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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천, 연하천 산장, 명선봉, 禪,
절골, 와운마을
연하천.
해발 1,480m 연하천은 명선봉 북쪽 중간 고산지대
숲 속을 누비며 흐르는 개울이 구름 속을 흐르고 듯하여,
연하천이라는 지명으로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리산 주능선 명선봉(1,462) 아래 위치한 연하천 산장 앞 마당 샘.
연하천(烟霞泉) 의미는.... 오묘한 자연(烟霞)속의 정취 어린 샘(泉).
<토끼봉 명선봉 & 삼각고지, 벽소령>4개 봉 주능선에서 가운데 위치.
연하천 산장 위치도
연하천은 삼정산 7 암자 길 끝에서 가까운 위치.
연하천은 도솔암과 가깝고 음정마을과도 가깝다.
전설 속 선녀가 살던 마을로 추정되는 음정마을.
고려 선종불교가 성행했을 때 융성했던 삼정마을.
이조 불교탄압으로 옛 영화를 잃은 삼정마을 주민.
연하천 요정의 전설은 이조시대 유래된 듯 보여진다.
'혹시, 연하천 아래 절골 규수들 아닐까?'
함양 마천에서 하동 화계까지 뚫린..산판 도로.
지리산 원시림 벌목을 위해 일제 때 만든 임도.
1950년대는 빨치산 토벌을 위한 작전도로로 사용.
산판 계절엔 철새처럼 몰려오는 숲의 요정들.
오징어철 동해안으로 몰려가는 바다의 요정들.
고냉지 채소 수확기에는 강원도 고지대의 요정들.
'혹시 연하천 산판 계절에 '숲의 요정' 아닐까?'
화개에서 벽소령 구간은 무너져 도로기능 상실.
마천에서 벽소령 구간은 고로쇠 운반용으로 사용.
연하천은 마천에서 화개 작전도로 중간 지점에 위치.
실상사에서 시작된 7암자 길 끝 지점이 연하천.
명선봉은 선종불교에서 유래된 지명인 듯싶다.
연하천은 알게 모르게 지리산 허리 중심에 위치.
토끼봉에서 6km 거리이며 벽소령에서도 6km 거리
일년 사계절 언제나 마르지 않고 넘쳐 흐르는 샘.
그 덕분에 지금도 공수특전단 유격 군인 훈련장소.
'빨치산 토벌 당시 군경 야영지였던 곳.'
토벌군과 빨치산 간에 격전지였던 연하천.
그 당시 빨치산 처녀 포로들도 많았다 한다.
한번 붙잡혀가면 살아 돌아올 수 없었던 운명.
산동 일대에서 당시 유행했던, '산동애가'.
가문의 대를 이을 오빠 대신에 죽어간 처녀
끌려가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불렀던 노래.
'그 넋들이 연하천의 요정이 된 걸까?'
...................'전시 강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침략 전쟁
전쟁은 여성에게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폭력을 행사
집단 강간, 강제 임신, 성폭력은 군사 작전의 일부
이러한 피해 사실들은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은폐.
가부장적 질서에 의해 가족이나 마을공동체 차원
전쟁은 적대국 여성의 몸에 대한 파괴로 시작된다.
'전시강간’은 적의 공동체를 모욕하고
파괴하기 위한 조직적인 수단으로 자행
여성의 몸에 증오를 각인시키는 성폭력
그것은 적대국 남성에 대한 상징적인 모욕
적대국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무기이기 때문.
'하여, 여성의 몸은 치열한 전투의 공간.'
전쟁이 가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은 종전 후에도 지속.
전시에는 적의 소유물 또는 포로가 되어 파괴당한 여성
전쟁이 끝난 후에 더욱 사회 구조적인 폭력 앞에 놓인다.
전쟁으로 붕괴된 기존 사회의 가치관들,
여성들은 어머니, 누이 아니면 ‘창녀’
전쟁 당시 여성의 피해사실들은 은폐되기 십상이다.
심지어 기존 공동체의 관습에 의해 단죄되기도 한다.
전시 강간 피해여성들, 또는 성매매에 동원된 여성들.
'더럽혀진 여성’으로 낙인찍히며,
공동체의 수치, 비극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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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여인들은 손목에 실을 묶고 문밖에서 진맥.
남자 의원에게 몸의 아픈 곳을 보일 수 없어 병사.
하여, 궁궐 또는 사대부 여성 치료를 위한 의녀제도.
임진왜란 당시 피난길에 배로 강을 건너던 여인.
배가 기우뚱하는 바람에 뱃사공과 신체적인 접촉.
그 순간 강물에 뛰어들어 자진했을 정도의 정절관념.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비교적 개방적이었다는 성풍습.
중국 사신이 겪은 고려의 개방적인 성풍습에 관한 기록.
고려시대 불교가 성행했던 연하천 아래 삼정 마을과 절골.
이조시대 불교탄압으로 삼정 마을과 절골은 쇠퇴.
연하천의 요정은 성풍속이 개방된 시대의 전설인 듯.
연하천 산장은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의 집처럼 작다.
1950년대 전란의 비극을 간직한 연하천
신라시대 화랑들의 심신수련장이던 절골.
연하천은 예나 지금이나 늘 넘치는 샘물.
숲의 요정들에 비유한 샘물이 연하천.
여성에 비유한 보통 샘물들과는 전혀 색다른 연하천.
