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평천국(太平天國) 운동
명대 이후 중국 사회의 지하에는 이전부터 낮은 수준의 비밀결사 활동이 존재했으며, 18C부터는 천지회라는 조직이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시간이 가면서 고정조직에 유랑민 등의 유동층이 유입되면서 비밀결사가 토비로 확대되었다. 아편전쟁으로 인해 청조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지고, 세금은 오르는 등 제(諸)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군사화가 진행되었다. 더불어 인재(人災)와 관련된 자연재해(생태계 파괴 등)나 1840년을 전후하여 일어난 대화재, 가뭄, 한발 등이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집단은 객가(客家)이다. 객가의 기원은 5호 16국까지 올라간다. 외침으로 인해 화북인들이 남쪽으로 이동해 자리를 잡아나간 것이다. 풍습, 말 등이 현지인과 매우 다르기에 스스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구성했는데, 남방의 문화는 외지인에게 관대하지 못하며 심지어 그들 스스로의 교류도 적었기에 현지인들은 자연히 객가와 대립하게 되었다. 객가인들은 단련 등의 공동체에서도 소외되었고, 경제적으로도 열악한 상황에 있었다. 객가는 계투(械鬪)에 능했는데, 만약 분쟁이 일어나면 스스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계투를 통한 조직화 역시 지방 군사화의 한 단면이다.
홍수전의 배상제교는 객가들이 본지인들의 사상체계를 비판할 수 있는 체계가 되었다. 홍수전은 객가 출신 중농으로, 계속 과거에 낙방하자 낙담하였는데 기독교 서적인 『권세양언』을 본 이후 꾼 꿈을 바탕으로 배상제교를 창시했다. 배상제교는 본지인의 단련에 대한 객가의 대응조직이 되었는데, 광동에서 천지회 등의 반란이 빈발하자 1850년, 광서성 금전촌에서 봉기했다(金田起義). 그들은 기존진서를 부정하고 천상의 왕국을 현세에 구현하고자 하였으며, 우상타파를 주장하면서 공자묘를 파괴하는 등의 일을 벌였따.
1851년 국호를 태평천국(太平天國)이라 하고 청조에 대한 반대를 주장했는데, 그들이 변발을 끊고 앞머리를 길렀기에 청조는 그들을 장발적(長髮敵)이라 칭했다. 그들은 지방 주둔 팔기군인 주방팔기(駐防八旗)를 격파하고 남방을 정복하고 세력을 확대했으며, 남경(난징)을 정복한 후 천경(天京)이라 부르며 도읍으로 삼았다. 후에 그들은 북벌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서정은 어느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
홍수전은 스스로 천왕(天王)이라 칭했으며 초기 간부들을 각각 왕에 임명하여 익왕(翼王) 석달개, 동왕(東王) 양수청, 서왕(西王) 소조귀, 남왕(南王) 풍운산, 북왕(北王) 위창휘가 초기 주요 지도자가 되었다. 후에 풍운산 등의 전사, 양수청의 숙청 등을 거치며 충왕(忠王) 이수성, 간왕(刊王) 홍인간 등 새로운 왕을 임명하였다. 가장 주목할만한 인물은 양수청인데, 양수청은 천부하범(天父下凡)이 가능하였기에 홍수전과 권력을 양분하고 있었으며, 군사적 재능으로 인해 태평천국군의 최고 지휘관 격이 되었다. 그들은 종교단체에서 출발하였으나 사회주의적 평등과 철저한 사회혁명을 꾀했다. 천조전무제도(토지제), 남여평등, 지주제의 모순 해결 등 피지배층의 마음을 대변하고자 했다. 서구열강도 초기에는 태평천국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보는 눈이 달랐다. 태평천국은 서구열강에 우호적이었고, 그들을 양형제(洋兄弟)라 불렀다. 그러나 서양은 후에 우호적인 태도를 바꾸어 청조 지지를 선언했는데, 이는 청조가 1860년의 조약으로 서양의 모든 요구를 수용했으며, 상군과 회군이 선전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의 몰락 원인은 안과 밖에서 각각 살필 수 있다. 외적으로는 상군과 회군의 강한 압력, 내적을는 홍수전과 양수청의 대립을 이유로 꼽을 수 있다. 증국번은 1853년에 호남성 상강(湘江)에서 상군을 만들었는데, 태평천국이 사회혁명 및 반만감정을 내세웠다면 증국번은 청조에 대한 충성과 지주전호제 등 관행의 보호가 모토였다. 그는 단련의 조직을 확대하고, 대단을 성 단위의 확대대단(extended tuan)으로 재편했다. 이는 중앙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지방군 확립의 시초이다. 황제에 대한 충성은 어디까지나 증국번 개인의 '사적인 것'아며, 공권력에 제약받지 않았다. 그의 막료로는 동생인 증국전과 이홍장이 활약했는데, 이홍장은 1862년에 안휘성의 회수(淮水)를 낀 지역에서 회군을 만들고 증국번과 함께 태평천국을 압박했다. 상군과 회군, 청조 최초의 사적 비정규군의 창설은 기득권의 수호를 위한 것이었다.
1860년, 증국번은 절강과 강소를 총괄하는 양강총독(兩江總督)이 되었으며, 흠차(欽差)로 임명되어 인근을 총괄했다. 양강은 가장 물산이 풍부한 지역이었고, 광주 이상으로 번성하던 상해에 외국 군대가 주둔해있었다. 그 때문에 태평천국이 상해를 공격하지 않았는데, 초기에 태평천국에 우호적이든 서양인들은 1860년 이후 청조 지지로 선회한다. 증국번은 이 시기 이후 직례총독 등을 거치며 경관(京官)이 되지만, 이 시기에 형성된 증국번 및 한인 관료들과 상해의 서양인간의 커넥션은 이후 양무파의 주요한 자산이 된다.
