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는 살아 있다.
이강민
‘어영부영’ 벌써 나이가 70이 되었습니다.
사람 나이 70이면 득도를 한다고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고 웬만한 것은 참을 줄도 안다는 나이인데 참는 것은 고사하고 심술만 더 사나워지니 나 스스로 내 처지에 여간 실망치 않습니다.
모르는 것은 다 물어보라는 그 유명한 ‘NAVER’ 선생님께 대한민국 남자 평균 수명 이렇게 여쭈어보니 80.5세 라고 또렷이 말씀하시고 좀 더 살기 바라는 기대 수명은 82세라고 덧붙여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내 70의 시계에서 바라본 80은 이제 10년이 남은 것입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려고 그렇게 세상천지를 다 뒤졌지만 생명은 본래 하나님이 주신 것 사람이 80 정도 살면 장수한 것이라고 성경에도 또렷이 적혀 있는데 순리대로 순응하며 받아들여야겠지요.
그래서 남은 인생 좀 더 겸허하고 정직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밀려오는 봄의 아침입니다.
나이가 들어 그런지 해 돋는 일출보다 해 지는 낙조가 더 멋져 보이는 건 내 젊음의 한 가운데 해병대 생활 그 말도의 황혼이 깊게 배어 있어 그런가 짐작도 해 봅니다.
1973년 스무살의 나이에 멋모르고 해병대를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김포반도 그 끝. 비무장 지대 안에 있는 말도라는 섬에서 군 생활을 했습니다.
서부전선 그 끝에서 떨어지는 해는 그야말로 장관이였고 그래서 우린 그 곳을 ‘황혼의 별장’ 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얀 백지에 빨간 홍시를 확 터트려 놓은 듯 온 천지가 붉은 물결에 출렁 거렸으며 아마
박재삼 시인의 ‘ 저것봐 저것봐’ 하며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이 이처럼 아름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진해에서 그 악명높은 훈련을 마치고 실무 부대에 배치가 되었는데 얼씨구 해병대가 해체되고
훈련소가 문을 닫아 앞으로는 신병이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대가 뒤숭숭 했습니다. 얼핏 들리는 해체 이유는 2만 해병대가 50만의 육군과 늘 맞 먹으려고 하고 아니 육군 알기를 너무 우습게 알어 괘씸죄에 걸려 그랬다는 등
그래서 해병대가 육군으로 팔려 간다는 설과 해군 밑으로 들어가 해군의 육전대가 된다는 등. 작대기 하나 단 나도 이랬으니 처 자식까지 있는 간부들의 심정이야 오죽했겠습니까?
미리 공포하면 비밀이 새고 혹여 해병대와 예비역들이 들고 일어날까 봐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예고되어 해병대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해체되니 간부들은 사회에 나가서 먹고 살길을 마련하라 하는 사전 통보 정도는 해 주는 것이 상식인데 하루 아침에 날벼락을 맞았으니.
아마 제가 알기론 그때 별이 몇 개 떨어지고 수 백명의 간부들이 해병대를 떠났다고 하는데
서울을 수복하여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은 6.25전쟁. 새벽의 한강 다리를 처음으로 넘어 군사혁명의 선봉이 되어 박 대통령을 만들어준 5.16혁명 그리고 월남전에서 삼군 최초로 전투부대를 파병해 선두에 서서 수많은 전공을 세우고 신화를 남긴 해병대를 잘 써먹고 이젠 그 들 세력이 너무 커 ‘토사구팽’ 시킨 꼴이겠지요.
세상에 회사가 부도 나는 것은 가끔 뉴스에서 보았으나 군대가 부도가 나 훈련소가 문을 닫는다니 기가 막히고 더군다나 그로 인해 내 밑에 쫄 병이 안 올라온다는 것은 군대에서 평생 쫄 병 노릇만 하다가 제대하라는 얘기인데 어느 나라에도 유례가 없는 기가 막힌 일이 1973년 겨울에 일어났습니다.
내막의 진실은 잘 모르지만 몇 개월 이렇게 어수선하게 지내다 높은 사람들끼리 숙닥거려 합의를 보아 별 네 개 사령관이 강등되고 생전 듣지도 못한 별 세 개 해군 제2차장이 해병대 수장이 되어 지금도 제대증엔 해군이란 직임이 커다랗게 찍혀 있습니다.
