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10월 14일(월) / CGV 강변 / 사랑에 빠진 것처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에 빛나는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신작
아키코를 중심으로 진실과 거짓, 그리고 사랑이란 욕망이 맴도는 세 남녀의 종착점은 어디일까요?

심영섭 평론가
시네마톡을 시작하기에 앞서 여러분들께 질문을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결국 얘기하지 않았던 책과 여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저는 같은 책을 두 번 읽는 것, 그리고 같은 여자를 두 번 사귀는것은 고역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이하 압바스) 감독은 왜 주인공들이 가장 감정이 격앙 돼 있을 때 마다 뚝뚝 끊고 그것들을 안 보여주는 걸까요? 노리아키가 밖에서 난동을 부리는 장면이나, 아키코가 타카시의 집에 가지 않겠다고 소리 지를 때 조차도 화면 밖에 있죠.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 부분만 싹 발라서 안 보여주는데 그 이유가 굉장히 궁금해지죠.
먼저 배우 소개를 하겠습니다. 타카시로 분한 배우는 오쿠노 타다시입니다. 연극배우인데 오디션에 응모해서 붙은 겁니다. 압바스 감독이 원래는 60대 교수로 설정했었는데 이 배우를 캐스팅하면서 80대로 고쳤답니다. 그리고 아키코로 분한 배우는 다카나시 린입니다. CF 모델 출신이고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한 경력이 있습니다. 또 노리아키로 분한 배우는 카세 료입니다. 이 배우는 영화 스펙트럼이 굉장합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구스 반 산트 감독의 <레스트리스>, 그리고 최근엔 홍상수 감독하고도 영화 찍었잖아요. 잘 나가는 감독들하고 영화 다 찍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여담이지만 카세 료가 압바스 감독과 홍상수 감독이 뭐가 비슷하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둘 다 대본을 아침에 안 주는 게 비슷하다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압바스 감독은 2~3일 전에 주는데 본인이 원하는 연출 방향이 뚜렷하고 연기를 못 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계속 연기 하지말라고 제지를 당하면서 현장에서 계속 운동을 시켰대요. 왜냐면 영화에서 다혈질로 화를 내야하기 때문에 아드레날린을 흥분시키기 위해서 운동만 계속 했다고 합니다. 홍상수 감독은 현장에서 일어나는 즉흥적인 모든 걸 다 받아들이죠. 압바스 감독은 굉장히 계산적이에요. 그런 점도 오즈 야스지로와 굉장히 잘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오즈는 이 주인공의 각도, 고개 돌리는 것까지 모든 걸 다 연출 시킨 거거든요. 그대로 하지 않으면 굉장히 화를 내고 그랬다고 해요. 압바스 감독도 상당히 원하는 연출을 머리속에 갖고 계신 분이신 것 같습니다.
질문 A
영화를 보면 프레임 밖에 사건들이 프레임 안에 인물들을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심영섭 평론가
영화의 공간은 스크린 안에만 있지 않죠. 이 영화는 스크린 밖을 아주 액티브 하게 쓰는 영화중에 하나라고 할 수가 있어요. 첫 장면부터 아키코는 소외되어있죠. 아키코의 목소리는 들리지만 카메라는 마치 다른 사람인 양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리아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죠. 또 타카시는 전화로만 외부와 소통합니다. 단절하려고 하죠. 이 영화에서 공간의 안 과 밖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키코가 택시에 탔을 때 택시기사와 한 공간에 있지만 따로 찍혀집니다. 두 사람은 기능적인 관계로만 엮여있지 서로 전혀 마음을 나누지 못하는 거죠. 이 점은 타카시와 아키코의 관계도 마찬가집니다. 타카시와 아키코가 집에서 둘이 있을 때 한 프레임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심지어 아키코가 타카시에게 침대로 들어오라고 얘기할 때 아키코는 TV의 이미지로 비춰져 있죠. 그리고 타카시는 그 옆에 있습니다. 두 사람은 사실 단절 돼 있는 거죠. 그러다가 관계가 변화하는 게 밤에서 낮으로 바뀌고 차 안에 두 사람이 나란히 있게 됩니다. 근데 더 재미있는 건 세 인물이 모두 이중역할을 하잖아요. 아키코는 낮에는 여대생, 밤에는 에스코트 걸, 타카시는 낮에는 교수님이지만 밤에는 집에 여자를 불러들이고, 남자는 낮에는 건실한 경영인 같지만 밤에는 스토킹 비슷한 행동을 하고, 그래서 셋이 마치 유사가족처럼 있을 때 비로소 한 프레임에 모두를 잡죠.
즉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는 소통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전 이 영화가 형식은 많이 다르지만 오즈 야스지로와 연결 돼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역에서 손녀를 기다리는 할머니 입장에서 영화를 만들면 <동경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즈의 영화처럼 일상을 조용히 보여주다가 별거 아닌 거에 갑자기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이 있거든요. <사랑에 빠진 것처럼>에도 그런 면이 있다고 봐요. 예를 들면 택시 안에서 아키코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할머니를 보다가 립스틱 칠할 때 눈물 한 줄기를 흘리는 장면이나 마지막에 타카시가 아키코를 치료해 주려는데 노리아키가 들이 쳐가지고 소리 지르는 그런 장면을 보면 솟구쳐 오르는 찡한 감정을 느낄 수 있죠.
질문 B
영화를 보면 계속해서 신경이 거슬릴 정도로 잡음이 들리거든요? 이런 부분도 심 평론가님께서 말씀하신 스크린 밖도 하나의 공간이다 라는 설정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 하는 것 같았거든요.
