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3) - 정조의 건강법 (2)
오늘도 조선의 제22대 임금인 정조의 건강법에 대해 살펴보죠.
장동민 한의사, 연결돼 있습니다.
(전화 연결 - 인사 나누기)
Q1. 지난 시간에 정조가 문무를 완전히 갖춘
거의 천재적 수준 능력의 소유자라고 하셨는데요.
정조의 성격은 어땠나요?
네 일단 정조는 어려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보았기에, 일찌감치 궁궐 내의 비정한 현실에 눈을 떴습니다. 그래서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항상 경계하고 조심하는 것이 몸에 밴 생활을 했었는데요, 실제 아버지 사도세자가 매일 영조에게 꾸지람을 받았던 것에 비해, 세손이었던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에게 한 번도 꾸중을 받은 적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왕위에 오른 뒤에도 여러 건의 역모와 암살 위협에 시달렸는데요, 정조는 이 모든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실제 왕위에 오르자마자 “짐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노라.”라고 선포하여 그동안 숨겨 놓았던 발톱을 드러냈다고 하는데요, 실제 왕조실록 원문을 보면, 약간 뉘앙스가 다르긴 합니다.
Q2.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수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다른 얘기가 있는 건가요?
네 다들 아시다시피 영조는 세손이었던 정조를 일찍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시켜서 왕위를 잇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일은 입도 벙긋하지 못하게 만들었기에, 정조도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얘기를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왕위에 오르자마자, 스스로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밝혔기에, 정조가 복수심에 불타 오른 것으로 얘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조 즉위년 3월 10일 <왕조실록>의 이어지는 부분을 살펴보면, “또한 효장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밝혔으며,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숭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실제 효장세자는 정조 때 ‘진종’으로 추존되지만, 사도세자는 끝끝내 추존되지 않았다가, 나중에 고종 때 황제의 나라임을 선포하면서 그때서야 ‘장조’로 추존됩니다. 즉 정조는 때를 기다리는 은근과 끈기도 있었지만,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는 판단력도 갖추고 있었던 것이지요.
Q3. 아, 그 당시 집권세력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너무 무리하지는 않았다는 말씀인데요.
하지만 결국 아버지 죽음에 관여했던
외가 홍 씨 일가는 모두 숙청하지 않았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래서 정조가 차가운 성격이라기보다는, 냉철한 이성으로 본능을 억제했다는 표현이 더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정조의 성격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는데요. 이 당시 정조는 수시로 성균관에 방문해서 유생들로 하여금 쪽지시험 비슷한 시험을 치르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번은 문제가 너무 어려웠었는지 유생들이 단체로 백지 답안지를 제출했는데요, 이 때 정조가 격노해서 쓴 경고문이 '정조어필 시국제입장제생'이란 글로 남아있습니다. 정조 본인도 이 글을 쓰면서 얼마나 흥분했었는지 잘못 쓴 글자를 그냥 먹으로 쓱쓱 지워버린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정조의 불같이 급한 성미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Q4. 정조의 본래 성격은 급하고 불같았는데..
숨기고 있었던 건가요?
네 맞습니다. 실제 2009년 2월 발견된 심환지와 교환한 서신첩인 ‘정조 어찰첩’을 보면, 학자 군주답지 않고 왕의 표현이라 볼 수 없는 표현들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특히 자유자재로 욕설과 막말을 구사하는 모습 때문에 화제가 되었는데요. 예를 들면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사람 꼴도 못 갖춘 새끼와 경박하고 멍청하여 동서도 분간 못하는 병신이 감히 그 주둥아리를 놀린다."라거나, "대신 아무개는 몸에 동전 구린내가 나 주변이 모두 기피하는 놈이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호로 자식"과 같은 욕설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또한 어떤 편지에는 '아, 내가 새벽 3시까지 잠 못 자고 이러고 있다.'라는 말 뒤에 '가가(呵呵)'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것은 웃음소리 '껄껄'을 뜻하는데요. 현대로 치면 "ㅋㅋ"와 같은 표현인 것입니다. 심지어 갑자기 한자가 생각이 나지 않았는지 ‘뒤죽박죽’이라는 한글을 한자 사이에 끼워서 써놓기도 하고 있습니다.
Q5. 지엄하고 근엄한 왕의 모습이 아니라
가볍고 발랄한 서민적인 모습도 있었네요?
네 그렇습니다. 여기서 또 정조의 아주 유명한 러브스토리가 나오는데요. 바로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자세히 나오는데요, 정조는 나이 15세 때 어머니 혜경궁 홍 씨가 거둔 ‘의빈 성씨’에 반했다고 합니다.
이에 일차로 정조가 승은을 내리려 했으나, 의빈은 울면서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며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정조는 납득하고 물러났다가 15년 후에 다시 승은을 내렸는데, 이번에도 의빈은 15년 전과 마찬가지로 거절했습니다. 이에 정조가 방법을 바꿔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그제야 뜻을 굽히고 정조가 내린 승은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Q6. 정조의 사랑이 한결같았었군요?
