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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차 북한사찰순례 문화유적답사기 (5)
김형근 편집인
청천강 수력발전소
2015년 9월 6일 묘향산 보현사 가는 길
오늘은 묘향산 북한의 대표적인 사찰 보현사를 가는 날이다. 평양에서 묘향산 까지는 대략 2시간 거리다.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거의 필수적으로 방문하는 곳이 묘향산이다. 여기에는 보현사가 있고 또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생전에 받았던 선물들을 전시해놓은 ‘국제친선전람관’이 있다. 이곳에는 남한과 중국을 비롯하여 일본, 미국, 유럽, 중동 등 전세계에서 선물한 물건들이 있는데 이 물건들을 보는 것도 커다란 흥미거리이다.
청천강을 따라 가면서 보는 강가에는 단체로 작업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청천강의 물은전에 보다 훨씬 적었다. 가믐이라고 한다. 어느 곳에서는 깃발을 들고 수 십명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청천강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묘향산 입구에있는 북한에서도 경치가 좋기로 10번째 안에 든다는 향산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은 느낄 수가 없었다. 무엇이 변하는 것이다. 상원암이라는 돌로 만든 큰 이정표가 보였다. 주변과 잘 어울리는지는 모르겠다. 오전에는 ‘국제친선전람관’을 구경하고 묘향산 약수터에서 점심을 먹었다. 북한에는 약수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많이 팔리는 것이 신덕샘물과 강서생물이다. 그런데 강서샘물은 콜라 처럼 똑 쏘는 맛을 느끼는데 위장병에 좋다고 한다. 강서생물은 신덕샘물보다 2배가 비싸다. 묘향산 샘물 맛은 이 강서생물과 비슷하였다.
보현사 9층탑
보현사 경내사진
필자는 이번까지 보현사에 4번째로 방문한다. 보현사에는 딸린 암자도 많다. 보현사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가면 불영대, 상원암 등이 있다. 2005년 1차 순례 때에는 불영대를 거쳐 상원암까지 갔다. 불영대는 임진왜란 때 전주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상원암은 해발 565미터로 ‘향산 제일 암자’라고 알려진 곳인데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걸려있다. 암자의 법당은 아늑하고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이곳에서 보는 묘향산 풍치는 참으로 아름답다. 여기까지 가려면 2시간 정도 산길을 가야 한다. 2013년 2차 순례 때에는 오른쪽으로 올라가서 하비로암을 방문하고 보현사 뒤쪽에 있는 서산대사가 오랫동안 주석했던 금강굴도 방문하였다. 조선시대 500여 년을 통틀어 최고의 승려로 꼽히는 서산대사(1520~1604)는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승병의 총수(總帥)로 더욱 유명하다. 그의 본명은 현응(玄應)이고 법명은 휴정(休靜), 호는 청허(淸虛)이나 별호인 서산(西山)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전국의 명산을 떠돌던 서산대사는 묘향산의 금강암에 오랜 기간 머물렀다. 묘향산은 서북의 명산이란 뜻에서 서산(西山)이라 불렸는데 그의 별호인 서산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선에 대한 견해를 밝힌 ‘선가귀감은 법정스님이 한글로 번역하였고 이를 다시 영어로 폴 현각 스님이 영어로 번역하여‘The Mirror of Zen’이란 이름으로 샴발라에서 출판되었다.
우리 일행이 들어가자 보현사 입구에서 안내 강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봤는데 2차 순례 때 우리를 안내하던 혜정보살은 아니었다. 그러나 혜정보살은 맨 마지막 종각에서 잠시 만나기는 했다.
아래 글은 필자가 2 차 순례를 마치고 쓴 북한사찰순례기 2번째 글로 2013년 11월에 실린 글을 그대로 옮긴다.
북한에서 출판된 ‘조선의 절 안내’라는 책에 의하면 보현사는 고려시기인 1042년에 처음 세우고 이조 중기와 후기에 걸쳐 다시 지은 절이라고 한다. 천년 사찰인 셈이다. 이 곳에는 조계문, 해탈문, 천왕문, 9층탑, 만세루, 8각 13층탑과 중심 건물인 대웅전이 있고 또 관음전, 영산전, 해장원, 만수각,수충사, 팔만대장경 보존고 등의 건물이 있다. 이 사찰의 특징중의 하나가 9층탑과 8각 13층 탑 두개가 대웅전 앞에 앞 뒤로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세루 앞의 9층탑은 그냥 지나친다. 하지만 이 탑은 아주 귀중한 탑이다.
