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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소시집|리뷰
감각의 경계 너머를 보는 시들
한보경과 이병일의 신작시
정훈(문학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1.한보경의 시
감각할 수 있는 세계를 우리는 모두 빨아들일 수 없다. 우선 감각은 내 몸과 느낌이 여닫는 영역의 밀도와 넓이에 따라 정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의 세계는 저마다 다른 결과 뉘앙스와 판단을 지닐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감각이 주는 신비하고 알 수 없는 느낌의 세계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감각이 선사하는 신비로움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현실의 형식에 빗금을 치거나 구멍을 내기도 한다. 이 영역에 들어서면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현실 세계는 상상이 만들어 내는 세계와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라 미세한 끈으로 이어져 있거나, 서로 보이지 않는 관계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도 된다. 한보경은 상상과 현실이 마치 둘이 아닌 듯 하나로 엮어내는 시적 색채를 보여준다. 여기에 미세한 언어 감각으로 존재가 만나면서 비끄러매는 이미지가 선연하다. 그의 시를 읽으면 얼얼하면서도 취한 듯 녹아드는 자신과 세계의 형체를 떠올리게 된다. 시인이 응시하는 세계는 사실 직핍해 들어가는 언어의 지시가 아니라, 비릿한 은유와 비유가 직조하면서 빚는 상象으로써 놓여 있다.
마냥 밝지만은 않은 그의 시가 내미는 메시지와 이미지는 환상처럼 우리를 갸웃하게 하면서도, 관계의 시학詩學이랄 수 있는 존재 사이의 의미가 만드는 다양한 색채에 깊게 박혀 있다. 그래서 메마른 시의 어조는 기실 존재와 삶의 속내를 파헤치는 시인의 지친 음성을 연상하게 한다. 대상과 함께 섞일 수 없다는 자괴감은 시인뿐만 아니라 모든 이의 절망과 한숨을 자아내는 원인 가운데 하나다. 이러한 존재 사이의 괴리감은 현대사회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일치하지 않는 존재의 이질성은, 인간애에 기대어 세상을 밝고 낙관적으로 전망하려 했던 계몽주의의 사산아가 되었다. ‘이성의 잠꼬대’, 혹은 ‘전망이 부재한 휴머니즘의 이면’에 눈길을 돌렸던 모더니즘 이후의 시인들은 세계의 형체와 본질을 그리려 했던 언어의 촉수를 비틀어 아이러니와, 내면에 그늘진 무의식의 심연에 주목했던 것이다. 이제는 자아와 세계의 합일이나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의 변주와 미끄러지는 의식의 유목적 정주만이 시인 대부분의 마음을 사로잡는 속성이 되었다. “늘 같은 자리에서 내일의 운명이 달라지기를 기다리는 못된 오늘처럼/ 똑같은 내일을 되풀이합니다/ 캄캄한 미혹입니다”(「트와일라잇 존(twilight zone)」는 진술처럼, 익숙하고 길들여진 습속과 절망을 내비치면서 희망 없는 시간의 굴레에 전 존재를 의탁하는 화자의 덤덤한 언어에 깃든 실존적인 불안정이 우리 시대의 시적 어조를 대변한다고 하면 과장일까.
미래가 봉인되고, 가능성을 박탈당한 현대인의 불안한 심리와 내면은 한보경 신작시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절망과 불안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안으로 삭이면서 건조한 언어로 창백한 표정을 낙인처럼 새긴다. 무미건조한 언어의 진술 속에는 개별자가 감당해야 하는 실존의 아이러니와 세계를 힘겹게 이고 살아가는 시인 내면의 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쩌다 안이 되었던 바깥이 울타리 밖으로 나가 더 바깥으로 떨어진다/ 너무 익숙하게 도로 바깥이 되고만, 안은 이제 뻔뻔해질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울타리마다 아예 넘나들 수 없는 금줄을 칠 작정을 한다/ 도로 데려다 놓아도/ 바깥은 영원히 안이 될 수 없다고 금줄을 친다”(「거울 앞에서」)에서 보듯, 안과 밖이 원활하게 소통하지 못하고 서로를 밀어내면서 억류하거나 흡수하지 못해 분리된 영역으로 공고해지는 이미지가 선연하다. ‘거울’은 자기 반영과 투사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오랫동안 시적 이미지로 쓰인 사물이다. 이러한 거울에서 현대인은 분열증의 다양한 양태를 묘사해 왔다. 한보경은 거울을 통해 더욱 세밀하고 정교한 현대인의 의식을 형상화한다. 자기 반영의 일그러지고 왜곡된 상은 “지금 네 웃음에는// 네가 지운 너무 많은 빚들이 눈부신 빛이 되어 뭉치고 있어서// 캄캄한 슬픔이 환해진다”(「반전」)는 진술에서 더욱 농후해진다. 반영하는 두 대상이 너와 나든, 혹은 나와 내 또 다른 나이든 주체와 대상의 교류는 원활하지 못하고 늘 어긋나기만 한다.
