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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틀란드 반도 이외에 핀(Fyn) 섬, 롤란(Lolland) 섬, 팔스테르(Falster) 섬, 셸란(S십land) 섬 등을 포함해 약 406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는 덴마크 해안선은 총7300km로, 이는 지구 둘레의 6분의 1에 해당한다. 이 밖에 덴마크령인 그린란드(Greenland)와 페로스 군도(Faeroes Irelands) 등이 있다. 그린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섬으로 크기가 약 220만km2에 이르며 이 가운데 약 190만km2가 얼음으로 덮여 있다. 페로스 군도는 전체 크기가 약 1400km2이며 가장 큰 섬으로는 스트뢰뫼(Str알썲 섬이 있다. 2. 기후 덴마크는 남쪽의 북아틀란틱 해와 걸프 만으로부터 난류가 흘러 들어옴에 따라 북쪽 지방의 겨울철 기온을 높여 주며 여름철에는 오랫동안 구름 없는 날씨가 계속되어 기온이 35.8℃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1년 중 가장 추운 달은 2월로 평균 기온이 -0.4℃이며 가장 따뜻한 달은 7월로 평균 기온이 16.6℃로서 전형적인 섬 기후를 보여 준다. 연 강수량은 600mm이며 1년 중 8, 9월에 비가 가장 많이 오고 봄, 겨울에는 상대적으로 적다. 특히 덴마크는 1년 내내 평균 초속 7.6m의 시원한 바람이 부는 나라이기도 하다. 3. 지역별 특색 덴마크의 지형은 빙퇴석에 의해 특성화되었는데, 풍부한 호수와 구릉지와 이것들과 번갈아 나타나는 굽이치는 평원 등이 그 것들이다. 서부 유틀란드 지방은 사토(沙土)와 긴 모래 언덕이 많은 불모지이나 유틀란드 동부와 다른 도서들은 일반적으로 비옥한 토질을 가지고 있다. 덴마크의 수도는 코펜하겐(Copenhagen:덴마크어로 괴벤하운)이며, 티볼리 가든과 인어 공주의 동상으로 유명하다. 세계의 비즈니스맨들에게 코펜하겐은 여러 첨단 산업과 무역 및 교통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코펜하겐 국제 공항에는 하루 435편의 국제 항공기가 이·착륙하고 있다. 또한 코펜하겐은 이 지역의 금융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으며 1996년에는 세계 문화 도시로 선정되었다. 이 밖에 주요 도시로는 오덴세( hus), 오르후스(Odense), 알보리노레순드비(Alborg-Norresundby) 등이 있다. 덴마크령인 그린란드에는 광물 자원이 많이 매장되어 있어 1979년부터 지방 자치령에 의해 그린란드 지방 정부와 덴마크 정부가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그린란드는 덴마크와 함께 EC(유럽 공동체)에 가입하였으나 1982년 국민 투표의 결정으로 탈퇴하였다. 또 하나의 덴마크령인 페로스 군도의 주요 산업 활동은 어업이며, 1948년부터 자치령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II. 역사 1. 고대 선사 시대 덴마크의 신석기 시대는 B.C. 3000년께 시작되었다. B.C. 2000년께 단장분(單葬墳) 문화가 인도 유럽계인들의 칩입에 의해 전래되었고, B.C. 1500년께 청동기 문화, B.C. 400년께 철기 문화가 도래하였다. 유사 시대(有史時代)는 800년 동안의 바이킹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바이킹 시대(800~1060년께) 최초의 왕들은 민족 지역 가장 남단에 다네비아케라는 도성을 구축하고 교역지 헤데비의 방위와 조국 방위에 힘썼으며, 811년 프랑크 왕국과의 사이에 아이다 강을 국경으로 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외링 지역에서 일어난 왕가는 970년께 하랄(Harald) 왕 치하에서 덴마크를 기독교화하였고, 그 아들 스벤 왕이 잉글란드를 정복하고 잉글란드 왕을 겸하였다(1014). 하랄 왕의 차남 크누드 1세(카누트 대왕)가 1016년에 잉글란드 왕위에 올랐고 1018년에는 덴마크 왕을 겸하였으며, 1028년에는 노르웨이 왕으로 추대되어 `북해 제국(앵글로 스칸디나비아 대제국)'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2. 