심영섭 평론가
저도 전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요. 카메라는 택시 안과 밖에 다 있어요. 아키코가 택시를 타고 갈 때 도쿄의 풍광이 비춰지잖아요. 그 때보면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고 소음이 들어옵니다. 모두 아키코에게 전달 혹은 전송되는 메시지에요. 근데 그 목소리를 듣는 아키코의 얼굴에는 슬픔이 넘칩니다. 왜냐, 그 메시지는 진심으로 아키코에게 전달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죠. 이 영화의 주제가 소통에 관한 것이라면 바로 이러한 소음 혹은 전달되지 못한, 마치 “편지는 그곳에 도달되지 못 한다”는 철학적 명제처럼 이 영화의 소리들은 본래의 의도대로 하나도 전달이 되지 못 해요. 그렇다면 그런 소리들은 전부 소음일 뿐인 거죠. 이란 감독한테 일본말이 소음이듯이 의미가 되지 않는다면 전부 다 소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계 자체가 소통 되지 못하면 앵무새를 길들이는 거하고 똑같아요. 여러분이 애인하고 마음이 통하지 못하면 앵무새 길들이는 거랑 똑같은 거죠. 그래서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본다면 이 영화에서 소음은 절대로 그냥 사용 한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근데 이 영화, 되게 유머스럽지 않아요? 예를 들면 팬 벨트 값을 안 받잖아요? 그리고 아키코한테 받겠다고 하는데 아키코를 때려서 진짜 받아내죠. 그리고 이웃집 여자가 굉장히 흥미로운 캐릭터인데, 이 여자에게도 나름의 세계와 스토리가 있습니다. 근데 그 여자를 프레임 안에 가둬놓고 앵무새처럼 계속 얘기하게 하죠. 이 영화는 사실 닮았다는 게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데, 전 아키코가 유령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그림 속에 있는 기모노를 입은 여자인 동시에 타카시의 아내와도 닮은, 그 누구와도 닮은 그런 여자에요. 그럼 도대체 이 여자는 몇 명의 껍데기를 갖고 있는 겁니까? 아키코는 굉장히 기표적인 여자예요. 심지어 그걸 표현해내려고 감독이 그림 속 여자와 정확히 겹치게 하잖아요. 또 그 앞에서 포즈도 여자랑 똑같이 취하잖아요? 그런 걸 보면 아이코는 부유하는 이미지의 여자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웃집 여자는 계속 그 자리에 있잖아요. 부유하지 않죠. 다카시만을 평생 사랑했는데 얼굴이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구애에 실패하죠.
영화 안에서 사람들이 진짜로 만나는 순간들은 짧습니다. 근데 감정이 격앙되거나 유리창이 깨지는 한이 있어도 만나야 합니다. 어떤 순간에는 진실을 얘기하는 게 거짓말을 자꾸 하는 거 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덜 상처가 됩니다. 노리아키는 오독의 즐거움을 모르고 아키코는 진실을 말하는 법을 잘 모르죠. 그리고 그것이 설사 거짓말 보다 덜 상처가 된다는 것도 아직 잘 모르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자꾸만 전화기로 가닿지 않는 어떤 것, 목소리가 흩뿌려지는 어떤 것으로 우리가 소통을 하는 것이죠. 그러나 저는 그런 것들은 정말 의미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우리가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이 저는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라고 봅니다. 왜냐, 사랑을 한다는 것은 존재와 공간과 시간이 합치되는 행동이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만약에 우리가 한 공간에 있는데도 시간이 뒤틀려 버리면 만나지 못하죠. 또한 공간이 뒤틀려도 만나기 어렵습니다. 노리아키와 아키코는 한 공간에 있는데 한 쪽은 계속 거짓말만 하고 한쪽은 계속 추궁만 하고, 그게 무슨 사랑입니까? 따라서 물리적 공간만 있을 뿐이지, 심적으로 겹치질 못하는 사람들이죠. 즉 저는 그러한 점에서 공간과 시간과 존재가 합치는 순간이 아주 짧더라도 굉장히 빛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영화는 그런 빛나는 순간이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질문 C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오히려 아키코 보다는 노리아키가 더 사랑에 더 빠져있고 타카시의 이웃집 여자도 깊은 사랑에 빠져 있는 느낌이 들었는데요. 그리고 타카시도 아키코에 대해서 설레임이 느껴졌는데 막상 아키코에게 느껴지는 설레임은 전혀 없었어요. 오히려 사랑하지 않는 남자친구를 계속 질질 끌고 있는 느낌이잖아요. 왜 압바스 감독은 아키코를 저런 캐릭터로 설정을 했을까 궁금하더라고요.
심영섭 평론가
제가 볼 땐 이 영화의 원제인 Like someone in love,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 것처럼 척을 하는 하는 거죠. 근데 이 영화의 굉장히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가 오인 하는 거잖아요. 노리아키는 타카시를 오인하고 아키코는 아무것도 아니라서 누구의 것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여자, 그리고 모든 사람이 오인하는 여자에요. 누구와도 닮아있지만 굉장히 어려운 여자, 근데 돈을 벌고 살려고 하는 거 보면 주체로써의 삶을 영위 하려고 하는 거 같죠. 그러나 어찌 보면 굉장히 막연하고 모호한 여자거든요? 근데 사실 막연하고 모호한 여자의 전형은 팜므파탈이에요. 그런데 아키코는 누구를 사랑하는지도 모르고, 끝까지 누구한테 마음을 주는지도 잘 모르겠고, 이런 부분이 이 영화의 굉장한 긴장감이라고 생각해요. 아키코가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이 영화는 되게 웃긴 영화가 되요. 긴장감이 사라지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아키코의 장악력을 고려해 볼 때 아키코가 명백해 지는 건 되게 재미가 없는 것 같은 그런 게 있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