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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6개국 여행
조 신 호
제1일 2010년 10월 27일(월) 인천- 독일 프랑크푸르트
여행 후기는 늘 그렇듯이 삶의 교과서이다. 이번 여행기에는 중간 중간에 써둔 몇 편을 시를 넣어두었다.
12시 30분, 아시아나 OZ 541편으로 이륙한다. 보잉777-200의 262석이 만선이다. 인천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8,552km 거리다. 평균 800km/h 정도 날아가면 약 10시간 반 정도이면 착륙할 수 있다.
비행기는 인천공항을 이륙하여 <서해 - 베이징 남동쪽 평야지대 - 산악 황무지 - 사막 황무지 - 몽골 울란바트르 동쪽 - 러시아 바이칼 호수 남서단 - 크라스노야르크 - 옴스크 북동쪽 - 리투아니아 빌리무스 남쪽 - 폴란드 영공>을 지나서 독일 프랑크쿠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프랑크푸르트의 역사는 로마 제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인들이 이곳에 터전을 잡았고 서(西)게르만족의 한 부족인 프랑크족이 로마인들을 몰아내고 이곳에 정착하게 되어 794년 “Franconovurt” 즉 프랑크족의 도시(City of Franks)라는 명칭으로 시작되어 오늘날 프랑크푸르트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대관식이 이곳 대성당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등 프랑크푸르트는 중세기에도 유럽의 중심도시로 기능하게 된다. 대관식 후에 연회가 열렸던 곳이 시청사로 사용되었던 뢰머 (Römer)인데 이는 로마라는 말이다.
'프랑크푸르트' 뒤에는 항상 '암 마인'이라는 말이 붙는다. 즉 'Frankfurt am Main' 이라고 표현한다. 때로는 암마인을 줄여 a.M. 혹은 a/M이라고 표기 한다. 자신의 지역에 대한 자존심이 강한 독일 사람들에게 암마인이라는 말은 큰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베를린 근처의 '프랑크푸르트 암 오데르(Frankfurt am Oder)' 라는 도시와 구분해 주기 위함 이다.
공항에 내려 체코 운전기사 마틴의 버스에 오른다. 마인 강을 건너 <길손>이라는 한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할리데인 익스프레스(Holiday Inn Express) 호텔에 첫날밤을 묶었는다. 독일 호텔의 방과 욕실의 스위치가 어린이 손바닥만 하다.
제2일 9월 28일(화) 독일 프랑크푸트 - 독일 아알렌 트레파흐
하늘이 온통 흐리고 가는 빗방울이 떨어진다. 안개-비-흐림 이것이 독일의 전형적인 날씨라 한다. 그래서 철학자가 가장 많이 배출되었다 하니 그럴 법하다.
3번 고속도로를 타고 버스가 달린다. 옥수수밭, 초지(草地), 말끔하게 갈아놓은 빈 밭, 그리고 울창한 숲들이 차장에 지나간다.
남동쪽으로 120km를 달려가서 오늘의 첫 번째 목적지, 뷔르츠브르크(Würzburg)에 도착했다. 뷔르츠부르크는 운하가 있는 마인(Main) 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켈트족의 마을과 로마군의 주둔지가 있었던 이곳은 704년 “비르테부르흐”로 처음 기록되었다. 741년 장크트 보니파티우스가 이곳에 주교관구를 세웠으며 12세기까지 주교들이 프랑켄 동부지역에 대한 공작의 권위를 갖게 되었다.
주교들의 권력에 대항해 연이어 반란이 일어났으나, 1400년 시민들의 항복으로 끝났다. 율리우스 주교가 통치하면서(1573-1617) 발전했고, 1582년 그가 세운 뷔르츠부르크대학교의 뢴트겐이 X선을 발견했다.
3000년동안 뷔르츠부르크를 지켜온 마리엔베르크 요새(Fsetung Marienburg)에 올라 안쪽을 돌아보고 아름다운 꽃이 가꾸어진 정원에서 시가지를 조망했다. 이 성은 B.C. 1000년경에 처음 세워졌다가 1200년 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고쳤다. 1253년부터 1719까지 주교의 주거지로 사용되었던 역사와 함께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성은 1600년대에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으로 재건되었고 관광객의 시선을 끄는 우물사원에는 깊이가 104m나 되는 우물이 있다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시내로 내려와서 바로크풍의 왕궁 레지덴츠(Residenz)의 아름다운 정원을 둘러보고 다시 길을 떠난다. 여행이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 길을 떠나는 것, 새로운 목적지에 대한 기대를 깃발처럼 펄럭이며 바람처럼 구름처럼 가는 것이던가?
다시 길을 떠나 80km 남쪽에 있는 로텐브르크(Rothenburg)로 발길을 향했다. 이곳 뷔르츠부르크에서 남쪽 국경 퓌센(Füssen)까지 7번 도로, 약 400Km 여정(旅程)을 “로맨틱가도(Romantishe Strasse)”라 한다. 중세의 성(城)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로텐부르크, 그리고 퓌센의 노인슈반스타인(Neuschwanstein)의 절경까지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길을 달린다.
철도가 가장 발달한 독일에서 철도의 가장 적게 받았기 때문에 중세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중세의 보석’으로 호평을 받는 고장이다.
로텐부르크 성 남단의 동쪽 문으로 들어가서 북쪽으로 관통하는 도로를 걸으며 고풍 스런 거리와 건물, 상점을 둘러본다. 시청 앞 광장에 관광객들이 북적거린다. 시청사 북서편 골목에 있는 이곳의 명물 성야곱 교회는 보수 공사 중이다. 북쪽 끝 수란렌 광장 동편에 있는 골든 로쉐(Goldene Roʃe)라는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는다. 북쪽 성벽을 올라가서 통로를 걷는다. 성 밖을 내려다보면서 중세 그 무렵 어떤 무기로 적의 침공을 방어했는지 궁금했다.
간다
독일 남부 뷔르츠부르크에서
로텐부르크를 지나 국경 퓌센까지
로맨틱 가도(街道)를 달리면서
우리가 탄 버스가 힘차게 달려가고
초가을 노랑 붉은 단풍이 물들어가고
고속도로 승용차 트럭들도 가고
한국 가요 씨디가 계속 돌아가고
강물이 흘러가고 구름이 가고
시간이 가고 하루가 저물어 가고
시간이 갈수록 모두가 시장해 가고
지구가 돌아가고 세월이 가고
우리 모두 조금씩 나이 들어가고
간다, 간다, 속절없이 간다.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
사랑도 가고 미움도 가고
원망도 가고 슬픔도 간다.
로텐부르크를 출발하여 다시 남쪽으로 발길을 재촉하여 아알렌-트레파흐(Aalen-Treppach)라는 시골 마을, 정확히 말해서 트레파흐의 뢰머(Römer) 호텔에 도착했다. 이곳은 로텐부르크와 남쪽 울름(Ulm)의 중간 지점이다. <아알렌-트레파흐>라는 지명은 한국의 <경산시-용성면>과 같은 방식의 표기이다. 아알레 지역은 기원전후 이곳 게르만 족의 마을 리메스(Limes)와 로마제국의 국경이었다. 그 당시에 쌓은 성벽이 2005년에 유네스코문화유산(Weltculturerbe)로 지정되었다. 우리가 머물었던 호텔 뢰머(Römer)가 바로 “로마”라는 뜻이다. 객실에는 LG TV가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제3일 9월 29일(수) 독딜 아알랜 트레파흐 - 오스트리아 인스브르크
버스가 7번 도로를 타고 남쪽 퓌센으로 출발한다. 차창에 비치는 낭만(浪漫)의 길, 로맨틱 가도(街道)답게 농촌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어제에 이어서 김일헌선생이 돌발 퀴즈를 시작하여 우리 모두를 재미있게 한다.
