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덕초등학교 11
덤으로 얻은 한 해였다.
그 전에도 지금까지도 예를 들어본 적이 없는 벽지학교에서의 유보가 교육장님 특명으로 이루어졌으니 고마울 수 밖에....
여러 사람들이 원하던 대전 전입도 별로였던 나에게는 고향땅에서 한 해를 더 가르칠 수 있다는 그것에 감사할 뿐이었다.
‘올 한 해는 정말로 마지막 해이다. 모든 걸 바쳐 열심히 하자’ 결심하고, 내 교직 경력 동안에 터득한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육상부는 물론 내 학급의 학습지도에도 심혈을 기울였고, 높이뛰기에서 1등으로 전국소년체전에 출전하는 미경이를 열심히 가르쳤다.
그런데 미경이는 도대표선수로 선발돼 대전체육고등학교에서 합숙을 했다. 내 손을 떠난 거지. 지도교사가 사 오라는 비타민 500IO와 꿀이나 열심히 날랐지. 체육고까지. 전국소년체전에서 입상하기를 바라는 염원과 함께....
그러나 전국의 벽은 너무 높았고, 또 한 번 주저앉았지. 벽지 학교의 소규모 인원에서는 전국을 호령할 특출한 인재를 만나기 어려웠다. 그동안은 억지로 도 대표까지는 만들었다고나 할까 ? 한계였지.
그 때 천안에서 근무하는 친구를 만났다.
“건표야. 우리 학교에 육상하기를 원하는 아이들이 여럿 있는데 나는 가르칠 사정이 아니니 네가 데려다 가르칠 수 없겠냐 ? 동덕학교는 천안 접경에 있어서 버스를 한 번만 타면 갈 수 있잖냐 ?” 이 게 웬 떡이냐 ?
그 친구의 학교와 이웃 학교에서 육상을 하기를 원하는 아이들을 여섯 명이나 전학을 시켰다. 부자 됐지. 힘이 불끈 솓더라.
아침에 학교 앞을 지나는 버스에서 우르르 내리는 아이들이 복덩이였다.
먼 길을 통학하면서도 제가 좋아서 하는 운동인지라 행복해 했다.
동덕 토박이 선수들에 그들까지 가세하니 막강해졌지.
그 해 학교간 육상경기 도 대회는 신경쓸 필요도 없이 가뿐히 우승을 했다.
2연패다. 소규모 벽지학교에서는 기적이랄까 ?
결승전 2등 학교는 대전 동산국민학교였었다.
동덕에서 3년 간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셨던 성교장님께서는 하필 내가 근무했던 모교, 탕정으로 자리를 옮기셔서 나와의 악연이 이어졌다.
탕정에서 함께 근무했던 최 형은 한 고장 형인데다 탕정초등학교 3년 선배이시자 공주교대는 동기라는 끈끈한 인연으로 맺어진 분으로 친형처럼 모셨던 분이다. 임종 시 가족의 연락으로 임종까지 했었지.
그런데 내가 동덕으로 떠난 후에도 탕정에서 계시다가 폐암으로 40도 안 되신 나이로 별세를 하셨다. 애통한 일이었다.
장례날, 외출을 달고 탕정학교 옆에 있는 최형의 집 빈소를 찾았다.
상여가 탕정학교를 들러 바로 뒷산의 장지로 향했다. 학교와 불과 70M.
바로 눈앞에 학교가 내려다 보이는 데 선생님들이 한 분도 보이질 않는다.
나중에 한 두분 왔다가는 금방 사라진다. “여기 학교 분이 누구라도 계셔야 하지 않겠어요” “교장선생님이 허락하시지 않아요” 그런데 최형이 워낙 인망이 있던 분이라 소식을 들은 교대 동기들이 먼 길을 찾아 장지까지 여럿 왔더라.
그 손님들을 대접할 사람이 나밖에 없어 하관할 때까지 떠나질 못했다.
달궁이 끝날 무렵에 바로 아래 학교에서 확성기 소리가 찌렁찌렁 울려 퍼진다.
“얼씨구나 절씨구나 지화자 좋다. 니나노” 이 게 웬일인가 ?
“어허 쟤덜은 즤 선생 죽었다고 지화자 좋다네” 달궁하던 동네 사람들이 혀를 차더라. 나도 속에서 불이 치솟았다. 즉시 교무실로 뛰어들어갔지.
“야, 이 ○○○들아. 지들 선생이 죽어서 바로 뒤에서 묻히는데 지화자가 뭐야. 그 게 교육이냐 ?” 소리를 쳤다. 힐끗 보니 성교장님도 보인다. 더 퍼부어댔지. 그동안의 한도 한 몫을 했지. “운동회 연습을 하느라고....” “오늘은 애도일 아닌가. 하루 쉰다고 운동회가 망쳐지나 ?” 말들을 못 한다.
속이 다 시원했지. ‘10년 묵은 체증이 떨어졌다는 말이 이런 뜻이리라’ 생각했지. 그런데 꼬장꼬장에 짝이 없던 성교장님이 분을 참을 수 없었던지 내가 사과하지 않으면 고소한다 교육감님께 투서한다 엄포를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성교장님과 인연은 그것으로 끝났다. 악연이었지.
한 해가 다 마무리 될 즈음. 전에 아산군 교육장님으로 계시다가 대전 백운 교장님으로 가신 분의 연락이 왔다.
대전으로 들어올 때 백운을 희망해서 운동부를 맡아 달라고....
대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던 나였으니까 불러주시는 게 고마울 수밖에.... 희망학교에 백운을 써 넣었다.
드디어 발령이 떨어진 날 대전일보를 보니 대전전입자 난의 맨 첫 번째에 ‘이건표’라 써있지 않은가. ‘이 게 뭐지 ?’ “야 이건표 일등으로 들어가네” 영구형이 축하를 해주신다. 이젠 백운초등학교가 어디인지 궁금해지더라.
도마동 사거리. 그 때에는 시교육청 자리였다.
초등교육과를 찾아가니 장학사님께서 이름을 물으신다. “아산에서 온 이건표입니다” “응 자네가 이건표 선생님. 그렇잖아도 할 말이 있네. 자네 어느 학교를 희망했지 ?” “백운인데요” “그런데 사정이 있어서 흥룡으로 발령이 났어” “예 흥룡요 ?” “그러니까 이해해 줘” 발령장을 내미신다. ‘흥룡은 또 어디야 ?“
백운 교장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교육장님 저 이건푭니다
“이선생, 어디를 희망했나 ?” “저는 백운을 썼는 데요” 한참을 침묵하시더니 “나는 자네가 꼭 올 줄 알고 운동선수도 뽑아 놓고 핸드볼 공도 다 사놨어. 그렇지만 이미 발령이 났으면 도리가 없지. 흥룡 가서 잘 근무해요”
그래서 어디 있는지도 모르던 흥룡국민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대전 생활의 시작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