연하천 주변에 민둥한 산세와 울창한 숲이 여러 군데.
민둥하게 솟은 연하천 일대는 '숲의 요정' 전설의 고향.
그곳 오솔길이 아늑하게 가라앉은 곳에서 솟는 연하천.
무성한 숲에 에워싸여 있어 오묘하고 정취 어린다는 뜻.
'형제봉의 전설'을 감안해 '지리산악회' 노총각들이 명명.
노총각들이 벗삼고 애인 삼아 마신 샘물이라 연하천.
연하천은 예전부터 지리산 종주 산꾼들의 야영장 터.
예나 지금이나 여성들이 머리 감고 발 씻기에 좋은 샘터.
그 여성들이 몸을 씻는 모습은 마치, '숲의 요정'
하여, 여성의 오묘한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연하천.
연하천 산장이 있는 산봉우리 일대는 예전에 야영장이 있던 곳.
연하선경이라 불리는 장터목 야영터보다 연하천 주변이 따듯하다.
벽소령 산장이 들어선 후 연하천 야영장은 자연보호를 위해 폐쇄.
이곳은 산봉우리라 부르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민둥한 산세.
하여, 주능선에서 산봉우리로서 독립된 지명을 갖지 못한 유일한 곳.
아직도 예전에 야영터의 흔적들은 숲속의 빈터로 군데 군데 남아있다.
장터목 인근 옛 야영터로 명성 높았던 연하봉(일명 일출봉)
천왕봉 일출을 감상하려는 산악인들의 야영터로 각광받던 곳.
1950년대 빨치산 토벌군이 작전 때마다 일시적으로 주둔했던 곳.
연하봉은 '오묘한 자연 속에 정취 있는..봉우리'란 뜻.
연하천과 연하봉은 옛부터 각광받던 야영장 터
근래 산장들이 들어서면서 야영장이 폐쇄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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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선에서 11km 지름길로 오를 수 있는 연하천산장.
'첩첩산중 고도'처럼 외길 등산로뿐인 듯한 입지.
뱀사골 지류에 숨은 와운마을 거쳐 오르는 지름길.
와운마을 개울은 삼각봉과 연하봉 사이에서 발원
최근 와운 마을까지 시멘트 포장도로가 개통되었다.
하여, 승용차로 와운 마을까지는 왕래가 가능해졌다.
'하동 의신마을에서 빗점골 거쳐 오르는 숨은 길.'
삼각봉 거쳐 함양군 마천면 삼정마을로 연결되는 지름길.
예전에 연하천 산장에 물품 운반할 때 주로 이용했던 수송로.
삼각고지를 거쳐 함양군 삼정으로 이어진 8km 거리의 오솔길.
삼각고지는 남원 실상사까지 사찰들로 이어진 능선의 고지.
실상사에서 약수암, 삼불사, 문수암, 상무주, 영원사, 도솔암
도솔암은 연하천 산장과 가까운 곳에 있어 쉬어가기 좋은 위치.
연하천은 빼어난 산세 못지않게 반란의 역사 격전지.
형제봉 아래 연하굴은 길이 15m, 폭 20m 20 여명 대피소.
<연하굴> 역시 '숲의 요정'과의 로맨스를 은유하는 지명.
산행 중 소나기를 피해 이곳에 들어 온 연인.
연하굴이라는 지명이 더욱 더 실감날 듯싶다.
길이 없는 듯 숨은 접근 루트 많은 연하천 산장 주변.
이 일대는 여순반란 사건과 한국전쟁 무장공비 은신처.
연하천 일대 원시림 속에 숨어있는 거미줄 같은 미로들.
'현재 우리나라 국군의 유격대 군사훈련 루트.'
1.8리터 플라스틱 물병 6개씩 들어있는 유격대 배낭.
연하천에서 물 뜨는 베레모 군인들이 땀 흘리는 모습들.
지리산 종주 도중에 이곳에서 만나면 믿음직하기만 하다.
문수골에서 연하천 거쳐 칠선계곡 또는 대원사 루트.
'반란의 역사' 남부군 루트가 오늘날 '유격대 훈련장'.
거미줄 같은 미로를 누비며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
'연하천은 유격훈련 군인들 땀을 식혀주는 휴식처.'
해발 1,500m 이상 고산에서 풍부하게 솟구치는 연하천 샘물.
남·북·서 3면이 아늑하게 감싸인 숲속 연하천은 넓다란 구릉.
1982년 이전까지만해도 야영객들 텐트가 항상 무리 지어 있던 곳.
산장이 건립된 후로는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산장을 이용.
주말 연하천 산장은 등산객들로 붐벼 새우잠을 자기 쉽다.
의신마을에서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한.. 빗점골 등산로.
이 등산로는 워낙 희미하고 험난하여 찾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고 보면, 알게 모르게 비밀 루트가 많은 연하천 등산로.
연하천 산장.
연하천 산장에 가장 빨리 오르내릴 수 있는 지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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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리 -4Km- 군사도로 -2Km- 주능선 -2Km- 연하천
<총거리 8Km, 오르막 3시간 10분, 하산 2시간 20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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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지리산 주능선 구간의 중간 지점.
지리산 종주 도중에 목욕할 수도 있는 곳.
그만큼 샘물이 풍부하게 솟는 연하천에 위치.
연하천 일대는 아직도 수많은 옛 야영장 터.
그만큼 수많은 산꾼들에게 사랑받던 야영터.
