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11권, 7년(1681 신유 청 강희(康熙) 20년) 1월 2일(병진)
丙辰/御營廳以資實日匱, 鳩聚銅錫, 欲以今月鑄錢啓稟, 許之。
어영청(御營廳)에서 자금[資實]이 날로 부족해지자, 구리와 주석을 모아 이 달에 돈을 주조하고자 계품(啓稟)하니, 허락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8책 508면
한 줄 짜리 짧은 기사인데 내용이 참 오묘하다. 어영청에서 자금이 부족해지니 구리와 주석을 모아 - 아다시피 구리합금의 재료다. - 돈을 주조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을 허락하고?
그런데 이런 기사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특히 숙종 이후 빈번하게 나온다.
숙종 7권, 4년(1678 무오 청 강희(康熙) 17년) 6월 3일(임신) 壬申/上引見大臣、備局堂上。 許積、吳挺緯以關西、湖南鑄錢事爲請, 上命兩道監兵營鑄錢。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허적(許積)·오정위(吳挺緯)가 관서(關西)·호남(湖南)의 주전(鑄錢)하는 일을 가지고 청하니, 임금이 명하여 양도(兩道)의 감영(監營)·병영(兵營)에서 주전하도록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8책 387면 숙종 8권, 5년(1679 기미 청 강희(康熙) 18년) 1월 19일(을묘) 傳曰: “錢文實是一國之通貨, 民亦樂從云。 不可不繼鑄, 以責成効, 而但銅鐵本非我國所産, 故停役之日多, 良可惜也。 今下內藏銅鐵百斤, 送于賑恤廳, 以爲補用之資。” 전교하기를, “전문(錢文)은 실로 한 나라에 유통하는 화폐이다. 백성들도 역시 즐겨 따른다고 하니 계속 주조하여 그 효과를 책임지고 보아야 할 것인데, 다만 동철(銅鐵)이 우리 나라에서 산출되지 않기 때문에 그 주조하는 일이 정지될 때가 많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이제 대내에 저장한 구리 1백 근을 진휼청(賑恤廳)에 보내어 모자라는데 보태 쓰도록 하라.”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8책 402면
숙종 13권, 8년(1682 임술 청 강희(康熙) 21년) 11월 30일(계유) 許鑄錢于全羅監營。 從監司李師命之請也。 전라 감영(全羅監營)에서 돈을 주조(鑄造)하도록 허락하였다. 감사(監司) 이사명(李師命)의 청을 따른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8책 615면 숙종 19권, 14년(1688 무진 청 강희(康熙) 27년) 3월 13일(병술) 領議政南九萬, 請平安道限一年鑄錢。 上從之。 영의정(領議政) 남구만(南九萬)이 평안도(平安道)에 1년을 한도로 하여 주전(鑄錢)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9책 124면
역시나 재정적으로 필요하면 해당 관청이나 기관에서 돈을 주조할 것을 청하고 임금은 그것을 허락하여 쓰도록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이지?
아마 어느 나라의 경우다. 그 나라는 재정적자에 무역적자에 쌍동이 적자로 해마다 국가채무가 늘어나고 있는데, 그것을 기축통화인 자국의 화폐를 추가 발행함으로써 해소하고 있었다. 결국 그렇게 지나칠 정도로 시장에 풀린 기축통화로 말미암아 유동성의 과잉을 해소하고자 무리하다가 마침내는 전세계적인 금융대란이 오기도 했었던 것이고.
말하자면 당시 조선의 화폐제도란 한 마디로 미국의 달러본위제와 마찬가지로 상평통보라고 하는 화폐의 발행을 통한 화폐본위제였던 것이다. 즉 필요한 만큼 돈을 주조해서 그것을 시장에 풀어 재정에 쓴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조선만의 경우는 아니었다. 근대적인 은행이 나타나고 신용화폐라는 것이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화폐는 현물화폐였다. 아마 괴테의 파우스트에 이런 부분이 잘 묘사되어 있을 텐데, 10이라는 가치를 갖는 현물 - 대개는 귀금속을 가공하여 화폐로 찍어냄으로써 그 공임과 화폐를 발행한 주체의 신용을 더해 15에서 20 정도의 가치로써 유통하는 것이 당시의 화폐였다.
위의 기사에서도 돈을 주조하는 데 필요한 구리와 주석을 확보하여 그것으로써 돈을 찍어내어 재정에 보태고 있듯, 근대 이전의 화폐란 화폐를 발행하는 데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여 거기에 발행주체의 신용을 더해 유통시키는 것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또한 조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럽이나 일본 등지에서는 돈을 발행하는 주체가 제각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앞서도 말했듯 돈이라는 것이 돈을 찍어내는 비용에 발행자의 신용이 더해져 유통되는 것이다 보니 일단 돈을 찍어내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상당히 남는 장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냥 금이나 은, 구리 등의 형태로 유통하는 것보다야 아무래도 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화폐를 유통시키는 편이 남았고, 그래서 개나소나 화폐유통에 뛰어든 결과 화폐의 종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그만큼 시장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졌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오늘날의 기축통화와 같은 기준통화다. 예를 들어 대항해시대에는 신대륙으로부터 유입된 막대한 금으로 인해 스페인의 재정이 무척 풍족했기에 스페인의 금화는 품질에 있어 매우 신용이 높았는데, 그래서 지금도 스페인 금화라 하면 마치 금화의 상징처럼 이야기되고 있을 정도다. 특히 베니스에서 발행된 두카트화는 이슬람세계에서 발행되던 디나르화를 밀어내고 지중해와 유럽세계에서 기준통화로써 상당기간 쓰이고 있었다.
조선의 경우도 역시나 아무래도 남겨 먹어야 하기 때문에 돈의 규격이나 가치가 또 발행처나 발행시기에 따라 제각각인 경우가 많았는데, 그래서 그것이 또한 조선의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었다. 숙종 때부터 그래서 계속해서 발행처를 일원화시키려 시도했었지만 그조차 정조 9년 잠시 호조에서 화폐발행을 전담하다가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말았었고. 조선이 통일된 근대적인 화폐를 갖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지나 개항이 되고 근대적인 유럽의 화폐제도를 받아들이면서부터였다.
