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운명을 바꾼 갈림길들(23.2.26)
수필교실에서 같이 공부하는 문우가 공부한지 얼마 안된 어느 날 카톡에 나를 좋게 평가한 글을 올렸기에 겉만 보고 알수 있나요 라고 답을 썼다. 그랬더니 겉볼안이라는 말이 있다면서 나를 좋게 말해줘 나로서는 처음 듣는 낱말이라 사전을 찾아 본적이 있다. 겉을 보면 속을 안 보아도 가이 짐작 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다.
나의 겉모습에서 삶의 여유로움을 향유하고 있음을 유추했다는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스스로 80평생을 되돌아 보아도 비교적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않 좋은 악조건 속에서 이정도의 성공적인 삶을 살아 온 것은 수없는 삶의 갈림길에서 비교적 올바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간 내가 직면했던 수많은 갈림길들을 생각해 보았다. 삶이 곧 선택의 과정이라면 매 선택을 할 때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수많은 시행착오였다고 생각한다. 즉 不經一事 不長一智(불경일사 부장일지)가 아닐까. 젖을 떼고 첫발을 디디면서부터 당시의 시골 생활은 수없는 시행착오의 연속이었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루하루 성장 하는 것이 삶 그 자체였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성장하고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렇다고 당시의 중학교가 모두가 입학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도 수업료를 내는 시절이어서 중학교는 당연히 내야했고 입학시험을 통과해야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대부분 가정에서는 아무리 아들이고 성적이 좋아도 못 보내는 집이 허다했다. 더구나 여자애들이 중학교에 다니는 것은 한동네가 아니라 한 면에서도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나의 경우 중학교 졸업 때 까지 나의 삶은 나에 의해서 선택 된 것은 없고 모두 당시 집안 살림을 책임지셨던 할머니의 선택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6.25이후 휴전을 코앞에 두고 불의의 사고로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고부 갈등으로 가출한 우리 집에서 13살의 큰 형님에서 2살 막내 동생까지 5남매의 삶은 42세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몫이었다.
나의 삶이 나에 의해서 만들어 지기 시작한 것은 1959년 이른 봄, 논의 갈게를 다듬으라는 할머니의 명을 거역하고 가출하여 고모집에 기숙하면서 신문배달을 하고 고등학교 진학의 길을 찾으면서였다. 이때부터 순간순간의 선택이 나의 운명을 만들어 가기 시작하였다. 시골에서 중학교 다닐 떄 까지 모든 선택은 당연히 할머니가 해주었지만 고학한다고 가출해서 누구도 달가워하지 않는 사돈집에서의 매 순간 순간의 선택은 당연히 나의 몫이었다.
당시는 시골이고 도시고간에 6.25의 처참한 전쟁의 상흔이 너무 넓고 깊게 남아 있어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문제였다. 웬만하지 않고는 누구도 남의 삶, 생활에 대해서 관심 가져줄 여유가 없었던 시대였다. 들은 소문만 믿고 신문배달해서 고학한다고 가출했으니 당연히 신문배달의 길을 찾았다. 어느 신문을 배달하여야 할 찌를 선택해야 하고 어느 고등학교 가야할지를 선택해야 했지만 누구도 관심 가져 주는 사람이 없으니 선택은 내가 해야했다.
시골서 올라온 시쳇말로 촌놈이 어느 신문이 인기 있는 신문이고 어느 학교가 좋은 학교인지 알리가 없어 무작정 거리로 나가 벽이나 전봇대에 붙여진 광고전단을 보고 찾아다녔고 결정하다보니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쳤다. 신문배달이 그랬고 고등학교 선택이 그랬다. 이름 없는 신문을 배달하다 보니 힘만 들었고 수입은 거의 없었다. 학교도 이 학교 저 학교로 옮겨 다녔다. 마침 그 당시는 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대부분의 집들이 호구지책에 정신이 없을 때라 많은 애들이 학교 가기보다는 구두통을 메고 골목을 헤멜 때였다. 그런 형편이어서 일부 학교를 제외 하고는 대부분의 학교가 학생이 부족해 학교 가는 것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세상을 조금씩 알아갔고 세월이 가면서 그에 따라 좋은 선택을 위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나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고 그런 길은 아무리 힘들어도 도전했고 합류했다. 대학입시가 그랬고 교직선택이 그랬다. ROTC를 선택해 졸업 후 장교가 되었다.
최전방에서 죽고 죽이는 정말 힘든 과정을 겪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 길은 힘은 들었어도 세상을 보고 미래를 보는 나의 시야를 확대해 주었다. 교사가 되고 난후에도 퇴근 후 한잔의 휴식대신 학원을 택했고 그렇게 해서 배운 영어가 미8군에서 미국인들과 활동을 가능하게 했다. 미국인과의 계속된 활동은 해외 연수에 선발되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면서 일상적인 삶의 모습으로 늙어 퇴직하기는 싫었다. 그래서 퇴근 후 역시 휴식대신 학원을 택했고 결과 전문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원하면 해외교육원장으로도 선발되는 기회가 주어지자 안 좋은 주재국의 여건을 거론하면서 주위에서 말리기도 했지만 그동안 힘들었던 과거가 만들어 준 오늘의 발전을 기억하고 주저 없이 모험을 선택했다. 선택이 옳은 결정아라고 증명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4년의 해외근무는 여러 문제의 해결은 물론 그로 인해 또 다른 인생을 꿈 꿀 수 있었고 힘은 들었어도 원하는 인생을 만들어 갈수 있었다. 지나고 보니 꿈을 향한 도전은 힘은 들었지만 내가 원하는 삶을 만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