주능선에 대형 산장들이 생긴 후 야영장 폐쇄.
오묘한 자연 속의 정취 어린 샘 = 연하천.
그런 정취가 피부로 느껴지는 곳이 연하천.
요즘은 차츰 사라져가는.. 연하천의 옛 정취.
'야영장의 낭만스러운 밤 풍경이 사라진 탓.'
'남원 민간구조대 대장을 역임한 노시철씨.'
연하천산장 관리인이자 산장지기 남원 산악인.
민간 위탁관리 산장이며 '요정의 집'과 같은 곳.
'아직도 주능선 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곳.'
숲 속의 요정이 금방이라도 유혹할 듯한 위치.
이곳에서 만난 여성 등산인들은 모두 선녀 같다.
산장 앞 마당에서 저녁 짓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숲의 요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즐거움.
상상 속 요정의 환영은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환희.
미술 또는 문학이나 음악을 하는 예술인들도 비슷할 듯.
'달의 여신'을 비롯해 '숲의 요정'은 어김없이 여성.
'태양의 신' 아폴로 또는 '술의 신' 바카스와 비교된다.
특히, 연하천 숲 속에 요정이 모여 산다는 전설도 흥미롭다.
'도대체 연하천의 요정들은 어떤 모습일까?'
숲을 지배하는 요정들은 대부분 쉽게 옷을 벗어 던진다.
전설 속에 나오는 요정 이야기가 동화 속의 이야기 같다.
시간과 공간, 현실과 번뇌에서 벗어난 상상 속의 지상낙원.
'바로, 그러한 곳을 연상하게 하는 연하천 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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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 '요정의 집'과도 같은..아담한 산장
정취 있고 별밤이 아름다운 숲속의 휴식처.
산장 앞 뜰 통나무 식탁에 랜턴 밝히고
어둠 속에서 정담 나누기에 좋은 곳이다.
여름철 갈증을 달래주는 맥주를 파는 산장.
약 8km 거리에 있는 뱀사골 산장처럼,
단골 산꾼들이 즐겨찾는 연하천 산장.
넉넉한 샘물과 맥주가 있기 때문인 듯.
6km 떨어진 벽소령 산장이 섰어도 인기는 여전.
노고단과 천왕봉 주능선에서 중간 지점에 위치.
땀을 식히며 산장 맥주로 갈증 해소하면 참 좋다.
이곳 분위기에 취하면 며칠 묵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기 어렵다.
낯선 남녀 길동무도 이곳에 도착하면 곧 연인인 듯, 가까워진다.
함께 어울려 밥 짓고 설겆이까지 하다 보면, 금방 서로 친해진다.
산장 뜰 앞에 바로 샘물이 있어
멀리 물 뜨러 다니지 않아 좋다.
특히, 초저녁부터 해질 무렵까지 산장의 분위기는 절정.
낯선 산꾼들과도 쉽게 어울려 저녁식사를 겸한 술자리.
산장 분위기가 물씬한 통나무 식탁과 의자들이 정겹다.
50 제곱미터 규모의 아담한 산장
동화 속에서나 보는 그림 같은 집.
'과연, 저 안에 50명이 들어갈까?'
숲의 요정들이 모여 살 것 같아
들어가고픈 욕심이 일어나는 곳.
막상 들어서면 실내는 제법 넓다.
연하천 산장은 앞마당의 밤 분위기가 일품.
라면이 끓고, 찌계 냄새 구수한 식탁마다 둘러 앉아 나누는 정담.
랜턴 불빛이 어둠을 밝힐 무렵이면 테이블마다 환상 같은 분위기.
술잔에 비춰 어른거리는 밤하늘 별빛이 깜빡이면 시간이 멈춘 듯.
'남녀 구분 없이 서로 반기는 산장의 사람들.'
산장에서 영원히 머물고 픈 충동을 떨치기 어려운 환상적인 밤.
다음 날의 산행에 대비해 한 사람 두 사람 산장 안으로 들어간다.
밤공기가 차가우면, 랜턴 불빛 아래 길게 품어진 입김이 아름답다.
'숲의 요정들이 별밤 속으로 품어내는 입김.'
담배연기처럼 들이켜 삼키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기 어려운 심경.
취침 소등시간 전까지 산장 앞 마당의 정겨운 풍경은 꿈나라 같다.
민간인 위탁산장이라 산장 불이 꺼질 무렵까지는 비교적 자유롭다.
'잠을 자려고 산장으로 들어가면 눈앞에 진풍경.'
선녀 같은 여성의 신비로움이 숲의 요정으로 변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잠자리에 누워 침낭을 덮고 누워도 피곤할수록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남녀가 한데 어울려 마주 보이는 공간에서 잠을 잔다는 설레임 탓일까?
산장 실내는 통로를 가운데 두고 남자 침소는 아래 층, 여자는 위층.
산발한 처녀귀신인 듯, 복도를 향해 줄줄이 늘어진 여자 머리카락들.
빨래 줄에 줄줄이 널린 듯한 산발들이 어둠속에선 허공을 맴도는 귀신.
남녀노소 불문하고 이 갈고 방귀뀌며
꿈나라 여행길에서 뒤척거림과 잠꼬대.
아침이슬만 먹고 살 것만 같은 조금 전까지의 처녀들
산행의 피로에 지친 듯, 야릇한 신음이 섞인 비명소리.
긴 머리 침상 끝에 늘어뜨리고 이까지 갈면 소름 끼친다.
