는 것에 언더라인을 긋고 그것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을 시작해도 좋을 것입니다)
마지막 때와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다양한 영역의 말씀들에 관심과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한순간에 합력하여 선(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깊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원뿌리의 회복이 이루어져야 다시 오시는 주님의 그 길이 진정으로 예비됩니다.
이것은 후에 더욱 나누겠습니다.
막연하기만 했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계12:!7)이
이런 일들로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내게 엄청난 기름부음이 되었고 다시 오실 신랑 예수님을 만나는 그 길을 예비하는 것의
중요한 전략을 소유하게 되는 은혜가 되었습니다.
2.
저는 남은 자가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예수님의 증거인 어린 양의 피의 증거를
소유하는 것이라고만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이 히브리적 문장구조와 언약의 틀 속에서 쓰여진 것이기에 온전히 읽지 못했다는
그 목사님의 말씀에 다시 그 관점으로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이른 아침 일어나 성령님께 가르침을 구해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증거'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그동안 '하나님의 계명'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무엇이고 그것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가르쳐 주세요."
저는 다시 성령님께 구했습니다.
그리고 계시록을 계속 읽다가 다시 그와 연결되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14:12
짐승에게서 그 표를 받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 양을 끝까지 따르며 순종하여 이기는 것을
성도들의 '인내'라고 합니다(계13:9-12).
하나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킴으로 승리하는 자들에 대한 이 말씀에서 역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증거)'로 기록되었습니다.
계시록의 아주 반복적인, 중요한 포인트는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자'(계3:!0)가 곧
'이기는 자'요 '남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도들이 견디고 이겨야할 '인내'가 독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증거(믿음)'을
지키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환난 날에 승리하고 견디고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은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증거와 그 진리에 대한 믿음인데 왜 하나님의 계명을
따로 구분하는 것일까?'
하는 단순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계명하면 그저 "하나님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복음에 대한 생각만 집중했지 '하나님의 계명'을 따로 깊이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저는 기도하며 갑자기 그것이 성경에서 어떤 의미인지 살펴 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2:3-5
이것은 갑작스러운 어퍼컷처럼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다른 편지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남은 자들의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 자, 그 안에 거하는 자들은 그가 행한 대로 행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요일2:6,7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5:3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눈을 씻고 다시 읽었습니다.
분명 이 계명은 '새 계명'이 아니라 그들이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계명은 그저 예수님의 가르치신 그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곧 구약이요, 토라(율법)예 계시 된 계명입니다.
저는 약간 놀라서 이것과 연관해서 성경 전반을 살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계명'은 구약의 십계명과 율법, 혹은 구약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핵심화 시키면 '십계명'을 의미한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지키는 일이 마지막 때에 '남은 자의 자격'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그동안 생각하지 않은 영역입니다.
십계명이나 율법을 지키는 것은 제게도 낯설기만 합니다.
신약의 성도들에게 십계명이나 구약의 율법은 그저 참조하고 일부가 성막등에 대한 관심의 분야일 뿐,
깊이 연구하거나 지키려는 분야는 아닙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의 십계명을 오랫만에 찾아 몇번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새롭고 충격적인 무엇이 다가왔는데 그것을 다루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니
후에 나누겠습니다.
명확한 한가지는 제가 십계명의 말씀을 여전히 깊이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이것을 다시 고민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15:9,10
예수님이 행하신 것은 바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신 것이고 그것으로 그 사랑안에 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지키신 아버지의 계명이란 바로 옛 계명(구약)안에 계시된 그 본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자'란 율법의 계명에 계시된 하늘의 본질과 예수님의 증거를 가진 자입니다.
그것이 무에 그리 중요하기에 이 야단인가 하실 터입니다.
그런데 제게는 매우 중요하고 놀라운 수건이 벗겨지는 것이었습니다.
최근 성령님께서 집중하여 열어 주신 것들이 한순간에 연결되며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회복과도 깊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에 너무나 중요한 코드입니다.
그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 들어 보시지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하나님의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5:17-19
그전에 수없이 읽었던 이 말씀이 너무나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다시 홍해처럼 새롭게 열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계시록처럼 예수님이 직접하신 말씀입니다.
구약의 어떤 내용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다시 조명하여 주시자 강한 충격의 파고(波高)가 되어 다가왔습니다.
