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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목 : 국보 제70호 분류 : 기록유산 / 전적류/ 목판본/ 관판본 수량 : 1책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전성우 관리자 : 전성우 이 책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한문해설서이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구성을 보면 총 33장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하여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해례를 26장 51면 3행으로 하여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1자 내려싣고, 그 끝에 ‘정통 11년’(1446)이라 명시하고 있다.『세종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책에서 서문과 함께 정인지가 근작(謹作)하였다는 해례를 비로서 알게 되었다. 또한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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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
안녕하세요. todaud91 입니다. 백과사전 참조하시고 아는대로 알려드림
1446년에 집현전 학사 등이(정인지) 만든 것이고요.
원리가 이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한글은 각 글자 하나 하나에 뜻이 담겨있어. 매번 같은 음이어도 뜻이 다르지만
한글은 모음과 자음이 뜻없는 글자가 모여서 하나의 단어가 형성되는 것이 원리입니다. |
요약
조선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을 1446년 정인지 등이 왕명으로 설명한 한문해설서. |
설명
五聲 | 牙 | 舌 | 脣 | 齒 | 喉 |
五行 | 木 | 火 | 土 | 金 | 水 |
五時 | 春 | 夏 | 季夏 | 秋 | 冬 |
五音 | 角 | 徵 | 宮 | 商 | 羽 |
五方 | 東 | 南 | 中央 | 西 | 北 |
자형 | 상형내용 | 발음상태 | 소리(聲) |
ㆍ | 天圓 | 혀를 옴츠림(舌縮) | 깊음(深) |
ㅡ | 地平 | 혀를 조금 옴츠림(舌小縮) | 깊지도 얕지도 않음(不深不淺) |
ㅣ | 人立 | 혀를 옴츠리지 않음(舌不縮) |
출처 : 야후 백과사전
그때 집현전의 신하인 최만리가 대표가 되어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줄거리로 새 글자 만들기를 반대하는 상소(1444)를 했다. (최만리는‘역사의 죄인’인가?)
첫째, 대대로 중국의 문물을 본받고 섬기며 사는 처지에 한자와는 이질적인 소리 글자를 만드는 것은 중국에 대해서 부끄러운 일이다.
둘째, 한자와 다른 글자를 가진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티베트) 등은 하나 같이 오랑캐들뿐이니,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은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일이다.
셋째, 새 글자는 이두보다도 더 비속하고 그저 쉽기만 한 것이라 어려운 한자로 된 중국의 높은 학문과 멀어 지게 만들어 우리네 문화수준을 떨어지게 할 것이다.
넷째, 송사에 억울한 경우가 생기는 것은 한자를 잘 알고 쓰는 중국사회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며, 한자나 이두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관리의 자질에 따른 것이니 새 글자를 만들 이유가 되지 못한다.
다섯째, 새 글자를 만드는 것은 풍속을 크게 바꾸는 일인만큼, 온 국민과 선조와 중국에 묻고 훗날 고침이 없도록 심사 숙고를 거듭해야 마땅한데, 그런 신중함이 전혀 없이 적은 수의 사람들만으로 졸속하게 추진하고 있고, 상감은 몸을 헤쳐 가며 지나친 정성을 쏟고 있다.
여섯째, 학문과 수도에 정진해야 할 동궁(문종)이 인격 성장과 무관한 글자 만들기에 정력을 소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세종 임금은 이에 대해서 세세히 답변하지는 않고, 설총이 백성의 글자 생활을 돕기 위해 이두를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한글도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탐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만드는 중대한 나랏일임을 먼저 밝히고, 다만 넷째 의견에 대해서 사리를 모르는 속된 선비의 생각이라고 비판하고,
여섯째 의견에 대해서 한글의 중요함에 비추어 동궁이 관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답변했다.
세종 임금은 당신 나름으로 신중하게 다듬기를 계속하고 신하들과 함께 몇 가지 문헌을 한글로 만드는 실용의 시험을 거쳐 세 해사 지나서야 [훈민정음(1446)]을 통해 반포했다. 이 책의 머리에 실린 짧은 글을 통해서 세종 임금은 중국 것에 사로잡히지 않은 곧은 줏대와 백성들의 어려움을 벗겨 주고자 하는 어진 마음과 단지 삶의 편의를 위해 새로운 글자를 만든다는 실용주의 정신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우리 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에 어진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담아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놓으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깨우쳐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國之語音異乎中國 與文子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而 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便於日用耳
-발췌문(김정수(1994), 한글의 역사와 미래, 열화당 p17-
훈민정음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모두 28자였으나, 그중 ‘ ㆍ( 아래아)’,‘ ㆆ( 된이응)’,‘ ㅿ( 반치음)’,‘ ㆁ(옛이응)’ 이 사라지고 지금은 24자만 씁니다.
ㅿ = 'ㅿ' 는 영어의 'z' 발음으로, 'ㅅ'의 유성음에 해당합니다, 흔히 '반치음'이라고 부릅니다. 소릿값은 [z]. 'ㅅ'과 'ㅈ'의 중간음 정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 발음을 사용하지 않게 되어 없어졌습니다. 일본어에도 이 발음이 있는데, 간토대지진이 났을 때,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돌자, '10원50전'을 일본어로 발음시켜서 [z]발음을 못하는 자를 조선인으로 지목하여 학살했던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ㆁ = 'ㆁ' 은 흔히 '옛이응'[옌니응]이라고 부릅니다. 소릿값은 [η]. 현대어의 받침 'ㅇ'과 같습니다. 현대 국어의 표기에서는 '아버지'와 '강'의 'ㅇ'이 똑같이 쓰이지만 그 소릿값은 완전히 다릅니다. 따라서 '아'의 'ㅇ'은 자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단지 글자의 모양을 갖추기 위한 부호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 자음 'ㅇ'이라고 하면 '강, 몽, 낭' 등의 'ㅇ'을 가리킵니다.
ㆆ = ‘ㆆ’ 을 흔히 '여린히읗' 또는 '된이응'이라고 부릅니다. 한자음을 표기하기 위해 만든 글자로, 소릿값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세종, 세조 때까지 쓰이다가 금방 없어진 글자입니다.
다시 말해 ‘ㆆ’ 은 훈민정음 창제시점에도 이미 음가가 없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를 위해 사용했던 것입니다.
동국정운이란, 한자가 오래 전에 들어와 발음이 변화하여 원래 중국식 발음과 차이가 있으므로 이를 교정하기 위해 편찬한 것입니다.
예컨대 '중국'을 "듕귁"으로 표기하는 것입니다.
ㆍ = 'ㆍ' 는 발음기호 [Λ] 로 '아'와 '어'의 중간발음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영어의 [Λ]발음아래아(ㆍ) 발음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구분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사라지게 되었습니다.(아직 제주 방언에는 아래아(ㆍ) 발음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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