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선수
3·1절 경축 역전마라톤을 통해 국내외에 명성을 떨친 선수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우승한 황영조선수를 비롯 국내 첫 20분대 벽을 허문 김봉래씨(65)를 비롯 유명종(59·한전춘천지점) 김동훈(57) 김종선(67) 임장환(65) 신원균(68) 박동균씨(64)등을 손꼽게 된다.
강원육상이 낳은 선수 중 하이라이트는 61·62년부터 본 대회에 출전했던 김봉래씨와 유명종씨로 이 두 사람을 주축으로 한 김종선씨 등 5,6명이 60년대 마라톤 강원을 빛내던 주요멤버였다.
마라톤 등용의 관문인 동아마라톤에 참가한 선수들은 62년 박동균, 65년에 유명종 이상운(당시 재미교포) 주형걸 등이었고 65년에는 김봉래 참가, 한국최초의 2시간 19분4초 기록을 세워 그토록 어려운 20분 벽을 깨는데 성공했다.
김·유씨 두 사람은 66년 보스톤 마라톤대회에 출전, 김봉래가 10위(2시간24분 17초) 유명종이 12위 (2시간 27분 37초)를 차지했다.
김봉래는 이밖에 66년 멕시코전지훈련, 방콕의 아시아마라톤(4위), 68년 멕시코대회(35위) 등 화려한 해외원정 경력을 가졌는데 김은 64·65년 경부역전마라톤대회에서 유명종 김동훈 백승현 정기용 이인규(도체육회사무처장) 김종선 등과 팀을 이뤄 2연패의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유명종은 67년 동아마라톤에서 우승했다. 박동균은 3·1절 마라톤대회에 59년부터 연6회 출전, 매년 단체우승의 주역이 됐으며 62년부터 5년간 전국체전 도대표로 출전, 강원육상을 빛내고 66년 경부역전마라톤에선 4개 구간상을 휩쓸어 주목을 받았다
김봉래 임장환 등과 함께 3총사로 불렸던 김종선은 66년 동아마라톤2위, 임장환은 49회 전국제전 1만㎞경기에서 2위, 68년 조선일보 주최 한국마라톤 세계제패기념 단축마라톤에서 3위에 입상했다.
강원마라톤의 이정표를 세우며 한국마라톤의 주역들을 발굴해낸 춘천∼화천간 역전경주는 제15회 대회(74년)때부터 단체팀 구성의 어려움을 해소하고 신인들에게 등용의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단축마라톤대회로 변경됐다.
60년대의 역전경주가 3·1절 마라톤대회의 전통을 구축했다면 15회 이후 단축마라톤대회는 기록단축과 육상인구 저변확대를 본격적으로 이루는 전환점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강원일보사앞을 출발, 신북면 샘밭간을 잇는 20㎞ 단축마라톤대회의 첫해인 74년 당시 춘천농공고 신현섭이 일반부를 제친 1시간07분35초를 시발로 기록 단축도전에 나섰다.
고등부에 처녀 출전한 최경렬(現 한전마라톤감독)이 1시간8분34초를 기록, 먼 훗날 대성 가능성을 보였다.
이듬해인 75년에 우승으로 강원마라톤 족보에 이름을 올린 최선근(現 도시개발공사감독)이 제56회 전국체전에서 2시간27분36초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고 김봉래 유명종의 영광을 재현했다.
이때부터 또다시 한국마라톤계에는 3·1절 단축마라톤대회를 거친 강원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77년 31회 조일마라톤에서 신현섭이 우승한데 이어 82년 제60회 동아마라톤에선 한림대마라톤 창단 맴버였던 임정태가 2시간15분18초의 기록으로 금메달의 영광을 안았고 92년 제41회 일본벳부마라톤에서 황영조(2시간8분47초)가 전통을 이어갔다.
이들 선수들은 한결같이 3·1절 경축단축마라톤에서 대기록을 수립하며 일찍부터 가능성을 보였다.
신현섭 최경렬에 이어 등장한 임정태는 86년 남대부에서 1시간01분47초를 기록, 현재까지 최고기록으로 남아있고 황영조도 89년 고등부 10㎞에서 강원마라톤 사상 처음으로 30분대(29분58초) 벽을 깨 일찌감치 수퍼스타 탄생을 예고했다.
단축마라톤은 대회 초창기만해도 7개 단체팀이 출전했으나 18회 대회부터는 일선 학교에서 많은 선수들이 출전, 그 규모는 날로 늘어갔다.
80년 들어 출전선수가 100명을 넘어섰으며 82년부터는 아시안게임 및 올림픽 개최와 함께 마라톤상비군 발족에 따른 활성화 열기의 확산으로 300여명의 선수가 출전, 기록과 규모면에서 가히 국제대회를 방불케 했다.
이 기간에 배출된 국가대표로는 82년도에 고등부 20㎞에서 1시간3분5초로 한국신기록을 수립한 박병배와 90년 북경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인 김봉유, 경호·경부역전경주의 스타인 김기복·최돈정·박재오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마라톤 대들보들이 탄생했다.
특히 김기복(횡성출신)은 황영조의 1년 선배로 당시 국내에서 펼쳐진 대회 전반에 걸쳐 정상을 휩쓸어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했다.
황영조는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한 이후 우승소감을 피력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바로 김기복 선배였다”며 “만약에 몬주익때 김선배가 있었더라면 우승을 자신하지는 못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김기복은 한전소속 당시 군복무를 빨리 끝마치기 위해 국군체육부대 입대를 포기하고 방위근무를 선택함으로써 운동량 부족과 함께 체력관리에 실패하는 바람에 웅대한 꿈을 펼치지 못하고 야인이 되고 말았다.
3·1절 단축마라톤대회는 당시 전국 최고의 행사로 치러지고 있던 경부역전마라톤대회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강원도육상경기연맹은 3·1절 단축마라톤대회를 통해 경부역전경주대회에 출전할 도대표선수들을 선발했으며 매년 상위권에 입상함으로서 강원마라톤의 자존심을 구가해왔다.
황영조 이후 3·1절 단축마라톤 출신으로서 알려진 선수로는 이봉주와 함께 한국마라톤을 대표했던 김이용을 꼽을 수 있다.
한때 올림픽 우승후보로까지 지목됐던 김이용은 매번 중요한 시합을 남겨놓고 부상을 당하는 불운으로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침체의 늪을 벗어나지 못해 현재는 "물건너간 선수"로 각인돼 왔으나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감독을 맡아 후배양성에 노력하고 있는 황영조선수의 지도로 2004년도에 열린 전국체전에서 대망의 우승을 차지하며 또다시 재기의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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