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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여행기 8
[제 시원치 않은 글을 읽어 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신 많은 동양고전 동호인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는 글로 표현하는 것이 좀 더 좋은 것 같이 생각됩니다. 말을 하다가 보면 쓸 데 없는 말도 많이 하게 되지만, 그래도 글이라고 적다가 보면 좀 쓸 데 없는 말을 줄이게 되지 않나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여행기에서는 이미 많은 쓸 데 없는 이야기가 들어가고, 내 신변의 잡사가 두루 노출되지 않았는가 해서 겁나기도 합니다마는 그런 이야기말고는 또 별로 쓸 것도 없어, 이것저것 다 적어 보았습니다.
젊을 때 대만에 3년동안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니, 누님이 대만이야기를 좀 해보라고 하였으나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니, “야야, 나는 수성방천에만 나갔다가 와도 할 말이 많은데, 니는 외국까지 갔다 와서 어쩨 그리 할 말이 없노?”하던 말이 늘 생각납니다. 요즘 여기서 색다른 것을 보고 들은 것이 많으니, 할 말이야 많지만, 그것을 다 적을 수는 없고, 또 다 적을 필요도 없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를 골라 적을지 고민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좀 적어 두는 것이 내 기억력 향상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또 몇 가지 이야기를 계속할까 합니다. 이러한 잡문을 읽으면서 나를 생각하여줄 여러 동호인들의 모습이 늘 나를 따듯하게 만들어 힘을 되살리게 하여주는 것 같습니다. 더위에 물난리에 고생이 많을 줄 믿으나, 잘 이겨내시기 빕니다.]
7얼 11일 월요일 개다. 아침 8시에 쎄인트 루이스 공항에 나가서 아메리칸 에어라인 비행기를 타고 뉴욕 공항에 내려, 같은 항공사의 다른 비행기를 갈아타고 보스톤에 오후 2시 반에 도착. 이민용씨의 부인이 차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서, 그 차를 타고 보스톤 시내는 들리지 않고, 바로 그 집의 뉴햄퍼셔의 별장으로 갔다. 곧장 가면 2시간 이내에 갈 수 있으나, 길이 좀 막히기도 하고, 중간에 시장도 좀 보아서 가다보니 오후 6시 경에 들어갔다.
요즘 이씨는 서울에 가서 불교문화원 원장을 하기 때문에, 부인이 혼자서 이 큰 별장을 관리하면서 전원생활 즐기고 있다고 한다. 한 시간에 3불 정도씩 받고 하루 낮전씩 와서 일을 하여주는 백인 남자가 하나 있으나, 젊을 때 교통사고로 장애를 입은 사람이라 지키고 서서 시키는 일만 할뿐이지, 잡초와 화초도 잘 분간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 부인도 서울에 살다가 미국에 와서는 비지네스를 하던 분이라, 살림살이나, 가드닝gardening(전원가꾸기)에는 익숙치 못한데다, 이 곳은 워낙 수목이 욱어진 곳이라 짐승이 많이 나와서 열매 맺는 채소는 결단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여러 가지를 심어 놓기는 하였으나, 내 같은 반농半農의 눈으로도 이것저것 지적할 것이 많았고, 살림살이, 특히 야채를 가지고 만드는 한국식 요리 방법에 대해서도 집사람이 많은 것을 이야기하여 주었다. 그 부인은 이제야 겨우 바쁜 일을 정리하고 이런 곳에 와서 조용하게 사는 게 좋다고 하면서, 한국의 촌사람인 우리들을 진심으로 환대하여 주었다.
7월 12일 화요일 저녁 비. 방학이라고 미국에 돌아온 이민용 씨가 여기 와서도 여러 사람을 만나고 바쁘게 산다도 부인이 불평이다. 그 말대로 우리가 가던 첫날에는 한국서 온 딴 친구 하나를 만나서 보스톤 시내 구경을 시켜주다가 시내에서 자고서, 오후에 그 친구 내외를 데리고서 여기를 와서 함께 잤다. 정영호라는 충북대 철학과 교수인데, 같은 이기영 교수의 제자이며, 이민용씨의 전임 불교문화원 원장이라고 한다. 매우 말이 적으며, 청주 교외의 시골 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살면서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출근한다고 하며, 최근에는 말을 타는 법을 익혀, 내년에는 몽고에 가서 말을 타고 여행을 하겠다고 한다.