숙종 25권, 19년(1693 계유 청 강희(康熙) 32년) 7월 3일(을사) 引見大臣備局諸臣, 領議政權大運啓言; “近緣諸衙門所請, 輒許鑄錢, 故私鑄狼藉, 多有淆雜之弊。 此後只定一衙門, 專管鑄錢似宜。” 右議政閔黯, 請只令地部, 句管鑄錢。 上命定式。 又因兪夏益言; “命私鑄之罪, 依《大明律》絞, 而從者減一等。”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권대운(權大運)이 아뢰기를, “요즈음 여러 아문(衙門)에서 청할 적마다 번번이 돈을 주조(鑄造)하도록 허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사로이 주조한 것이 어지럽게 뒤섞여서 난잡한 폐단이 많이 있습니다. 이 뒤로는 다만 한 아문만을 지정하여 돈을 주조하는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민암(閔黯)은 지부(地部)7762) 로 하여금 돈을 주조하는 일을 맡아서 관리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일정한 법칙을 정하라고 명하였다. 또 유하익(兪夏益)의 말로 인하여 돈을 사사로이 주조한 죄는 《대명률(大明律)》에 의거하여 교형(絞刑)에 처하되, 종범(從犯)인 자는 1등을 감(減)하라고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9책 281면
아무튼 이런저런 문제들이 있기야 했지만 그런 것이야 어차피 전근대사회에서 거의 반드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이었고, 어찌 되었든간에 숙종대에 이르러 조선은 비로소 제대로 화폐를 발행하여 유통시킴으로써 본격적으로 화폐경제에 들게 되었다.
사실 조선조정이 화폐사용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꽤 오래 되었었다. 아니 고려 때부터 조정은 항상 화폐를 발행하여 그로써 시장에 유통시키고 세금을 거두려 했었지만,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시장 여건이 성숙되지 않은 탓에 괜히 시험 볼 때 외워야 할 화폐의 종류만 늘려 놓은 채 매번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토지대장이 불타고, 병자호란까지 겹치면서 많은 토지가 황폐화되고 유민이 발생하면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전세로는 재정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더구나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찾은 명나라 장수들을 통해 자극받은 것도 있고 해서 선조 때부터 이미 화폐의 유통과 상공업의 장려에 대한 여러 제안들이 나오기에 이르렀었다.
다만 문제라면 돈을 찍어낼 구리가 부족했다는 것인데, 효종연간 구리광산이 발견되면서 그 문제마저 해결되고 있었고, 청과 일본을 잇는 중계무역의 이익이 상당한 규모에 이르면서, 화폐의 발행과 유통은 당연한 수순이 되었다. 일단 제대로 걷히는가도 알 수 없는 전세보다야 얼마든지 현물화가 가능한 화폐야 말로 조선조정의 고질적인 재정난을 해결할 유일한 대안이기도 했었고. 그래서 마침내 숙종 7년 성숙된 여건에 힘입어 조선조정은 본격적으로 화폐의 발행과 유통을 시작하게 된다.
숙종 7권, 4년(1678 무오 청 강희(康熙) 17년) 1월 23일(을미) 乙未/引見大臣、備局諸臣。 始以用錢定奪。 錢爲天下通行之貨, 而惟我國, 自祖宗朝, 累欲行之而不得者, 蓋以銅鐵非土産, 而且民俗與中國有異, 有窒礙難行之弊也。 至是, 大臣許積、權大運等, 請行之。 上問于群臣, 群臣入侍者皆言其便, 上從之。 命戶曹、常平廳、賑恤廳、御營廳、司僕寺、訓鍊都監, 鑄常平通寶, 定以錢四百文, 直銀一兩, 行于市。 擢前別檢趙顯期、別檢李雲徵、參奉權歆, 直陞六品職。 顯期, 金錫冑之姊夫也。 尹鑴薦其才, 上問于許穆, 對曰: “臣雖未見其人, 而人多稱其能文有才, 臣嘗記認之矣。 得見甲寅封事, 則其所設施, 果有見識, 非大言無實者比也, 實合擢用。 此外又有李雲徵、權歆二人, 雲徵則文才操行卓異, 智慮勇力過人, 歆則周詳謹厚, 且有才局。 竝宜勿拘常例, 而陞出六品也。” 從之。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제신(諸臣)을 인견(引見)하고, 비로소 돈[錢]을 사용하는 일을 정탈(定奪)하였다. 돈은 천하에 통행(通行)하는 재화(財貨)인데 오직 우리 나라에서는 조종조(祖宗朝)로부터 누차 행하려고 하였으되 행할 수 없었던 것은, 대개 동전(銅錢)이 토산(土産)이 아닌데다 또 민속(民俗)이 중국(中國)과 달라 막히고 방해되어 행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었다. 이에 이르러 대신(大臣) 허적(許積)·권대운(權大運) 등이 시행하기를 청하매, 임금이 군신(群臣)에게 물어, 군신으로서 입시(入侍)한 자가 모두 그 편리함을 말하였다.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호조(戶曹)·상평청(常平廳)·진휼청(賑恤廳)·어영청(御營廳)·사복시(司僕寺)·훈련 도감(訓鍊都監)에 명하여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여 돈 4백 문(文)을 은(銀) 1냥(兩)의 값으로 정하여 시중(市中)에 유통하게 하였다. 전(前) 별검(別檢) 조현기(趙顯期)·별검(別檢) 이운징(李雲徵), 참봉(參奉) 권흠(權歆)을 발탁하여 곧바로 6품직(品職)에 올렸다. 조현기는 김석주(金錫胄)의 자부(姊夫)였는데, 윤휴(尹鑴)가 그 재주를 천거하매, 임금이 허목(許穆)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臣)이 비록 그 사람은 보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이 많이 그가 글에 능하고 재주가 있음을 일컫기에 신이 일찍이 기억하여 알았습니다. 갑인년1855) 의 봉사(封事)를 얻어 보았더니, 그 설시(設施)한 것이 과연 견식이 있고, 말만 크게 하고 실상이 없는 자와 비유할 것이 아니니, 진실로 탁용(擢用)하기에 합당합니다. 이밖에도 또 이운징과 권흠 2인이 있는데, 이운징은 문재(文才)와 조행(操行)이 탁이(卓異)하고 지려(智慮)와 용력(勇力)이 과인(過人)하며, 권흠은 주밀 자상하고 근후(謹厚)하며 또 재국(才局)이 있으니, 아울러 상례(常例)에 구애하지 말고 승급하여 6품을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8책 379면
사실 숙종이야 말로 조선의 역대 국왕 가운데 가장 평가절하된 왕이라 할 수 있는데, 송시열을 죽이고 노론의 기세를 꺾은 것 하며, 노론과의 연합을 통해 왕권을 강화시키려 한 것 하며, 특히 화폐의 발행과 유통으로 시장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재정을 확충한 것등은 이후 영정조의 중흥기를 이루는 밑바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영정조의 치세란 숙종의 기초가 없이는 힘들었을 것이니, 고작해야 장희빈 스캔들로만 기억되는 것은 참으로 억울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아무튼 이렇게 화폐를 유통시키기 시작한 것은 좋은데, 그러나 갑작스럽게 화폐경제로의 전환을 시도함에 따 그 부작용도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었었다.