중세 내란의 시대(1047~1332) 1047년 덴마크는 스벤 에스트리드센(Sven Estridsen)이 왕위에 올라 그 손자대에 왕위를 둘러싸고 내전 상태에 빠졌으나, 1157년 발데마르 대왕(Valdemar I den Store)이 유일한 왕이 되어 내전은 종결되었다. 그는 국민 집회에서의 동의를 얻는다는 조건으로 왕위 세습 원칙을 확립하였다. 그후 발데마르 2세(Valdemar II:1202~1241)가 1219~1227년에 에스토니아를 공략, 그 행군중 `다네 부로우'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전설이 있다. 그의 치세 때 스코네 지방과 코펜하겐이 번영하여 왕권 강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발데마르 2세는 1241년 절대 칼마르 연합과 종교 개혁(1332~1588) 발데마르 4세(Valdemar IV)는 1340년 전에 왕위에 올라 국내의 혼란을 평정하고, 한자(Hansa) 동맹과도 화해하여 안정기에 들어갔다. 그의 딸 마르그레테(Magarete)는 노르웨이 왕 호콘(H on) 6세와 결혼하여 그 아들 올로프(Olof)는 발데마르 4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1375), 1380년 호콘 6세가 죽은 후에 노르웨이 왕을 겸하였다. 1387년 올로프가 죽은 후 마르그레테는 덴마크노르웨이의 양 국무원으로부터 `최고 권위자'로 추대되어 사실상의 여왕이 되었고, 1389년 스웨덴 귀족의 요청으로 스웨덴 왕 알브레크트(Albrekt)를 추방하고 스칸디나비아 3국을 통합하였다. 1397년 마르그레테는 언니의 외손자 에릭(Erik XIII)을 칼마르(Kalmar)에 모인 귀족들에게 3왕국의 공통 왕임을 인정시킴으로써 `칼마르 연합'이 성립하였다. 1479년에 코펜하겐 대학이 설립되었고, 프레데릭 1세(Fredrik I)에 의해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 프레데릭 1세가 죽은 후, 그 아들이며 루터파인 크리스찬 3세(Kristian III:1534~1559)의 왕위 계승이 거절되었으나, 유틀란드 귀족이 그를 지지하여 승인되었다. 이에 항거하여 수도와 말뫼의 시민이 카톨릭의 크리스찬 2세를 옹립하고 싸웠으나 패하였고, 1536년 수도가 함락되어 내란은 종식되었으며, 1537년 귀족 회의에서 루터 교회가 승인되었다. 3. 근대 절대 왕정(1588~1848) 크리스찬 4세(Kristian IV:1588~1648)의 치세는 중상주의 정책과 르네상스의 화려한 시대였고, 또한 칼마르 전쟁(Kalmariget)과 30년 전쟁에 참전한 국난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프레데릭 3세(Fredrik III:1648~1670)의 치하에서 1658년 스코네(Sk e) 지방을 잃었는데 이듬해 스웨덴군이 수도를 공격해 오자 왕은 시민과 함께 방어하였으며, 이를 기회로 국무원을 폐지하고 귀족의 권리를 제한하여 왕권의 세습제를 확립, 절대 정치가 시작되었다(1661). 1665년 `왕법'이 설립되어 계승법 등을 규정하였고, 18세기 후반의 덴마크는 중상주의를 기조로 영국, 프랑스 사이의 항쟁에서 중립 정책을 취하였다. 1814년에는 킬(Kiel) 조약을 체결, 노르웨이와의 동일 군주 연합에 종지부를 찍었고, 1834년 4지방 의회가 개설되어 슐레스비히(Schleswig)에서는 회의장을 중심으로 덴마크어, 독일어 투쟁이 전개되었다. 근대 산업 국가로 향한 길(1848~1915) 1848년 코펜하겐에 무혈 혁명이 일어나 절대 왕정이 무너지자, 킬에서도 독일 지향의 슐레스비히 홀슈타인(Holstein)주의자들이 임시 정부 수립을 선언하여 슐레스비히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두 차례의 전쟁 끝에 덴마크는 패배하여(1864) 슐레스비히를 잃음으로써 역사상 최소의 판도가 되었다. 프레데릭 7세는 1849년에 자유 헌법을 제정하였고, 그가 사망한 후 크리스찬 9세가 1863년에 즉위하여 글뤽스부르크 왕조가 시작되었다.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두 공국의 귀속 문제를 둘러싼 독일(프로이센)과의 전쟁 후 덴마크는 비록 패배했지만 곡물 농업에서 낙농업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하고, 나아가서 산업 혁명에 의한 수도의 도시화에 의해 덴마크는 근대 산업 국가로의 발전을 가져왔다. 1827년 이전에는 도시화로 인해 생겨난 노동자 계급의 정치 세력인 사회 민주당이 성립되었고, 1901년에 좌익당 내각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사회 입법에 의해 복지 국가의 기초가 세워지고 평화주의가 대외 정치를 규정하게 되었다. 4. 