비몽사몽 꿈결 속에서 들려오는 환청일까?
아니면, 숲의 요정이 본색을 드러내는 걸까?
한밤중에 부시시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오는 모습
잠자는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으려는 듯한 귀신걸음
배탈났는지 밤새도록 들락거리기도 하는 처녀도 있다.
새벽녁, 랜턴을 켜고 무엇인가 먹는 산발한 처녀
랜턴 불빛이 아래서 위로 올라가 무시무시한 얼굴.
무덤을 파헤쳐 끄집어낸 인골을 먹는 걸까?
아니면, 갓 잡은 들짐승 날고기를 먹는 걸까?
연하천 산장에서만 볼 수 있는 으시시한 진풍경이다.
랜턴 불빛 아래 미소 곱던 숲의 요정들의 색다른 변신.
그것은 흑기사를 자처하던 남성들 역시 마찬가지지만..
'이성 간 아름다운 환상이 깨지기도 하는 곳.'
연하천 산장은 뱀사골 산장과 벽소령 산장 중간 지점.
수용 50명, 숙박 5000 원. 침낭 2000원. 밤 9시 소등.
명선봉.
지리산이 큰 산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것
산자락에 자리 잡은 10개 사찰과 14개 암자.
그중 3개 사찰과 4개 암자를 돌아보는 코스.
실상사 - 삼정산
영원사 - 명선봉
실상사 - 약수암 - 삼불사 - 문수암
상무주 영원사 - 도솔암 7 사찰과 암자
석가탄신일 즈음에 불심 깊은 등산객들이 찾는 코스
특히 상무주에서 바라보는 천왕봉의 모습이 일품이다.
11시간 도보코스라 일찍 출발하지 않으면 도중에 하룻밤
산행 코스는 실상사와 약수암을 빼놓고
군자리 도마동 마을에서 올라가도 되고
영원사를 들러 삼정리로 하산해도 된다.
시간과 체력에 맞게 산행할 수 있다는 장점.
암자에서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바로.. 하산.
실상사를 둘러본 뒤, 논둑 길을 따라가다
송림 숲을 지나 도로를 따라가면 약수암
물맛 좋은 약수암의 보광전을 둘러본 뒤
왼쪽 산비탈로 20분쯤 가면 도마동 마을
도마동 마을에서 견성골로 접어들어
계곡을 네 번 건너 1시간쯤 오르면
삼불사 길과 문주암 가는 갈림길.
삼불사 능선을 가로지르면 문주암
비구니 사찰인 삼불사를 둘러본 후
20분쯤 능선을 가로질러 가면 문주암
커다란 바위동굴에서 떨어지는 석간수
문주암에서 고개 하나 넘으면 상무주암.
상무주암 뒷편이 바로 삼정산의 정상이다.
상무주암은 천왕봉 전망대 같은 위치.
상무주암에서 20분쯤 가면 영원사와 영원재 갈림길.
오른쪽 계곡 아래 영원사로 내려간다.(약 30분 거리)
영원사에서 비포장도로를 따라 10분쯤 내려오면
오른쪽 큰 계곡과 왼쪽 작은 지류가 만나는 지점.
이곳에서 왼쪽 큰 계곡을 건너면 도솔암 가는 초입
특별한 표지기가 없어 길을 찾는데 주의해야 한다.
도솔암 입구만 찾으면 도솔암까지 1시간 쯤 걸린다.
영원사에서 시간이 늦으면 삼정리로 내려갈 수 있다.
명선봉은 도솔암 대웅전 뒤로 해서 능선으로 오른다.
급비탈을 한 시간쯤 오르면 영원재에서 올라오는 능선.
도솔암부터 명선봉까지는 키를 넘는 산죽밭 길
여름철에도 긴팔 웃옷을 입는 것이 안전상 좋다.
산죽밭은 길을 잃어 버리지 않을 만큼 나있는 편.
영원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지점에서
한 시간쯤 산죽밭을 오르내리며 가면 삼정리
연하천 산장 가는 길과 만나면 걷기 편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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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능선은 가끔 하늘나라를 걷는 듯.
특히, 명선봉 아래 있는 연하봉에 이르면
고산지대 특유의 색다른 감흥에 젖게 된다.
천왕봉의 일출, 반야봉의 낙조, 대자연의 섭리.
연하봉은 늘 변함없이 지리산 그곳에 멈춰있다.
연하천 위치는 명선봉 아래 아늑한 숲 속에 있다.
숲속 연하천은 널따란 평지를 이루고 있다.
1982년 이전까지만 해도 야영객들의 텐트촌.
산장이 건립된 후 등산객들은 산장을 이용한다.
50제곱미터 남짓한 아담한 초미니 산장.
하지만 대규모 산장에 비해 정감이 있다.
연하봉 가는 길은 뱀사골 지계곡
와운골에서 오르는 길이 열려 있다.
일반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길.
대부분 화개재, 토끼봉, 명선봉따라 온다.
또는 하동, 의신마을, 빗점골 거쳐 오는 길.
삼각봉 거쳐 함양군 마천면 삼정마을 등산로
와운골에서 오르는 길은 뱀사골 입구
즉 반선에서 와운교를 건너 와운마을
와운골 따라 능선 위로 열려있는 길.
반선에서 와운마을까지 2km 남짓
와운마을에서 연하천까지는 9km,
함양군 삼정은 양정, 음정, 하정 등 세마을
하동군 삼정마을과는 상호 혼돈되기도 한다.
