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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말씀: 소생이 작성한 보잘것 없는 글을 많이 애독하여 주시고 수십차례의 격려 전화와 댓글을 올려주시는 우리동문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연말 각종 행사준비 관계로 조금 늦었지만 피날레를 장식하는 '제 10 화(大尾): 미처 못 다 부른 노래'를 보내드립니다. 이 작은 글을 통하여 소생의 입장을 널리 이해하여 주시고, 나아가 이 기회를 통하여 18 대 대선을 전후로 한 한국정치문화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기대를 걸어봅니다.
동기생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항해사 신희석이의 작은배도 선착장에 도착하였습니다.우리 모두 하선하여 술이나 한잔 합시다. Oh! '대전고 43'이여! 영원 함께 하여라!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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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화(大尾): 미처못다 부른노래 (맺음말) : 신희석이가 소위 ‘한국적 출세’를 아니한 이유⑩
우리는 곧 제 18 대 대통령선거를 맞이하게 된다(이 글은 2012년11월작성하였음). 앞으로 대한민국과 그 국민들을 위한
전환기적 훌륭한 지도자가 탄생하기를 많은 국민들은 지켜보고 있다. 국가의 최고통치권자가 되기 위하여는 국가원수로써 지녀야 할 경륜, 성숙한 인격, 탁월하고도 강력한 리더슆----- 안보가 중시될 수 밖에 없는 분단국의 경우 더욱 그러함----- 과 아울러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갈 심오한 통치철학의 소유가 필요충분조건으로 선행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지금까지 나는 국가정책연구활동의 전개라고 하는 차원에서 역대 대통령들과 나와의 밀접한 관계에 관하여 9 회에 걸쳐서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의 역대 대통령들과 비교적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정부요직에 들어가지 않고 오로지 국책연구활동과 교육활동에만 부단히 종사해 온 것은 학자는 어디까지나 학문의 길을 조용히 걸으면서 연구와 교육에 매진해야만 한다는 확고부동한 신념과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의 세계로부터 약간의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주로 미국 Harvard대학과 일본 동경대학에서 오로지 배움의 길만을 걸어왔다. 왜냐하면, 나는 국가의 최고통치권자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아부하면서 국가요직을 구걸하는 것은 학자의 바람직한 본연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대통령이 혹시 나를 불러서 국가정책에 관한 상담을 요구한다면 기꺼이 응할 수는 있지만 내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서 자리를 구걸해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자에게는 가끔 전략적인 자존심과 긍지가 필요하다.나는 대한민국의 국가공무원으로서 또한 국제정치학자로서 우리나라의 최고통치권자들에게 외교안보문제에 관한 나의 보잘것없는 소신과 사상과 철학을 전달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그저 만족할 따름이었다. 내가 두번다시 국가최고통치권자 즉 대통령의 ‘지적노예’가 되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중대결심을 하기에 이른 것은 바로 이와같은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박정희 대통령 이후의 거의 모든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협조체제를 유지해온 나의 과거사 교훈은 국가의 최고통치권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이용만 당하지않았던가 하는 허무한 감상주의이었다. 예컨대, 김대중씨의 자서전 출판협조는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 위한 일종의 전리품으로 사용된 측면도 없지 않다. 무려 5~6개월 동안 500 페이지에 달하는 단행본출판을 위한 번역작업은 너무나도 피눈물나는 노력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나에게 허탈감과 고독감을 주었을 따름이었다.
일반적으로 나와같이 비고위관료 출신 인사가 정치권력의 중심부분에서 소위 정부요직을 쟁취하기 위하여는 최고통치권자의 정권창출과정과 그 선거운동과정에 해당 캠프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머리를 숙이고 불철주야로 동분서주하면서 헌신적 기여를 하여야 한다.그후 대통령 당선자는 재임기간 동안에 이들 정권창출과정에 기여한 명부와 그 노력의 결과에 대한 반대 급부로 적절한 인사에게 적절한 요직을 배분하는 것이 최고통치권자에
의한 고위직 인사행정의 일반적 경향이라고 하겠다.
“박근혜후보가 혹시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신박사가 외교통상부장관과 같은 국가요직에 기용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는 주위사람들의 무책임한 발언에 대하여 과감히 저항하면서 이글을 쓰게 된 동기는 바로 이와같은 배경과 환경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 가능성은 0.1%도 아니된다. 세인들은 도대체 장관자리가 무엇이길래
이다지도 연연하는 것일까?
