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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SM Academy) 원문보기 글쓴이: 답사회장 (김신묵)
국보 제18호 - 공식명칭 :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한자명칭 : 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 지 정 일 : 1962.12.20 - 시대 : 고려
- 주소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문화재청 설명 |
직전에 소개한 국보 제17호가 무량수전 앞 석등이다.
그때 의상대사와 선묘낭자 이야기, 그리고 부석사 전반을 이미 설명하였기에 여기에서는 무량수전 위주로 간략하게 적어본다.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은 국보 제15호로 이미 3회 앞서서 설명한바 있다.
바로 그 봉정사 극락전과 지금 소개하려는 부석사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손꼽히는 건물들이다.
한동안 우리는 부석사 무량수전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배웠으며 심지어 장학퀴즈나 각종 상식문답등에서도 단골로 출제되던 것이었는데 이 만고불변(?)의 원칙이 얼마전부터 봉정사 극락전으로 바뀌었으니 바로 봉정사 극락전 상량문에서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발견되면서부터이다.
즉, 부석사 무량수전은 1376년에 중수기록을 갖고 있었는데 봉정사 극락전이 이보다 43년이나 빠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이는 양쪽 모두 중간에 수리한 연도를 말하는 것이지 최초 건축한 날자가 확인 된것은 아니므로 약 40년 안팎의 중수 년도 차이로 더 오래되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쩐지 조금 아쉬운 측면도 있다. 어쨌든 부석사 무량수전은 이렇게하여 그동안 누려왔던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라는 영예를 봉정사 극락전에 내어주고 말았다.
참고로 학계에서는 건축을 처음 짓고 난후 약 100~150년이 지나면 대규모 수리보수하는 중수(重修)를 한다고 보아 중수기록이 발견되면 최초 건축연도를 추정해보는 것이니, 그렇게보면 무량수전이나 극락전은 큰 차이없이 비슷한 시기에 지었다고 보여진다.
기록으로 실제 건축시기를 확실히 아는 최고(最古) 절집은 수덕사 대웅전이다. (1308년 창건)
고려 건축의 백미(白眉)
무량수전을 일컬어 고려 건축의 백미(白眉)라고 한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도리가 11개나 되는 11량 규모의 큰 건축물이면서도 전체적으로 간결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 주심포 건축의 전형이며, 나아가 고려 건축의 백미라고 부르는 것이다.
특히 무량수전은 혜곡 최순우 선생의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라는 문장으로 일약 유명해졌는데,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는 그의 명 문장은 숱한 사람들로 하여금 무량수전에 찾아오면 정면 6개 기둥 하나하나를 쓰다듬고 만져보고 심지어 기둥에 기대어 무엇이 아름답다는 말이냐고 되뇌이며 비벼보게 만들기도 하였으니 잘된 답사기 하나가 끼치는 영향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부석사 무량수전은 목조건축물중 숨겨진 기법과 아름다움이 더해진 곳이니 앞서 말한 배흘림이란 기둥의 하단과 상단에 비하여 중간, 특히 아래의 1/3쯤이 불룩하게 불러보이게 함으로써 큰 건물의 경우 긴 기둥의 중앙부가 얇아 보이는 착시현상을 교정하며,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더하기 위해서 사용된 수법이다. 서양의 그리스 신전 건축물에서도 석조의 기둥에 이러한 기둥을 사용하였는데, 엔타시스(entasis)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도 등장할 만큼 오래 전부터 사용하던 수법으로 고려시대의 배흘림이 조선시대보다 더 불룩하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건물중 강릉 임영관지의 객사문(국보 제51호)이 가장 그러하다.
또한 무량수전에는 몇가지의 목조건축 기법이 더 숨겨져 있는데 정면 6개의 기둥이 좌우 모서리로 갈수록 조금씩 높아지는 귀솟음 수법과 그 기둥들 위에 얹힌 지붕이 밋밋한 직선이 아니라 좌우 처마 귀퉁이가 조금씩 더 튀어나오게 한 안허리곡 기법등이 그것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기둥들은 수직으로 선 것이 아니라 조금씩 안쪽으로 기울어진 안쏠림으로 세운것이니 이렇게 함으로써 건축적으로 튼튼하고 안정됨은 물론 시각적으로도 보기 좋을 뿐아니라 건축의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으로 비쳐져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케 하는 것이니 그래서 부석사 무량수전을 주심포 방식 목조건축의 교과서라거나 고려 건축의 백미라고 하는것이다.