도중에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린다. 휴게소 안의 화장실은 2유로이고 주유소 화장실은 1/4 가격 50센트였다. 오줌 잘못 누다가 3200원을 낭비하게 되니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고약한 인심이다. 얼마나 달려왔을까? 평지와 작은 구릉의 농촌 풍경이 사라지고 눈앞에 설산(雪山) 봉우리들이 그림처럼 다가온다. 퓌센에 접어들어 곧장 백조의 성(Schlob Neuschwanstein)으로 갔다.
퓌센 시내에서 4km 떨어진 곳에 슈반가우 숲이 펼쳐지는데, 그 숲 한자락에 월트 디즈니가 디즈니랜드의 성을 지을 때 모델로 삼았다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있다. 이 성은 중세 기사 전설에 매료된 바이에른 국왕의 루드비히 2세가 1869년에 시작하여 17년 후에 완성이 된 궁전이다.
뮌헨에서의 왕궁 생활이 지겨웠던 루드비히 2세가 전설 속의 성을 꿈꾸며 1869년부터 짓기 시작한 성이다. 바그너를 너무나 사랑했던 루드비히 2세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서 기사가 백조를 타고 사라지는 장면을 좋아해서, 성의 이름을 노이슈반슈타인(Neuschwanstein)으로 지었다. 이 어마어마한 성을 지으면서 동시에 다른 성들도 몇 개씩이나 함께 지었기 때문에 엄청난 빚은 계속해서 불어났고, 루드비히 2세는 정신병자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바그너에 대한 애정 때문에 성 곳곳에 바그너의 오페라를 표현한 벽화들을 그려두기까지 했지만, 이 성에 살게 된지 반 년 만에 폐위를 당해 결국 이 성에서 단 한 번도 바그너를 만나지 못하고 요양소에 보내져 사흘 만에 죽은 채 발견되었다.
시내로 들어와서 “Asian Restaurant Kim Quy"라는 중국식당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떠난다. 식당 맞은 편 2차선 도로 건너편에 여러 개의 맷돌 분수가 인상적이다. 7, 8미터 높이의 직사각형 돌기둥의 상단부가 물의 힘으로 맷돌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다.
퓌센은 오스트리아와 국경 도시이다. 독일의 7번 도로 표시가 오스트리아의 178번으로 바뀌면서 국경을 넘어선다. 국경 표시가 없다. 버스가 알프스 설산 계곡을 구불구불 돌면서 페른국경고갯길(Fernpaß Bundesstraße)을 넘어간다. 좌우 설산에 치솟은 알프스의 절경, 그 파노라마가 굽이굽이 계속되었다. 고개를 넘어 오스트리아 티롤 지역의 아름다운 산촌이 이어진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맑고 청순한 눈망울로 저 마을 어디선가 손을 들어 인사하는 것 같다.
버스가 E60 4차선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오른편으로 인(Inn)강도 함께 흘러내린다. 인스부르크는 오스트리아의 가장 빼어난 자연 경관을 가진 티롤지방의 주도로써 인(INN)강을 잇는 다리라는 뜻인데 “알프스의 장미”라고도 불리어진다. 인구 13만명의 소도시이지만, 1964년과 1976년 동계올림픽을 두 번이나 개최했다. 알프스 유럽의 문화와 행정의 중심지로 대학생 인구만 3만 명이나 되는 교육의 도시이기도 하다.
3000m급의 알프스 산들은 천혜의 자연경관으로 둘러 싸여 있어 각종 레포츠의 중심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화적 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해발 574m의 인스브룩은 과거 로마시대부터 이탈리아와 독일로 가는 교통의 중심점이다.
인스부르크 구시가지로 들어가서, 현지 가이드 김동하씨의 안내에 따른다. 합스부르크 왕가 막시밀리안 황제의 결혼식을 계기로 도금한 2657장의 금박으로 지붕을 만든 “작은 황금 지붕(Goldenes Dachl)을 구경하는 엄청난 관광객들, 서양사람들이 더 많았다. 골목사이로 멀리 남쪽 아득히 눈 덮힌 하펠레카르(Hafelekar, 2334m)산 아래 스키장 식당 건물이 햇살에 빛나고 있다.
인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Maria Theresiastrasse)의 중심에 있는 안나기념탑(Annasaule)까지 북쪽으로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왕궁, 그리고 주교좌 성요셉 성당(Dom st. Jacob)을 두루 돌아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은 가벼웠으나 몸이 무겁고 피곤했다.
성요셉 성당에는 마틴 루터의 친구, 루카스 크라나하(Lukas Cranach)가 그린 “구원의 성화(Maria Hilf)” 제대 중앙에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 성모 마리아의 서민적 모습이 완연한 이 그림은 로마 성베드로 성당에 있는 피에타 조각의 원본이라 한다.
버스가 인스부르크 북쪽 산길을 구불구불 올라간다. 오늘 밤 잠들 곳, 올림피아 호텔이다. 동계 올림픽 대활강 경기가 있었던 현장이다. 지도를 보니 인스부르크의 9개 스키장 중에서 3번으로 표시된 이곳은, 시내의 남서쪽 악사머 리줌(Axamer Lizum) 해발 1564m 산골이다.(호텔 여주인은 호텔이 해발 1700m에 있다고 했다.)
호텔 시설이 좀 불편했지만 남쪽 창밖에 하늘을 찌를 듯한 칼크퀘겔(Kalkkögel) 산맥(최고봉 Slip Seesitze 2804m)의 설산 연봉(連峰)들의 정기를 받으며 편안하게 잠들었다.
목소리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해발 1700m 올림피아 호텔
동계올림픽 활강경기 선수들 묶었던
좀 오래되고 비좁은 객실에 들어서자
일행들이 이상하다 불편하다 웅성거렸다.
그러더니,
얼마가지 않아서 모두가 조용해졌다.
창 밖에 하늘 찌를 듯 치솟은 설산(雪山)들
알프스의 영봉(靈峰)들을 바라보며
묵언 수행이라도 하는지 고요했다.
산에 왔으니
산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울림에 흐르는 침묵의 감로수로
먼 여정, 세상 갈증을 씻으라! 했는지
나그네들이 모두 나직히 감탄하며
하룻밤 행복하게 잠들었다.
아침 하늘
눈 덮힌 칼크퀘겔(Kalkkögel) 산맥에
눈부신 비단결 안개가
살며시 휘감겨 있었다.
제4일 9월 30일 (목) 오스트리라 인스브르크 - 잘츠브르크
인스부르크를 떠나 잘츠부르크까지 동쪽으로 약 200km 이동한다. 고속도로를 약 20km 달리다가 바테스(Wattens)에 위치한 Swarovski 본사에 들어섰다. 전 세계에 널리 크리스탈 공예로 그 명성을 떨치는 전시장을 구경하며 쇼핑하는 재미도 있었다.
E60번 도로를 타고 독일 동북 방향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버스가 접어들었다. 이미 독일 땅에 들어온 것이다. 오른편(남쪽)은 알프스 산악지대이고, 왼쪽 저 멀리까지 독일의 남부지역 평지가 펼쳐진다. 구릉을 지나 제법 높은 고개를 넘으니 왼쪽에 호수가 보였다. 독일 로젠하임(Rosenheim) 동쪽 침호수(Chiemsee)였다. 호수 속 섬에 그림 같은 집들이 멀리 보였다. 그 호수 숲 속에서 하룻밤 묵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달렸다. 나중에 들으니 그 섬에 왕궁도 있다고 했다.
