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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 여행3 - 뵤도인 절을 나와 강변을 걸어 내려가 윤동주 시비를 찾아가다!
6일째인 2019년 4월 9일 교토 고조도리 五条通 를 걸어 가모강을 건너서 케이한전철
키요미즈고조에키 京阪電鉄 淸水五条駅) 로 내려가 간사이 쓰루패스를 사용해
케이한 혼센 京阪 本線) 전철에 올라 9번째 역인 주소지마 中書島 (중서도) 에서
우지센 (京阪 宇治線) 으로 환승해 7번째 케이한 우지역 (京阪 宇治駅) 에 도착합니다.
646년 우지강 (宇治江)에 만들었다는 우지바시 宇治橋 다리를 건너 세계최초의 여류 소설
“겐지 이야기” 의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 (紫式部) 석상을 보고는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서는 뵤도인 平等院(평등원) 이라는 절에 도착하는데... 일본 화폐 10엔
짜리 동전 에 새겨진 우지의 명소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천년 사찰이라고 합니다.
절을 나와 강변에서 "윤동주 시비" 를 찾다가 포기하고는 인포메이션 센터 로
들어가서는 여직원에게 "우지강변에 일본인들이 세웠다" 는
윤동주 시비 위치 를 표시해 달래서는 지도를 들고 우지강을 따라 내려 갑니다.
그런데.... 지도를 보고 한참 내려왔는데 이쯤에서 윤동주와 도시샤 대학 동료
학생들이 사진 을 찍었던 그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인도교 그물 다리 가
나타나야 하는데.... 저 앞 멀리까지 보아도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20분가량 강을 따라 내려가니 길은 두갈래로 갈라지는데 다리는 강변에 있어야 하는지라
왼쪽 강변에 난 작은 길 로 접어들면서 생각하니... 우리가 가진 지도는 관광지도 입니다.
그러니까 일반 지도는 축적을 실제대로 엄격하게 해서 정확하게 작성 하지만 관광지도
는 중심부에 여러 관광 명소와 호텔에 식당 등이 몰려있으니..... 이 부분은
실제보다 크게 자리잡고 그 외 관광지가 아닌 지역은 작게 그리니 그 때문인가 봅니다?
강변에 소로 로 접어들어 10분 정도 걸어가자... 드디어 저만치 앞에 고풍스러우면서도
우아한 다리 가 나타나는데 그럼 20분이상을 걸은 것이니 발걸음을 빨리해서 다리에
도착해 보니 이 다리는 자동차는 지나 다니지 못하는 그러니까 보행자 전용 다리 입니다.
나무 다리 천게빈교(天ケ瀕橋) 는 나무 문이 서 있고 다리는 케이블 까지
설치 되어 있어 건너니 조금 출렁거리는데..... 참으로
정겨우면서도 스릴 마저 느껴지는 독특한 관광용 인도교 가 아닌가 합니다?
교토 도시샤대학에 재학중인던 윤동주 는 귀국전인 1943년 친구들과 함께 우지강을 찾아
다리에서 마지막이된 사진 을 찍었는데 며칠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죽으니 최근들어
마지막 사진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우지에 윤동주 기념비를 세우자는 움직임 이 생겼습니다.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 곤타니 노부코(紺谷延子) 사무국장인데 그녀는 2002년
부터 시를 읽고 꽃을 우지강에 던지는 추모행사 를 열었고 2009년 6,358명 서명을 받아
교토부(府) 지사 에게 제출했으나 번번히 거절당하고 비를 세울 곳을 찾아 동분서주 합니다.
곤타니 사무국장 의 바람은 마침내 2016년 교토 남부 우지시 시즈가와(志津川)구 에서
우지 강변에 용지 제공을 결정해 이뤄지게 됐는데 구청장은 “세계 평화의
상징이 됐으면 좋겠다” 라며 기념비 건립을 받아들이니 시인의 탄생 100주년인
2017년 10월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가 여기 우지강변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윤동주 는 1942년 3월 일본 유학 을 떠나면서 의무적으로 창씨 개명
을 해야 했으니 ‘윤(尹) 씨’ 는 ‘히라누마(平沼) 군(君)’
이 됐는데....... 개명을 앞두고 ‘참회록’ 이라는 시를 썼다고 합니다.
이후 유학 시절을 관통한 감정은‘부끄러움’이었으니 교토(京都) 도시샤대 학우 였던
기타지마 마리코 (北島萬里子) 씨는 우연히 둘만 수업을 듣게 됐을 때....