한보경 시에 보이는 경계를 불안하게 드나드는 시적 이미지와 분위기에서 현대인의 불안하고 정처 없는 내밀한 정서를 발견하게 된다. 이는 비단 시인뿐만 아니라 요즘 세상을 스케치하면서 언어를 직조하는 시인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불안은 좌절과 절망과 무관하지 않다.좌절과 절망만이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된 지는 오래 되었다. 낙관적인 전망이 신기루처럼 우리 세계를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단지 숨을 쉬거나, 숨을 쉬기 때문에 습속에 젖어 자동인형처럼 신체를 놀릴 수밖에는 없다. 지향점이 삭제되거나 애초에 목적이 상실된 생명-기계로서 익명적 존재의 형식은 “오늘도 어제처럼/ 높고 황량한 고원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단지 바람이 불어와서, 그들은 내일도 연을 날릴 것이다”(「우리는 모르는 게 많아서」)처럼 단지 반복만을 되풀이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 형상화 이면에는 슬픔이 숨어 있는 듯하다. 슬픔은 인간의 감정 이전에 우리 시대를 표상하는 상징적인 ‘감성’이 된 감이 없지 않다. 슬픔은 존재의 근본적인 허무함에서 비롯한 감정이기도 하지만, 늘 어긋나기만 하는 관계가 만들어내는 실존적 풍경이 된 것이다.
“기억 속 당신은 늘 빛을 등지고 있고, 나는 당신을 볼 수 없었어/ 언제라도 불완전한 예측인 당신,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나”(「트레이싱페이퍼」)처럼, 예측이 어긋나거나 봉쇄당하기 일쑤인 관계의 심리학을 통해 화자는 트레이싱페이퍼의 속성을 유추하면서 시적 세계관을 드러낸다. 확실하지도 그렇다고 불확실하지도 않은 존재의 관계망에서 우리는 늘 기대하지만, 기대를 저버리는 경우를 보게 된다. 예측이 불완전한 사회에서 시는 오랫동안 인간의 불안한 심리와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절망을 길어내는 기능을 맡았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일은 심연 깊숙이 가라앉은 존재의 상처와 우울함을 표시하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 한보경은 그런 시의 면면을 이번 신작을 통해 보여준다. 현대인의 실존은 인간 실존이 맞닥뜨리는 부정적인 요소를 총체적으로 짊어지고 있는 사물의 덩어리다. 이것은 비인간화가 초래한 풍경이고, 불신과 자기 억압에서 비롯된 어두운 측면이기도 하다. 세계의 투명도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환했던 시대에 가졌던 인간의 희망과 낙관적인 세계관은 이미 획득할 수 없는 장밋빛 전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는 오래되었다. 하지만 시는 그런 시대와 세계의 지적 풍경과 관계 없이 인간이 처한 유한성과 불완전한 존재 속성을 끊임없이 드러내고 형상화하였다.
서정적 리듬을 통한 우주적 합일이나 세계와 일치하려는 개인의 욕망은 지금에도 유효하다. 하지만 현대가 저질러놓은 문명의 속도와 그칠 줄 모르는 물질적 번영을 위한 기획은 인간이 지녔던 본래 의미의 낙관적인 믿음을 가로채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믿음을 가로챈 자리에 들어선 것은 경쟁과 욕망이 부추긴 타인에 대한 불신과, 이기주의를 부풀려서 스스로 신분의 피라미드를 타고 올라가서 꼭대기에 서게 하려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조장이다. 여기에서 시인은 절망과 우울, 그리고 멜랑꼴리한 감성의 시적 형상화의 범람을 가져왔다고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한편으로, 건조하고 메마른 의식의 단면을 보여주면서 서로 침범할 수 없는 경계가 지니는 비정한 현실을 드러내는 시들도 쏟아졌다. 한보경의 시가 후자의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현실을 뒤집어서 스스로 내면의 메마른 풍경을 내비치는 작업인 것이다.