현대 1915년 헌법 개정에 의해 상·하원의 차별 철폐, 여성 참정권, 비례 대표제가 결정되었다.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후, 1920년 북부 슐레스비히가 주민 투표에 의해 덴마크에 복귀하여 현재 국가의 판도가 성립되었다. 2차 세계 대전중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으나 국경선은 유지되었고, 1953년의 헌법 개정으로 상원의 폐지, 여성 왕위 계승권을 인정함으로써 1972년에 여왕 마르그레테 2세가 왕위에 올랐다. III. 정치 1. 개관 덴마크의 현행 헌법은 이 헌법은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존속과 상원의 폐지를 목적으로 하여 종전의 헌법이 수정된 것이며, 입법권은 왕과 국회에 있다. 왕은 각료 회의를 주관하고, 행정권은 왕과 내각의 협의에 입각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며, 사법권은 법원에 속한다. 왕은 수상 이하 각료를 임명하고, 법령의 발포는 왕 및 1명 이상 각료의 서명을 필요로 한다. 2. 의회 덴마크 의회는 단원제이며 정원은 179석으로, 그 중 자치령 페로스, 그린란드에 각각 2석을 할당한다. 나머지 175석은 17개 선거구에서 비례 대표제로 선출되며, 선거권 및 피선거권은 18세 이상의 남녀에게 주어진다. 의원의 임기는 4년이고 의원 내각제는 헌법이 규정하고 있다. 국민은 행정에 대하여 `국회 옴부즈만(Ombudsman)'에 불만을 제소할 수 있다. 3. 정당 현황 1901년 의원 내각제가 확립된 후 1905년 좌익당에서 급진 좌익당이 분리되고, 하원에서는 급여 노동자의 사회 민주당과, 농민층의 좌익당, 자영업자와 산업 자본가의 보수 국민당 등으로 나뉘어 4대 정당 체제가 확립되었다. 덴마크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1973년 사회 인민당, 급진 좌익당이 대폭 후퇴하고, 신흥 진보당이 일약 제2당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0여 개 미만의 의석을 가진 군소 정당의 다당화 시대가 열렸다. 1980년대 전반에는 `네잎 클로버'라고 불리는 부르주아 세력의 4당 연립 정권이 10년에 걸쳐 행정을 담당했으나 이제는 사회 민주당이 중앙 민주당, 사회 자유당, 그리고 기독 인민당과 연계하여 다수 연합을 구성하였다. 사회 민주당:34.6% ― 69석, 사회 자유당:4.6% ― 8석, 보수 국민당:15.0% ― 27석, 자유당:23.3% ― 42석, 사회 국민당:7.3% ― 13석. 역사상 가장 장기 집권한 당은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사회 민주당이며, 덴마크 국민 10명 가운데 약 한 명은 정당에 가입되어 있다. 4. 정부 현 정부는 1993년 1월에 개편된 다수 연합이 구성하고 있는데, 폴 뉘룹 래스뮈센(Poul Nyrup Rasmussen:사회 민주당)이 수상으로 재임하고 있으며, 외무 장관직은 닐스 헬벡 피티어슨(Niels Helveg Petersen:사회 자유당)이 맡고 있다. 또한 다수 연합은 내각에 개발 원조를 담당하는 별도 부서를 두고 폴 닐슨(Poul Nielson:사회 민주당)을 장관직에 임명했다. 정부 정책은 국가의 예산 균형과 국가의 외채 삭감, 고용 증대를 이루기 위한 여러 방안에 대한 폭넓은 합의를 이루어 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민간 부문의 저축 증대, 민간의 부채 감소를 위한 세제 개편, 크로네(덴마크 통화)의 안정적 환율 유지, 현재 10%에 달하는 실업률 감소를 위한 인력 시장 및 교육 정책 등을 활용하고 있다. 정부의 수입원은 소득세(59%, 1990년 기준)와 소비세(33%)로 충당된다. 시정부에서 거둬들이는 소득세는 비례세이나, 연방 정부의 소득세에는 누진세를 적용한다. 전반적인 조세 부담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으로 48%(1990년 기준)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벌어들인 세금으로 정부는 사회 복지에 44%, 교육 14%, 기간 산업 11%, 보건 사업 11%, EC에 내는 개발 원조 및 기금 5%, 국방 4%, 교회 및 문화 3%, 경찰 및 법원 2%, 주택 관련 사업 2%, 그리고 일반 행정에 4%를 지출하고 있다. 5. 