모차르트의 고향, "소금의 성"이라는 뜻을 지닌 잘츠부르크에 도착하여 "세 마리 토끼(drei Hasen)"라는 식당에 들려 현지식 점심을 먹었다. 시내로 들어가서 신시가지 관광버스 주차장에서 현지 가이드 한수경의 안내를 받게 되었다. 그녀는 피아노를 전공하며 대학원 논문을 쓰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목소리도 좋고 말솜씨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미라벨 정원에 들어섰다.
꽃으로 잘 조성된 미라벨 정원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어서 더욱 유명하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는 여주인공 마리아가 뒷 편 정원에서 아이들과 도레미 송을 부른 곳이다. 이 저택은 지금은 미국인 소유이고, 영화의 실제 모델인 폰 트랩 대령과 마리아는 1947년과 1987년에 각각 이 세상을 떠났다.
미라벨 정원 내 미라벨 성은 1606년 볼프 디트리히(Wolf Dietrich) 대주교가 사랑하는 여인 살로메(Salome von Alt)를 위해 건축한 것으로 훗날 모짜르트가 당시 주교를 위해 이곳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성직자는 결혼 할 수 없다는 법을 어기고 살로메와 사랑에 빠졌던 디트리히 대주교는 결국 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1617년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 후 살로메도 성에서 쫓겨나게 된다
1730년 디트리히 주교의 사망 후 과거의 기억들을 지우기 위해 궁전과 정원을 새롭게 단장 하였으나 화재로 소실되고 1818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미라벨정원(Mirabell Garten)을 나와서 조금 걸어가면, 길 건너편에 모차르트가 25세까지 살았다는 단아한 건물이 보인다. 잘츠부르크 아하(강)를 건너 구시가지로 들어가는데, 다리를 건너기 직전 오른편에 마에스토로(Maestro) 헬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08-1989)의 생가 정원에 서있는 그의 동상을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시원스럽게 흐르는 강물을 가로 지르는 마카르트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구시가지 좁은 길에 들어가서 하나하나가 예술품 같은 간판의 거리를 둘러본다. 그 중간 지점 5층 건물의 4층이 모차르트가 태어난 집이라고 커다랗게 표시 되어있었다. 안내자는 모차르트가 젊은 나이에 죽은 이유는 비밀조직 프리메이슨에 가입되어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지들을 위한 노래”를 작곡하여 조직에 반감을 주었을것이라고 추측했다.
거의 수직으로 올라가는 궤도기차를 타고 잘츠부르크(Festung Hehensalzburg) 성에 올라갔다. 미라벨 정원에서 멀리 남쪽 산위에 하얀 성벽으로 보이던 성에서 내려다보니 북쪽으로 잘츠부르크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이 성에 300여명이 거주하면서 우물이 없어서 빗물을 저장하여 생활용수로 사용했다. 성 내부에는 대주교가 거쳐하던 사치스러운 황금의 방과 의식의 방, 고문기구가 있는 방뿐만 아니라 200개의 파이프로 구성된 오르간도 있다고 하지만, 인형극 소품과 감옥으로 사용했던 곳을 구경하고 나왔다. 보리수 한 그루와 우물이 있는 후원으로 나와서 “성문 앞 우물가에 서있는 보리수...”라는 가곡을 합창했다. 그곳이 바로 슈베르트가 그 가곡을 작곡한 현장이라 했다.
성 뒷면에서 내려다보면 건너편 왼쪽은 독일이고, 오른편이 오스트리아이다. 암염(巖鹽)과 붉은 대리석 생산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잘츠부르크, 인구 15만명에 연간 관광객 4천만 명을 맞이하는 고장이다. 날이 저물 무렵 가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거리에 내려 티엔츄(天廚, Tien Tsu)라는 식당에서 한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제라늄처럼
독일, 오스트리아 여행하면서
집집마다 창가에 걸어놓은
붉은 제라늄 꽃이 아름답다.
벌레도 방지하고 보기에도 좋으니
그야말로 일거양득이다.
그런데
이 동네에 그런 게 또 하나 있지!
거리에도 건물 내에도
우물라우트가 팍 찍힌 독일어 하나만 써놓고
독일어 모르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거
꼭 제라늄 같은 걸 아시는가?
독일어 하나만 걸어 놓으면
잉크 절약하고 약도 올리지만
약 올리는 재미가 더 크다는 거
그게 더 재미있지, 손님 배려보다
우리 한국에는 모국어 밑에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읽고 쓰는 영어와
한자까지 써서 중국인 일본인
독일어 사용하는 너희들도
잘 읽고 다니지!
잘츠부르크 남쪽 근교 레온하드(St. Leonhard) 마을에 있는 레온하더호프(Leonharderhof)라는 펜션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창밖에 검은 숲과 높은 산이 마음을 상쾌하게 씻어주었다.
제5일 10월 1일 (금)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 빈(Wien)
잘츠부르크에서 버스를 타고 잘쯔캄러굿(Salzkammergut)으로 간다. 이곳은 잘츠부르크 남동쪽으로 펼쳐지는 호수와 설산의 고장이다. 수 많은 호수와 2000m 알프스 영봉들이 점점이 조화를 이루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독일어로 잘쯔(Salz)는 소금, 캄머(kammer)는 황제(국가)의 보물 창고, gut(굿)은 소유지란 뜻이다. 즉, <황제의 소금 보물창고지역>이다.
이곳은 빈이나 잘쯔부르크 처럼 도시가 아니라, 1000m 이상의 2, 3000m 알프스 산들과 76개의 호수가 모여 있는,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산맥의 백미여서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오는 곳이다. 계절에 따라 다양한 관광거리가 풍성하다. 아름다운 풍경과 일년 내내 스키를 즐길 수 있고, 요트, 래프팅, 승마, 건강과 치료를 위한 온천, 하이킹, 기본적인 하이킹부터 고난이도 암벽 등반, 자전거, 골프, 스킨스쿠버, 문화유적 탐사, 소금광산 탐험, 동굴 탐사 등등 너무나 많다. 지금도 관광 캄머굿, 보물지역이다.
산길을 달리며 가이드 한수경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오스트리아는 구름 끼고, 비오고, 햇살이 조금 비치는 들쑥날쑥한 날씨 때문에 사람들의 심성도 그와 비슷하여 응답도 반응도 불분명하다고 한다. 날씨가 늘 흐려서 일반 농작물 재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초지를 만들어 풀을 키워서 건초를 생산하다. 이곳 청정지역에서 생산된 건초가 한국의 마사회까지 수출된다고 한다.
알프스 산맥은 오스트리아 빈의 칼렌베르크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프랑스 니스에서 끝난다고 한다. 오스트리아가 알프스의 출발점이라 한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산맥의 끝인가? 산길을 조금 더 가니 왼쪽으로 푸슐(Fuschl) 호수가 지나간다. 한국의 박카스 원료를 도입하여 이 호수의 물로 레드불(Red Bull)이라는 제품을 유럽 전역에서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고 한다.
고개를 더 넘어가니 볼프강 호수(Wolfgang)가 먼 동양 이방(異邦)의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호수를 지나서 좀 더 가면 온천 휴양지 바드 이슐((Bad Ischl)이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남쪽으로 한참 더 가서 목적지 할슈타트(Halstatt) 호수, 그 마을에 도착했다. 할(hal)은 고대어로 소금이라는 뜻이다. 소금의 도시, 잘츠부르크의 소금이 이곳에서 채굴되었다. 소금굴이 낮아서 난장이들을 데리고 와서 고된 노동을 시켰다고 한다. 호수 가에 발돋움하여 늘어선 작은 마을, 집도 나무도 모두 바위벽에 납작하게 붙어있었다. 골목을 걸으며 사진도 찍고 맑은 공기를 마셨다. 1997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다시 볼프강 호수로 돌아와서 호수의 동북 끝 지점 길겐(Gilgen) 마을에 내렸다. 알프스 호수 가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마을이다. 모차르트의 외갓집을 구경하며 마을 끝 지점까지 걸어가서, 바하 뤼트 암 그리스(Bach Writ am Gries)라는 현지식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떠난다.