절의 중심은 예나 지금 이나 일주문에서 대웅전에 이르는 공간이다.대웅전과 그 앞에 놓여있는 탑이 절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보통의 경우, 대웅전 앞에 두 개의 탑을 세운다면 나란히 가로로 놓게 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보현사에는 두 개의 탑이 앞뒤로 세워져 있다. 보현사의 탑들이 이렇게 선 까닭은 무엇일까? 앞쪽에 위치한 9층탑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졸한 맛이 돋보이는 고려시기의 석탑이다. 북한에서 국보 142호로 지정할 만큼 그 자체로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지만 보현사에는 2인자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보현사 8각 13층탑,
이 탑은 보현사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보물이다. 그런데 이 탑이 세워진 것은 9층탑이 건립된 후 한참만의 일이었다.
[탑에서 보면 1탑 1금당형식이었는데 그 이후에 교리변천상 만세루와 하나의 탑을 더 건축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처음에, 보현사의 중심탑은 9층탑이었고 대웅전과 1탑 1금당(법당)의 구조였다. 그런데 절의 규모가 커지면서 그 가운데 만세루가 들어섰고, 대웅전 앞의 탑을 가로막은 형상이 되었다. 이에 13층탑을 새로 만들어 중심탑으로 삼았다. 바로 이 때문에 보현사는 두 개의 탑이 앞뒤로 서있는 독특한 구조를 갖게 된 것이다. 이 탑이 고려 석탑의 백미로 손꼽힌다.
우리 순례단은 앉아서 주지 스님의 반야심경 독경을 들었다. 주지스님과 기념촬영도 하고 안내 강사의 설명을 들으며 부속 건물들을 둘러보았다. 기념품을 파는 곳에서는 전에는 볼 수 없었던 한복도 팔고 있었고 전에는 팔지 않던 물건들을 많이 팔고 있었다. 이런 변화보다 아주 큰 변화는 유점사 종 타종 때 느낄 수 있었다. 전에는 타종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무료로 타종을 할 수 있게 했는데 이번에는‘이런 명종을 타종하는 것은 매우 귀한 기회이니 마땅히 그에 상당하는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이 종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알아서 내라고 하였는데 안내 강사가 그렇게 설명하면 안된다고 하고 여러 사람이 한데 돈을 $100 정도 모아서 종을 치라고 한다. 우리 일행중 4-5명이 다소 얼떨떨한 기분으로 각자 성의껏 돈을 내고 타종을 하였다. 다 합해서 $100는 조금 못되었다.
‘명종을 타종 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돈을 내야 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남한의 고찰에 있는 오래된 종을 방문객이 돈 10만원 정도 주고 칠 수는 없다. 100만원을 주고 치자고 해도 안된다. 여러 사람이 모아서 $100를 내고 유서 깊은 명종을 타종하는 것은 오랜 기억에 남을 것이다. 하지만 전에 여러 번 보현사를 방문한 필자는 이러한 변화가 왠지 이상하게 생각이 되었다. 차라리 남한처럼 보여는 주되 종을 치게 하지 말았으면 어떨지 모르겠다.
보현사 13층탑 앞에서 참가자들과 기념사진
평양에서 만난 사람들
이번 순례에서 느낀 것은 중국인 여행자들이 많았다. 유럽 사람들도 드문 드문 만났다. 미국에서 온 사람들이나 남한출신 사람들은 거의 만나지 못했지만 인상적인 몇 사람을 만났다. 평양과학기술대를 설립한 김진경 목사님과 학교 관계자들을 비행기 안에서 만났다. 또 한 사람은 부타페스트에 산다는 50대 초반 남성인데 기내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같다. 이 교포는 남한에서 대학을 마치고 유럽으로 유학을 갔다고 한다. 매년 평양에 온다고 했다. 조명관계 일을 하는데 그 일과 관계 있는 일을 하러 온다고 한다.