'율법'이 곧 '하나님의 계명'임을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일점일획도 파기하지 않고 온전히 가르쳐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실로 충격입니다.
다시 읽어봐도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당연하지만 주님은 율법(하나님의 계명)을 한번도 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온전히 이루셨고(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키심)심지어 이 계명 중에서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그같이 폐하여 진것처럼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로 여기신다고 하십니다.
반대로 율법의 계명을 귀중히 여기고 그것을 행하는 자는 천국에서 큰 자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율법이 폐하여 진것 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신약교회가 가장 놓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은 이 부분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는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생각하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수건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 의미와 실제, 기름부음을 알지 못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지금 누릴 뿐만 아니라 마지막 그 때에 기름을 예비한 남은 자들이
들어갈 혼인잔치이기도 합니다.
요한 계시록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계시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남은 자손의 조건인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믿음)을 가진 자'(계12:!7)는 주님의 이 말씀과
동일하게 연결 됩니다.
그 계명의 본질을 지키고 소유하는 것은 '천국'(천년왕국, 혼인잔치)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것입니다.
재림을 예비하는 신부들의 주요한 조건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부족하고 깊이 주목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어떤 분들에게 이것은 갑작스러운 의문일 터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제를 처음 만난 것처럼 당혹감과 낯설음을 느끼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재림의 때에, 심판의 그 환난을 이기는 역사, 기름을 예비하는 일을 말하더니 갑자기 '율법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의아해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님의 그 길을 예비하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사40:3
이 말씀은 초림 예수님과 재림 예수님께 적용되는 중요한 예언입니다.
'여호와'(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말씀에서 '예비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파나'입니다.
그것은 '돌이키다'란 뜻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것을 "아버지의 마음"(말4:5)으로 돌아 가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은 그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광야에서' 그 길을 예비하라고 하십니다.
광야로 돌아 가는 것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매주 모이는 월요 기도회를 시작하며 말씀을 구했을 때에 이사야40장의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몇달을 그 말씀만 붙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광야로..사막으로 돌아 가는 것이 왜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인가요?"
저는 이 말씀을 받고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깊은 깨달음이 다가왔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 계명, 율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 안에 아버지의 마음, 뜻, 언약, 전략,시간표, 하늘의 청사진이 모두 계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선민과 제사장으로 삼으신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롬3:1,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말씀을 담아낼 그릇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과 사랑과 구원, 하늘의 비밀과 전략의 길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아니면 예수님의 오심과 역사, 진리도 없습니다.
주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의 큰 의미는 그 그릇에 담긴 아버지의 길을 발견하고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제가 유대인들처럼 구약의 율법을 지금도 그래도 지켜야 한다는 율법주의자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런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것에 어리석은 오해가 없으리라 믿습니다.
(비판의 기름부음을 받은 이들이 이것을 가지고 마치 율법주의자로 돌아갔다고 한다면...
극단적인 메시아닉 쥬들처럼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는 말을 하면 ...미워 할꼬야..^^)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문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성경의, 재림을 예비하는 일의 중요하고도
절박한 문제임을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이 그것을 강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렘6:16
'엣적 길, '선한 길'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받은 언약과 그에 순종하여 걸어간 그 길, 토라의 계시들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선한 일(기뻐하시는 뜻)이 계시 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비하며 깊은 하나님 나라와 그 의가 들어 있습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이루리라
마5:18
아아...
예수님의 말씀에 주권을 두면 하나님의 계명(율법)을 지키고 그것의 언약적 성취에
깊이 복종하는 문제는 이토록 심각합니다.
율법은 '점(點)하나와 획(劃)하나'가 중요합니다.
율법의 모형과 그림자 안에는 그토록 하나님의 뜻, 일정, 전략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율법에 대한 고정관념과 잘못된 이해의 수건이 가려져 있습니다.
율법은 신약의 은혜의 복음에 비해 열등한 계시이고 예수님이 오심으로 폐하여 졌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과 대치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그런 생각들이 지배적입니다.
저는 요즘 창세기부터 다시 연구하며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하며 엄청난
선물인가를 새삼 절감합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등.....선지서...시편...잠언..
그 말씀들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신 뜻과 전략과 청사진을 담고 있는가...
