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고시가 맺어 준 인연
이우현
고고의성을 터트리며 세상 빛을 처음 봤을 때, 시골의 형편은 대체로 어려웠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의 잘못 된 보증까지 겹쳤으니.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 진학은 아예 접어야 했다. 의젓한 교복에다 검은 교모를 쓴 친구들이 무척 부러웠다.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통과해야지' 이것이 어린 소년에게 하나의 소신으로 굳게 자리 잡았다.
약한 체구이기에 취직도 쉽지 않았다. 주물공장을 운영하는 친척뻘 되는 아저씨 공장에 취업했다. 뜨거운 열기는 나를 주눅 들게 만들었고 무거운 철판 나르는 일은 무척 버거웠다. 취직한 지 6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나의 부주의로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흐르는 피는 멈출 줄 몰랐다. 손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깊었다.
며칠을 방에만 박혀 있었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방문을 두드렸다.
“서문 시장에 가려는데 구경 갈래?” 내가 살던 자취방의 주인집 아주머니는 나를 자식처럼 아껴주었다. 하루 종일 방안에 박혀 있는 내가 안쓰러웠을 것이고, 적당한 자리를 물색해보라는 무언의 암시가 있었을 모양이다. 서문시장 동산상가는 우울함을 날려주기 충분했다. 삶의 활기가 넘쳐났다. 평소 접하지 못한 잡화가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시골 소년의 호기심은 번개처럼 눈앞에 광고를 낚아챘다.
'종업원 구함' 그릇가게다. 대뜸 점포에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일 할 기회를 달라고 읍소했다. 사장님은 키가 작아 일을 하기 힘들 것 같다는 눈치다.
“시켜만 주시면 성실히 일하겠습니다."
“여기는 배달 업무가 많아 자전거를 탈 수 있어야…” 사장님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비록 키도 작고 다리도 짧지만, 자전거를 탈 때 다리 한발은 올리고 한발은 내리면서 잘 탈 수 있습니다.”는 대답에 사장님은 웃음이 터졌다. 배달 사고는 100% 책임을 진다는 조건을 걸고 취직했다. 사장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다. 그러는 가운데, 언젠가는 ‘내 가게를 가질 수 있겠지’ 지금 생각해도 야멸차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배우고 싶은 열망은 떨칠 수 없었다.
검정고시 학원이다. 꿈에 그리던 영어시간이었다. 그림을 그리듯 알파벳을 그려 나갔다. 주위 학생들은 나이가 많은 나를 안타까워하며 그리지 말고 쓰라고 일러주었다. 기초가 없었기에 진도도 늦었다. 시간 날 때마다 시장 모퉁이에 앉아 알파벳을 소리 내어 읽고 눈으로 익혔다. 성실함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금세 알파벳을 떼고 단어와 문법을 배울 수 있었다. 동시에 수학을 배웠다. 몇 년을 책과 씨름했다. 시험 발표가 나던 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우현, 축하한다. 합격이다.”학원 선생님이 합격증을 건네주셨다. 첫 월급을 받았을 때보다 몇 배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우리 상점과 시장은 내 합격 소식에 떠들썩하고, 여라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행복함을 느꼈다.
이에 맞춰 꿈꿔왔던 나의 가게<경동상회>를 열었다. 감격의 순간이다. 그 동안 모은 돈으로 동생들 공부를 시키고 내 집을 마련했다. 내 가게까지 갖게 되었으니 하늘을 날 것 같았다. 시류에 따르고자 쇠퇴 일로에 처한 상가 재건이 급선무였다. 재래시장 상가의 획기적인 변신을 위해, 신용카드 단말기 도입과 상품 정찰제 실시를 꾸준히 건의했다. 바로 신용카드 결제를 실시함으로서 재래시장에 대한 신뢰 회복에 기대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다. IMF 경제 위기 때에도 수입품 그릇과 분청 질그릇을 전략 상품으로 도입해 경영의 어려움을 거뜬히 극복했다. 은행 대출을 받아 인근 점포를 매입, 사업을 확장하고 종업원을 충원했다. 사업은 종업원들에 맡겼다. 책임 경영의 일환이다.