원래 이 글의 목적은 비록 보잘 것 없지만 국제관계에 관한 약간의 전문지식과 경륜을 갖고 있는 내가 한국에서 말하는 소위 ‘한국적출세’를 왜 아니하였는가 라고 하는 명제에 대하여 명쾌한 해답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국무총리나 장관을 해야만 출세라고 생각하는 한국적 사고방식은 결코 올바른 인식이 아니다. 구멍가게를 하든 가방장사를 하든 공무원을 하든 피눈물 나는 노력과 땀의 결과를 통하여 그 분야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여 행복을 누린다면 우리는 그것을 소위 '출세'라고 보아야 한다. 이와같이 그릇된 인식은 고관대작을 부러워하고 권력지향적인 일부 세속적인 사람들의 편협한 사고방식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한 인간에 대한 평가는 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서 달라진다. 또한, 때로는 ‘타이밍’이라고 하는 종속변수(Dependent Variables)가 작용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어느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또한 어떠한 인조기준(Frame of Referance)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사뭇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시대는 영웅을 만든다고 한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영웅이 시대를 창조하기도 한다. 오늘날과 같은 후기산업사회 특히 글로벌 IT산업과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에 있어서 전세계는 지구촌미래에의 물결을
향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 또한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Market Economy)와 자본주의경제(Capitalistic Economy), 이것이야말로 앞으로 우리 대한민국이 선택해야 할 최고의 가치체계이며 이를 중시하는 후보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야 한다. 뿐만아니라, 향후의 대선이야말로 한국정치의 병폐적 요인인 지역주의 갈등과 이데올로기 대결을 초월하여 모름지기 정책논쟁이 중시되어야 한다고 나는
조용히 생각하고 있다.
최근 내가 이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아태정책연구원(Aisa-Pacific Policy Rsesearch Insititute)은 국내의 국가정책연구기관 중 연구업적과 생산성면에서 비교적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30여년 동안 작성한 수많은 연구논문과 단독저서 그리고 수많은 제자들을 갖고 있음을 나는 마음든든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나의 총재산목록의 중요한 일부인 동시에 이것이 바로 내가 보는 "출세"인것 이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오로지 학문의 길을 걷기를 희망했던 선친의 준엄한 꾸지람은 나로 하여금 이 길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나의 선친은 “미국하버드대학이나 일본동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못하면 동해바다에 빠져서 죽어도 좋다.”라고 말할 정도로 학문의 길을 권장하였다. 천하대란의 세파속에서 뜻이 있는 사람은 항상 자신의 몸을 감추고 불안정하고도 세속적인 정계진출을 삼가하라고 하는 선친의 지침이 나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나는 이제 국가공무원직을 떠나서 자유스러운 몸으로 아태정책연구원(Asia-Pacific Policy Research Institute)을 통하여 국가정책연구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벤쳐기업의 성공을 위하여 오로지 심혈을 기울여왔으며, 그 결과 오늘날 아태정책연구원(APPRI)은 가장 최소의 규모로서 가장 최대의 연구업적과 생산성을 기록하고 있다.
외교통상부의 등록법인으로 출범한(1996年 9月, 제 311 호) 국가정책연구기관인 아태정책연구원(APPRI)은 한국의 정치, 외교, 안보, 행정, 경제, 통상, 사법, 공안, 환경, 노동 등 정부의 주요정책현안을 연구대상으로 하여 그동안 무려 340 회에 걸친 각종 정책연구이벤트의 개최와 정책연구기관지 『亞太Focus』 의 延 46 회 출판, 각종 對정부정책건의서의 제출 등 활발한 연구활동을 통하여 이미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나는 이렇힌
벤쳐기업의 성공을 자랑스럽게 생가한다.
소위 ‘한국적 출세’에 관하여 나는 아무런 미련도,애착도,아쉬움도 없다. 책으로 둘러 쌓여진 연구실에 홀로 앉아서 나를 도와주는 직원들과 함께 땀을 흘리면서 국책연구활동에 종사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나는 정치학교수로서 또한 사회과학자로서 국책연구활동과 교육활동에 모든 심혈을 기울여왔다. 지난 30 년동안 나와 함께 강의실에서 공부하였던 연세대 행정대학원과 정치외교학과 (학부 및 대학원)졸업생들을 비롯한 약 1000 여명의 제자들, 국제관계론의 이론과 현실에 관한 약 1 만권에 가까운 韓英日 장서, 반기문 제 8 대 유엔사무총장을 비롯하여 340에 걸친 국내외 저명인사초청 정책연구포럼, 240 여편의 각종 연구논문목록과 13권의 저서(공저포함), 그리고 나를 격려하여 주는 아태정책연구원의이사, 연구위원, 정책자문위원, 조교비서들......,
또한 역사와 자연을 사랑하는 역자회( 歷自會 )의 평생동지들! 이 분들과 함께 향후의 인생을 더불어 살아가는 한 나는 결코 외롭지 아니하다. 나는 성공한 지적노동자임을 자부하고 있다.