그 읽기조차 불편해 보이던 율법과 이스라엘의 행적 안에서 재림의 본질적인 길들과 방향, 역사들까지
이미 치밀하게 계시되어 있음에 흥분합니다.
그것을 깨달으며 시대를 분별하고 무엇을 행하고 어디에 서있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그동안 이 비밀들을 알지 못함이 얼마나 억울한지...
구약의 수건이 가리워 짐으로 신약의 깊이와 본질을 더 알지 못하고 그 엄청난 하늘의 보고(寶庫)를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율법에 대한 우리의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역시 성경의 본질이 아닌 '율법은 안좋은 것이고 폐해졌다'는 마귀가 심어놓은 막연한 생각들, 교리들,
전통적인 이해가 우리게 있습니다.
그런 생각의 단서에는 바울이 말한 마치 율법에 대한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어떤 구절들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바울조차도 그것을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지적한 것은 '율법'자체가 아닌 '율법주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3:31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7:12
이것은 분명한 바울의 편지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증거와 믿음은 결코 율법의 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세우고 온전하게 만듭니다.
왜 예수님은 요한을 통해서 마지막 때에 용(사단)과 더불어 싸우는 '여자의 남은 자손'이 다른 무엇이 아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고 했는지를 깊이 깨닫습니다.
주님은 '등불'을 켜서 온 세상에 비추라고 하신 후(마5:14-16)에 율법의 계명을 지키는 일을
함부로 하는 자는 천국에서도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은 등불을 들고 주님을 맞으러 나가는 그 역사입니다.
'주의 말씀(율법)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시119:105)를 이루는 것입니다.
결코 율법의 조항을 다시 지키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예수님과 바울처럼 '율법주의'를 배격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남들이 어찌 생각하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는 남은 자손의 주제는
제 영에 지금 강하게 부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재림의 길에 너무나 중요한 회복과 예비의 역사입니다.
이것을 연구하며 '성령의 기름부음'의 진정성을 더욱 발견하고 누리게 됩니다.
결국 말씀이, 언약이 회복되어야 진정한 기름을 예비하고 부움받게 됩니다.
저는 성령님께서 '이스라엘'로 인도하신 그 이유를 이제 더욱 깊이 체휼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깊이 알고 지키는 일은 '참감람나무 원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일과 연결 됩니다.
초대교회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강력한 기름부음을 소유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이제 더욱 강력하고 근원적인 그 깊이와 본질로 나아가야 합니다.
정신없이 쓰다보니 글이 거칠어 졌는데...
깨달은 것들을 어떻게 글로서 나눌지 고민은 되나 성령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더욱 구체적인 말씀과 깊은 경지로 인도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출처 : 제3시 http://www.3-rd.net
첫댓글 재림예수님을 만나뵙기위하여 간구해야만 할때가 왔음을 실감하는 세상입니다..마지막때를 예비하기위해서는 말씀의 예언 -선지서나 요한계시록의 진리의 비밀의 말씀을 나의 것으로 승화시켜야만 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축하드립니다....말씀을 깨닫는 것은 너무나 기쁜 일이지요...성령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이 구체적으로 정리되면 꼭 알려 주세요.......저도 늘 궁금해 하고 있는 주제입니다...
울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 미워 할꼬야,,^^* 를 생각하며 잊지않고 요한 계시록에 관한 성경필사를 하면서 " 오직주님만"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고 경배하렵니다..마라마타!!!!
감사합니다.....깊은 깨달음을 나누려 모셔갑니다!
김우현감독님이 깨달으신대로 제게 그대로 전해져 오는거 같습니다...붙잡고 고민하던 말씀 중에 하나인데 굉장히 공감되네요.
와~! 정말, 많은 것을 깨달아 알게하시는 주님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멘, 할렐루야~!
아멘 귀한 계시를 받은 말씀으로 느껴지네요. 유대인과 이방인 원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요 여호와의 증인들이지요 이방인은 개들이지요 예수님의 성육신은 새시대를 열었습니다. 율법시대를 끝내고 은혜시대로 전환했습니다. 구약은 침례자 요한까지 입니다.말씀의 해석은 굽이 갈라지는 것이 중요하고 진리의 말씀은 목수가 나무를 쪼개듯이 해야 하지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유대인중 나중에 구원받는이들이고,예수님의 증거는 이방인 믿는이들로 예수님과 하나되어 남은자들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