외교 이제까지 덴마크 정부의 기본 외교 노선은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UN(국제 연합) 창설 가맹국으로서 UN 활동에 협력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북부 유럽 여러 나라와 협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본 정책 아래 1960년에 콩고, 1964년에 키프로스에 평화 유지군을 파병하였으며, 걸프전 기간에는 UN군에 순찰선 1척을 파견하였다. 이제까지 3만 명의 덴마크 군인들이 UN군과 UN 정찰군으로 복무하였으며 현재 740명의 덴마크 군인이 UN에 복무하고 있다. 1952년에 북부 유럽 각국 의원을 구성원으로 하여 성립된 `북부 유럽 의회'에 참여하여 북부 유럽 각국과 군사와 경제를 제외한 실질적인 협력 활동을 벌였다. 1972년에는 국회가 EC에의 가맹을 141명의 의원의 서명으로 된 결의서에 의해 승인하고, 국민 투표에서 유권자 56.7%의 찬성표를 얻어 1973년 1월에 EC에 가입하였다. 6. 우리 나라와의 관계 덴마크는 대한 제국과 마지막으로 수호 조약을 체결한 국가로서, 1902년 7월 대한 제국 전권 대신 덴마크는 한국 전쟁 때 UN군으로 참전했으며, 병원선 유틀란디아 호를 파견해 의료 활동을 지원하였다. 현재는 산업·사회·문화면에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1975년 9월 코펜하겐 대학에 한국학과가 신설되었으며, 1960년대 이래 왕립 도서관의 동양학부(코펜하겐 소재)는 수천 권의 한국 장서와 많은 종류의 학술지를 구비하고 있다. 이따금 왕립 도서관과 국립 박물관은 공동으로 한국 문화 전시회를 개최해 우리 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1991년 6월 현재, 덴마크의 대한 수입은 2억 8645만 달러이고, 대한 수출은 2억 3616만 달러이다. IV. 경제 1. 역사적 배경 덴마크는 1864년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로 일어난 전쟁에서 패배한 후, 덴마크 왕의 영토로 독일인이 거주하는 홀슈타인과 주민의 과반수가 덴마크인이었던 슐레스비히 공작령을 잃고 그 지역들이 함부르크(Hamburg)의 시장권에 있었기 때문에 독일을 주요 무역 상대국으로 하는 덴마크의 경제적 기반은 끝났다. 1870년대에는 산업 혁명 시대를 맞이하여 식품을 중심으로 하는 주요 무역 상대국도 독일에서 영국으로 옮겨 갔다. 1866년에는 H.소네가 주창한 공동 조합 운동이 시작되었고, 1882년에는 공동 낙농 협회가 설립되어 농업 혁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운수 기술의 혁신으로 신대륙과 러시아로부터 값싼 대량의 곡물이 서부 유럽으로 유입되자, 덴마크의 곡물 중심의 농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후 농업의 주축을 낙농업으로 옮겨 대산업국인 영국을 시장으로 하여 버터, 계란, 베이컨 등의 생산에 중점을 두고 공동 조합 활동을 유용하게 활용하였다. 1940년대에 이르기까지 덴마크의 산업은 농업에 의존하였으나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공업이 병행되었다. 2. 최근의 산업 경향 덴마크는 오랫동안 자원이 전혀 없는 나라로 여겨져 왔으나, 석유와 천연 가스가 발견되면서 자체 수요를 충족시킬 뿐 아니라 1991년부터는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광물 자원이 없었기 때문에 덴마크인들은 국토의 3분의 2가량의 경작 가능한 토지를 일구고 바다를 항해하며 살아야 했으며, 천연 자원의 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숙련된 인력과 솜씨, 품질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하에 오늘날 덴마크 농업은 전 세계에 많은 양의 베이컨과 가공육을 제공해 주고 있으며, 자국 내 필요량의 3배 이상을 생산하고 있다. 또한 해안이 대부분 피오르드(Fjord) 형태이므로 천연항이 많아 수산업, 해운업 역시 산업의 주요 분야로 자리잡았다. 