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답사기(2012.0718) 전주의 완산칠봉
전주는 경주와 함께 백제시대 이래의 유서깊은 도시이다. 도시를 가꾸는 일은 이 시대 역사를 창조하는 길이다. 전주는 통일신라시대에는 9주 중 하나인 전주로 그리고 후백제 견훤의 40여년간의 수도였으며, 고려시대 500년간 12목의 하나로 지정되어 전라도의 정치경제, 행정 군사의 중심지로 기능을 해왔으며, 이는 조선왕조 500년간 그 위치를 가져왔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성계의 관향으로 경기전이 설치되었고, 조선왕조실록이 전주사고본이 임란 중 어렵게 옮겨져 오늘 우리는 조선 전기의 조선왕조실록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19세기 말에는 동학혁명이 일어나 전주성을 혁명군이 장악함으로써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후도 전주는 전라북도의 행정, 경제, 정치의 중심지로서 지금까지 중대한 역할을 해온 우리나라 대표적인 문화와 역사의 도시이다. 그리고 국악과 미술, 음식의 면에서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도시이다. 이런 점에서 전주에 국립박물관이 설치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방에서 이런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도시로서는 전주시가 유일한 곳이다. 그리고 이지역의 연구를 위한 한국학연구원이 설치되었으면 하는 것이 희망사항이다. 시장과 도지사는 문화적 개념을 소홀히 하지 말고 중시하기를 강력히 청원하는 바이다.
7월 18일 나는 볼 일이 있어 아침 8시 30분고속버스로 전주에 내려갔다. 올사모 특별회원인 제석 선생과 만나 일을 본 후 오랜만에 완산칠봉을 정혜사 뒷길로 올라갔다. 전주에 와서 한 30분 동안이면 오를 수 있는 완산7봉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제석 선생에게 자랑을 했다.
나는 전주를 떠 난지 32년만에 완산칠봉을 오르기로 했다. 내가 전북대학교를 떠난 것이 1980년이므로 전에 즐겨 올랐던 완산7봉을 오르기로 했다. 우리는 정혜사 입구에 내려 이 절에 들러 비구니 스님으로부터 차 공양을 받았다. 정혜사는 180년 전에 세워진 사찰이지만 도시 안에 있는 사찰이어서인지 크게 중창되었고, 너즈막한 공간이 도시인의 쉼터로서 아늑한 풍치를 느낄 수 있었다. 절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곳곳에 써 놓은 안내문이 한글로 쉽게 정리되어 있었다.
태풍이 온다는 일기예보이기에 완산7봉의 주봉인 장군봉의 팔각정까지 갔다. 가는 길은 내가 30여년 전에 올랐던 길과는 달리 계단이 만들어졌으나 완산칠봉에 대한 안내문도, 올라가는 길의 안내 표지도 없었다. 그리고 갈림길에서 길의 안내표지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두세번 하산객에게 물어 올라갔다.
완산은 전주의 백제시대의 최초의 도시명이다. 삼국사기 지리지 전주조에는 “본래 백제의 완산이었다고 했고, 진흥왕 16년에 주(州)를 설치했다가 26년에 주를 폐했고, 신문왕 5년(685)에 다시 완산주를 설치했으며 경덕왕 16년(757)에 전주로 개명하여 1소경(남원소경), 10군, 31현을 거느렸다”고 했다. 전주는 지금까지 칭해지고 있는 명칭이나 원래의 완산이란 명칭을 한식으로 바꾼 것이고, 완산이란 명칭은 지금까지 완주군, 완산동이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진흥왕대에 이곳에 주를 설치했다는 것은 사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진흥왕이 16년(555)에 경상남도 창녕을 점령하고 이곳에 ‘비사벌’정이란 군단을 설치했다가 26년(565)에 이를 폐하고 합천지역으로 군단을 옮겼다. 이 군단은 상주(고명 사벌)에 설치한 군단을 상주정으로 칭하였고, 비사벌정을 하주정이라고 칭하였다. 창령에 지금까지 전하는 진흥왕순수비에는 하주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신라본기 진흥왕 16년조와 26년조에는 비사벌에 완산주를 설치했다가 폐하고 대야주(합천)를 설치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전주조에 진흥왕이 주를 설치했다는 것은 김부식의 잘못된 서술임이 분명함을 학계에서 공인된 설이다.