하동군 삼정마을은 의신마을로 가는 길 초입.
'염소목장 3가구가 사는 하동군 삼정마을.'
함양군 삼정 등산로는 벽소령 작전도로에서 시작된다.
삼정에서 4km 가량 가다 보면 작전도로 벗어난 등산로
이곳에서 다시 2km 오르면 삼각고지 능선길과 만난다.
이 능선을 따라 2km 오르면 삼각고지에 도착하는데
여기서부터는 종주 주능선과 만나 연하천에 닿는다.
등정시간은 3시간, 하산은 2시간 가량이면 충분하다.
연하천 주변은 빼어난 산세로 어우러져 있는데
그 경관 못지않게 아픈 전쟁의 상흔이 전해온다.
명선봉과 삼각고지, 형제봉, 벽소령 구간에는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이 어울린 한폭의 동양화
형제봉 아래 커다란 바위산에 뚫려 있는 연하굴
길이가 15m 가량, 20여m 절벽 아래에 커다란 굴
20 명 정도 들어갈 수 있어 산행 중 긴급 대피소
또한 삼각고지는 연하봉에서 약 1km 남짓한 거리
이 일대는 여순사건과 6.25 당시 빨치산 은신처
삼각고지에는 아직도 남아있는 군사용 벙커 흔적
이현상이 빗점골에서 죽기 전까지 활동했던 격전지.
삼각고지 - 명선봉 - 벽소령 일원 = 피의 능선
선(禪)
삼정산 7 암자 공통점은 선(禪)
선(禪)은 선정(禪定)의 약칭이다.
앉아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잡념을 떨쳐내어 마음을 집중
좌선(坐禪)하는 인도의 수행법
인더스 문명 유적 중 하나인 모헨조다로 출토품.
요가 자세를 취한 아리아인 고행에서 유래된 선.
고행과 요가는 인도 실천불교의 양 날개를 이룬다.
선정은 요가에 가깝지만 고행과 차이점이 모호하다.
불교에서 선정은 한결같이 좌선이며,
요가처럼 다양한 동작을 취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선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 중 정.
좌선은 훗날 선종(禪宗)으로서 독립된 한 종파를 형성
심오한 사상적 의미가 부여된 것은 중국에 전해진 이후.
온갖 욕구를 버리고 기쁨과 안락을 느끼지만,
분별과 사려가 남은 상태가.. 선의 제 1 단계
분별과 사려가 가라앉고 마음이 통일되어
기쁨과 안락을 느끼는 상태가.. 제 2 단계.
기쁨과 안락도 버려서 마음이 평정하게 되고
정념(正念)과 정지(正知)로 안락한..제 3 단계
몸의 안락도 없게 되고 고락을 초월하여
마음의 평정이 청정하게 되는..제 4 단계.
'마음의 안정과 지(知)의 활동이 동등 = 해탈.'
허공이 끝이 없음을 깨닫고
마음의 허공과 같음을 깨닫고
무소유처(無所有處)를 깨닫고
무상념(無想念)을 깨닫는 삼매경.
탐하는 마음을 바로잡고,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고
노여움을 가라앉히는 수도.
대승불교에서의 선정은 6바라밀 가운데서
제5의 선정바라밀에서 설하는 것이 일반적.
[중국의 선]
중국 선정은 후한(後漢) 시대 안세고(安世高)
여러 종류의 선 관계 전적을 가져온 것이 최초.
달마가 중국에 온후 선정의 관념과 수행은 변화.
달마는 반야공(般若空)을 근간으로 하는 좌선 수행
[한국의 선]
신라의 법랑은 중국 선종의 제4조 도신의 제자
귀국후 중국의 선을 신라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법랑의 제자 신행(神行)은 당나라에 가서 수학
돌아와 북종선을 전했고, 남종선은 도의에서 비롯
한반도 선종은 828년(흥덕왕 3년) 실상사가 근본도량
'실상산(實相山)이라는 선문을 세운 데서 유래'
이후 10세기 전반까지 '선문9산'이 성립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지눌(知訥)과 보우(普愚)가 선을 중흥
조계종에 이르며, 그 선풍은 중국의 임제종에서 계승.
절골.
길고도 깊어 영원할 것만 같았을 한밤의 어둠
달빛 아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원화.
목욕재개 후 예불 드리는 모습이 아름다웠을 듯
'화랑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을 절골.'
훗날 살아있는 미륵보살로 일컬어진 여왕.
신라 최초의 여왕이자 독신녀였던 선덕여왕
미륵보살 화신이라 할 만큼 미모의 진덕여왕.
김유신이 죽도록 못 잊을 사랑을 나눈 천관녀.
모두 신라시대 미모를 자랑하던 원화들.
신라시대 화랑들의 심신수련장이 곧 절골.
그러므로, 신라 시대의 지명 흔적인 절골.'
통일신라 시대에는 전국 방방곡곡에 절골
지리산에는 절골이 모두 3군데 있다.
내원골에 있는 '큰절골' & '작은 절골'.
그리고, 빗점골 3 지계곡 중 오른쪽이 절골.
............절골 가는 길............
화개동천을 거슬러 의신교를 지나고
선유동계곡을 휘돌아 단천골을 거슬러
대성골을 뒤로 한 채 위로 오르면 빗점골.
'왼골 산태골 절골' 삼정이 합쳐지는 곳.