330km 동쪽에 있는 빈(Wien), 즉 비엔나로 간다. 얼마나 달렸을까? 버스가 고속도로를 벗어나서 2차선 도로에 접어들었다. 오른쪽으로 도나우 강 물결을 벗 삼고 달렸다. 왼쪽으로 연이어 많은 포도밭이 보였다. 계속 달렸다.
빈을 약 80km 앞두고 강변 작은 마을 뒤른스타인(Dürnstein)에 쉬어간다. 아름답게 흐르는 도나우 강, 그 건너편 마을에 캠핑카들이 줄을 지어 쉬고 있었다.
영국의 사자왕 리차드(Richard I세, 1157-1199)가 1192년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5세의 깃발을 찢어 명예를 손상시켰다는 사건 때문에 붙잡혀 감금되었다가, 은화 5만 마르크(12톤) 라는 엄청난 몸값을 치루고 1194년에 석방된 곳이다. 그는 1190년에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신성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제휴하여 제3회 십자군을 편성하여 출정하였다. 1191년 리처드 왕은 성지 예루살렘 근처에서 적왕(敵王) 살라딘을 격파하여 3년의 휴전을 맺고(1192), 그의 용맹성으로 사자왕(獅子王)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귀국 길에 이곳에서 역사적인 수모를 겪었다.
가을 해가 점점 짧아진다. 빈 시내에 들어서니 땅거미가 내린다. 바하-행글(Bach-Hengle)이라는 식당, 1137년 문을 열었다는 유명한 식당에 가서 쏘세지, 돼지고기, 쇠고기를 접시에 담아내는 호이리게 정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식사 도중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노인과 아코디언을 잡은 젊은이, 집시 악사들이 들이닥쳤다. 아리랑으로 시작하여 “만남”으로 이어지면서 10유료 지폐들이 팁으로 전해지자 분위기가 한층 더 고조되었다. 한국 가요를 연이어가며 합창과 박수를 치며 마음껏 여흥을 누렸다. 이 식당에는 미국 대통령들을 위시한 소피아 로렌 등 세계적인 명사들이 다녀갔다는 사진이 한 쪽 벽면 가득했다.
빈의 숲(das Wienerbald) 호텔에 여장을 풀었으나 침대 속의 냉기 때문에 잠을 설치고 가벼운 감기 기운으로 시달리게 되었다.
제6일 10월 2일 (토) 오스트리아 빈(Wien) - 헝가리 부다페스트
독일과 오스리아에서 영어로 사용하는 명칭도 미국쪽과 다르다. 호텔 엘리베이터는 영국식으로 리프트(Lift)라 하고, 프런트 데스크(Front Desk)는 리셉션(Reception)이라 한다.
빈 중심에서 남서쪽에 있는 쉔브룬 궁전(Schloss Schönbrunn) 앞에서 현지 가이드 바리톤 이광욱을 만났다. 키가 크고 건장한 청년이다.
쉔브룬이라는 이름은 1619년 마티아스 황제가 사냥 도중 아름다운 샘(Schönner Brunnen)을 발견한데서 유래하고 있다. 연간 2천만 명이라는 놀라운 수의 관광객이 찾아온다는 이 궁전은 합스부르크 가의 여름 별궁이었다. 광대한 부지 안에는 궁전 외에 마차박물관, 바르크 양식의 궁전 극장, 전몰자 기념관, 식물원과 온실, 세계 최초의 동물원과 다양한 정원이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사진 촬영이 금지된 미로 같은 궁전 내부를 안내자를 따라서 관람했다. 앞뒤로 밀고 당기는 각국의 관광객들도 마치 줄당기기 시합을 하는 운동장 같았다. 왕족들의 막강한 권력과 상상할 수 없는 부와 사치를 일견 짐작하면서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그 다음 시내 남서쪽 가까운 곳에 있는 벨베데레(Schloʃ Belvedere)궁전 미술관으로 갔다. 벨베데레는 ‘아름다운 발코니가 있는 집’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라고 한다. 황제의 겨울 궁전으로 경사진 정원에서 황제가 썰매를 탔다고 한다. 빈이라는 하나의 도시에 구 궁전, 여름 궁전, 겨울 궁전을 두고 보낸 세월도 가고 그 영화도 모두 살아지고 흔적만 남았다.
내부에는 19세기와 20세기 회화로 가득하다. 쉴레, 코코슈카 등 세기말 화가들의 작품에서 빈 환상파 작품까지 전시되어 있다. 그 가운데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키스(das Kuss, 1907년)가 1조 3천억원이라는 가격으로 명성을 지니며 전시되어있었다. 과연 그런 가격이 어떻게 매겨지는 궁금했다. 작품을 돈으로 명시하며 그 우수성을 자랑해야 하는지? 키스라는 작품은 금빛 찬란한 색채와 선이 환상적이다.
그 다음은 구시가의 중심에 있는 슈테판 대성당(Stephansdom)으로 갔다. 최초의 순교자 슈테판의 이름으로 지은 이 성당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슈테판 사원은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 사원으로, 빈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슈테플(Steffl)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남 탑은 137m로, 사원의 탑으로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다. 343개의 계단을 이용, 73m 높이까지 올라가면 사원의 아름다운 지붕과 구시가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오스만 투르크 군대가 남기고 간 180개 대포를 녹여 만들었다는 오스트리아 최대의 종이 있는 북 탑에는 엘리베이터로 올라간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장례식이 이곳에 있었다.
국립오페라 극장 건너편 면세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칼, 압력솥, 냄비 등 독일제 제품을 쇼핑하고, “李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출발했다.
헝가리 국경을 넘어서자 퇴색된 간판의 문자들이 달라졌다. 계속 달리다가 큰 고개를 넘어서 어둑해질 무렵, “다뉴브의 진주”라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붉은 고추(Red Pepper)"라는 이름의 네온싸인이 반짝이는 지하 식당으로 들어갔다. 한국의 육개장 맛과 비슷하다는 굴라쉬 스프와 저녁을 먹었다. 옆방에는 현지인들이 생일 파티로 그 지역에서 좀 사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도시의 야경을 걸어서 구경한 다음, 밤길을 돌아서 Europa Cogress Center, 즉 유럽의회센터 건물 부속 호텔에 피곤한 여장을 풀었다. 가족호텔 다시 말해서 콘도(미니엄)을 숙박시설이었다.
참는다
여행 5일째
오스트리아 빈(Wein)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가면서
목이 말라도 참고 또 참는다.
물을 많이 마시면 피로 회복에 좋지만
화장실 가는 게 불편해서 참는다.
그런다고 오줌이 나오지 않느냐?
오줌통 움켜잡고 참고 또 참다가
유로화 50센트 주고 오줌 누지만,
시원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급해서 달려가면 돈부터 먼저 내라고 윽박지른다.
그놈의 주기 싫은 동전 찾기가 그리 쉬운가?
크고 깨끗하고 무료이며 음악이 잔잔한
한국의 고속도로 화장실이 그립다.
명승지 어딜 가도 시원하게 볼일 보고
세수까지 할 수 있는 여유와 인심이 그립다.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3개국에
영업망을 두고 경영하는 유료화장실 회사
세니퍼(Sanifer) 사장과 직원들에게
잘 먹고 잘 싸고 잘 살도록
한 줄기 오줌으로 축복하고 가자!