<부석사의 9품 만다라를 본뜬 대석축의 가장 위에 위치한 무량수전, 안양루 뒤에 있다.>
<안양루 아래로 들어서서 계단을 오르노라면 무량수전과 앞마당 석등이 보이기 시작한다.>
<계단을 올라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본 모습.... 석등(국보 제17호)과 무량수전(국보 제18호) 두 개의 국보가 한자리에 있다.
정확히는 무량수전 안에 있는 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45호)까지 한 마당에 국보 3개에 있는 것이니 놀라운 일이다.>
<고즈넉한 느낌의 무량수전, 안허리곡 기법의 지붕 처마가 살짝 들린것이 전통적 한국의 아름다움이다. (문화재청 사진)>
<정면 5칸, 측면 3칸 건물로 기둥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건물로 간결하여 오히려 아름답다.
앞쪽 5칸중 가운데 3칸은 칸마다 두짝짜리 분합문과 두짝의 창, 좌우 한칸씩은 분합문 없이 두칸 창으로만 되어 있다.
모든 창들은 다시 윗쪽으로 들어올려 거는 방식인지라 필요시는 앞면 전체를 활짝 개방할수 있는 구조이다.>
<다른 절집 전각처럼 좌우측면으로는 출입문이 없다. 뒷벽에는 문틀에 널판문을 달았는데 사용하지는 않는듯하다.>
<앞쪽 기둥의 배흘림 모습이 뚜렷하다. 또한 처마 아래로 보이는 공포가 간결하면서도 매우 탄탄해 보인다.
공포 위로는 11개의 도리중 밖으로 노출된 외목도리가 보인다. 위사진을 보면 뒷처마 아래로도 외목도리가 나와 있다.>
<정면의 무량수전(無量壽殿) 현판은 공민왕 친필이다.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와서 머무를 때 써주었다고 한다.
일반적인 현판 양식과 달리 네글자를 세로 두글자씩 두 줄로 썼으며, 검은색 바탕에 글씨에는 금칠을 했을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검은색도 바래고 글씨의 금칠도 다 벗겨지고 없는데 자세히 보면 언듯 금칠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관례로 임금 글씨는 낙관을 하지 않는다고 하며, 대신 뒷면에 공민왕이 썼다는 기록이 적혀있다고 한다.>
무량수전(無量壽殿)은 부석사의 주불전(主佛殿)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량수전으로 들어가면 몇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우선 부처님을 정면 중앙에 모신 것이 아니라 왼쪽, 그러니까 서쪽에 모셔서 오른쪽, 즉 동쪽을 바라보고(동향 : 東向) 계신 점이다. 이는 아미타여래가 서방정토에 계심을 뜻하여 배치한 것으로 보이며 다른 부처님들처럼 좌우에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만 계시는데 불단과 화려한 닫집을 만들어 모시고는 있으나 건물 내부와 천정을 막지 않아 각양각색의 목재 부재들의 결구 모습이 노출된채 보이는 것이 또한 보기 좋다.
아미타여래좌상에 대하여는 다음 국보소개때 (국보 제45호) 하기로 하고 남겨 둔다.
<무량수전 내부 모습, 아미타불은 서쪽에서 동향(東向)으로 앉아 계시고 내부 목재구조가 모두 노출되어 있다.>
답사를 다니다보면 가장 난감할 때가 '촬영금지'이다.
이곳 부석사도 무량수전과 아미타불 모두 국보인지라 무량수전의 내부구조나 아미타불의 근접촬영을 해야하는데 떡하니 지키고 있는 법당보살님이 사진 찍으면 안된다고 눈을 부라린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왔으니 어쩌고하는건 아니지만 작금의 추세는 국립박물관이나 외국 어느 전시시설에도 사진을 못찍게 하는 곳은 없다. 다만 후래쉬를 사용하여 문화재가 빛에 반응하고 퇴색할 우려가 있다던지, 삼각대 사용등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고 위험할 수 있다던지, 또는 법회등 종교행사 중일때라면 모를까 이유를 불문하고 내부촬영금지라고 막아서는데야 참 할 말이 없다.
문화재를 사랑하고 천녀고찰을 아끼는 탐방객들에게 좀 더 너그러워지기를 기대해본다.
<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