'삼정 합수내'라 불리우는 일대가 빗점골.
벽소령 작전도로 아래 숨어 있는듯한 절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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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골에 가도 지금은 절이 거의 없다.
향불을 피워 새벽을 열었던 비구니들
우리나라 비구니의 유래는 신라 원화.
통일신라 화랑의 우두머리 원화.
문수보살의 변신이라는 전설 속 여인.
신라시대 원화에서 유래된 듯 보인다.
결국 통일신라 시대 사라진 원화 제도.
신라 국가제사를 담당하던 여사제.
그 원화는 무당 또는 기생으로 전락.
김유신이 사랑한 천관녀는 원래 원화.
기생이 되었다가 훗날 천관사 비구니.
일생동안 죽기 전까지 김유신 만 흠모.
화랑 원화 시절 사랑이 사후로 이어진다.
'통일신라 시대에 번성했던 절골.'
빈대 등살에 못 견딜 만큼이나
옛날에는 인파가 북적거린 곳.
그 절은 허물어져 보이지 않고
목 부러진 불상과 묻힌 기와조각
그 절터엔 칡덩굴 보랏빛 향기뿐
절골에 가도 들리지 않는 목탁소리
칡덩굴을 젖힌 돌샘 아래 잠긴 하늘.
천길 고요를 깨뜨리며 우짖는 산새소리.
"절골 절골." "절골 절골."
절골 옛이름을 외치는 듯 우짖는다.
절골에서 찾을 수 없는 돌탑 그림자
돌탑 무너진 자리에서 자라난 나무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를 흔들며
하늘을 쓸고 있는 듯
염불소리 들리지 않는 절골
돌샘 위에 밤마다 별이 뜨고
미물들만 남아 지키고 있는 듯.
산 아래 먼 곳까지 퍼진.. 절골의 전설,
절골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옛 염불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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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에서 영월 가는 교동고개 넘어 정거랭이 벌판
현재 장락역 자리이고 그 벌판의 절반이 공장지대
정거랭이 우측에 있는 사방 오지가 옛날 절터였다
연대는 신라 선덕여왕 시대로 추정.
5 걸음마다 석등, 10 걸음마다 불당,
100 걸음마다 가람(迦籃)이었다 한다.
본당에서 절골까지 5리 사이엔 연이어 회랑.
수도승들이 눈비를 맞지 않고도 수도했단다.
해마다 사월 초파일과 칠월 칠석 날 즈음이면
3천 승려가 목탁과 바라를 치고 법요식을 거행
지금은 그 형태조차 알 길이 없지만
밭두렁 돌무지에 흩어진 깨진 기와들.
하나마다 신라 와공들의 혼이 스며있고
이끼 낀 돌덩이에도 석공들 피가 맺힌 듯.
이렇게 웅장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언제 어느 때 소멸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눈감으면 어디서인가 목탁소리 염불소리
무심한 풀벌레가 울고 있는 자연의 소리.
...........절골에서 빗점골까지.........
빨치산들이 통신수단의 배터리 충전을 위해
절터골에 수력발전 시설까지 갖추었다는 설.
그만큼 절골은 빨치산 최후의 항전무대인 곳.
남로당 간부와 각 지구 유격대 사령관들이 회의
그 최후의 회의 이후 이현상은 최후를 맞이했다.
이헌상 최후의 날이 1953년 10월 18일로 전해온다.
빨치산 최후의 항전지였던 빗점골
화개천 거슬러 50리 올라야 빗점골.
화개장터에서 의신마을까지 포장도로
의신마을에서 삼정마을까지 비포장도로
주민들은 의신마을 상단 계곡에서부터 빗점골
일부는 삼정마을까지를 의신계곡으로도 부른다.
의신에서 삼정까지는 3km 남짓한 비포장도로
삼정마을은 수만 평 넓은 초원지대 염소방목장
3가구가 사는 삼정마을 지나 2km 더 가면 벽소령
삼정마을에서 벽소령까지 연결되는 작전도로
주민들이 고로쇠 채취와 수송을 목적으로 보수
아마도 멀지 않아 벽소령까지 도로가 정비될 듯.
삼정마을에서 방목하는 염소무리들
이미 벽소령까지 영역을 넓힌 상태
더욱이 산 너머 마천면 삼정에서는
지프형 택시비가 벽소령까지 10만원
벽소령에서 하동 작전도로는 현재 폐도.
역시 곧 보수될 것이라고 예상되는 부분.
삼정에서 조금 지나면 차량진입이 불가능
그곳 주차장에는 늘 차가 몇 대씩 보인다.
주차장 못미쳐 계곡과 도로 사이 꽤 넓은 곳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이곳이 바로 옛날 빗점마을 터로 보인다.
빗점마을은 한때 화개천에서 가장 높은 곳
지금은 모두 이주하고 집터만 남아 있는 곳.
당국이 삼정마을 또는 의신마을로 집단 이주
어릴때 빗점마을에 살았던 의신마을 조봉문씨
빗점마을 위 주차장이 곧 빗점골 코스 들머리.
주차장에서 조금만 걷다보면 넓은 너덜지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했던 합수내 흐른바위.