이 밖에 덴마크 자치령인 그린란드에서 잡히는 바다 표범을 이용한 모피 산업, 가공육의 공정 과정에서 쓰이는 기계류 등의 제조업과 선박, 냉동 장비, 엔진 등의 운송 산업이 발달했으며, 최근에 특히 첨단 전자 산업의 발달로 인해 선박 등을 위한 전자동 교각 제어 장치, 항공기 자동 착륙 시스템, 인공 위성 제어 시스템, 피부를 이용한 혈액 분석 장비 등이 생산되고 있다. 3. 경제 수준 화폐 단위는 덴마크 크로네(DKr)이고, 1994년 대 달러 환율은 100DKr = $ 635.23였다. 덴마크의 1996년도 GNP(국민 총생산)는 9957억 크로네이며 유아에서 연금 수령자에 이르기까지 1인당 국민 소득이 15만 8000크로네(2만 5500달러)에 이르러 EC 회원국 중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덴마크의 경제는 서비스업, 제조업, 금융업을 기초로 한 국영과 민영의 혼합 경제 체제이며, 수십 년 전부터 농업은 더 이상 덴마크 경제의 주축을 이루지 않게 되었다. 현재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의 서비스 분야가 전체 GDP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농업, 공업, 무역 및 수공업과 같은 생산 분야가 차지하고 있다. 확고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 덴마크는 1990년대 말 완성 예정인 유럽 경제·통화 연맹으로의 제3단계 및 최종 단계 과정으로 옮아 가는 데 필요한 제반 요건들을 충족시켜 왔으며, 현재 당면한 최우선 과제는 실업 문제이다. 4. 대외 무역 덴마크의 총수출액은 2528억 크로네이며 총수입액은 2150억 크로네(1994년 기준)에 달한다. 덴마크는 상대적으로 천연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외 무역 비중이 높으며, 이로 인해 덴마크 정부는 자유 무역 정책을 지원하고 있다. 상대 무역국을 살펴보면 서독, 영국, 프랑스 등의 EC 국가가 수출 49.3%, 수입 51.0%를 차지하고 있으며, 북구의 여러 나라는 수출 22.7%, 수입 22.9%를 차지하고 있고, 그 나머지는 러시아, 미국, 동유럽, 일본, 우리 나라 등의 나라들과 무역을 행하고 있다. V. 문화와 생활상 1. 언어 및 인종, 종교 덴마크의 공용어는 덴마크어이다. 계통적으로는 인도-유럽어족과 게르만어파 중 북게르만어군의 하나이며, 특히 스웨덴어, 노르웨이어에 가깝다. 그러나 덴마크어가 음성면에서 크게 변화했기 때문에 같은 북유럽인이라도 덴마크어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주민은 노르드계의 인종으로 북부 독일 및 스칸디나비아 제국과 동질성이고, 금발과 푸른눈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유틀란드 반도 남부에 정착하고 있는 독일 민족이 유일한 소수 민족이다. 총인구는 덴마크인의 평균 수명은 여자 78세, 남자 72세이며, 출생률은 수년 동안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최근에는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머지않아 덴마크는 연령 분포에 있어 문제를 겪게 될 것이다. 즉, 금세기를 지나면서 노령 인구는 점차 증가할 것이지만 상대적으로 이들을 부양할 경제 활동 인구는 줄어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덴마크 국민 100명 가운데 92명이 루터 복음 교회 신자이며, 나머지 8명은 각기 다른 종교를 갖고 있다. 2. 생활상 덴마크 사람들은 근면하다. 아이들도 자신의 용돈을 벌어 쓰려고 할 뿐만 아니라, 현재 7~14세 사이의 아동 가운데 26%가 신문 배달이나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덴마크 일반 가정의 지출 내역을 보면 납세 후 소득 중 주거비 21%, 식음료 및 담배 20%, 교통 및 통신비 16%, 레저 및 오락 장비, 교육비 9%, 난방 및 전기료 7%, 가사 용품 구입비 7%, 피복비 6%, 주택 관리비 3%, 의료 및 치료비 2%, 기타 9%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자료에서 나타나듯이, 전체 지출의 약 30%가 주거 관련비이다. 