2. 이병일의 시
이병일은 사물의 이미지가 그리는 풍경 속으로 곧장 들어가, 자신만의 세계를 끄집어 올리는데 능하다. 여기에는 시인이 평소 생각하고 있는 미적 세계관이 가득하다. 침묵과 소란 사이, 여백과 꽉 참 사이의 경계에서 시인의 눈길이 좇는 것은 세계 속에서 미세하게 움직이거나 그려내는 존재의 윤곽이다. 이들이 만드는 형식은 한편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꿈틀대는 세계의 주름일 수도 있다. 이 주름이 깊어지거나 혹은 사라지더라도 시인은 한때의 풍경이 잠시 나타났다 저무는 시간의 단면을 포획하려 한다. 그 시간에는 말갛게 고여있거나, 천천히 소멸하거나, 잔잔하게 머물다 지나가는 것들이 가득하다. 시인은 이러한 풍경에서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궁구한다. 그의 시도 그러한 아름다움에 손길을 잡으려 한다.
“저 표독스러운 아름다움이 나는 좋다// 단절된 꽃 이름 다 들춰낼 것 같은 벌집/ 구름처럼 삼 일을 굶고 산맥으로 줄행랑칠까”(「표독스러운 아름다움이 나는 좋다」)에서 시인은 벌들이 군무처럼 허공을 파헤치며 그리는 모습을 보며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표독스러운 아름다움’은 아마 계획하거나 기획하지 않고 무턱대로 그림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 이런 풍경은 우리를 둘러싼 일상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만 골몰하게 주목하지 않았을 뿐이다. 시인은 굳이 의식해서 찾지 않아도 무심코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오랫동안 매만지며 고민한 듯하다. 그 속에는 요란한 소리조차 침묵의 배경에 놓일 뿐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삶이 개의치 않게 몸을 입고 섰다/ 강이 강을 찾아가듯 목마름도 옮겨진다/ 저 크고 불길한 꽃송이들, 무리 지어/ 교회 종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밀고 나온다/ 천사에게 달아준 꽃잎 날개를 위해/ 대낮에도 몇 번씩 계절풍을 부른다”(「이식」)처럼, 무엇엔가 채인 듯 깊게 팬 상처를 숨기고 부풀어 오르는 바람의 일렁임처럼 그에게 숨겨진 내면이 언뜻 보이기도 한다.
이병일은 세계 표면에 역동적으로 산란하는 존재의 형식뿐만 아니라, 내성적인 움직임의 현상을 묵묵하게 훑어보는 눈동자 또한 선연하다. 한때 우리 시단에 ‘신 서정’이라는 용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신 서정은 전통적인 의미의 서정과 차이가 난다거나, 전통 서정시의 형식과 분위기에서 이탈한 시 형식이 아니다. 도시화와 현대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현대사회에서 시인이 찾아가는 서정의 세계라고 해서 신 서정이라 이름을 붙인 건 아닐 것이다. 다만 신 서정의 시에서 발견되는 느낌과 이미지를 기존의 서정으로 한데 묶어 말하기 힘든 연유에서 그런 용어나 나왔을 듯하다. 이병일의 시가 신 서정의 한 표현으로 본다고 해서 그의 시의 특징을 오롯이 건져내지는 못한다. 이는 시인 특유의 개성과 시 형식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병일에게는 그것이 우화의 양식을 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화는 시인에게 세계를 비평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시적 표현 가운데 하나다.
“강이 강을 거슬러 오를 때/ 풀빛이 풀빛을 옮길 때/ 멀미가 멀미를 앓을 때/ 아버지를 여러번 죽이는 일/ 어린 양에게 있을 법한 일이라네// 이마를 짚어보면/ 눈썹과 눈썹 사잇길이 주름져 있다네/ 천만번 불에 타도 없어지지 않을/ 재로 된 그림책,/ 용서와 죄를 감추는 노래로 가득하였네”(「엘리사의 그림책」)에 상기되는 구약의 예언자 엘리사 등이 그렇다. 우화를 통한 시적 형상화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유추할 수는 있지만, 중요한 것은 우화의 방법으로써 시적 형상화가 한정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상상의 영역을 확장하는 장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천만번 불에 타도 없어지지 않을/ 재로 된 그림책”에는 “용서와 죄를 감추는 노래가 가득하”다는 전언에 주목한다면, 시인은 율법과 성서라는 진리의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장엄하지만 끔찍한 사태의 발현이 그려내는 존재의 풍경을 쉽게 떨쳐버리기 힘들 것이다.