합수내는 삼각봉과 연하천에서 흐르는 절터골
명선봉(1586m)과 토끼봉에서 흘러내린 산태골,
왼골의 3 개울물이 합수하는 지점이라.. 합수내
빗점골에서 주능선까지의 등산로는 세 갈래
첫째 절골따라 연하천 산장 또는 삼각봉 8km
둘째 산태골따라 명선봉 또는 총각샘으로 연결
셋째 산태골따라 왼쪽 왼골 통해 토끼봉으로 연결.
'길이 없을 것 같은 곳에 숨어있는 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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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절골..................
지리산 절골은 신라 화랑들의 심신 수련장.
고려 시대에도 절골로서 명맥을 이어왔던 듯.
이조시대 불교탄압에 의해 쇠퇴한 듯 추정된다.
이조시대 인사동의 이름은 절골 또는 사동(寺洞).
사동의 ‘사’자에 당시 행정구역 관인방 ‘인’자
1914년 일제시대 명명된 행정구역 명칭이.. 인사동.
지금 전통거리의 대명사 인사동 옛 이름은 절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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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군 어상천면 임현리 절골................
옛 을아현 양지말은 여자 성기 모양의 산세.
그곳에서 마주 보는 중바위는 남자 성기 형태
그 두 산세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절이 있었다.
불공을 올릴 때에도 음란한 기운이 일던 곳.
마침 신임 현감이 권속을 이끌고 부임해 왔다.
그 현감의 부인은 가끔 절에 불공을 드렸는데
그 승려 꾀임에 빠져 은밀히 내통을 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사실이 현감의 귀에도 들어가
화가 난 현감은 절을 헐고 승려를 쫓아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현감은 영춘으로 옮겨갔다.
'현재 절골 이름 만 남았을뿐 사라진 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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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송군 부동면 이전리 주왕산 절터............
주왕산 남동쪽 계곡에 맑고 깨끗한 개울과 기암괴석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마치 별천지와도 같은 분위기.
암벽을 사이에 두고 골바람을 맞으며 들어가는 절골
시원한 물과 바람으로 한여름에도 등골이 오싹하다.
약 8km 계곡의 빼어난 산세는 주왕 계곡에 버금간다.
약 1km 떨어진 주산지 저수지 물속에 버드나무 고목들.
신비감을 자아내는 이곳이 주왕산의 사라진 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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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골’이란 지명은 우리나라에 널리 있다.
한때 법등을 밝혀 길을 열었으나 폐사되어
절골 이름으로나 전해지는 비운이 서린 곳.
더러는 전쟁, 자연재해, 화재로 인해 사라졌지만
대부분 이조시대 억불정책에 의해 폐사된 듯하다.
억불정책이 한창인 이조 때 사찰을 노략질하고
사회악을 일삼은 유생들과 토호들을 빈대에 비유.
지방토호와 유생들이 사찰 터가 명당인 점을 감안
절에서 스님들을 몰아내고 그곳에 조상 무덤을 썼다.
형제봉 벽소령 작전도로 아래에 숨어있는 절골.
연하천 산장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는 빗점골 일대
남부군 총사령부가 있던 그곳은 이조시대의 절골 터.
'지금은 마을의 흔적조차 사라진 절골 터.'.
원래, 절골은 통일신라시대 화랑들 여름 휴양지.
지리산의 절골은 화개골의 발원지인 연하천 일대.
이조 억불정책으로 신라 때 절골은 거의 사라진 듯.
와운마을.
명성봉 연하천은 와운골을 빚고
그 와운골에는 와운마을이 있다.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와운마을
백여리 주능선이 장쾌하게 뻗어 흐르는 지리산.
주능선마다 가지쳐 나간 수많은 산자락과 계곡
산 둘레만도 800 여리에 이른다는 지리산 자락.
임진왜란같은 국란 몰아칠 때마다 민초들이 피난처.
갑오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난 뒤 농민군 최후 저항처.
해방후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숱한 사람이 죽어간 곳.
지리산 산골마을 주민들 삶 또한 그때마다 고달팠다.
수난 역사 속에서 화전을 일궈 목숨을 연명한 주민들.
지리산 자락에서 이상향을 일구려 했던 화전민들의 삶.
와운마을은 청학동을 꿈꾼 민초들 이상향 중 하나.
임진왜란을 피해 오백년 전 선조들이 첫발을 들인 곳.
지리산 북쪽은 점심 숟가락 놓기 무섭게 해가 지는 곳.
그런데 유독 이 와운마을 만은 오래도록 햇살이 머문다.
골짜기 하나가 트여 있다고는 하지만
겹겹이 산으로 둘러싸인 첩첩산중 마을.
구름도 누워 쉬고 간다는 와운마을 이름
와운마을 입구인 뱀사골은 인파가 북적거리는 곳.
하지만, 와운마을은 뱀사골에서 한걸음 떨어진 곳.
오지마을 정취에 반해 종종 영화를 찍으러 오는 곳.
뱀사골 매표소 지나 가끔 트럭이 다니는 흙먼지 길.
와운마을 사람들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개통된 길.
이 길이 나기 전까지 4k 산길을 꼬박 걸어 다닌 주민.
산길 아래 우거진 숲 사이로 뱀사골 계류가 보이고,
바위와 부딪히는 물살의 격한 소리가 들려오는 도로.
그 한적한 길을 따라 2km를 더 가면 길이 둘로 나뉜다.
하나는 뱀사골을 따라 화개재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다리 건너 시멘트 포장길은 와운마을.
갈림길에서 와운마을까지는 2km쯤 올라가야 한다.