덴마크의 주거 수준은 높은 편으로 주거 면적이 1인당 평균 44m2이며, 전체 가구의 84%가 자체의 화장실, 목욕탕 및 중앙 난방 시설을 갖추고 있다. 1990년 전체 100가구 중 57가구가 자기집을 소유하고 있으며, 10가구가 여름 별장, 58가구가 자가용, 67가구가 세탁기, 27가구가 가정용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다. 3. 여성의 지위와 결혼관 여성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덴마크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남성과 동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덴마크 여성들이 투표권을 갖게 된 것은 1915년의 일이다. 일찍부터 남녀 동일 임금 원칙이 도입되었으며, 특정한 한쪽 성에 편향한 광고는 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해 놓고 있다. 점차 인력 구성에 있어 여성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데, 현재 고용 인구 가운데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남자 100명당 76명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덴마크와 그 외 스칸디나비아국들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집 이외의 장소에 아이들을 맡길 수 있는 탁아 시설을 쉽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90년 현재 3~6세까지의 아이들 가운데 71%가 탁아 시설에 맡겨지고 있다. 최근에는 고등 교육을 받으려는 젊은 여성들의 수가 늘고 있어 인력 시장에서 여성들이 차지하는 역할은 약간 둔화되었다. 최근 통계 자료에 따르면 남성의 가사에 대한 기여도가 점차 증가하고 있는데 이것은 덴마크에서의 성 역할이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덴마크는 1960년대 중반 이후 결혼율은 감소 추세인 반면에, 이혼율은 1970년대 이후부터는 점차로 증가하고 있다. 결혼 연령도 늦어지고 있으며 남녀 관계에 있어서 공식적인 혼인 서약이 없는 비공식적 관계가 더욱 일반화되고 있다. 동성간의 결혼이 1989년부터 법적으로 허용되면서 1991년 초에는 1436명이 동성간 결혼을 허가받았다. 이들 가운데 1030명은 대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4. 인물 수세기에 걸쳐 많은 덴마크인들이 과학과 문화에 중대한 공헌을 해 왔다. 티코 브라헤(Tycho Brahe:1546~1601)는 카시오피아 성좌에서 새로운 별을 발견하였다. 이 발견을 기초로 하여 케플러(Kepler)는 태양계 행성 운동의 법칙을, 나아가 뉴턴(Newton)은 만유 인력의 법칙을 발견해 내었다. 니콜라우스 스테노(Nicolaus Steno:1638~1686)는 지질학의 기초를 확립하였으며, 닐스 핀센(Niels Finsen:1860~1904)은 광선을 이용한 피부병 치료법을 소개하였다. 닐스 보어(Niels Bohr:1885~1962)는 원자력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 중 하나이며, 주기계에 대한 정의를 내린 사람이기도 하다. 라스머스 라스크(Rasmus Rask:1787~1832)는 비교 언어학의 기초를 확립했고, N. F. S 그룬트비그(Grundtvig:1783~1872)는 많은 나라들이 도입한 바 있는 민속 고등 학교 운동을 확립하였다. 유명한 키에르케고르(Kier Kegaard:1831~1855)는 실존주의의 시조이며, 한스 크리스챤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1805~1875)은 그가 지은 동화로 세계 80여개국의 어린이와 어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카렌 블릭센(Karen Blixen:1885~1962)은 불후의 명작 『아프리카에서』를 집필하였다. 회화 부문에서는 비조형 부문의 세계적인 화가로 인정받고 있는 아스거 얀(Asger Jorn:1914~1973)이 있고, 덴마크풍의 회화파인 스코겐(Skogen) 화가들과 핀부어느(Fynboerne)들은 점차 많은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다. 영화 제작자 가운데는 칼 드라이어(Carl Dreyer)의 명성이 높다. 