전공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불성佛性”에 관하여 논문을 썼고, 인도에 가서 공부도 하였다고 하였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부처님은 있다고 하신 것이 불경에도 나오나, 조주선사는 없다고 하셨는데, 있다. 없다 한군데 치우치면 안 됩니다”고 대답한다. 이 대답 역시 선문답이다.
7월 13일 수요일 아침 10시 경에 정영호 교수 내외가 주인의 차를 타고 떠났다. 나는 국학진흥원에에서 의뢰받은 원고 마감 날이 촉박하여 하루 종일 원고를 타자하였다. 주인은 저녁에 돌아왔다.
7월 14일 목요일 작업을 마치어 전일주 선생에게 이메일로 보내어 제출하게 하였다. 전선생과 함께 이퇴계선생이 아들과 손자에게 보낸 친필 편지 원본 7권(130통)을 탈초하고 번역 해설한 것인데, 금년 10월에 있을 도산서원 창설 450주년 기념행사에 맞추어 그 원문을 영인하여 책으로 낼 것이라고 한다. 정말 진귀한 자료다. 우리가 원래 500매 정도를 쓴다고 하였는데, 탈초한 원문과 번역문까지 다 넣고 보니 800매 가까이 되어, 오히려 해설에 하고 싶은 말을 다 적지 못하여 아쉽다. 다시 연락하여 좀 보완하였으면 한다.
7월 15일 금요일. 노바스코샤로 가기 위하여 아침 10경에 출발하여 매인Main 주로 올라가서 국경 가까이 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도로변 휴게소 식당에 들어가서 프래인 브래드Plain Bread 센드위치를 사서 먹었다. 납딱하고 긴 빵인데 값이 싸고 나물을 많이 넣어 센드위치를 만들었다.
까래Calais라는 프랑스 땅 이름이 붙은 카다다 쪽 국경 소도시로 들어가니 뉴 브런스위크라는 주가 시작된다. 여기서 부터는 모든 간판이나 안내문이 영어와 불어 2종이다. 미국과 카나다가 다른 점은 이렇게 간판이 영어 불어 2 종이라는 것 외에는 별로 다를 것이 없으나, 카나다가 북쪽이 되다가 보니, 도로변의 나무들이 대체로 좀 왜소하고 북을 갈수록 부분적으로 시든 게 많아서 좀 삭막해 보인다. 서쌕스Sussex라는 영국 지명이 붙은 소도시에 들어가서 자려고 하였으나, 여름 성수기가 되어 방을 잘 구할 수 없어, 중국집에 가서 저녁만 사서 묵고 떠났다.
그 중국집 아주머니가 매우 똑똑하게 생기었는데, 같은 동양인을 보니 반가운지 테이블에 자주 와서 영어로 말을 걸었다. 북경어로 물어 보니, 홍콩에서 이리로 온지가 29년이라고 하는데, 29를 광동식으로 “니십가오” 비슷하게 발음한다. 메뉴표와는 관계없이 나물 반찬이나 3,4개 달라고 하였더니, 배추를 무치기도 하고 삶기도 하여 주었는데, 값은 70불 정도로 만만치 않게 받았다. 추운 곳이니 채소 값이 비싸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몽톤Moncton이라는 곳에 가서 잤다. 내 컴퓨터를 내어 놓고 이메일 사용하려 하였으나, 되지 않아서 이민용씨 부인의 컴퓨터를 켜서 전일주 선생이 내가 보낸 원고와 자기가 맡은 부분을 합하여 진흥원에 보냈음을 확인하였다. 또 노바스코샤의 하리팍스에서 살고 있는 옛날 대학과 군대 친구 윤명근 교수에게도 몇일 뒤에 만나자는 이메일을 보냈다.
7월 15일 토요일. 이민용씨가 자기 밴 차를 하루 종일 운전하여 저녁 6시 경에야 노바스 코샤의 동북쪽에 있는 그의 제2의 별장에 이를 수 있었다. 지도만 보면 미국의 매인 주나 이 카나다의 노바스 코샤 주가 아주 왜소한 것으로 보이는 데도, 각각 통과하는데 몇 시간씩 걸리니, 그 면적이 다 한반도나 비슷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젊은 사람들은 보스톤에서 여기까지 쉬지 않고 10여 시간 만에도 오고, 또 중간에 배에다 차를 실고 오면, 좀 더 편하게 오는 방법도 있다고 하나, 돈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70이 다 된 노부부가 이틀 동안을 이렇게 수 천리를 운전하여 다니는 것을 보니 참 세상이 좋아진 것도 같다.