제7일 10월 3일 (일) 헝가리 부다페스트 - 슬로바키아 타트라
부다페스트에 아침 공기를 안고 시내 관광에 나섰다. 물(水)이라는 뜻의 부다(buda)는 다뉴브 강의 서쪽 지역으로 구릉과 산지로 되어있다. “벽돌 굽는 가마터”라는 뜻의 페스트(pesta)는 강의 동쪽지역으로 평평한 구역, 200년 전에 건립된 신도시를 말하는데 이곳에서는 페슈트라고 발음한다.
서쪽 부다의 겔라르트 언덕(Gellert-hegy)으로 올라갔다. 헝가리에서 광고료가 가장 비싸다는 이곳 전차길에 삼성과 현대의 광고 깃발이 바람이 휘날리고 있었다. 우리 기업들의 위력을 느끼며 주차장에서 현지 가이드 정은숙의 안내를 받게 되었다.
겔라르트 언덕은 도나우 강변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망을 바라 볼 수 있는데, 시타델라(Citadella) 요새가 자리 잡고 있다. 성벽에서는 2차 대전 때 서쪽 부다를 점령했던 독일군과 동쪽 페스트를 차지했던 소련군의 치열했던 공방의 총탄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다. 언덕 높은 곳에 “자유의 기념비”가 모스코바를 향해서 우뚝 솟아있다. 1947년 이제 여성들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뜻으로 탑의 상단이 한 여인이 서있다.
구소련의 압제에서 가장 먼저 독립 깃발을 오렸던 헝가리의 민족의식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김춘수 시인의 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그 절규가 생각났다. 자료에 의하면, 헝가리의 독립 투쟁에 수많은 시련과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45년 2차 대전 후 나치의 편을 들었던 헝가리는 소련군에 의해서 점령당한 후 공산위성국가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1956년 마침내 국민들의 불만은 커지게 되었고,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에서는 폭동이 일어나 20여만명이 무장을 하여 소련군에게 대항할 준비를 하였고, 여기에는 공산당원을 비롯, 중고등학생들도 참여를 하게 되었다.
소련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 15만명의 군대를 부다페스트로 파견하였다.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소련군은 후에 있을 프라하의 봄보다 더욱 잔학하게 이를 진압하였다. 누구든지 반항하는 사람들은 살해하였다. 도로엔 시체가 널리게 되었고, 반소 인사들도 모두 소련으로 끌고갔다.
하지만 헝가리 공산당의 당원들은 헝가리 국민의 편을 들었다. 그들은 서방국가와 최대한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언제든지 소련을 위협하였다.
후에 헝가리는 1989년 7일 혁명으로 공산당을 퇴진시키고, 공산위성국 중에서 제일 먼저 서방국가화가 되었다.
어부의 요새, 마차시 사원(Mἀtyἀs Templom), 부다 왕궁이 있는 건너편 언덕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부의 요새는 7개 부족의 상징인 원뿔형 뾰족 탑이 강 언덕을 방어벽으로 둘러서 있고 그 안에 마차시 사원의 웅장한 위용을 자랑한다.
1015년 이슈트반(스테판) 왕이 결혼을 위해 이곳에 작은 교회를 만들었으나, 몽고 침입으로 폐허가 되었다. 지금의 성당은 몽고 침입 후 벨라 4세 의해 만들어 졌다.
정면 입구의 오른쪽에 80m의 마차시 탑과 왼쪽으로 36m 베레 탑이 솟아있다. 섬세한 조각의 고딕식에 선명한 색상의 모자이크 지붕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왕궁으로 가는 도중에 헝가리 군악대의 연주를 바라보는 행운을 가겼다. 국가, 리스트의 헝가리 무곡 등이 잔잔하게 울려왔다. 마차시 왕의 전설적인 새, 까마귀가 지키는 문으로 들어가서 한 바퀴 돌아보았다.
드라마 아이리스의 촬영장이었다는 건물을 바라보며 이병헌의 총격전을 저기서 했지요! 라고 소개한다. 헝가리 사람들은 한국처럼 성을 앞에 쓰고 이름을 뒤에 쓴다. 훈족의 후예, 그 영향을 받은 결과인 것 같다. 지금도 가끔 몽고반점을 가진 아이가 태어난다고 한다. 국기게양대와 반공호 유적을 지나서 내려왔다.
다뉴브강이 유유히 흐르는 세체니 다리를 건너 페스트 지역으로 갔다. 커다란 사자 4마리가 네 귀퉁이에 앉아있는 세체니 다리는 19세기 중반에 건설되었다. 세체니라는 이름은 이 다리에 공헌한 세체니 백작을 일컫기도 하지만, 밤을 밝히는 전구의 모습이 마치 사슬(세체니)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졌다.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하기 위해 1896년에 지어진 영웅광장으로 갔다. 광장 중앙의 36m 높이의 기둥 꼭대기에는 가브리엘 대천사의 조각상이 있다. 이 기둥을 기준으로 반원의 형태로 좌우에 마자르의 7개 부족장들의 동상과 헝가리의 역대 왕과 영웅들이 연대순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슈트반(스테판) 성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슈트반 대성당은 헝가리의 초대국왕이자 기독교를 헝가리에 전파한 위업으로 성인으로 추대된 성 이슈트반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부다페스트 최대의 성당이다.
당시 헝가리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인 요제프 힐드와 미클로시 이블의 공동 설계 작품인 이 대성당은 본래 1848년에 기공식을 가졌으나 연이어 발발한 헝가리 독립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851년부터 재개되었다. 그러나 대성당 선축이 한참이던 1868년에 전례 없는 폭풍이 불어 닥치면서 대성당의 돔이 날아가버렸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야 1905년에 공사는 끝이 났다고 한다. 성당 정면에는 라틴어로 “EGO SUM VIA VERITA ET VITA(나는 길이요 생명이다)”라고 새겨져있었다.
성당 높이가 96m 인 것은 헝가리 건국 원년인 896년에서 유래되었다. 국회의사당과 함께 페스트 지역에 96m 이상의 건물은 금지되어 있다.
성당의 중앙 제단에는 이슈반 대왕이 봉헌되어있고, 성당 안 왼쪽 편 경당에 대왕의 손이 미라 형태로 보존되어있었다. 50센트 동전을 넣으니 밝은 불이 켜지고 그 손의 형상을 보여주었다. 중앙 제단에 이슈트 왕에 봉헌된 것과 미사 후 파견성가는 헝가리 국가를 부른다는 점을 보면 이들의 민족의식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헝가리의 명산품 토카이(tokaji) 와인(귀부貴腐 와인)과 약품 등을 파는 면세점 쇼핑을 끝내고, 다시 부다 지역, “Seoul House"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폴란드로가는 중간 지점, 슬로바키아 국립공원 타트라로 출발했다.
헝가리를 떠나면서 가정의 모든 권한은 여자에게 있고, 결혼 후에는 남편을 꼴불견의 용(龍), 즉 괴물로 여긴다는 말이 귀에 쟁쟁거린다. 어느 사회건 남녀가 상호 공존하면서 서로 존경하는 반려자가 좋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다.
부다페스트 북쪽으로 시가지를 벗어나자 왼쪽으로 상당히 큰 규모의 삼성전자 공장이 보였다. 도중에 마이크를 잡은 이덕만 선생의 “노인들의 삶”이라는 자료 소개가 재미있었다. “노인들의 삶도 가지가지이다. 老仙이 있는가 하면, 老鶴도 있고, 老童이 있는가 하면, 老翁도 있고, 老狂이 있는가 하면, 老孤가 있고, 老窮이 있는가 하면, 老醜도 있다.” 여덟가지 삶의 유형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고개를 넘고 오후 내내 달리고 또 달려서 슬로바키아의 포프라드(Poprad)에 도착했다. 이곳은 폴란드와 국경을 이루는 비소케 타트리(Vysokě Tatry) 산맥의 타트라 국립공원 남쪽 소도시이다. 이 산맥은 최고봉 레를라호프스키(2655m) 산을 중심으로 동서로 뻗은 산맥의 3/4은 슬로바키아 영토이고 1/4이 폴란드에 속한다.