내가 1973년에 전북대학교에 부임하였더니 총학생회 축제의 명칭이 ‘비사벌’이라고 해서 깜짝 놀라 그 연유를 알아보았더니 신석정 시인이 1948경에 ‘오 비사벌’이라는 시를 썼고 이에 연유하여 총학생회에서 이를 취한 것이다. 신라의 원지명은 지명의 끝에 벌, 불이라는 말이 붙는데 이는 큰 마을을 칭하는 용어이었고, 같은 의미가 백제의 지명에는 부리, 물이라는 명칭이 붙여졌음을 확인할 수 있고, 고구려지명에는 홀이라는 명칭이 붙여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부리, 물, 홀이란 낮은 산을 의미한다.
전주시의 남쪽에 있는 완산은 전주의 안산(앞산)인 셈이고 일곱 봉우리가 기이하게 솟아 있어 이를 완산7봉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은 장군봉(해발 185m)이고 서쪽으로 검무봉(劍舞峰 164m)이고, 仙人峰(163m), 모란峰, 錦絲峰, 매화봉이다. 전주시의 남문에서 보면 뾰축, 뾰축 솟은 정기가 온화하면서도 빼어난 감을 준다. 이는 전주가 예술의 도시, 맛을 도시로 발전함과도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완산은 전주의 상징적인 역사적 연원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지금은 이들 칠봉을 완산외칠봉이라고 부른다. 전주시 남문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서남쪽에도 장군봉을 중심으로 7봉이 있는데 옥녀봉, 무학봉(舞鶴峰), 백운봉, 용두봉, 매화봉, 탄천봉(?)이 있어 장군봉을 합쳐 내칠봉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장군봉에는 팔각정이 세워져 있고, 내가 30여년 전에 올랐을 때에는 북쪽의 전주성이 환히 보였다. 그런데 지금 가 보니 참나무와 벚나무가 무성하게 자라서 팔강정에서는 전주성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완산7봉의 중심인 장군봉의 팔각정에 올라서 보니 남쪽으로 모악산과 서남쪽에 서 있는 아파트 군이 보일 뿐이었다. 울창하게 자라는 나무를 탓할 수는 없지만 씁쓸한 생각을 가졌고, 제석 선생도 나의 설명을 듣고 나더니 제석 선생은 고개를 흔들면서 전주시의 문화정책은 참으로 한심한 수준이라고 일갈하고 전망대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했다.
그리고 정혜사 쪽에서 올라가는 입구에는 완산7봉에 대한 설명서를 쓴 안내판이 필요할 것 같다. 팔각정에는 완산을 설명하는 안내문도 없었다. 우리는 씁쓸한 생각을 가지고 전주라는 문화도시가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을 생각하여 좀더 신경을 써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혜사에서 장군봉의 팔각정까지 올라가는 시간은 30분이면 족하였다. 전 코스를 걷는데 2시간이면 족하다.
우리는 내려오다가 더위를 식히기 위해 한 참을 내려오다가 가게를 들려 주인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 주인은 우리를 보더니 전주시가 예산이 넉넉하지 못하지만 문화정책에 너무 소홀하다는 이야기와 불평을 쏟아 놓았다. 자기는 매일 아침마다 1시간 내지 2시간을 걸어서 완산칠봉을 오르내리는데 만약 비가 오면 피할 곳이 없어 걱정이라면서 군데 군데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해주었으면 한다고 하고 주민들은 나무를 베자는 주장과 그대로 두자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고 했다.
우리 생각에는 적당한 곳에 전주시 중심가를 볼 수 있는 전망대를 세우고 야간에도 오를 수 있는 환경을 가꾸어놓으면 전주의 한옥마을 경기전, 전주천 그리고 멀리 덕진공원까지, 그리고 정읍과 김제 평야의 광활한 평야가 산들과 함께 한눈에 바라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하는데 전주라는 역사의 숲을 볼 수 있는 것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서울의 남산타워 같은 명물을 만들어주기를 간곡히 바란다. 아마 그러면 이곳의 이름다운 야간 풍광을 보기 위해서도 전주에서 1박을 하는 관광객이 늘어날 것이다. 전주가 가지고 있는 유서 깊고 좋은 명산, 명물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연과 환경을 시민들이 즐길 수 있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하나의 길이다. 그리고 외지인을 고려한 도로표지판에 문제가 있는지도 세밀히 살펴야 할 것이다.(목포시가 모범임) 시민과 행정당국이 이곳을 좀 더 가꾸는 데 좀 더 세심한 노력을 해주었으면 한다. 이런 나의 제안이 이루어지도록 뜻있는 전주 시민의 노력을 기대해본다. 뜻있는 인사들이 그 추진을 위한 추진 단체를 만들어 추진된다면 미력한 힘이지만 적극적으로 돕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