이 별장 집에 관하여서는 사는 과정부터 자주 들어왔던 터인데, 상주할 수는 없지만, 관리를 누구에게 부탁해 두고 있다고 해서, 아주 반질반질한 해변의 요람일 것이리라고 예상을 하고 왔는데, 와서 보니 바다 가에 이웃집이 거의 안보일 정도로 이 집이 떨어져 있는데, 누렇게 방부제를 칠한 통나무 벽은 좀 꺼멓게 변색이 되어가고, 주변에 자란 잔디는 깍지를 않아서 마음대로 자라고 있으며, 숲은 추위와 바다 바람에 시달려 절반 이상이 허옇게 말라있다. 저녁이라 날씨조차 선선하여 매우 황량한 기분이 들었다.
집안에 들어가서 보니 반지하까지 합치면 3층으로 된 통나무 집인데, 반지하에 방 하나, 화장실, 큰 마루와 보이러, 세탁기 등이 들어 있는 큰 창고가 있고, 일층은 부엌과 큰 마루, 2층은 큰 마루와 화장실이 있는데, 침대가 놓인 것으로 보아 이 마루가 이 집의 가장 중요한 안 방인 것 같으나, 일층과 통하는 사다리 이 외에 따로 막아주는 문이 없으니 좀 의아하다.
비어 놓았던 집이라 문을 열고 네 사람이 대청소를 한 뒤에야 반 지하실에 고인 냄새가 좀 날아갔다. 물을 마시니 쇳물 냄새가 나서 처음에는 좋은 곳의 지하수라서 철분이 든 약수 성분이 많은가 싶더니 나중에 보니 쇠 통에 오래 잠겨있던 물이라 그런 것 같았다. 전기 시설은 되어 있지만, 전화는 설치신청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핸드폰조차 터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집에서는 바다에 낮에 들어가서 놀든지, 하루 종일 넓은 유리 창문을 통하여 바다를 바라다보는 일 이외에는 별 달리 할 일이 없을 것 같다.
7월 16일 일요일. 휴일이지만 이 지역의 도서관은 문을 열고, 또 교회 앞에서 헌 물건을 내다 파는 자선 세일이 열린다고 하여, 차를 타고 나가서 도서관에 들어가서 이메일도 열어 보고, 쎄일에 가서는 이민용씨 네가 헌가구도 몇 개 샀으며, 마을 시장에 가서 식품도 좀 사고, 이씨의 집 관리인이 운영하는 조그마한 식당에 가서 크림 차우다와 빵을 사서 점심을 사서 먹고, 병들어 집에 누워 있다는 관리인을 데리고 오게하여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식당이라야 촌 길 옆에 있는 구멍가게 수준인데, 70이 가까운 남자주인 죤John이 취미로 요리하는 것을 좋아해서 하면서,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어 한담이나 하는 장소로도 삼았다고 하는데, 지금 그 사람이 중병이 걸려서 대장을 다 잘라 내고, 자루를 차고서 변을 받아낸다고 하며, 살아남을 확률이 4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안타깝다. 젊을 때는 마을 악단의 나팔수로 풍류도 있었다고 하나, 뚱뚱해 진 뒤에도 검진 한 번 받지 않다가 죽을 병이 든 것을 통증이 온 뒤에야 알았다고 하니, 생로병사의 이치는 어디나 예외없이 통하는 것 같다.
오후에는 집 앞의 바다에 가에서 홍합을 땄다. 내자와 둘이서 한 시간 정도 땄는데도 한 바겥쓰는 넘는다. 삶아서 먹는데 보니, 어느 것 할 것 없이 모두 잔잔한 진주알이 들어, 도무지 안심하고 씹을 수가 없어, 손으로 일일이 그 알을 파내고서 미역국을 끓이는데 넣었더니, 그 전날 저녁에 죤의 아네가 사다 주었던 것 보다 맛은 훨씬 좋았다. 똑 같은 홍합인데도 사다가 준 것은 돌이 없는데, 이것은 돌이 있는 것을 보니 이상하다. 내자가 굴까지 2개 따서 퍽 득의양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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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월요일. 하리팟스로 나가서 윤교수도 만나보고, 시내에서 점심을 같이 먹을까 하였는데, 그 전날 전화를 받을 때도 보청기를 찾아서 끼고 전화를 받는데 내가 하는 말도 다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니, 오늘은 부인이 받아서 별로 만날 생각이 없는 듯이 말한다. 아마 건강이 좋지 않아서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 같이 생각된다.