네 그렇습니다. 이렇게 의빈 성씨는 정조가 내린 승은을 두 차례나 거절했다가 하인이 벌을 받자 비로소 후궁이 되었는데요. 문효세자와 옹주를 낳았지만, 옹주는 두 달 만에 경기(驚氣)로 사망하고, 문효세자도 홍역으로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사망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임신 중이던 의빈 성씨도 당시로서는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이 때 기록을 보면, “의빈은 마음이 여리고 약해서 칠정(七情) 즉 과도한 스트레스 증세가 있는데, 문효세자가 사망한 뒤에 중병에 걸려서 본궁으로 피난을 떠났다가 조금 낫자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정조가 그날그날 의빈이 씻는 모습을 보고, 약을 조제하고 달일 때 직접 살폈으나 병이 악화 되었다. 결국 정조 10년 9월 14일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사망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Q7. 정조가 직접 씻는 모습을 보고,
약 달이는 것을 살펴 볼 정도였으면..
정말 아끼고 사랑했었나 봐요?
네 그렇습니다. 의빈 성씨의 묘 자리를 봐도 알 수가 있는데요, 예전에 숙종이 숙빈 최 씨의 무덤을 공주의 묘 근처로 준비했던 내관을 파직시켰던 것에 비하면, 정조는 효창묘, 즉 문효세자의 묘와 겨우 백여 걸음 떨어진 곳에 묘를 마련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그만큼 의빈 성씨를 아꼈던 것인데요.
왕세자의 죽음 때도 무척 슬퍼했었습니다. 정조 10년 5월 3일의 기록을 보면, ‘왕세자가 홍진의 증세가 있자,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하라고 명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여기서 홍진은 홍역(紅疫)을 말하는데, 어린 아이에게 잘 나타나는 전염병입니다. 일반적으로 고열과 반점을 동반하는데, 5월 5일의 <왕조실록>기록을 보면, 이러한 증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약청에서 <왕조실록>에 보고하기를, ‘세자의 피부에 열이 시원하게 식고 반점도 상쾌하게 사라졌다.’고 하였는데요. 이는 그 당시 왕세자가 고열과 피부반점에 시달리다 결국 호전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Q8. 그러면 병이 다 나은 거 아닌가요?
아마 그 당시 어의들도 그렇게 판단을 내렸던 것 같습니다. 이후 기록을 보면, 5월 6일에는 정조가 세자의 병세 호전에 대해 선조들에게 사례하는 행사를 여는 것에 관해 논의하는 기록이 나오며, 7일에는 약방에서 아뢰기를, “증세가 어제에 비해 더욱 좋아졌지만, 남은 열의 증세가 있는 것 같아서, 약을 추가로 더 처방한다.”고 하였습니다. 급기야 8일에는 “모든 병증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열을 식히는 약을 중지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런데 겨우 이틀 후인 10일에, 갑자기 왕세자의 병세는 심각하게 악화되는데요.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의약청에서 숙직을 철수한 뒤로 세자에게 갑자기 다른 증세가 생겼는데, 이 증세를 보고 정조가 차마 아들의 아픈 증세를 볼 수가 없다고 말하여,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을 토로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러한 피 끓는 부정(父情)에도 아랑곳없이, 다음날인 11일에 왕세자(문효세자)는 사망하고 맙니다.
Q9. 다 나은 것 같더니,
이렇게 급작스럽게 사망한 원인이 있었나요?
네 있습니다. 처음 병의 조짐이 보였던 5월 3일 이후의 처방을 살펴보면, 5월 5일에 ‘인동차(忍冬茶)에 대안신환(大安神丸) 반 환(丸)’을 처방했으며, 7일에는 ‘대안신환(大安神丸) 반 알과 금은화(金銀花) 오매(烏梅)’를 처방하였습니다. 이 처방들은 모두 차가운 성질을 지닌 약인데, 8일에 이르러 병이 나았다고 판단하였기에 투약을 중단합니다.
그리고 사망 원인의 대답은 이어지는 6월 1일의 기록에 나오는데요, 왕세자의 홍진에 인삼(人蔘)과 부자(附子)의 약을 처방한 의관을 탄핵했던 상소문이 실려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백성들의 경우에도 홍역을 앓을 때는 차가운 성질을 지닌 약을 처방하는데, 오히려 문효세자의 경우에는 10일과 11일에 걸쳐 인삼과 부자를 투약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 내용이 조정의 기록에 누락되었었다는 사실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고열 증상의 환자에게, 인삼 정도가 아니라, 아예 최강의 뜨거운 성질을 지닌 부자까지 투약했다니, 문효세자의 열 증상이 악화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장동민 한의사와 함께
정조의 건강법에 대해 살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