또한, 이제 나는 한국최고의 Law Firm중의 하나인 법무법인 '율촌'의 비상고문으로 근무하면서 곧 나이 70 을 바라보는 주제에 약간의 월급을 받으면서 영세학자로서의 안정된 기초생활을 하고 있음을 자랑스러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법무법인 '율촌'을 통하여 나는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한 새로운 울타리속에서 보람을 느끼면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있다. 나는 기쁘고 행복하다.소위 ‘한국적출세’를 아니하였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일반적 ‘출세’ 라고 하는 개념에 비교적 가까이 접근하였다고 객관적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자기만족이나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다.
나는 오늘도 광화문에 있는 ‘경희궁의아침’연구실과 강화도섬마을 전원주택의 작은
서재 유리창으로 비치는 바깥을 바라보면서 명상과 조용한 집필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여생을 부정·불의와 일체 타협하지도 않고 이 길을 묵묵히 걸어갈 따름이다. 나는 앞으로도 솟아오르는 물줄기와 같이 그칠 줄 모르는 집필활동과 국책연구활동을 통하여 학자로서의 긍지와 자존심을 갖고 꾸준히 학문의 길을 걸어 나갈 것이다('Going My Way'!).
고독했던 톨스토이도 그리고 낭만적인 시인 바이론도 이제 모두 붓을 사리고 있다.인간 신희석이도 별 볼일 없는 놈이지만 고독한 인생의 길을 때로는 굳세게 때로는 젊은 시절보다 더욱 '부드럽지만 강열하게' 인생을 살아 갈 것이다. 신희석이는 무서운 것도 없고 겁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 놈이다.
요컨대,나는 구한말 고종황제에게 개화기 조정내외의 정치사회적 변동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상황에 관하여 상소문으로 읍소한 당시의 석학 최익현 선생과 같이, 때로는 조선개국의 일등공신 정도전이나 하륜과
같이 학문과 정책연구의 길을 조용하고도 굳세게 여생을 걸어갈 따름이다<大尾>.
첫댓글 잘 보구 갑니다~~건강 하시고~ 좋은글 부탁 합니다~~
기준아! 항상 관심을 갖어주셔서 고맙다. 앞으로도 잘 부탁 한다. 희석이가...
경희궁의 아침그리고 강화도 섬마을 전원주택 에서 타오르는 불꽃같이 세계를 보는 상념들이 간단없이 솟구쳐 오르기를 바라오/헤안이 있는 자라면 국가 백년대계의 국제안보시스템구축의 기회를 전폭적으로 맡겨흠결없을텐데.....아무튼 최익현 석학의 길을 조용히 걷고 계시면 불역락호아라 하셨으니...
신박사/ 내가 신박사 와 같이 연세대 정외과 입학시험을 치러 감히 원서 접수를 하고 연세대 정문 바로 우측에 있던 중앙관(?)에서 문제지를 받아 들고 몇칸 채우지도 못하고 돌아왔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공부도 않한놈이 무슨 배짱이었는지? 손병민 선생님이 말없이 원서를 써주며 속으로 얼마나 황당해 했을까를 생각하면 얼굴이 뜨
3학년 5반이군 ...
며칠전 반창회 했는데...
성운이! 오랫동안 소생의 보잘것없는 글을 읽어주느라고 수고 많았네. 근일중 술한잔 하자..!!
내 머리 깜빡 깜빡...
니 머리 아직도 쌈빡 쌈빡...
머리도 여러가지...
주변에 이런 친구들이 내 전 재산이오
철세야! 중1때부터 지난 55년동안 변치않는 너의 우정에 커다란 감동을 느낀다. 근일중 술한잔 하자.!응!
"신희석이는 무서운 것도 없고 겁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 놈이다."
대학초년때~왁자 지껄 목척교 근처 은행동거리에서 만나~함께 손바닥에 빈대떡 사들고 쟁반처럼 앞에 들고 먹으면서~난 충대 넌 연대~ 너랑 나랑(난 쫌그랬는데~)) 보무 당당하게 거닐었던 폼좀 보았소?(기억 하겠지?) 그 누가 뭐라카던~쫄 쫄한 뱃속을 채워 두면??~그렇치 그렇코 말고 암~그때부텀 인지 우린(아니 넌) 잘 났다 ~ 잘 했구 말구~말구~~아랫도리힘 더 빠지기 전에 조용하면서 지치지 아니 하며 누가 뭐라도 하지 아니하며 후진양성에 힘써온 그대~ 존경한다
명동아! 암~~기억하고 말고...거의 50 년전의 아름다운 추억을 기억해 주는 벗이 있음을 나는 기쁘게 생각한다.
우리 함께 열심히 살고 자주 만나자.응!...희석이가......
대전고 43 동기생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신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