호사다마랄까. 사업을 종업원들에게 위임하고 아들 뒷바라지에 전념했다. 아들은 기획사의 각종 프로그램 교육을 이수하고, 유능한 매니저에게 개인 교습을 받으며 요구한 금액을 지급하고 또 지급했다. 기대에 부풀어 기획사를 의심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들이 곧 방송에 출연할 것이라며 거액을 요구하는 횟수가 잦아들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잘못 디딘 발이 흙탕물에 빠져 시커먼 암색으로 변했다는 것을 느꼈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이라는 기획사의 말에, 지인에게 차용하여 큰 금액을 건넸다. 의구심은 현실로 다가왔다. 이틀 후 저녁 9시 뉴스에 기획사의 부도 소식이 나왔다. 심장이 내려앉고 온 몸이 떨렸다. 힘써 일궈놓은 사업은 십 년 만에 도산이란 아픔을 겪어야했다. 모든 기운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그러한 어느 날, 함께 공부했던 검정고시 동문을 친구를 만났다. 나의 자초지종을 들었을 모양이다.
“동문님 영업실력이면 조그만 가게를 임대해 사업을 재개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수중에 가진 것도 없고 여태 채권자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형편이라 사업은 꿈도 꿀 수 없다."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얼마나 필요해? 언제든 전화하게." 친구를 앞에 두고 도와달라는 말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와 달라 할 걸,' 며칠을 고민했다. '다시 일어서자.’ 자존심을 꺾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막상 친구를 마주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해 봤어?” 친구가 내 의중을 읽었는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를 믿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에 격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사업자 명의, 은행 통장도 모두 친구 이름으로 개설하고, 체계적인 영업 전략과 사업 실행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친구는 나를 믿었다. 우리는 사업 파트너가 되었다. 그의 도움으로 8개월 간 떠돌이 생활과 일용직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시장조사에 들어갔다. 정품 장사는 어렵겠다는 결론을 냈다. 중고 물품을 다루기로 사업 방향을 틀었다. 친구에게 빌린 돈으로 점포 임대 보증금과 진열장, 간판을 주문했다. 그러나 사업운영자금이 부족했다. 이 소식을 들은 검정고시 김00 동문이 나를 찾아왔다.
“우리, 가시밭길도 맨발로 걸어갈 수 있는 '검정고시동문' 아닙니까? 형설의 공을 같이한 동병상련의 동지가 아닙니까. 지난 날 아픔을 거울삼아 꼭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도움을 약속하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겸손과 배려로 일한다는 마음으로 상호를 「우리 주방」으로 정했다. 사업 시스템이 정착되었을 즈음, 도움을 준 검정고시 동문을 만났다. 원금과 이자를 넉넉히 준비했다. 선물로 양주 한 병을 건넸다.
“나는 이 동문님이 꼭 성공하리라 확신 했어요. 원금은 받겠습니다. 술 선물도 받겠습니다. 혹여, 제가 동문님께 신세를 질지 모르니 이자는 사양하겠습니다. 우리는 '검정동문'이 아닙니까”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그 후 2년이 흘렀다. 변제하지 못한 채권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돈을 갚고 용서를 빌었다. 사업파트너인 친구는 독립하여 사업을 키워나갔고, 나는 공장과 도매상회, 은행권 채무를 모두 정리했다. 부도 후 11년 만에 신용불량자 사슬에서 풀려났다. 은행통장과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검정고시인' 나를 믿고 아무런 담보도 없이 큰돈을 빌려준 그들은 나의 재기를 있게 한 소중한 분들이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도움 주신 분에 보답하는 길은 베푸는 길임을 안다. 그들의 뜻에 보답하고자 독거노인, 재활원에 정기적으로 약간의 성금, 생필품을 보내고 있다. 작은 힘이지만 어두운 곳에 작은 횃불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