양무파의 대두는 안정을 필요로 했다. 당시 중국은 크고 작은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화북에는 염(捻)이 등장하여 천경 함락 이후에도 10여년간 활동했고, 회족들이 서북(섬서, 감숙 인근)에서, 묘족들이 서남(운남, 귀주 인근)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신장에서도 소요가 끊이질 않았다. 1860년대 내내 끊이지 않았던 1870년에 들어서면 열강과의 관계가 안정되고 반란들이 다 진압되면서 상대적인 안정기에 접어들게 된다. 청조 중앙에 개혁 움직임이 시작되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다.
후에 쑨원은 스스로를 "제 2의 홍수전"이라 부르며, 그에게 받은 영향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삼민주의의 항목인 민족(반만흥한), 민권(남여평등), 민생(토지분배) 역시 홍수전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덕목이다.
마오쩌둥 역시 태평천국을 농민전쟁이라 칭송했으며, 그 역시 농민을 바탕으로 한 홍군을 창설했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가장 큰 결과적 의의는 한인 관료들의 세력을 강화시켰다는 점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청조는 만한병용제를 채택하고 있었으나 이 시기에는 만한간의 비율이 깨어져서 총독은 20:4, 순무는 21:3으로 한인 관료가 압도적으로 다수였다. 이는 청조의 지방분권 내지 지방통제력의 상실을 의미한다. 또한, 태평천국 이후 상군은 해산하였으나 회군은 명칭을 바꾸며 존속했고, 1916년~28년 군벌 시대의 기원으로 남았다. 상군과 회군 이외에도, 이 시기의 근대화 노력 중 근대적 군대(新軍)의 건설에 대해서는 지방세력이 주도한 경향이 많았고, 특히 이홍장과 원세개가 그 핵심에 있었다.
2. 염군(捻軍)의 난
군사화 경향의 지속은 하북의 염군(捻軍)과 관련이 있다. 염(捻)이란 '뽑다'라는 의미로 무리를 지은 약탈자의 성격을 갖는다. 염군에 대해서 1850년 이전의 역사는 잘 알려지 있지 않으며, 이들은 흔히 백련교의 잔여세력들이라 여겨진다. 염군에 대해 기록한 신사들은, 모든 반란을 대체로 백련교에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분명한 연관관계는 찾기 어려우나 백련교 세력이 염에 가담한 것은 사실이다.
염군은 하남, 안휘, 강소 등 성 사이에 위치한 교계(交界)에서 활동했다. 교계지대는 성 정부의 영향력이 약한 곳이었으며, 백련교의 잔존세력은 그곳에서 어렵게 살던 이들에게 백련교 교리를 전파하여 끌어들였으나 일부는 반 백련교로 돌아서서 향용을 결성한다. 그러나 향용 해산 후 방랑하들 이들이 다시 비적이 되면서 백련교도들과 함께 비적이 된다. "종족, 가문, 집안에 염이 있으면 편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염은 민간 사회에 뿌리내렸는데, 각 촌락들은 거리를 두고 형성되었으나 전부 염에 가담했다. 그러나 그들이 연계하지는 않았는데, 각 촌락은 자율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부촌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재산을 수호하기 위해 무장 보호자로서 염을 수용했고, 빈촌은 염과 결탁하여 농한기에 약탈을 행하기 위해, 즉 무장 비적이 되기 위해 염을 수용했다.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염을 유연하게 적용했고, 이는 염의 사회적 기반이 되었다.
태평천국군은 염군과의 연합을 꾀했으나 태평천국군이 유일신 사상과 엄격한 규율을 요구했기에 염군이 그를 수용하지 못했다. 염군은 종교적 신앙과 거리가 있었기에 연합은 오래가지 않고, 태평천국의 혁명성은 농촌사회와 괴리감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염군은 기존질서에 보다 더 순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무장보호집단으로서의 염은 국가가 승인하여 민단으로 인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염은 정주사회 속으로 침투해 들어갔는데, 세력가들은 이 무법세력을 자신들의 도구로 만들려 했다. 1850년대부터 황하의 물길이 변하기 시작했고, 굉장한 자연재해가 발생했따. 기근과 절망 속에서 염이 확산되었으며, 계투가 빈번해지면서 전혀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산채를 짓고 약탈업에 종사하는 이가 늘어났다. 촌락은 신사, 지주 등을 중심으로 성곽을 끼고 재편성되었는데, 지도자는 염군의 두목이 되어 갔다. 해당 지역의 관군은 전쟁중이었기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1852년에 염의 총 수령으로 장락행(長樂行)이 등장했는데, 그는 스스로 대한명명왕(大漢明命王)이라 칭했다. 대한(大漢)은 반만흥한의 태평천국에 호응하는 측면이나, 명(明)은 백련교의 전신인 명교가 명을 세웠기에 붙인 이름이라 생각된다. 만주족의 통치를 부정하고 백련교의 기치를 내걸었으나, 그리 강한 사상적 기반이나 경향성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태평천국 시기에, 청조는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관군을 파견했다. 몽고의 왕공 출신인 승격림심(僧格林沁)에게 지휘를 맡겼으나 장락행의 조카인 장종우(長宗禹)가 그를 격파했다. 후에 증국번이 염군 토벌 사령관이 되었으나 곧 북경으로 올라가고 이홍장과 회군이 남아 염군을 박멸했다. 염군은 태평천국에 비해 위험은 적으나 훨씬 지속성이 있었다. 이는 염이 지역사회의 요구에 잘 부응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의 사회혁명성은 교리적 배타성으로 인해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염은 자원획득이 목적이었기에 전통 가치체계에 대한 위협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