포프라드의 Satel-Poprad 호텔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헝가리 명품 토카이 포도주를 마시는 기쁨을 누렸다. 일행 중 뜻있는 한 분, 이도현님이 부다페스트 면세점에서 구입해 온 정성이었다.
제8일 10월 4일 (월) 헝가리 부다페스트 - 폴란드 쿠라쿠프
숲속 산골 마을들을 여러 번 지나고 내리막길에서 계곡이 아름다운 국경을 넘어서도 버스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린다. 관광 버스가 마치 달려오는 적으로부터 급박하게 탈출하는 장면 같다. 참으로 아쉽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중간에 두서너 번 발길을 멈추고 맑은 공기도 마시며, 그 절경들을 사진으로 담았으며 참 좋겠는데, 그것은 자유여행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패키지 여행은 정해진 스케줄, 즉 다음 목적지와 도착 시간에 늘 사로잡혀 줄곧 전진 또 전진이다.
어서 가자!
패키지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일정이다.
오늘 아침 일어나면 서둘러
몇 시까지 어디에 도착해야 누구를 만나야
제대로 먹고 자고 구경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일정표가 우선이고
사람은 부지런히 따라가야 하는 종속물이다
여기서 30분간입니다.
시간 꼭 지켜야 합니다!
열 한 시에 저기 시계탑 앞에서 만납니다.
얼른 화장실 갔다가 심호흡 한번 하고
허둥지둥 사진 한 장 찍고 돌아서면
벌써 저기서 일행들이 손짓하며 재촉한다.
빨리 오너라! 어서 출발하자!
사실 우리들의 한 평생도
시간의 궤도를 가고 또 가는 것!
어디로 가는가?
무엇을 위하여!
타트라 산맥 북쪽 휴양지 부근 폴란드 농촌의 집이 크고 아름다웠다. 특히 삼각구조의 3층 4층집 군락의 화려한 형상들이 한 폭의 그림 같다.
드디어 폴란드 제2도시 고도(古都) 크라쿠프(Krakow)에 도착하여 현지 가이드 이명주와 만났다. “흰 장미(Biała Rōza)"라는 깨끗하고 단아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걸어서 중앙광장으로 갔다.
인구 76만 중 대학생이 25만명이라는 대학 도시 그리고 관광 도시 크라쿠프, 내가 오랜 세월동안 존경하는 지동설(地動說)을 주창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가 졸업한 대학이 이곳에 있다.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고향이 바로 여기다.
중앙 광장으로 갔다. 우리가 들어선 우측 코너에 세계에서 가장 작은 성당이 있고, 대각선 맞은편에 성마리아 성당(Bazylik Mariaka)의 첨탑이 솟아있었다. 그 성당 앞에는 결혼식 장면 영화를 촬영하고 있었다. 광장 중앙에는 폴란드 최고 전성기의 무역거래의 중심지였던 100m 길이의 직물회관의 전통을 이어 기념품 상가들이 제마다 불을 밝히고 있었다.
광장 11시 방향 골목에 있는 대학, Uniwersytet Jalgiellonsku Rektorat에 가 보았다. 너무나 먼 세월이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신념적 학문의 지조(志操), 그 흔적을 엿보고 싶었다. 고색창연한 건물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나오고 있었다.
남동쪽 40분 정도 가서 비엘리치카(Wielicska) 소금 광산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깊이 0.9km에서 1.5km 정도의 암염층이 있다고 한다. 유네스코 자연유산 제1호라고 한다. 표를 사서 수직 나무 계단 378개를 내려가서 지하 64m 지점에 도착했다. 1998년까지 700년 동안 암염을 채굴하여 3040개의 방이 있다. 그 중에서 20개 방을 구경한다. 아주 큰 적송(赤松) 기둥을 가로 세로 세운 버팀목들이 인상적이었다. 수직으로 세운 버팀목 20년을 견디고 수평으로 쌓은 것은 300년을 간다고 했다. 그렇다! 지금 우리는 누구의 버팀목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누구의 버팀목 덕분에 살아가고 있는가? 늘 살아가면서 생각해 볼 평생의 과제이다.
안내자를 따라서 계속 걸어갔다. 700년 동안 비엘리치카의 광산 노동자들은 약 2,600만㎢의 암염을 채굴했다. 9층으로 나뉜 갱 안에는 여러 갈래로 갈라진 갱도가 갖추어져 있는데, 이 갱도의 깊이는 300m, 총 길이는 300km에 이른다. 한편, 이 거대한 채굴 공간은 필요에 따라 예배당이나 운동장으로 사용되었다. 왕의 조각상, 난쟁이 조각상, 광산 노동자들의 조각상, 코페르니쿠스도 있었다.
지하에서 고된 일을 했던 말을 만났다. 사람들은 근무 교대로 바깥 세상에 들낙거렸지만, 말은 어린 망아지 때 한번 들어오면 평생 나갈 수 없었다. 햇볕을 보지 못해 눈이 멀고, 푸른 초원이 아니라 지하 깊은 곳에서 깜깜한 미로에서 일만 했다는 말(馬) 박제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135m 지점에 높이 87m의 광장에는 3명의 광부가 만들었다는 조각 작품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집트로 피신하는 성가족, 헤롯 왕의 유아 학살, 가나의 결혼 등 성서의 장면이 무려 700년에 걸쳐 벽면에 새겨두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모방한 작품도 있다. 음악감상실에 가서 쇼팽의 <이별곡>을 들었다. 높은 천장과 소금물이 고인 바닥, 그리고 어두운 공간에 서서히 비추는 조명과 함께 은근한 현악으로 연주되었다.
현재 갱도 대부분은 폐쇄되었지만, 일부는 견학용 코스로 일반인에게 개방되고 있으며, 거대한 공간을 보유한 지하 채굴 유적지는 식당은 물론, 극장이나 카페 또는 우체국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1964년에는 지하 211m 지점에 요양소가 설치되어 기관지 천식이나 알레르기 환자가 요양하고 있다. 주위 암염의 영향으로 갱 안에 세균류가 매우 적고 공기 속에는 소금을 비롯한 미네랄 성분이 풍부히 포함되어 있어 치료 효과가 있는 듯하다. 크라카우로 돌아와서 Hotel Major에 여장을 풀었다.
제9일 10월 4일 (화) 폴란드 아우슈비츠 - 체코 프라하
크라카우에서 남서쪽 64km 거리에 있는 오시비엥침(아우스비츠)로 갔다. 가면서 가이드가 폴란드에 관해서 소개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외국으로 일하러나간다. 영국의 딸기밭에 일하는 사람 대부분이 폴란드 젊은이들이다. 국내에 마땅하게 일자리가 없다는 것 반증한다. 한때 대우가 폴란드 국영 자동차 공장 3개를 인수하여 가동할 때 대단했다고 한다. 많은 실업자들을 구제해 주면서 제2의 징기스칸이 침략해왔다고 생각했으나 오래가지 못해 유감이다.
여기도 모계 우선 사회이다. 여자-애완동물-남자 순으로 남성들의 지위가 3순위라니 처량하다.