其四, 論鑄錢之弊則曰: 自夫錢貨之行, 風俗日?, 物價日湧, 甚至萊?鹽竪, 亦皆棄穀而索錢。 農民有穀, 交易莫通, 故不得已賤穀價而?錢路, 欲換一疋之布, 已費數石之穀, 無錢農民, 安得不重困乎? 富家積錢如山, 而假貸貧民, 窮春出百錢之債, ?得斗米之糧, 至秋用數斗之米, 僅償百錢之債。 竝其甲利而論之, 則所貸一斗, 所償至於六七斗。 若令貸之以穀, 償之以穀, 則息不過一倍而已, 中外民庶, 皆願其罷。 今雖不能銷已鑄之錢, 何可無端加鑄, 以益其無窮之弊乎? 네번째 돈 만드는 폐단을 논하였는데, 이르기를, “대체로 전화(錢貨)가 행해지면서부터 풍속이 날로 경박해지고 물가가 날마다 뛰어올라 심지어 나물 캐는 할미와 소금 굽는 아이도 모두 곡식을 버리고 돈을 구하려 합니다. 농민(農民)은 곡식이 있어도 교역(交易)을 통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곡물이 값이 천해지고 돈이 유통되는 길이 행해져 한 필(疋)의 포(布)를 바꾸려면 이미 몇 석(石)의 곡식을 소비해야 하니, 돈 없는 농민들이 어떻게 거듭 곤궁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자집에서는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빌려주는데, 춘궁기(春窮期)에는 1백 전(錢)의 빚을 내어야 겨우 쌀 한 말의 식량을 얻을 수 있지만, 가을에 이르러서는 몇 말의 쌀을 가져야 겨우 1백 전의 빚을 갚을 수 있습니다. 그 갑리(甲利)까지 논한다면 빌려 준 것은 한 말인데 갚는 것은 여섯 일곱말에 이릅니다. 만약 곡식으로 빌려 주고 곡식으로 갚게 한다면, 이식(利息)이 갑절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중외(中外)의 백성들이 모두 그것을 혁파하도록 원합니다. 지금 비록 이미 만든 돈을 녹여 버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어떻게 까닭없이 더 만들어 그 무궁한 폐단을 더 보태려 합니까?”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12장 A면 【영인본】 41책 33면
이것은 지금에도 해당되는 문제로, 농사를 지어 현물을 생산하는 농민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현물을 화폐로 바꾸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화폐를 보유한 - 요즘 말로 치면 독점자본의 횡포가 발생하고 마는 것이었다. 현물가치가 비쌀 때 상대적으로 저렴한 화폐를 빌려주었다가는, 현물가치가 쌀 때 비싼 화폐로써 돌려받게 되니, 그로 인한 차익은 상당한 것이었고, 고리대에 더한 고리대로써 농민의 삶을 압박하는 요인이 되고 있었다. 더구나 화폐를 발행하는 관청 자신이 화폐발행을 통한 차익을 노리고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흥선대원군 때의 당백전과 민씨일족의 패악 가운데 하나이던 당오전이었다. 돈 1전을 주조할 재원으로 100전 가치의 돈을 만들어 뿌리니 이익이야 100배를 당연히 넘을 테고, 그 부담은 모두 시장에 전가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와 비슷한 일이 현대에도 첨단 금융기법을 쓴다는 어느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딜 가나 돈 가지고 장난치는 인종들이 하는 짓은 모두 같은 모양이다.
숙종 8권, 5년(1679 기미 청 강희(康熙) 18년) 9월 15일(정미) 賓廳啓曰: “錢文變通事, 依下敎, 來會商確, 則臣積、臣致和、臣始壽及睦來善、閔黯、金德遠、閔宗道、吳始復等以爲: ‘公私異價, 勢有窒礙, 不可不急時變通。 改定四十文, 以順民情。’ 臣大運及柳赫然、金錫冑、吳挺緯、李元禎、鄭維岳等以爲: ‘變法太數, 民愈不信, 持久不變, 自可通行。’ 左議政閔熙雖不來參, 其意欲爲不變, 而僉議必欲變通, 則亦當從之云。 論議參差, 終未歸一, 而錢文一事, 專委於赫然、錫冑、挺緯三人主管, 今三人皆以爲, 仍存二十文, 終必可行, 依此施行何如?” 傳曰: “變法太數, 雖非美事, 勢有窒礙, 民皆不便, 則不可不急時變通, 以順民情。 其令改以四十文行用, 而不從法令者, 論以重律。” 初行錢議定時, 鑄小錢四十文, 以代銀一錢, 民甚便之。 未幾, 旋以二十文爲一錢, 民遂不信, 不遵朝令, 依前以四十文用之, 故筵中累發此議, 至命齊會商確, 至是自上親加裁定。 厥後四十文亦廢, 稍大其制, 以十文行用, 而換銀之際, 或倍或過於倍矣。 빈청(賓廳)에서 아뢰기를, “전문(錢文)을 변통하는 일은 내리신 전교대로 모두 모여서 상확(商確)해 본즉, 신(臣) 허적(許積)·정치화(鄭致和)·오시수(吳始壽) 및 목내선(睦來善)·민암(閔黯)·김덕원(金德遠)·민종도(閔宗道)·오시복(吳始復) 등은 ‘공용과 사용의 값이 서로 다르므로 형편상 구애됨이 있어 빨리 변통하지 않을 수 없으니, 40문(文)으로 개정하여 백성의 뜻을 따르자,’ 하고, 신(臣) 권대운(權大運) 및 유혁연(柳赫然)·김석주(金錫胄)·오정위(吳挺緯)·이원정(李元禎)·정유악(鄭維岳) 등은 ‘법을 변경함이 너무 잦게 되면 백성이 더욱 불신하지만, 그대로 유지하고 변경하지 않으면 저절로 통행이 될 것이다.’고 하였으며, 좌의정 민희는 참석은 하지 않았으나, 자기의 뜻은 변경하고 싶지 않지만 여러 의논이 반드시 변경하고자 한다면 또한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의논이 엇갈려서 마침내 한군데로 귀결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전문에 관한 한 가지 일은 유혁연·김석주·오정위 세 사람이 전적으로 수관하도록 위임하였더니, 지금 그 세 사람 모두 20문을 그대로 둔다면 마침내는 반드시 시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의해서 시행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법을 너무 자주 변경하는 것이 비록 좋은 일는 아니지만, 형편상 구애됨이 있어 백성들이 다 불편해 한다면 빨리 변통하여 백성들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40문으로 고쳐 행용하도록 하되, 법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중률(重律)로 논죄하라.” 하였다. 당초 행전(行錢)의 의논을 정할 적에 소전(小錢) 40문을 주조하여 은전(銀錢) 한 돈[錢]을 대신케 하니 백성들이 매우 편리하게 여겼는데, 얼마 안 되어 곧바로 20문으로 한 돈을 삼으니 백성들이 드디어 믿지 않고 조종의 영을 따르지 않으므로, 종전대로 40문으로 쓰게 한 것이다. 때문에 연중(筵中)에서 여러 차례 논의되어, 일제히 모여서 상확(商確)하라는 명이 내리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친히 재정(裁定)을 행하였으나, 그 뒤 40문 또한 폐지하고 그 제도를 조금 키워 10문으로 행용(行用)케 하니, 돈을 바꾸는 즈음에 더러는 갑절이 되고, 더러는 갑절도 넘었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8책 422면