그 사람의 어머니는 여류 소설가 한무숙, 한말숙 자매의 큰 언니인데 수필을 쓰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사람이 젊을 때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벌써 한국 학생 대표로 뽑히어 미국에 왔다 갔고, 물리학을 전공하면서도 사람의 두뇌연구에 관심이 깊어져, 대학에서는 생리〮·심리학과의 교수가 되었고, 불교도 깊이 있게 파고, 영어로 시집을 3 권이나 낸 수재인데, 늙고 병들어 옛 친구조차 만날 힘이 없다고 하니 참 슬프다.
몇 년 전까지도 늘 한국의 스님들의 한시를 자주 영어로 번역하여 보내면서, 번역이 옳게 되었는지 좀 보아달라고, 늘 숙제를 내어 주던 친구인데, 이 먼 변방에서 병고에 시달린다니 참 안타깝다. 그 사람의 막네 딸이 카나다를 대표하는 재원으로 뽑히어 클린턴이 젊었을 때 받았다는 매우 좋은 장학금을 받고 옥스포드대학으로 유학을 갔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친구는 만나지 못하고, 부두 곁에 있는 용황龍皇반점이라는 중국 부페에 가서 점심을 잘 먹었다. 1인당 11불인가 하였는데, 중국 요리이외에도 일본 초밥과 회도 있고, 김치까지도 갖추어져 있었다. 중국 관광객들을 태운 대형 관광 버스가 2대나 앞에 와서 서 있는 것을 보니, 아마 관광객이 점심을 먹고 가도록 연결이 된 식당인 것 같다.
오후에 집에 오니 부탁해 두었던 일꾼이 잔디 깎는 차를 가지고 와서, 차에 탄 채 잔디를 밀고, 좀 후진 구석은 차에서 내려 전기 모터가 달린 예초기를 손에 잡고서 들고 다니면서 깎아낸다. 건장한 사나이인데, 이웃 남자 한 사람과만 어울러 사는 게 아마 게이Gay일게라고 한다.
저녁 먹고 이런 게이문제를 가지고 민용씨와 한바탕 설전을 벌려 분위가 험악하여 지자 그 부인 제지하여 그만 두었다. 대체로 미국에 오래 산 사람들을 보면,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하는 가치의 기준보다는, “현실적으로 있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없지 않느냐?”하는 현실을 더 중시하는 것 같다. 미국이 가진 가장 잘 못된 것 중에 눈에 가장 잘 띄는 것이 사람의 비대증이며, 이 동성연애 문제도 역시 큰 두통이 될 것 같다. 거기다 범죄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고, 나라 빚은 세계에서 가장 많고, 실업자도 많다고 하니, 과연 미국의 榮華Fax America가 얼마나 갈 것인가?
7월 19일 화요일. 오전에는 마린 비취라는 곳에 가서 맨발로 모래 사장을 많이 걸었다. 이민용씨 집에서 보면 멀리 방파제 같이 보이던 곳이라고 한다. 이 긴 언덕 바깥의 바다에는 파도가 심한데, 민용씨의 집앞의 바다에는 파도가 전혀 없으니, 그 거센 물결을 이 언덕이 막아주는 것 같다.
돌아오는 길에 마을 식당에 가서 양식을 사서 먹고, 다시 죤네 음식점에 들려 내일 떠난다는 작별인사를 하였다. 우리는 차에 앉아 있었는데, 죤의 아낙네가 민용씨 부부 앞에서 눈물을 지웠다고 한다. 아는 사람이 병들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도 없으니 이 착한 친구들 내외도 참 서먹해 하고 있다.
차에 오르려고 하는데, 이 식당의 땅 주인이라는 화교 아주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바로 그 가게 뒤에 있는 집에 살고 있는데, 넓은 잔데 밭 구석구석에 온갖 꽃과 푸성귀를 심어 놓았고, 그 중에는 더러 낯에 익은 꽃들도 많이 보여 이집 주인이 혹시 동양 사람이 아닌가 하고 더러 기웃거리며 들여다 본 일도 있는데 추측이 맞았다.