아우스비츠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정문에는 독일어로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로워진다)라는 표지가 풍상에 시달린 모습으로 걸려있었다. 처음 수용소로 들어올 때 수용소 관리국장으로부터 “너희들이 출구는 화장터의 연기 하나밖에 없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모든 재산을 다 빼앗기고 가스실에서 죽으면 금 니까지 탈취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하늘이 슬퍼하는 듯 가랑비가 내렸다. 처음에는 폴란드 정치범을 수용했던 아우스비츠, 1940년부터 45년까지 40여개의 수용소를 유지했다. 수용 당했던 사람들은 감금, 굶주림, 중노동, 의학실험, 사형집행 등의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 수용소는 1942년부터 유럽 최대의 유태인 학살지가 되었다. 죽음을 선고 받은 사람들은 도착하자마자 명부에 등록도 하지 않고 곧바로 죽음을 당했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정확한 희생자의 수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1942년 1월에 유태인 대량 학살이 이루어 시작되었다. 최초로 사형선고를 받은 유태인들은 폴란드 남서쪽 실레지아 지방과 독일군 폴란드 점령지 총독관구에서 호송되어 왔다. 다시 봄이 되자 슬로바키아,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웨이, 폴란드북부, 리투아니아, 그 외 독일군 점령국에서 유태인이 연행되어 왔다.
각국에서 수용소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약 150만 명이 학살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도 그 수를 좀 더 정확히 추정하기 위한 추가적인 자료집수집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1호실에는 브졔진카(제2 수용소)에서 발견된 사체를 화장한 재가 용기에 담겨져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안내자를 따라서 1층 1호실부터 그 참상을 관람했다. 수용자들의 머리칼을 쌓아둔 방, 그 머리칼로 천을 짜 놓은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용자들의 줄무늬 복장의 사진, 그들의 신상이 적힌 서류, 마지막에 인체 실험을 했던 자료를 보며 인간을 잔악성에 치가 떨렸다. 목욕한다고 알몸으로 들여보내서 낮은 천장 구멍으로 “싸이클론-B”를 뿌려서 대량 학살을 자행했던 가스실과 시체 소각장 유물을 끝으로 견학은 끝났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 당시 수용소에 근무했던 SS대원들의 사고 방식이였다. 유태인들은 “나와 내 가족의 경제적 이익을 탈취한 인간들이다.” 그러므로 “인간 쓰레기를 태워 없애는 당연한 일을 한다.”라고 합리화 했다는 점이다. 우리 인간에게 “합리화”는 지금도 자신을 몰각시키는 마약과 같은 것이다. 전시(戰時)가 아니라도 쉽게 대량 학살을 일삼는 북한을 보라! 그리고 사회 각 처에서 날뛰는 범죄자들의 편향된 시각과 행동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 당시 수용소에서 “까포”라는 유태인 동족의 앞잡이들이 활용되었다. 독일인들에게 협조하여 몽둥이를 들고 처참한 동족들에게 위세를 부렸던 그들도 다 죽었다. 수용자 중에 150여명이 탈출에 성공했고, 지금도 그 친척들이 폴란드에 살아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도망 갈 수 없다!
너희들의 출구는 화장터의 연기 하나밖에 없다.
나 뿐만 아니라, 우리 SS 대원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너희 유태인들을 죽인다.
종교와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보다
지금까지 나와 내 가족의 경제적 이익을
끊임없이 탈취한 인간쓰레기들을 청소한다.
쓰레기를 태워 없애는 당연한 일을 하니
나의 신념은 조금도 부끄럼 없다.
합리화 한다고 비난하지 말라!
합리화된 신념이 나를 지키고
나치 군대와 조국을 일으켜 세계를 점령한다.
이유가 없다!
가진 것 다 내어 놓아라!
머리칼까지 베를 짜고 메트레스를 만든다.
전시(戰時)가 아니라도
일하지 않고 잘 사는 너희들을
모두 다 죽이고 싶었다.
자! 오늘도 뼈가 빠지도록 일하거라!
일하다가 죽으면 더욱 더 좋다.
“일하면 자유로워진다!”(Arbeit Macht Frei!)
내일이면 한 줄기 연기로 승천할 것이니
시체 소각장 굴뚝으로
아우스비츠 관람을 마치고 체코 프라하로 가는 여정에 올랐다. 폴란드도 “낮은 땅”이라는 뜻인데 고속도로는 계속해서 내리막길을 달렸다. 도로변에 “LG Life's Good"이라는 우리 기업의 광고판이 지나갔다.
체코 땅에 접어들어서 국경도시 체스키테신에 있는 Hotel Smênárna의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해질 무렵 동유럽의 파리하고 칭하는 프라하에 도착했다. <만남>이라는 한식당에 저녁 먹고 걸어서 구시가지 야경을 둘러보았다. 카를 다리까지 가서 불타바 강 건너 프라하 성을 바라보았다. 강 저편 언덕에 어둠 속에 빛나고 있었다. Europa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제10일 10월 5일 (수) 체코 프라하 - 독일 뉘른베르크 퍼스
프라하의 아침이 밝았다. 현지 가이드 정태원의 안내로 블타바 강의 서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프라하성(Prazsky Hrad)으로 갔다. 요새 안에 하나의 도시 같은 성, 9세기 보르지보이 왕이 건설한 성에 기초하여 14세기 카를 4세 때 거의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현재는 체코 공화국의 대통령 관저가 이곳에 자리잡고 있다. 길이는 약 570 미터, 폭은 약 130 미터의 크기를 자랑하는 프라하 성은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큰 옛 성으로 기록되어있다고 한다.
대통령 관저 앞 문 양쪽에 부동자세로 서있는 보초 옆에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었다. 그 건너편 광장 한 켠에 초대 대통령 마사릭(Tomas G. Masaryk)의 동상이 근엄하게 대통령 집무실 쪽을 굽어보고 있었다. 이렇게 자유롭게 대통령의 집무실 건물을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개방하는 나라도 잘 없을 것 같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대통령이 아침에 출근하여 매일 다른 비밀 집무실을 사용한다고 했다.
제2정원에서 제3정원으로 나가면 성 중심부에 비투스 대성당 (Katedrála svatého Víta)이 나온다. 1343년에 시작하여 1929년에 완공했으나 아직도 미완성이라 한다. 뛰어난 고딕 양식이 돋보이는 체코에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대주교좌의 성당이다.
구시가지로 가는 길에 트렌바이라는 전차가 지나가는 걸 보니, 전차 두 칸 외부에 온통 삼성 광고를 감싸고 있었다. 귀국길 비행기 안에서 보니 EU와 FTA가 체결되어 내년 7월에 잠정 시행된다는 뉴스가 대서특필되어 있었다. 우리 기업들이 동유럽에 사전 광고 활동에 찬사를 보냈다.
어제 저녁에 잠시 들렸던 카를교(Karlūv most)로 갔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체코가 자랑하는 다리이다. 1357년 카를 4세 때 약관 20세의 건축가 피터 팔레지에 의해 설계되어 1402년에 완공된 것이다. 블타바 강 위에 놓인 18개의 다리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16개의 기둥에 길이가 510m. 폭은 9.5m로 3개의 브릿지 타워가 있다. 특히 바로크 시대에 만들어진 기독교 성인 33인의 조각상이 다리를 장식하고 있어 더욱 유명하다. 마치 조각품 전시장에 온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중 가장 귀한 것은 최초로 장식된 "17세기 예수 수난 십자가"이며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다리 중간에, 1683년 혀를 잘린 채 강물에 던져져 순교한 요한 네포묵 신부의 동상이다. 그 반석의 전면에는 네포묵 신부가 병사들에 의해 돌에 매달려 거꾸로 떨어지는 모습이 부조로 묘사되어 있다.