하긴 이미 이때에도 은 1전을 동전 40문으로 정했다가 차익을 늘려보겠다고 20문으로, 또 10문으로 낮추는 바람에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은이 아무래도 기준일 터인데, 은 1전이 동전 40문이었다가 동전 20문으로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발행하는 조정 입장에서야 대박이겠지만 그만큼 화폐의 액면가치는 높아지고 그것은 바로 조선의 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었다. 1문 가치의 동전을 2문, 4문 가치로써 써야 할 테니. 결국 조선조정은 전혀 예상치 못한 시장의 반응에 앗뜨거라 놀라며 원상복구시키고 있었다.
참고로 동전 1문은 한 푼 줍쇼 할 때 그 1푼이었는데, 이 1문이 열 개 모이면 1전이 되었고, 이 1전이 다시 열 개 모이면 1냥이 되었다. 1관은 다시 이 1냥이 열 개 모인 것이었다. 그러니까 동전 40문이란 4전, 즉 동전과 은전의 교환가치는 4:1이었던 셈이다. 당시 쌀 한 섬 144킬로그램이 5냥 정도였으니 지금의 20킬로그램에 5만원 정도인 쌀 소매가격과 비교하면 대략 돈 1냥이 지금 돈 7만원 정도가 되는 것이다. 역산하면 1전은 7천원, 1푼은 700원. 한 푼 달라고 할 때 1천원짜리 주면 300원 거슬러주면 얼추 맞아떨어진다.
숙종 31권, 23년(1697 정축 / 청 강희(康熙) 36년) 9월 21일(무술) 全州幼學李澂等上疏, 極陳行錢之弊, 下廟堂。 備邊司覆啓曰: “錢貨利害, 亦且相參, 有難一朝猝罷。” 上從之。 전주(全州)의 유학(幼學) 이징(李澂) 등이 상소하여 돈이 유통되는 폐단을 극력 진달하니, 묘당(廟堂)에 내렸다. 비변사에서 복계(覆啓)하기를, “화폐[錢貨] 유통의 이익과 손해 역시 서로 참작이 되므로, 하루아침에 갑자기 혁파하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9책 469면
아무튼 그러나 그러한 부작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조선 조정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화폐의 발행과 유통을 밀어붙여야만 했었으니, 이미 당시에 화폐경제로의 전환은 조선의 경제에 있어 대세였기 때문이었다. 숙종 연간은 특히 한발이 잦아 농업생산이 불안정했기 때문에 재정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안정적인 화폐의 수입이 필요했던 것이다. 화폐경제로 바뀌어가던 모든 시대의 모든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조선의 화폐경제로의 전환은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늦은 편에 속한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바록 숙종대에 본격적인 화폐경제로의 진입이 이루어지고 있기는 했지만 이런 걸로 자본주의 맹아론 어쩌고 하기엔 솔직히 낯뜨거운 일인 이유다. 그저 단지 시대적 필요에 의해 현물이 아닌 화폐로써 그 경제의 근간을 이루게 된 것을.
그냥 조선이라는 사회가 이렇게 발전되었구나 하는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식민지근대화론이 말이 안 된다고 자본주의 맹아론은 더 말이 안 되는 것이니. 역사는 주의가 아니다. 목적이 사실을 지배하는 것은 역사가 아닌 협잡일 뿐이다.
전황에 대해서도 써볼까 하다가 글이 너무 길어져서 그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과연 언제쯤 쓸 수 있을 지... 뭐 언젠가는 쓰기는 쓰겠지만... 일단 지금은 너무 귀찮고 피곤한 관계로 그냥 패쓰.
대한제국은 과연 힘이 없어 망했는가?
한국 민족주의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 가운데 하나가 그놈의 지랄맞은 "약소국 컴플렉스"다. 우리는 약해, 우리는 약해, 우리는 약해... 그러니까 강해져야 해, 그러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해져야 해, 강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상관없고 어떤 희생도 무릅써야 하고... 황우석 사태도, 디워 사태도, 지난 두 번의 대선도 결국 그러한 컴플렉스에서 비롯된 바 컸다.
결국 뭐냐면,
"대한제국은 힘이 없어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고 36년의 식민지 치하를 겼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약소국이라 망했으니 망하지 않으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인데... 민족주의를 자처하는 파시스트들이 항상 쓰는 논리다.
"힘이 없어 당했으니 힘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노동자는 받아야 할 임금과 누려야 할 대우를 포기해야 하고, 당연히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신념이야 어찌되었든 강제로 군대에 가서 무기를 들어야 하고, 심지어 여성들은 자신의 자궁을 나라를 위해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세계적으로도 카미카제에 대해 가장 우호적인 것이 한국인들이다.
"왜 우리는 저런 게 없을까?" "저런 걸 본받아야 한다." "우리도 저렇게 해야 한다."