가장 인상적인 만남은 그 다음날 이었다. 8월 30일 법운암 방문을 마치고 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으로 갔다. 그곳에서 김필주 박사를 만났다. 김필주 박사는 농학박사인데‘평양과학기술대학’학장으로 있었다. 명함을 보니 미국의 미네소타 대학교와 농업분야 국제기관에서 일한 경력이 있었다. 한국 거주지는 강남이었다. 평양과학기술대학은 기독교계가 평양에 만든 대학이다. 이 대학에서 북한에 과학기술과 농업기술을 전하고 있다고 한다. 이 대학 수업은 모두 영어로 진행된다고 한다. 앞으로 국제금융과 보건대와 의대로 그 영역을 확장할 계획이라고 한다. 김필주 박사는 토질이 나빠 농사가 힘든 황해도에 목화를 재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공로로 김 박사는 북한에서 수여하는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안내인이 설명을 한다.
김 박사에 관한 연합뉴스 보도를 소개한다.
북한은 2014년 3월 7일 지난 20여년간 대북 농업지원 활동을 해온 재미동포 농학자 김필주(77) 평양과학기술대학 농생명실험개발연구원 원장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통신은 김 원장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한 이유에 대해 "애국의 뜨거운 열정으로 조국의 농업과학 발전에 이바지했다"고 소개했다.
학위 수여식은 이날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렸다. 김 원장은 지난 20여년간 북한 농업 분야에 대한 지원 활동을 펼쳐왔으며 특히 북한 토양에 맞는 목화 품종을 개량·재배해 북한에서는 '목화할머니'로 불린다.
함경남도 영흥(현재 금야군)이 고향인 그는 서울대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1962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시시피주립대에서 종자학으로 석사, 뉴욕 코넬대에서 종자생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 원장은 북한 당국으로부터 황해도 내 4개 농장 3천ha(약 900만 평)를 임대받아 목화를 비롯한 각종 농산물을 재배하고 선진 영농기술을 현지에 전수하고 있다.
7-8년전 워싱턴 DC에서 발행되는 중앙일보에도 김필주 박사에 대한 장문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부분 발췌하여 싣는다.
‘목화 할머니’김필주 박사는 자신의 인생은 크게 4막으로 나뉜다고 했다. 북한에서 태어나 보낸 유년기, 대학을 졸업하기 까지 보낸 한국에서의 삶, 박사 과정부터 시작된 미국 생활, 그리고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고향인 북한에서 시작한 목화 사업이 그의 4막 인생의 소제목이다.
김필주 박사와 북한 농민들
김 박사는 최근 뉴스위크가 ‘세계 여성의 날’ 100주년을 맞아 선정한 ‘세계를 뒤흔드는 여성 150인’에 유일한 한국계 2명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는“지난해부터 다시 남북관계가 긴장 속에 있지만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식량과 비료 등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0년 전 남편과 사별한 김 박사는 여전히 1년에 10회 이상 북한을 드나들며 농사 일에 바쁘다. 그의 최종 목표는 북한 주민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행복 마을 만들기’다.
“저는 북한에서 종교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꼭 성경책을 나눠줘야 복음 전파는 아니니까요. 대신 크리스천의 사랑을 담고 그 사랑을 나누면 그로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제 인생관처럼 근면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열심히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해나가겠습니다.”
또 한 사람의 인상적인 사람은 젊은 20대로 북한학으로 박사학위를 하는 사람이었다. 이름은 잊었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성장하다가 어린 시절 이민을 갔다고 한다. 평양에서 만나 잠깐 인사를 나누었는데 돌아오는 날 고려항공에서 다시 만났다. 필자의 짐을 대신 들어주기도 한 그 젊은이는 서방언론에 보도된 북한 보도를 믿을 수가 없어서 거주하는 호주(?)에서 북한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인상 좋고 겸손한 젊은 사람이었다. 해외에서 북한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일텐데 좀더 많은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이 글을 쓰면서 평양에서 만나지는 못했지만 북한에 관한 일을 하고 있는 개신교 목사님을 알게 되었다. 그는 뉴질랜드에 사는 김남수 목사이다. 2010년도 부터 2015년도 까지 약 20-30만 그루정도 과일나무와 일반묘목들을 북한에 들여보내고 신품종우량과일나무 품종을 약 430 여 종목 가져갔다. 이러한 공로로 2013년 2월 22일 만수대의사당에서 김룡진 내각부총리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김필주 박사보다 1년 먼저 받은 것이다. 지금 종교적인 차원이던, 인도주의적인 차원이던 해외에서 북한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보면 거의 대부분 기독교인들이다. 불교인들 중 재미동포로 이런 활동을 한 사람은 도안스님이었다. 도안스님은 북한이 고향도 아니었고 순전히 남북화해와 평화를 위하는 마음으로 1991년부터 거의 매년 북한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L.A. 