그는 불후의 흑백 영화 `쟌다크'를 제작했으며, 연기자로는 오스카 상을 수상한 `바베테스 페스트(Babbette's Feast)'의 카브리엘 악셀(Cabriel Axel)이나 `정복자 펠레'의 빌르 아우구스트(Bille August)를 들 수 있다. 건축 분야에서는 얀 윗존(Jorn Utzon:1918~ )이 유명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를 건축했으며, 피에트 헤인(Piet Hein:1905~ )이 창시한 대규모 타원형 건축 공법은 수많은 건물과 올림픽 스포츠 스타디움 그리고 응용 미술에 도입되었다. 최근에 이룩한 것들 가운데 가장 놀라운 현대의 건축물의 하나는 파리 라데팡스(La D'efense) 거리의 아치길로서 거기에는 덴마크의 건축가 요한 폰 스프레켈센(Johan Von Sprechelsen:1929~1987)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5. 언론 매체 국영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국은 방송 광고 유치에 있어 일정한 제약을 받는 가운데 다른 여러 민간 채널들과 경쟁하고 있다. 전국적인 텔레비전 방송 채널 2개와 라디오 방송 채널 3개 이외에 85개의 지역 텔레비전 방송국과 269개의 지역 라디오 방송국이 있다. 덴마크 전체 230만 가구 중 63만 3000가구가 가정에서 각종 모니터링과 은행 거래 및 기타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는 양방향 통신이 가능한 텔레비전 및 라디오 유선 전송용 혼성 네트워크에 가입되어 있다. 또한 46만 5000가정이 위성 텔레비전 방송을 수신할 수 있는 안테나를 설치하고 있다(1989년 기준). 또한 연간 1만 1000종의 책이 출간되고 있으며 47개의 일간지가 발간되고 있다. 6. 대중 문화 및 스포츠 연극계는 일정의 공공 보조금을 받고 있으나 무엇을 공연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그들이 결정한다. 덴마크 로얄 발레단은 세계적 수준의 발레단으로 1748년 코펜하겐 왕립 극장의 개설과 함께 발족되어서, 1829년 오규스트 부른노빌이 이 발레단을 맡은 이래 반세기 동안 파리 오페라 극장의 발레단에 필적할 만한 발레단으로 성장하였다. 에릭 블륜, 피커 마친스, 페터 샤프스 등 세계적인 남성 무용수가 이 곳에서 배출되었다. 덴마크의 국민 스포츠라면 축구를 꼽을 수 있겠으나 수영, 보트 타기, 사이클, 전국 횡단 달리기 등도 역시 인기가 높다. 아침이나 저녁에 조깅을 즐기는 사람들의 수도 점차 늘고 있다. 덴마크는 격투, 요트, 승마, 사격, 수영, 보트 및 사이클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바 있다. 7. 환경 보호 덴마크는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덴마크에는 원자력 발전소가 없고, 또한 어느 누구도 지을 수 없게 되어 있다. 그 대신 풍력이나 다른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덴마크에서 만든 풍력 터빈은 전 세계 풍력 발전 단지들로 수출되고 있다. 재활용에 대한 덴마크 국민들의 관심 또한 높은데, 종이 회수율이 전체 종이 생산 원료의 69%(1990)를 충당하고 있을 정도이다. 전체 쓰레기 가운데 약 20% 가량이 일반 가정에서, 50%는 기업에서, 그리고 나머지 30%는 에너지 생산 및 정화 시설에서 나온다. 이 가운데 약 5분의 1을 재활용하고 있으며 5분의 1은 소각, 나머지 5분의 3은 매립한다. 정부에서는 시당국들이 유리병이나 종이를 합리적으로 회수하도록 하는 규정을 제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기 오염을 막기 위한 사업이 체계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코펜하겐에서 배출되는 아황산 가스의 양은 지난 20년 동안 연간 45만 톤에서 25만 톤으로 감소하였다. 이는 지역 난방의 사용을 늘리고 에너지 보존을 위한 세금 마련 및 오일과 가스에 함유된 납 성분을 줄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처럼 덴마크에서는 일반 대중과 기업 모두가 환경 보호에 앞장서고 있으며, 기업에서는 수질 정화, 화학 폐기물 처리 및 가스 정화용 첨단 기기를 개발하여 세계로 수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