이 블로그에서도 예전에 카미카제에 대해 포스팅했을 때 그런 리플들이 적잖이 달렸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을 비웃거나 폄하해서는 안 된다나? 정말 병이라 해도 좋을 텐데,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대한제국은 그렇게 약한 나라가 아니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과 불평등조약을 맺고 개항을 할 당시에도 사실 일본과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았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될 당시 대한제국의 군대가 보유하고 있던 병력이나 무기들은 그렇게 한 번 저항조차 못해 볼 정도로 형편없지도 않았다. 심지어 당시 대한제국에는 일본군이 보유하지 못한 마우저 소총이나 크루프 속사포 같은 최신무기마저 다수 장비되어 있었으니.
물론 정면으로 맞부딪힌다면야 당시 대한제국의 전력으로 일본과 전쟁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시까지 동아시아 최대, 최강의 제국이었던 청과도 싸워 승리하고, 세계최강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던 러시아와도 비록 극동에서의 제한전이기는 했지만 사실상의 승리를 이끌어냈던 일본군이었다. 2만 2천 명 규모의 대한제국 군대로 30만에 이르는 일본군을 상대해 이긴다는 것은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이상의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도 일본이 러시아보다 더 강해서가 아니었다. 사실 러일전쟁이라고 하지만 러시아가 동원한 전력은 극동의, 러시아가 보유한 전력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당시 일본은 보유한 모든 가용한 전력과 자원을 러일전쟁에 투입하고도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던 반면 러시아는 여전히 러시아 본토에 만주에서 잃은 그 이상의 전력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러시아가 끝내 손을 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 결국 멀리 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를 지나 만주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데 따른 부담이었다. 역시 발틱함대가 대한해협에서 일본 함대에 괴멸당한 것도 희망봉을 멀리 돌아 항해하느라 지치고 소모된 끝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본 함대에 포착되어 불리한 상황에서 교전을 강요당한 결과였고.
다시 말해 대한제국이 그럴 의지만 있었다면 지리적 이점을 무기로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서의 소모전에 빠져들도록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일본을 지리한 소모전에 빠져들도록 할 수 있다면 아직 재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상당히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일본으로 하여금 유리한 조건에서 협상에 응하도록 강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 대한제국이 그럴 의지만 있었다면 대한제국을 도울 나라들도 적지 않았다. 일단 영국은 이미 이전에 미국에 조선의 독립을 보장할 것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바 있었고, 미국 역시 시어도어 루즈벨트 자신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도저히 일본에 반대하여 조선인들을 위해 개입할 수가 없다. 조선인들은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주먹 한 방도 날릴 수가 없었다."
개입할 빌미만 있다면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조선의 문제에 개입할 의사가 있었다. 원래 미국이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는 것을 용인키로 한 것도 러시아가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고 보면, 굳이 일본이 아니어도 좋았고, 괜히 일본을 키워 태평양에서 경쟁자를 하나 더 늘리느니 만만한 조선에 그 역할을 대신 맡겨도 좋았다. 스스로 그럴 의지가 있었고, 그 의지만 내보일 수 있었다면 말이다.
하긴 1876년 불평등 조약을 맺고 강제로 개항을 했다고는 하지만 당시 조선과 일본의 차이가 그렇게 컸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아직 일본의 산업은 취약했고, 군사력도 압도적이라 할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일본의 상인들이 조선의 경제를 교란시킨 주력상품이 영국으로부터 수입한 옥양목이었고 보면, 단지 먼저 개항하여 유럽의 제국과 교역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제외하고 일본이 조선을 압도한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물론 청이라고 하는 존재는 조선이 자주적으로 어떠한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 큰 걸림돌이었다. 미국 등과의 조약에 있어서도 청은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고, 사실상 조선을 속국처럼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이미 나라의 문은 열려 있었고 서구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특히 텐진조약 이후 청과 일본이 동시에 조선에서 철군한 뒤로는 자주적으로 나라를 개혁할 짧지만 소중한 기회가 주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조선은 어떠했던가? 과연 일본과 같이 과감하게 내정을 개혁하고 문물을 일신하는 각오가 되어 있었던가?
아마 당시 지배층의 정신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독립협회였을 것이다. 원래 독립협회는 황제인 고종과 당시 대한제국의 관료들이 개화파 지식인들과 손을 잡고 외세에 대항하여 국권을 지키고자 만든 단체였다. 민비가 살해당하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도망가 있던 상황에서 외국의 간섭이 극대화되고 조선의 국권이 위태로워지자 민간의 운동을 통해 국권 - 정확히는 고종의 왕권을 확립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활동은 조정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비판과 입헌군주제로까지 확장되고 있었고, 결국 자신의 권력강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겨지자 고종은 어용단체인 황국협회로 하여금 그들에게 테러를 가하도록 사주하기에 이르고 있었다.
하기는 나라의 국운이 흔들리는 와중에 나라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돈을 들여 자기 생일잔치를 열었던 고종이다. 심지어 왕이랍시고 벼슬 팔아 그 돈으로 황제의 개인금고인 내탕금을 채우고 있었으니, 그러한 내탕금에는 광산과 철도와 삼림 등의 조선의 자원들을 열강에 헐값에 넘긴 댓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그 일부는 은행을 세우는 등 나름대로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위해 쓰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대부분은 여전히 고종의 손에 남아 왕권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목적으로 쓰이고 있었다.