키가 작고 얼굴이 햇볕에 새카맣게 끄슬었는데, 머리에 염색까지 한 것을 보니 영락없이 우리 시골 수무동의 어느 생기발활한 아지메와 똑 같다. 객가인客家人으로서 마라시아에 조부 때부터 나와 살았으며, 북경말을 할 줄도 안다고 한다. 저녁에 이씨네 집에 와서 밥을 같이 먹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더니, 찾아왔다.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쉬지 않고 영어로 이 동네 이야기, 중국화교들 이야기,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 같은 것을 빠른 속도로 지끌이다가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야 돌아갔다. 이야기의 흐름을 끊지 않기 위하여 나도 중국말 보다는 영어로 몇 마디씩 물어 보았다.
나이가 70이 가까운데, 영국에 가서 6년 살면서 간호학교를 마치고 카나다의 해군장교와 결혼하여 아들 셋을 낳고, 이 동네에 와서 산지도 37년이나 되는데, 남편과는 이혼을 하였고, 여기서 간호원 노릇을 하면서도 마라시아에서 파산한 부모 형제들을 데려다 지금 죤네가 하는 식당을 처음으로 만들어 중국음식점을 하면서 동생들 둘을 대학까지 시켰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였다. 지금도 에스키모들이 사는 북극지역에 들어가서 병원근무를 하면 시간당 150불을 벌수가 있지만, 이제는 겨울에는 뜨개질이나 하든지, 중국 본토여행을 많이 다닌다고 한다. 못 말릴 또순이가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녀가 한 이야기 중에, “컬럼버스가 미주 대륙을 발견하기 전에 중국인들이 이미 카나다에 왔던 흔적이 있는데도 공개하지 않는다”고도 하였다. 그 증거로 카다나 서부 해안에 중국식의 오랜 무덤이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러할 가능성도 있지도 않을지? 잘 모를 일이다.
이민용씨 부인이 현지 사정에 정통한 친구를 알게 되었다고 몹시 좋아 하였다.
7월 19일 수요일. 다시 떠나서 쎄인트 앤드류St.Andrew라는 국경근처의 카다나 쪽의 작은 어촌에 와서 하룻밤을 잤다. 그림과 같이 아름다운 항구다. Whale Watching이라고 하여 고래가 노는 모습을 구경하러 다니는 유람선이 있으나 못타본 것이 아쉽다. 오라가던 길을 따라서 다음 날 저녁때에 다시 뉴 햄퍼셔로 돌아왔다.
그 사이 틈틈이 민용씨가 보던 한국 역사 소설 《소현세자》와, 불어로 쓴 것을 한국어로 번역한 《측천무후》 상권을 읽었다. 둘 다 여류작가들이 쓴 것이라 표현은 정밀하나 중후한 맛은 없다. 전자는 대충 줄거리를 알고 있는 것이라서 별 느낌은 없었다. 다만 연행록에도 자주 나오는 청나라의 구왕九王과 우리나라의 효종孝宗의 성격에 관하여 좀 더 많이 알게 된 것은 소득이다. 후자는 너무 음탕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읽다가 그만 두었다. 삼천 궁녀가 아니라 1만 명이나 여인들이 들끓는 궁중에서 벌어지는 온갖 해괴 망칙한 이야기가 다 적혀있다.
7월 22일 토요일 맑다. 뉴햄퍼셔 별장에서 나와서, 그 인근 도버Dover라는 곳에서 버스를 타고 보스톤의 남부 터미날에 와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로드 아일랜드 주에 있는 아름다운 항구 뉴포트New Port에 와서 영해 고향 선배인 남석철 선생 집에 와서 3일을 묵었다.
남선생은 병원의 검사실 요원으로 이화대학 부속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이곳으로 이민을 와서도, 이 도시의 큰 병원에서 역시 검사실에서 근무하다가 은퇴하였는데, 금년에 연세가 만 81세이나 아직도 손수 운전도 하고, 집안에 있는 10평 남짓한 텃밭도 가꾸면서 지내고 있다. 얼마 전까지도 꼴프도 하고, 바다 낚시도 즐겼다고 하나, 지금은 한쪽 무릎이 아프다고 하면서 지팡이를 짚지 않으면 왼쪽 다리를 좀 저는 것 같다. 몇 년 전에 내가 보스톤에 와서 있을 때도 자주 만났던 분인데 몇 년 만에 보니 키도 좀 더 작아진 것 같아서 안타깝다.