지금이야 다 이순신 장군의 후예라 생각해 해군이나 해병이나 같은 가족이라 생각하지만 그때 해군이란 마치 아버지 자식이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내 이름이 의붓 아버지 호적으로 옮겨놓는 것 같은 아주 찜찜한 기분이었습니다.
올해는
수해 현장에서 실종자 구조 수색 작전 중 순직한 채수근 상병 사건으로 해병대라는 이름이 자주 뉴스에 등장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이목을 끄는 한 해였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해병대 헌병 대장이나 되니까 저 정도로 용산과 국방부에 고개 쳐들고 항명도 하지 하는 장한 생각도 들고 그래 역시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고 재판마다 따라다니며 군가를 부르는 그 동기들 멋지다고는 생각도 들고 어떤 때는 해병대 별들도 이젠 별 볼 일 없구나 하는 측은한 마음도 드는 2024년의 아침입니다.
타군 친구들이 간혹 해병대 전역한 자네는 이런 사태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며 비꼬듯 질문하곤 하는데 여기서 나는 껄껄 웃으며 ‘이놈아 작대기 네 개 달고 전역한 내가 별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오묘 무쌍한 일들을 어찌 알며 작대기 단 놈들이 거기 별 천지에 끼어들면 월권행위야. 채수근 상병 유가족도 사람은 미운데 해병대는 아들이 자랑스러워 했다는데 거기까지 내가 끼어들어 이러쿵 저러쿵 하면 유가족 욕보이는 거야’ 하고 마무리 짓곤 합니다.
이러다 정말 용산이니 국방부에 미운털 하나 더 박혀 그 나마 별 세 개짜리 힘없는 사령관이 별 두 개로 강등되면 어쩌나 하는 ‘웃픈’ 기우도 들고요.
요즘은 또 해병대 뉴스에 이종섭 국방부 장관까지 끼어들어 전화를 받았느니 명령을 했느니 하며 해병대를 한번 더 죽이고 있습니다.
23년 국군의 날 행사에서 서울 시내를 누비는 장한 후배들의 행진을 보다가 문득 50년 전 ‘황혼의 별장’ 이라 불렀던 말도 OP가 생각났고 그래서 이리저리 수소문 끝에 주소를 알아내 장문의 편지와 작은 위문품을 포장해 말도에 보냈습니다.
예전에는 강화군 서도면 말도리 [황혼의 별장] 하면 좀 늦더라도 편지가 도착했는데 지금은 보안 때문에 그런지 op주소 알아내기도 무척 힘들었습니다.
편지에는 사랑하는 후배들의 수고에 감사를 전하였고 지금의 그 고독한 섬 말도의 군 생활이
평생 여러분에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의 지문으로 심장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썼습니다.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그 곳 후배들이 그곳에서 이 부러진 나라의 허리를 잡고 있어 우리는 늘 안심하며 그대들의 수고에 늘 감사하고 있으니 서부전선 최북단 ’황혼의 별장‘ 말도에서의 군 생활 멋지고 힘차게 마치고 돌아오라고 문장도 넣어서 말입니다.
그리고 어제 소대장으로부터 답신의 편지가 왔습니다.
보내주신 편지와 위문품 잘 받았다는 내용과 선배님을 글을 보고 소대원들이 자기들은 외딴섬에서 근무하는 실력 없는 병사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말도 근무를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며 자기들도 해질녁 황혼을 그렇게 문학적으로 표현을 못 했는데 되새겨보니 정말 말도는 멋드러진 ‘황혼의 별장’이 맞다며 부대에 방문하시면 소대원 모두 대환영 할 것 이라는 글로 답신이 왔습니다.
해병대가 무엇인지 제대한지 50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동기들과 만나 무슨 ‘람보’ 처럼 M16 휘두르며 전쟁터에 나가 대단하게 군생활 한 것처럼 수다를 떨며 전국 동기회 모이는 것도 성이 안 차 수도권 모임이니 지역 전우회니 제 각각 또 모이고 또한 목사. 신부. 스님들까지 지구촌 곳곳에 코리아가 있는 곳에는 전우회가 만들어지고 아마 해병대는 죽어서 천국에 가면 거기도 ‘해병천국전우회’를 만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도 ‘황혼의 별장’이라는 말도 출신 예비역 모임을 만들어 가끔 만나 회포도 풀며 그 추억을 되새김하고 있습니다
80이 넘은 선배님으로부터 젊은 예비역까지 나이와 계급에 상관없이 모여서 정보도 나누고 서로 덕담도 하는 보통의 해병 모임과는 좀 격이 다른 독특한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계급과 나이에 관계없이 오직 그 곳 말도에서 근무했다는 것 하나로
이번 모임에는 인도네시아에 살고 계시는 선배님까지 참석 하시어 이 모임에 뜻을 더하였고
익산에 계시는 선배님은 [180기] 83의 고령에도 불구하시고 참석 하시어 죽기 전에 말도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라며 그 의지가 대단하십니다.