관음사 주지 도안스님이 2006년 입적 이후 해외동포 사회와 북한불교계와 교류는 끊겼다. 해외동포사회의 한국불교계에서 북한과 하는 유일한 것은 미주현대불교의‘사찰순례’프로그램이다. 2005년 1차, 2013년 2차, 그리고 2015년 3차로 다녀왔다. 10년동안 고작 3차례 다녀온 것이다. 올해도 가려고 한다. 하지만 이 사찰순례는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필자는 북한 방문자가 북한에서 선교나 포교는 원칙적으로 금지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북한을 방문하는 스님, 목사, 일반 평신도 그 누구도 선교적인 차원에서는 활동을 할 수가 없다. 종교 장소에서는 가능하다. 사찰에서 법회는 할 수가 있고 평양의 교회에서 예배는 한다. 하지만 언론에 보도가 되지 않아서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해외동포 중에서 북한에 가서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농업기술을 전수시키고 인도주의적인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 대부분이 기독교인이다. 북한 주민들은 이 사람들의 행동을 본 후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불교인들이 불교 교리가 아무리 타종교에 비해 훌륭하고 뛰어난 종교라고 생각할지라도 불교인들의 자비행동이 없으면 비불교인들에게 불교는 호감을 줄 수가 없다. 북한 주민들이 볼 때 교육사업을 비롯한 북한사회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면 그들은 기독교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된다. 필자가 보기에 북한의 종교정책은 변하고 있다. 10년 전에 북한 스님들은 삭발하지 않았다. 이제는 모두 삭발을 한다. 우리가 노력하면 그에 상응하여 북한 종교 정책은 변할 것이다.
불교계 무엇을 할 것인가?
북한에서 불교에 대한 정책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는 필자는 자료 부족으로 잘 알 수가 없다. 그런데 특히, 한국에서 발행되는 인터넷 신문‘통일뉴스’윤법달의‘한국전쟁 후의 북한의 종교지형’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김세률은 1956년 3월 10일부터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1기 11차 회의에서 토론을 통해 “오늘 공화국 북반부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은 우리 승려와 불교도들의 생활에서도 긍정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신앙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받고 있는 북반부의 불교도들은 과거의 기생적 의존생활로부터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자립적 생활을 영위하는 길에 들어섰다”고 말하고, “1955년에만도 평남도의 향풍사, 황남도의 자혜사를 비롯한 16개의 사찰이 수리 복구되었으며 금년에는 금강산 표훈사, 황주 성불사 등 10여개의 사찰이 복구 중에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북한에서는 지금으로부터 60년전인 1955년부터 전쟁으로 부서진 사찰의 복구사업을 한 것이다. 그 결과 지금 북한에는 한 개의 교회가 있지만 사찰은 광법사, 법운암, 정릉사, 묘향산 보현사 등 60여개가 있다. 그리고 관광지 주변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복원을 확장하고 있다. 북한의 이런 정책은 종교적인 관점인지 문화적인 관점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북한이 지금까지는 타종교에 비해 불교에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이들이 이런 우호적인 정책을 계속 유지하게 하려면 우리 불교인들이 북한의 사찰을 좀더 자주 방문하고 북한 사회와 교류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신교에서 설립한 평양과학기술대학교 처럼 북한 사회에서 관심있는 불교 프로젝트를 만들어야 한다.
필자는 그 동안 한 번의 개인방문과‘북한 사찰순례 총 4번의 방문을 한 경험과 언론에 보도된 북한관련 자료를 토대로 구상한 불교 프로그램이 있다. 그것은 한국문화 부흥시기인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고려자기, 고려불화, 고려사경 중 고려사경과 고려불화의 남북 해외동포 불교계가 함께 만나 학술 세미나를 하는 것이다. 고려사경과 고려불화는 북한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들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인데 고려시대의 수도가 현재의 개성이다. 그러므로 고려사경과 고려불화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개성을 중심으로 이들 문화를 알리는 행사를 한다면 이들 문화는 남북은 물론이고 전세계에 널리 홍보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또 이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남북한 문화 동질성 확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아주 좋은 문화관광상품을 개발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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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