이 항구 도시에는 뉴욕의 부자들이 100여년 전에 지은 거대한 여름 별장이 많은 것으로 이름이 있고, 또 해군의 군사학교War College가 있어, 여름 한철에는 관광객이 많이 몰려오고, 한국에서 한 해에 영관 급 장교들이 2,3명씩 단기 유학을 오는 것 외에는, 한국인이라야 겨우 5,6 집밖에 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남선생이 한국 손님 초대는 정말 극진하다. 올 때 마다 자고 가라고 붙잡고, 랍스타를 사다가 삶아서 주더니, 이번에 와서도 역시 랍스타와 생선회 꺼리를 사다가 손수 삼고 떠서 주었다.
이 전에도 다 본 곳이지만, 이틀 동안은 하루에 별장 하나씩을 구경하였다. 서양인들에게는 귀에 꼽고 듣는 것을 주고, 우리보고는 듣는 것을 줄까 설명서를 줄까 물어 나는 듣는 것을 받고, 집사람은 설명서를 달라고 하니, 한국 사람이라고 하여 한국어 설명서를 주었다. 19세기 말에 철도와 석탄 같은 것으로 거부가 되어 여기에다 이러한 여름별장을 짓고 하인들을 30-40명씩 거느리고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시에 기증한 상태라고 한다.
저녁에는 해변을 산책하기도 하였고, 또 어시장에 들어가 보기도 하였다. 차를 타고 식당으로 가는 길 사이에 캐네디 대통령이 결혼식을 올린 교회 앞을 지나가기도 하였다. 재크린느의 친정 별장이 이 동네에 아직도 있다고도 하였다.
화요일 아침에 남선생 내외분이 하버드 대학이 있는 캠부릿지Cambridge 시내에 있는 그 질녀 세교씨네 집까지 차를 몰고 와서, 그 집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고 다시 공항으로 나왔다.
세교씨는 젊을 때 간호원으로 이민을 와서 조각가인 피터씨와 결혼을 하고서 딸 둘을 낳았는데, 맏 딸은 대통령 선거 때 선거운동을 해주고 지금 국방성(펜타곤)에 들어가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이 남여사는 벌써 60대 중반이 되었지만, 아직도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여 영어로 시도 짓고, 동양화를 그리기도 한다고 한다. 김소월의 시를 영어로 완역해 놓기도 하였다. 내가 전에 왔을 때에 보니, 당시에 하버드 옌칭연구소의 소장이던 뚜웨밍杜維明교수의 부인과도 같은 독서써클 회원이라고 하면서, 자기 집에 우리내외와 두씨 부부를 같이 청하여 저녁을 함께 대접한 적도 있다. 그 외에도 문화계의 인사들과의 교재 범위도 퍽 넓은 것 같이 생각된다. 자기 외가집 조상인 이퇴계선생의 한시를 번역하는 나에게도, 또 우리 내자에게도 고향사람이라는 것 이상으로 늘 친절을 베풀고 있어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오후에 보스톤에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뉴욕까지 왔으나 번개 때문에 4시간 이상이 지체되어, 밤 12시 반에야 세인트 루이스까지 돌아왔다. 공항에 나온 딸아이가 한국의 물난리 소식을 전하여 주어 3시까지 이메일로 한국뉴스를 보다가 걱정 속에 밤잠을 설쳤다.
꼭 보름동안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대개 다 전에 다 가본 곳이지만, 차만 타고서 육로로 보스톤에서 노바스 쿄샤까지 내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길은 단풍철이면 정말 더 절경이라고 하는데, 언제 다시 그럴 기회가 있을지? 중간에 더러 들린 곳에 배를 타고 선유를 할 수 있는 곳도 있었으나, 내자가 배를 타기 싫어하여 그만 두었다. 남의 차를 얻어 타고, 남의 집에서 자고 다니니 그렇게 큰돈은 들지 않았고, 어쩌다가 우리가 밥을 살 때도 보니 물가가 한국의 관광지에 비하여 특별히 더 비싼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 세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인정이 아직도 남아넘치나, 앞으로 몇 번이나 이러한 호강을 누릴 기회가 있을 것이며, 몇 년이나 이러한 선배나 친구들이 건재 하겠는지? 생각하여 보니 다시 이러한 기회를 얻기는 좀 힘들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7월 29일 추기)
첫댓글 아직도 북미여행은 진행중이죠 선생님. 화려한 2011년의 여름을 북미에서 누리고 계시는 선생님 덕분에 저희도 앉아서 북미여행중입니다. 사모님께서 홍합에서 덤으로 얻으신 진주... 크기가 얼마만 할까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