즉 전근대적인 전제군주였던 고종에게 있어 조선은 곧 왕이고 왕이 곧 조선이었고, 따라서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모든 것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러시아와 일본 등의 열강의 제국주의 침탈을 잠시나마 저지하는 중대한 역할을 했던 만민공동회 등의 자발적인 민중의 움직임이나 요구는 외면한 채 오로지 왕실의 안위만을 위해 열강들과 거래하고 타협하고 양보하며 조선의 잠재력을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없잖아 있기는 하다. 일본이야 메이지 천황이나 삿쵸 등의 웅번들이나 결국 바쿠후 체제에서 변두리의 비주류에 불과했었다. 따라서 그들이 주류로 올아서기 위해서는 기존의 막번체제를 해체할 필요가 있었고, 그를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일본의 근대화였던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당시 고종에게는 아버지 대원군이 남겨놓은 강력한 왕권이 남아 있었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근대화니 개화니 하는 것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요소일 뿐, 그래서 자기 주머닛돈으로 은행도 설립하고, 학교도 짓고 할 수는 있어도, 개화파의 지식인이나 민중이 자신의 경쟁자로 나서는 것은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1904년부터 항일의병이 일어났을 때에도 그들 의병에 대해 폭도로 규정하고 일본군으로 하여금 토벌하도록 요청한 것도 바로 이들 고종과 조정의 관료들이었다. 차라리 나라야 뺏길지언정 무지렁이 백성들이 자신의 권위를 넘보는 것은 용납지 못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일본의 협박에 의한 것이었다 두둔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외국의 군대로 하여금 나라의 국권을 지키겠다 나선 의병을 토벌토록 한 것에는 - 그것도 폭도라 규정한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만일 당시 고종이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에 대항하도록 명령했고, 그래서 일본에 비해 한참 부족하기는 하지만 대한제국의 군대와 의병이 합세하여 일본에 저항하려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비록 전력에서는 열세일지 몰라도 바다 건너 원정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일본군으로 하여금 조선에서 소모전을 강요당하도록 했다면? 그리고 그것이 극동에서의 또다른 이익을 구하는 다른 열강을 자극할 수 있었다면? 물론 가정처럼 무의미한 것은 없지만 구한말의 역사가 그리 썰렁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가 나라가 망한다는데 정부는 하는 것 없고 민간의 의병만이 저항의 전부였다니.
다시 말해 당시 조선 - 대한제국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은 단순히 힘이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먼저 지배계급 자신이 전략도 없었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민중의 자발적인 의지를 오히려 두려워하고 경계하고 있었다. 나라의 힘을 결집시켜야 할 때 자신들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해 오는 민중들에 대해 오히려 적개심을 품고 있었고, 그 결과 차라리 나라를 빼앗길지언정 그들과 함께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왕인 고종조차도 그랬다. 작은 양보 하나 하기조차 두려워하고 오로지 왕위만을 챙기려 한 결과 조선은 힘을 결집하여 저항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조차 잃었던 것이다.
실제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사실상 일본에 병탄되어 사라진 뒤로도, 그토록 멍청하고 탐욕스러웠던 고종에 대해서조차 조선의 민중들은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다. 왕이었고 황제였기에, 그들의 군주였기에, 군주란 곧 나라였기에, 여전히 왕에 대한 충성심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역량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으니...
그렇다고 조선의 민중들이 아주 반동적이기만 해서 근대화를 반대하기만 했다면 모를까, 만민공동회에서 보듯 이미 근대적인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자각이 있었고, 이후 3000개가 넘는 학교가 세워진 데서 보듯 근대화에 대한 인식도 있었다. 다만 기득권을 지키는 데 골몰하느라 그를 외면하고 있을 뿐. 모든 것은 그럴 의지도 있고, 그럴 힘도 있었음에도, 그 의지와 힘을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제대로 살리지 못한,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의지만을 갖고 있던 지배층의 탓이었다. 고종의 탓이었다.
역사상 힘이 없어서 나라가 망한 예는 오히려 극히 드물다. 대개는 힘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내적인 역량을 제대로 결집하지 못한 탓이 컸다. 그럴 의지도 있고, 그럴 힘도 있는데, 그럴 의지와 그럴 힘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이다. 알량한 기득권이 그것을 놓기보다는 차라리 망하기를 선택한 때문이었다. 바로 대한제국처럼.
힘이 없어서 나라가 망하는 것이 아니다. 지킬 의지가 없으니 망하는 거다. 지킬 가치가 없으니 망하는 거다. 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이들조차 제대로 결집시키지 못하니 망하는 거다. 힘이 없어 망한다? 힘을 추구하느라 그 강대한 힘에 치여 망하는 경우가 그런 예다. 오로지 힘에만 집착하느라 작은 부분을 보지 못한 끝에 그 작은 부분으로 망하는 것이다.
힘을 모으자? 뜻을 모으자? 역량을 결집하자? 누구를 위해서? 누구에 의해서? 왜? 어떻게? 고종이 하자는대로 조선의 인민들이 그대로 따랐다면 조선은 살아남았을까? 그저 고종이 하자는대로 뜻을 모으고 힘을 모았다면 조선은 망하지 않고 살아남았을까? 그래서 군사력만 일본을 넘어섰다면 조선은 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행여나!
한국의 민족주의가 위험한 이유다. 결국에는 그렇게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힘의 결집을 강요하고 있으니. 고종이 그랬던 것처럼 오로지 국가와 민족이라는 기존의 권위와 권력만을 위해 자발적인 모든 의지를 희생하고자 하고 있으니. 왜곡된 역사관이란 이래서 어처구니가 없다. 힘이 약해서? 오로지 힘이 약해서만? 그 이전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다.
덧)뭔가 쓰다가 엇길로 샌 것 같기는 하지만... 뭐 글쓰기 싫어 죽겠는데 의무방어전으로 이 정도면 준수한 편이니까
조선의 노비에 대해서...
조선의 노비에 대해 이해하자면 먼저 노예란 무언가에 대해서부터 살펴야 한다. 노예란 무엇일까? 그리고 노예는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바뀌어 갔는가? 사실 노비에 대한 오해는 바로 이러한 노예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점이 크다.
원래 노예란 약탈을 통해 얻어지는 이방인이었다. 같은 무리 가운데서 노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다른 무리 가운데서 포로를 잡거나 납치해서 노예로 부리던 것이었다. 아니면 아예 침략자에 의해 하나의 무리 전체가 복속되어 노예로써 부려지거나. 즉 그들은 처음부터 타자로서 그 사회에 동화될 수 없는 존재였으며 따라서 그 사회의 잠재적인 위험요소였다.