고전의 재해석이라기보다는 고전의 세계를 현재적 시선으로 재인식하고, 재인식된 세계가 시인이 형상화하려는 시적 기법 속에 녹아들 때 생겨나는 이미지를 시인은 침묵하며 그려낸다. 이런 작품에는 소란스러운 고요가 숨어 있다. 정적이지만 결코 고여 있지 않은 목소리들이 들끓는다. 이런 것들은 이 세계가 이율배반, 아니 형용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인식의 다른 느낌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빛과 그림자’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은 겉으로 드러나는 존재의 모습 속에 담긴 또 다른 양태를 가리킬 때 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얼마나 많은 빛과 그림자를 지니고 있을까. 시인은 “온데간데없이/ 휑하게도 아름다운 것들은/ 왜 아름답지 않은 몸을 가졌을까”(「서천으로」) 묻는다. 존재의 구멍, 혹은 존재의 빈틈에서 새어 나오는 조그맣거나 옅은 낌새가 환히 밝히는 아름다움이다. 이를 인식하는 일과 이를 느끼는 일은 다를 것이다. 세계를 인식하는 일은 세계의 속살을 지적 태도로 규명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시인으로서 세계를 인식하는 일은 세계의 형식을 통해 그 속살에 전하는 존재 방식과 풍경의 표정을 흡수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병일은 이 세계에 숨고, 엎드리고, 그래서 조그만 몸짓일지라도 그 형색으로 하여금 이 세계에 아름다운 무늬를 수놓는 것들에 시적 촉수를 들이댄다. “반짝, 빛을 내본다는 것이 그만 울음을 꺼내놓는 청개구리, 살짝 곤두서 있는 그 느낌이 좋다. 나는 오래도록 저런 것들을 쳐다보게 된다. 나는 철판도 없으면서 철의 얼굴로 웃고 떠드는 세계를 잘 안다. 일부러 말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약게 살지 못한 아름다움에게 내 숨통을 내어주고 싶다. 기이한 통찰력과 뚱딴지같은 질문이 내가 가진 힘이다. 그 힘으로 나는 세상 모든 것에 반응한다.”(「시론-숨통의 시」)고 시인은 말한다. “약게 살지 못한 아름다움에게 내 숨통을 내어주고 싶다”는 게 시인의 ‘시론’이다. 그의 시론의 부제가 ‘숨통의 시’다. 숨통에서 숨을 내쉬며, 숨통에서 존재 밖에서 부유하는 공기를 빨아들인다. 들숨과 날숨이 흐르면서 연락하고 소통하는 일을 시인은 시작詩作의 무늬에 각인한다.
스며들며 아파 오거나 빠져나가는 것들이 내지르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실은 우리가 생각과 마음으로 채색된 형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언어로 세계를 새기는 작업을 시인은 제각각의 연장과 수단으로 행한다. 이병일에게 시는 움츠러들면서도 새근새근 숨 쉬며 존재를 밝히는 쪽을 향한다. 그것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에 시인의 마음은 닿아 있다. 이 또한 경계를 과감하게 넘나드는 시적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감각을 촉발하는 존재의 얼굴을 가만히 매만지며 빨아들이는 시인의 눈동자가 뉘는 곳을 상상한다. 현대인이 늘 마주치는 긴장과 불안이 이병일에게는 말끔히 지워져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만으로 현실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현실 인식이 극에 다다를 때 이 세계는 하나의 거대의 은유요 알레고리가 된다. 은유와 알레고리로 점철된 이 세계를 다시 조립하고 해체하는 일이 시인에게 맡겨져 있는 일종의 권리이자 덕목인 것이다. 수많은 눈들이 세계를 바라보면서도 희미하게 자신의 눈동자를 향해 달려오는 것을 외면하지 않고 기록하는 자, 이 존재가 바로 시인이라고 한다면 이병일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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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현 《사이펀》과 인문무크지 《아크》 편집위원으로 있다. 평론집 『사랑의 미메시스』, 『시의 역설과 비평의 진실』, 시집 『새들 반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