낮에는 토벌군, 밤에는 빨치산 산사람이 주인
가파른 산비탈을 넘어 다리 하나가 또 나온다.
계곡에는 두 갈래로 쏟아지는 폭포가 걸려 있다.
잠시 피로에 지친 다리를 쉬어가기 좋은 곳.
다리에서 산내로 일보러 가는 노인 한분을 만났다.
이름 밝히기 꺼려하면서도 마을의 유래를 일러준다.
“그랑께 임진왜란 때 선조들이 이곳으로 피난왔제.
그 때만 혀도 마을 안에서 모든 걸 자급자족 했당께.
쇳물을 녹여 연장도 만들고, 질그릇도 구워냈지라.
한일합방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백여호 넘게 살았응께,
산골치고는 꽤 큰마을. 근디 지금은 열 가구도 안된당께.”
한일합방후 마을에 숨어든 의병 쫓아 들어온 일본군.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고 그것은 첫 번째 시련에 불과.
해방 후에는 여순사건을 일으킨 군인들이 들어온 마을.
빨치산을 잡는다고 토벌군이 마을로 들어와서 쑥대밭
낮에는 토벌군이 진치고, 밤이면 빨치산이 식량을 강탈.
결국 빨치산 근거지를 없앤다며 토벌군이 불질러 쑥대밭.
와운마을에 다시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1957년 즈음.
강제로 와운마을을 떠났던 주민들이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
'이때 서른 다섯 가구쯤 와운마을로 돌아온 듯.'
“워낙 외진 산골인께 뭐 먹구 살게 있나.
논이 좀 있긴헌디 일년 양식으론 모자랐제.
그랑께 죄다 화전을 일구어서 먹구 살았제.
제사나 있어야 쌀밥 구경, 대부분 조나 수수로 연명.”
험한 산길에서 생필품을 지게로 운반하는 산골 생활.
초등학교 분교까지 들어섰지만 하나 둘 떠난 주민들.
80년대 초까지는 이십여 호가 남았고,
지금은 십여 호도 채 남지 않은 마을.
산골 고단함이 몸에 배인 이곳 주민들.
노인과 작별하고 다시 팍팍한 길을 따라 오른다.
장단지가 딴딴해질 무렵 와운마을이 눈에 걸렸다.
와운쉼터라는 간판이 걸린 이층 양옥집이 소란하다.
냉수 한 사발 얻어 마실려고 내려갔더니 들어오란다.
일년에 한 번 타는 곗날이라 이웃에 음식을 배푸는 날.
“요즘은 와운마을도 소문나서 관광객들이 많이 와요.
헌디 경제가 좋지 안응께 먹을 것을 다 싸 가지고 와서
소득엔 도움이 안된당께요.살기 힘들어도 옛날이 좋았제.
아 그 때는 오줌 눕다가도 송이를 땄응께.
요즘 산나물도 씨가 말라버릴 지경이랑께.”
“한봉마을로 지정되어 집집마다 쬐깐허니 벌을 치는디
그게 큰 돈벌이 되겄는가? 그저 용돈이나 마련하는 정도.
농사? 마을 앞에 천수답이 좀 있제. 근디 사람이 있어야제.
그거 지어서 어디 남는 것이 있다냐?”
술기운이 거나하게 오른 주민들이 다투어 한마디씩 던진다.
타지에 나가 있는 이들은 잠자코 듣기만 할 뿐 말수가 없다.
그들도 와운마을에 뿌리 내리고 있다면 할말이 많을 듯 보인다.
그래도 산골의 힘든 나날을 함께 못하는 것이 미안해
이렇게 일 년에 한 번씩 찾아와 음식을 베푸는 것이다.
“저기 마을 뒤에 가면 천년송 소나무 하나 있어라.
그거 구경하고 가시요. 예전부터 정월 초사흗날에
당제를 지내던 소나무인디 아주 멋드러진당께.
그래도 그 소나무가 얼마나 영험한지 모를 것이여.
아 눈 많이 온 날은 호랑이가 꼬리로 눈 쓸어주고,
애 못 낫는 이들이 정성으로 빌면 애를 점지해 준당께.
어! 못 믿는 게빈디, 진짜여!”
와운쉼터를 나와 마을로 올라간다.
녹슨 양철지붕과 돌담 너머로 감나무
홍시가 줄줄이 달려있는 그 뒤로 천년송
천연기념물(424호)로 지정되어
나무계단 길까지 놓여진 천년송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 서 있다.
천년송 앞에서 보는 늦가을 지리산속 정취
그 품에 아늑하게 안겨 있는 산골 마을 모습.
산골 마을을 휩쓸고 간 전란도 세월속에 묻히고,
두메산골엔 구성진 뻐꾸기 울음소리만 가득하다.
와운마을 찾아가는 길.
서울에서 경부와 대전~진주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
함양에서 88올림픽고속도로 광주 방향으로 잡는다.
지리산 IC로 나와 24번 국도타고 남원 방면으로 6km
인월에서 산내가는 60번 군도 따라가면 산내면소재지.
우회전해서 726번 지방도로를 따라 가면 뱀사골 입구.
뱀사골에서 와운마을까지는 차를 가지고 갈 수 없다.
4km는 산책 삼아 걷는 게 좋고 와운 마을은 대부분 민박.
허름하긴 해도 산골 정취에 취해 하루쯤 묵고 싶은 곳.
'돌아갈 때는 성삼재나 정령치를 넘는 드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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