고대사회에서 - 아니 비교적 최근은 남북전쟁 전의 미국 남부에서 노예에 대해 가혹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같은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었다. 문화나 종교, 풍습 등이 모두 달랐다. 아직 이질성이 남아 있기에 자신을 부리는 이들에 대한 적개심이 남아있을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그를 통제하는 데 공포 이상 가는 것이 없는 법이었다. 오로지 물리적인 강제력으로만이 노예로 하여금 복종토록 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아직 생산이 부족했거나, 더 많은 생산을 확보하기 위한 등의 이유도 있기는 했지만 일단 이런 측면에서는 그런 게 컸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방인일지라도 오래도록 그 사회에서 노예로 머물다 보면 그 사회에 어느새 동화되게 된다. 또한 이미 노예를 부리고 있다면 굳이 외부로부터가 아니더라도 그 사회 내부로부터도 노예를 조달하려는 경우도 생겨나게 된다. 더 이상의 외부로부터의 노예의 유입이 없다면 이래저래 노예라고 영원히 이방인일수만은 없게 되는 것이다. 종교도 같고, 어느새 사고방식이나 문화 역시 비슷해지게 되면 아주 타자로서 인식할 수만은 없게 되니 어느새 동질감을 서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노예에 대해 가혹하게 대한 것이 그들이 그 사회에 위협이 되는 이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었다면, 동질성을 갇게 된다면 이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대우는 필요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남북전쟁을 전후해 미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처음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데려다 노예로 부릴 때야 노예는 그저 사람 모습을 한 짐승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흑인노예와의 잦은 접촉을 통해 많이 익숙해지고, 흑인들이 기독교와 영어를 그들의 종교와 언어로써 받아들임에 따라, 점차 이들 흑인들에 대해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북부는 물론 노예해방에 반대하던 남부에서도 그같은 움직임이 일찍부터 있었는데, 결국은 같은 사람임을 - 동질성을 인식하게 되고 나서는 과거와 같이 노예로 부리는 것은 꽤나 난감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사회에서도 그리스에 비해 세계제국으로써 보다 보편적인 세계에 살았던 로마인들은 노예에 대해 상당히 관대한 편이었다. 사유재산도 축적할 수 있었고, 노예주의 배려에 의해 노예에서 해방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일단 노예에서 해방되고 나면 시민권을 얻어 자유민이 될 수도 있었다. 그에 대한 차별 또한 사실상 없었다. 게르만의 경우는 해방노예라 할지라도 일정기간 차별적인 지위에 있어야 했지만 역시 시간이 흐르면 자유민과 별다른 차이 없이 존재할 수 있었다.
더구나 특히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일단 절대유일신인 야훼를 섬기고,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한다고 하는 점에서 노예와 노예주 사이에는 이전보다 더 강한 종교적인 유대가 형성되게 되었다. 굳이 로마교회에서 기독교도를 노예로 삼는 것을 반대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기독교도를 포로로 억류하여 노예로 삼는 것은 반대하고 있었으므로, 그 영향으로 노예에 대한 대우는 이전보다 더욱 향상되었었다. 즉 이미 중세 초기가 되면 노예라고 해도 신분상 노예라는 것이나, 영주에 대한 의무에서 일반 예속농보다 더 불리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차이가 없는 신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중세 초기 장원에 아직 남아 있던 노예들은 일단 자신의 망스를 소유할 수 있었다. 더 많은 세금과 부역을 지불해야 하기는 했지만, 일단 노예라 해도 자신의 경작지에서 생산되는 생산물은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었다. 결혼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서, 심지어 서로 신분이 다른 콜로누스나 자유민과도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자식들의 신분은 어머니를 따라 정해지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매질을 당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다. 더구나 지속적으로 장원의 노예들은 해방되어 농노로 바뀌어갔기 때문에 노예의 수는 갈수록 줄어 10세기가 넘어가고 나면 프랑스의 장원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자유민 또한 상당수가 농노로 전락하여 사라지고 있기도 했다.
바로 조선의 노비가 그랬다. 고려 전기까지 노예란 전쟁포로였다. 삼국시대에도 끊임없이 삼국이 서로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전쟁포로들이 각 사회에서 노예로 공급되고 있었고, 고려 전기에도 후삼국의 혼란기를 거치며 발생한 많은 전쟁포로들이 노비로 전락하고 있었다. 광종이 노비안검법을 통해 해방시키려 했던 노비도 바로 이들이었다. 조선전기 고려 각지를 떠돌던 무자리들을 양인으로 삼거나 공노비로 삼은 것도 그런 일환이었다.
그러나 말했듯 처음에는 전쟁포로였어도 시간이 흐르고 자식에서 자식으로 대를 이어가다 보면 처음의 그런 의식은 자연스레 흐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같은 집안에서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고, 또한 이래저래 부대끼고 하다 보면 어느새 동질감마저 느끼게 된다. 노비가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얼핏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서로 동일집단이라고 하는 인식이 어느새 자리잡고 있었기에 당시로서는 매우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더구나 여기에 성리학이 가족의 연장선상에서 사회질서를 정의하는 유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나오면서, 노비는 사회의 최하층부로써 그 존재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의 노비들을 보자면 일단 그 인신이 소유주에게 구속되어 있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많은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먼저 사유재산을 가질 수 있었고, 법적으로 주인으로부터 사적인 제제를 받지 않을 것을 보장되고 있었다. 나아가 사유재산을 축적하여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면 노비에서 풀려나 평민이 될 수도 있었다. 주인이 풀어주거나 공을 세워 나라로부터 인정받으면 또 평민이 될 수 있었는데, 때로 그런 이들 가운데 아예 관직에 나가 양반이 되는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공노비의 경우는 아예 그 특수한 신분을 이용해서 각종 이권에 개입해 많은 부를 축적하는 경우도 나왔었고. 오죽하면 집안이 망해 노비에게 얹혀 사는 양반의 이야기며, 노비가 일을 해서 주인인 양반을 부양하는 이야기마저 기록에 나올까? 아마 박제가가 그렇게 집이 가난해서 노비가 밖에 나가 일을 해 벌어 온 쌀로 연명하고 했었다는데... 심지어 19세기에 이르면 아예 노비가 주인보다 더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경우마저 나타나고 있었다.
사실 이게 또 웃기는 것이 노비는 일단 주인에게 종속된 몸이라 역이나 세금을 지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아예 속량을 할 수 있음에도 노비의 신분을 유지하는 경우도 당시에는 적지 않았었다. 19세기 순조 때 공노비를 해방한 이유도 이처럼 세금을 거둘 수 없는 노비와 양반의 수는 늘어나는데 평민의 수는 갈수록 줄어드니 역과 세수의 확보차원에서 단행한 것이었었다. 사실상 이때에 이르면 사노비 역시 실질적으로 주인에 종속되어 봉사하는 경우는 겨우 체면유지나 할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고, 대부분 외거노비로써 자기 재산을 가지고 소유주의 영향 아래 사실상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으니, 여전히 신분적인 제약은 있었지만 갑오개혁에서의 사노비해방이란 거의 형식에 불과하다 할 정도로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재미있게도 당시의 기록등을 보면 사대부들이 무척 이 노비들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보는 앞에서만 열심히 하는 척을 한다든지, 때려도 말을 안 듣는다든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생각같아서는 매질을 하고 억지로 고통을 주어 열심히 하도록 하면 될 것 같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아마 바로 그러한 노비에 대한 비효율성이 또 점차 노비를 풀어주어 반자유농으로 풀어주도록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노비로 예속시켜 부리기보다는 자기 땅 경작해서 그 생산물을 갖다 바치도록 하는 쪽이 더 이익이었을 테니까. 노예가 사라지게 된 이유가 또 그것이었다.