내 년 꽃 피는 봄에는 말도를 방문하여 후배들을 위로하고 그 멋진 석양도 한번 볼 예정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드리면 문이 열린다고 햇든가. 사단장님의 배려로 말도 출신 해병들의 말도 방문이 이루어지고
우리는 이것 저것 한 아름의 선물 보따리를 들고 말도를 방문 하였고 해병대는 살아 있다. 라는 현수막을 크게 걸어 놓고 기념 촬영까지 하며 후배들을 격려 하였습니다.
말도 부대 방문시 격려사를 개재 합니다
격 려 사
저는 지금으로부터 51년 전인 1973년 이곳 말도에서 근무한 해병 263기 이강민 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고 이렇게 늠늠한 후배들을 보니 감개 무량 합니다.
51년 전 그 때는 이곳 op 아래 에는 북한 넘어가는 실미도 부대원들의 막사가 있고 저 건너편 연백에는 김신조가 훈련받은 124군 특수부대가 있어 정말 살벌하고 무서운 곳이 이곳 말도 였습니다.
여기 말도는 김포반도 제일 끝에 섬이라 민간 여객선이 없어 앞 섬 보름도에서 뎃목을 타고 다니던 전기가 안 들어와 호롱불에 불을 켜고 아침이면 그름에 콧구멍이 새까맣던 정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였습니다.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 해질녘 낙조가 너무 몽환적이라 여기를 ‘황혼의별장. 이라 불렀고 50년이 지난 후배들도 이곳이 황혼의 별장이란 이름을 안다니 전통이란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우리 해병대는 누가 오라고 해서 온 군대가 아니라 전부 자원 입대한 군대입니다.
그래서 조금 힘든 훈련도 참고 이겨 내며 조국을 위해 충성 하는 군대입니다.
여기 전라도에서 오신 181기 선배님은 83세의 고령에도 말도 한번 다녀오고 돌아가시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여기를 오고 싶어 하시던 한분입니다.
인생의 젊음 한가운데 3년의 기억은 인생 80년을 좌우 할 정도로 긴 여운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후배님들 .
지금 사회에는 채 상병 순직 사건의 법 적인 처리로 온 세상이 야단입니다.
모두 해병대는 이제 죽었다고 비야냥 거립니다.
저는 정치적인 사항에는 잘 모르지만 해병대를 무시하고 비난하는 데는 동의 하지 않습니다.
여기 이처럼 젊음을 바처가며 국토방위에 최 전선에서 수고하는 이들에게 해병대 저하 발언은 용납할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후배님들 이 섬이 비록 외롭고 쓸쓸하지만 여기 끈끈한 전우애가 있고
든든한 선배들이 있으니 군 생활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여기 방문 한 김돈하 후배는 90년 말도 소대장으로 근무 하면서 소대원 2명을 데리고 같이 왔습니다.
얼마나 감개 무량 하시겠습니까?
여러분도 이 다음 30년 40년 후 아니면 저처럼 50년 후에라도 동기들과 같이 말도를 방문 하는 귀한 시절이 왔으면 합니다.
교회에서 후배들에게 드리려고 군 시절 저도 못 받아 본 커다란 위문품을 정성껏 마련해 개인 별로 준비 했습니다.
최고급 화장품 셋트를 비롯 해 과자. 첼리. 그리고 햄버거등 푸짐하게 준비 했으니 부모님이 보내주신 선물 이라 생각 하시고 맛있게 드시길 부탁 드립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이 말도 근무 2년이 가슴에 아름다운 지문으로 꽉 박혀 힘들고 외로울 때 말도 생활을 기억 하며 이겨 내시길 부탁 드립니다.
여러분의 무운과 건투를 빕니다,
2024년 4월 27일 황혼의 병장 예비역 모임 해병 263기 이강민 드림
짚신문학회 이사 부천 약대교회 장로 수필집 <아버지와 소> 외 다수
태산승강기 [주]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