구청사 벽면에 있는 천문시계를 보려고 발길을 돌렸다. 수 많은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프라하에 연간 3천만명의 관광객이 온다는 말이 실감났다. 12시가 되자 커다란 두 개의 시계 중에서 위쪽 시계에 돌출한 좌우 4개의 현세의 욕망을 상징하는 인형들이 각기 동작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위쪽 예수 그리스도의 좌우 2개의 창문에 12 사도가 차례로 바르게 살아가도록 훈시하며 지나갔다. 끝으로 시계탑 꼭대기 난간에서 나팔소리가 울려왔다.
구경꾼들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성을 드높였다. 한 걸음 물러서서 그냥 보면 별 것이 아닌데, 유명하다고 기대하고 조바심 발돋움하여 여러 사람들과 웅성거리며 바라보면 그렇게 멋질 수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서 Vinárna U klíccû 라는 식당의 지하로 내려가니 마치 동굴 속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는 곳이었다. “어린돼지등갈비요리”, <베프조바제보리카>를 먹었다.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
주마간산 격으로 반나절 체코 프라하 관광이 끝났다. 이렇게 멀리 와서, 참으로 간단하고 편리하게 끝나버린 일정이다. 우리들의 여정에는 조금도 여유가 없다. 늘 바쁘다. 체코인 운전기사 마틴도 “빨리빨리”라는 말을 곧잘 했다.
독일 뉘른베르크(Nürnberg)를 향해 출발했다. 뉘른베르크는 둘째날 들렸던 로텐브르크 바로 동쪽에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프라하에서 독일로 가는 고속도로도 계속 내리막길이다. 가면서 이런 시 한편을 썼다.
가는 길
여행 일주일이 넘었다.
연일 강행군 여정(旅程)에 이끌려
심신이 피로하다.
또 300km를 달려가는데
쾅쾅 울리는 음악에 온몸이 흔들린다.
날마다 버스가 흔들리고
가고 또 가는 시간도 흔들린다.
오늘은 차장에 비치는
이국(異國)의 농촌 풍경에 젖으며
참선수행은 아니더라고
좀 조용하게 빈 마음으로 가도 싶다.
아 저기! 산 아래 아늑한 저 마을에
이삼일 한적하게 머물며
저녁노을 붉은 콧노래를 부를 수는 없을까?
속도에 소리에 생각에 흔들리며
앞으로 내일로
우리 모두 가고 또 간다.
선교사의 독촉에 못 이겨
통나무를 옮기던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너무 빨리 이동하고 또 이동하여
멀리 뒤처진 영혼이 따라 올 때 까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던
그들이 그립다.
뉘른베르크(Nürnberg) 북서쪽 퍼스(Fürth)에 도착하니 날은 어두워졌다. 호텔을 찾지 못해서 같은 구역을 두 번 돌아서 Hotel Bavaria에 내렸다. 호텔에 들어서자, 인상 좋은 독일 아저씨가 “안녕-하십니까?”라고 중간 한 마디 끊어서 인사했다. 기분이 좋았다. 우리말 발음이 어려웠던 모양이다.
호텔 식당에서 저녁 먹으며 여행 기간 동안 생일 있었던 4분을 위해서 프라하에서 사온 케이크를 놓고 맥주잔을 부딪치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그곳 뉘른베르크 퍼스 지역에 음식 축제를 한다고 해서 함께 가보았다. 바로 가까운 곳 골목 길게 각 종 먹을거리가 줄지어 불을 밝히고, 놀이, 게임 같은 부스도 스피커 볼륨을 높이며 북적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곳은 역시 길거리 맥주집이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함께 어울려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제11일 10월 6일 (목) 독일 퍼스(Fürth) - 하이델베르크 - 프랑크푸르트
퍼스에서 출발하여 230km를 달려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다. 네가르 강변 주차장에 내려서 자유롭게 구시가지를 돌아보았다. 10년 전과 별 다름없었다. 4대강 사업의 모델이 되었다는 네카르 강 운하로 작은 배가 통과해서 내려오고 있었다. 운하를 건설하면 환경을 파괴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유심히 바라보며 사진도 찍었다. 보 오른편 별로 크지 않는 갑문이 있을 뿐, 환경을 파괴하고 사람 사는데 별 지장을 주지 않는 것 같았다.
1386년 루프레흐트 1세(Ruprecht I)에 의하여 설립된 하이델베르크대학교는 체코의 프라하대학교와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의 뒤를 이어 독일어권에서는 가장 오래 된 대학으로 16세기에 종교개혁의 보루가 되었다. 30년전쟁(1618∼1648) 이후 쇠퇴하였다가 프랑스혁명 전쟁 이후 옛 명성을 회복하여 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대학이 되었다.
네커(Necker)강을 가로 지른 카를 테오도르(Karl Theodor)다리에서 언덕 위의 고성(古城)과 흐르는 강물 그리고 건너편 산중턱으로 평행선을 이루는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이라는 오솔길도 바라보았다. 잠시나 한적한 시간이었다. 마르크트 성령교회 한 쪽 골목에 있는 “한국관”에 가서 점심을 먹고 하이델베르크 성으로 올라갔다.
16세기와 17세기 초에 건설되었다가 17세기 말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되어 일부만 남아있는 성이다. 이 성의 지하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하이델베르크 툰(Heidelberg Tun)이라는 약 5만 8080갤런 규모의 거대한 술통이 있다.
프리드리히 5세가 영국으로부터 데려온 아내 엘리자베스에게 하루 만에 지어 선물했다는 엘리자베스의 문에 일행들이 사진을 찍었다. 그냥 보면 별 것이 아닌데 이야기를 덧붙여서 그 의미를 부여하여 유명해진 것이다. 이 문은 60대의 괴테가 30대인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 곳이라 하여 사람들이 더 찾는지 모른다. 늘 아지랑이처럼 저만치 아른거리는 사랑!
85km 거리를 달려와서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이곳 시계로 17:00에 OZ 542편에 탑승했다. 내일 낮 12시 30분이면 인천 공항에 내리게 된다.(*)
첫댓글 하운.! 기행문 잘 읺어 보았 다네. 참 대단 하구먼 난 읺어 보면서 내가 마치
동 유럽을 여행 하고 있는 기분 으로 읺어 보았네. 공부도 많이 되었 다네.
내가 다 다녀 온 곳이기 때문에 모른 부분을 알게 되어서 고맙네. 아무튼 소상히
잘도 써놔 책 으로 엮어 놔도 손색이 없겠더군. 내가 다시금 기억 하게
해 주어 고맙 다네. 다음 만나 이야기 나누세.....
항남! 과찬일세. 숙제로 쓴 어설픈 글을 읽어보았다니 고맙네. 그 코스를 한번 가 본 사람은 좀 도움이 될걸세. 11월에 만나세.
하운 ! 자네의 기행문에는 풍부하고 자세한 고증자료와 자네의 문재가 합쳐져서 멋진 기행문이 되었네. 더욱이 시백의 시가 더해지니 좋은 글에 멋을 더해주어 맛깔스럽네. 글중에 "쓰레기를 태워 없애는 당연한 일을 하니 나의 신념은 조금도 부끄럼 없다."고 유태인을 학살하면서 내밷은 인간백정 독일군의 자기 합리화가 더욱 가관이고 천인공노할 인면수심의 그들을 어찌 불러야 할지. ....... 아픈 역사의 한 페이지 그러나 그들은 전범을 처형하고 사과하고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기도 하지 않았나. 우리 동족인 북한의 위정자 김씨 3대 세습의 꼴불견과는 비교가 되지 않은가?
도봉! 허둥지둥 쓴 글인데 자네 마음에 드는 곳이 조금 있어서 고맙네. 세상을 보는 지평이 넓어진다는 것과 그 넓은 세상을 훌훌 건너 한 줌 구름이 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