아무튼 따라서 조선의 노비란 노예라기보다는 - 중세초기의 노예보다도 이후 나타나는 농노에 가까운 존재라 할 수 있다. 토지 대신 여전히 주인에게 종속되어 있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자기 재산도 가질 수 있었고, 가정도 자유롭게 꾸릴 수 있었고, 종속되었다는 전재로 상당한 자유도 누릴 수 있었다. 물론 그에 대한 댓가로써 종속된 만큼 여러 봉사를 바쳐야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나마도 생산이 증가하고 노비 역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사실상의 예속관계가 해체되고 있었고.
다만 유럽과의 차이라면 유럽의 경우는 여러 요인들로 인해 점차 농노마저도 사라지고 자유민이 되어갔던 반면, 조선의 경우는 또 조선만의 여건으로 인해 조선 후기까지도 명목상으로나마 노예제가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화폐경제도 발달하고, 생산도 증가하는 등 여러 이유들로 인해 사실상 노예제라기도 뭣한 상태가 되어 버리지만.
참고로 공노비의 경우는 또 사노비와 달라서 이와 비슷한 예를 들자면 고대 로마에서의 전문직 노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관청에 소속되어 국가가 필요로 하는 각종 노역을 제공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는 각종 장인이나 수군 등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일들도 있었다. 공노비들이 부를 축적하고, 오히려 관에 속해 있다는 점을 이용해 때때로 문제를 일으키곤 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말이 관청에 속한 노비라는 것이지 사실상 하급 실무공무원에 가까운 신분이었으니.
즉 조선의 노비를 그저 노예로만 보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물론 노예와도 비슷한 부분이 아주 없지 않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중세유럽의 농노에 더 가까운 존재들이었고, 그나마도 조선후기에 이르면 상당한 자유를 획득하고 있었으니. 그런 것을 두고 노예제사회라 하는 것은 글쎄... 하긴 그런 시대구분 자체가 유럽중심의 사관이 만들어낸 편견이긴 할 테지만 말이다.
한국전쟁은 북의 남침에 의한 전쟁이 아니다?
한국전쟁은 분단 이후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 사이에 벌어진 여러 군사적인 충돌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났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이미 전시상태였으며 북한에 의해 일방적으로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는 주장은 허구다.
이건 들을 가치도 없는 개소리다.
당장 식민지 상황을 보자. 이미 1910년 8월 28일 경술강제병탄 이전에도 구일본제국은 통감등을 통해 대한제국의 내정에 깊이 간섭하고 있었고, 을사보호조약을 통해서는 아예 외교권을 박탈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한제국이 식민지가 된 것은 과연 언제인가? 1910년일까? 1905년 을사조약 이후일까? 아니면 러일전쟁이 끝나고 나서일까? 그도 아니면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이후?
그러고 보니 그게 있다. 성폭행 사건에 관련해서, 여자쪽에서 남자의 방으로 먼저 찾아가 단둘이 있는 상황을 자초했으니 성행위에 동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며 가해자에게 무죄판결을 내린 예가 있었다. 자, 이 경우에 여자가 남자와 밤늦게 술을 마시고 남자의 자취방으로 찾아갔으니 남자가 성폭행을 하기 전에 이미 그러한 모든 조짐이 있었고 그에 따라 여자가 동의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까? 과연 그럴까?
1980년대에도 파주의 외갓집을 찾으면 라디오에서 휴전선에서 북한군과의 교전이 벌어졌다는 뉴스를 심심치 않게 듣곤 했었다. 그러나 누구도 1980년대를 두고 남북간에 전쟁이 치러지던 동안이라 말하지 않는다. 김대정 정부 들어 서해에서 서로 상당한 인명 및 물적 피해가 발생한 군사적충돌이 있었음에도 역시 그 기간을 전쟁이 일어나고 있던 기간이라 말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이건 상식이다. 서로 사이가 나쁘다. 사이가 나빠서 만나면 으르렁거린다. 서로 욕도 하고 주먹으로 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과 작심하고 상대를 주먹이든 발로든 가격하고 그로 인해 싸움으로 번지게 되면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전까지의 다툼이 그저 사소한 다툼에 불과하다면 이때부터는 분명 어느 일방의 폭행으로 싸움이 벌어진 것이며, 이 경우 누가 먼저 폭력을 행사했는가 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왜? 사소한 다툼과 폭행은 다르니까.
마찬가지로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38선에서 사소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단순한 적대국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소요 정도지 전면전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전면전은 어디까지나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이 기습남침을 감행하면서 일어났었고, 사실상 이때부터를 한국전쟁으로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당연히 설사 서로 분쟁중에 있었어도 군사적인 침략을 감행한 북한과 김일성에게 있다.
도대체 어이가 없는 거다. 어떻게 하면 그 전에도 무력충돌이 있었다는 것이 명백한 침략을 침략이 아닌 것으로 여기는 이유가 되는가? 전쟁과 단순한 분쟁을 구분 못하는가? 뭐가 전쟁이고 뭐가 사소한 충돌인가 전혀 구분이 안 되는가? 더구나 그런 주제에 잘난체는... 웃기지도 않아서...
분명히 말하지만 전쟁은 북한이 일으켰다.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선제 기습남침을 함으로써 3년간의 참혹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아, 그러면 물론 그러겠지. 미국이 유도한 것이다. 미국이 남침을 유도한 것이다.
바보냐? 그래서 여자가 미니스커트 입으면 유혹하는 것이니 덮쳐도 상관없는 거지? 밤늦게 여자가 함께 술을 마시고 하면 한 번 대 준다는 것이니까 사양하는 게 미친 놈이지? 그런가? 그런 건가?
기존의 상식을 깬다고 비튼다고 그게 잘난 증거가 아니다. 정말 이런 병신들도 없다는 생각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말인지 막걸린지, 말이 안 나온다. 말이...
식민지근대화론이나 남침부정론이나... 지들만 잘난줄 알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