윤 시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둘밖에 없는데 틀리면 부끄럽겠네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히라누마 군’이‘국민시인’이 된 사실을 몰랐던 기타지마 씨는 전후 50년을 맞아 KBS 와
함께 윤동주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NHK 제작진 에 학창 시절 앨범을 찾아 윤시인의
생전 마지막 사진 을 제공했는데 1943년 우지(宇治) 강의 다리 에서 찍은 사진 이었습니다.
윤 시인은 중앙에 여학생들 옆에 자리를 잡았는데 수줍음이 많아 수업시간이면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아 조용히 수업을 듣던 그였는데.... 징병을 피해 귀국을 결심한
그를 위해 학우들이 열어준 송별회 였던지라 당당하게(?) 중앙에 자리를 잡은 것이네요?
사진을 찍고 1개월후 윤 시인은 일본 경찰에 치안 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 됐는데... 함께 사진을 찍었던 일본 남학우 들도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전선으로 끌려가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평범한 주부였던 곤타니 노부코 (紺谷延子)씨는 윤 시인을 만난후 인생이 바뀌었다는데
2002년부터 매년 시를 읽고 꽃을 우지강에 던지는 추모 행사 를 열었고... 2005년
기념비 건립을 위한 시민단체를 조직해서 각계의 모금을 받아 2007년 기념비 를
만든 후에는 용지를 확보 하기 위해 문턱이 닳도록 지방 자치단체 를 돌아다닌 것입니다.
시인의 탄생 100주년인 2017년 10월 에 여기 우지강변 에 세워진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 에는 한국과 일본의 화강암에 양국 언어로 시 ‘새로운 길’ 을
새겼으며 시인을 상징하는 돌기둥이 그 위에서 양국을 연결하는 디자인 이라고 합니다.
이번 비석은 일본 내에서 3번째 인데, 윤 시인을 기리는 일본 시민들은 매년
2월이 되면 시인이 유학했던 도쿄(東京) 릿쿄대 와 교토 도시샤
대학교 그리고 숨을 거둔 후쿠오카 (福岡) 등에서 추모 행사 를 연다고 합니다.
일본인 중에는 중국에서 시인의 무덤 을 찾아낸 학자도 있으며 30년
넘게 일본 내 행적을 추적한 전직 언론인 도 있다는데.....
모두 시인의 ‘부끄러움’ 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이들 입니다.
작은 시민단체를 조직해 12년간 이 사업을 추진해 온 곤타니 사무국장 은 한국의 신문
기자에게 보낸 e메일에서 “현재 한일 관계는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시민들은 윤동주를 통해 이어질 수 있다” 며 “개막식에 꼭 와 달라” 고 초청했다 하네요?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 명동촌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평양의 숭실중학교 에 편입
했다가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자퇴 하고는 돌아와 광명중 을 거쳐 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 에 진학해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집을 내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2년 일본 도시샤대학 영문학과에 입학 합니다.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길을 서두르던중 사촌 몽규와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
되었으니 갖은 악형 속에서 2년의 징역 이 선고되었는데 죄명은 독립 운동 이었고,
“조선 학병들은 일본이 패전하는 기회를 타서 조선 출신 군인으로 목숨을 바쳐
궐기해야 한다” 는... 일본의 징병제에 대한 생각 이 옥살이의 중요한 원인 이었습니다.
1년 뒤인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 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시신을 수습
하러 간 아버지와 당숙이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를 면회 했는데, 몽규는 자신들이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으며 그 주사 때문에 동주가 죽었고 자신의
몸도 이 꼴이다" 라 말하고는 한달뒤 숨을 거두었으니 생체 실험의 대상 이 된 것입니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교토(京都)부 우지(宇治) 시에 기념비 가 세워진다는데 일본인
학우들과 우지강변에서 송별회를 하면서 생전 마지막 사진 을 찍었으니 이 사진이 1990년
대에 공개되면서 2005년 일본시민단체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 가 만들어 집니다.
12년만인 2017년 10월 28일 시인의 1938년 작품 ‘새로운 길’ 을 새긴 비석 제막식을
진행할 것’이란 소식이 알려지자 한국 여중생 이 곤타니 노부코에게 일본어로
작성한 e메일을 보냈으니 “다른 나라 인물을 위해 마지막 까지 노력해 멋진 결과를
낸 것을 존경한다. 윤동주 기념비 가 한일 사이의 가교 가 될 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작 ‘쉽게 씌어진 시’ 에 나오는 싯귀입니다.)
숙명 여대 김응교 교수는 동아일보에 연재중인 “동주의 길” 에서....
“이제 북한에서도 윤동주를 언급하기 시작했어요.”
1993년 일본 와세다대 스승 오무라 마스오 교수님께서 복사물 몇 장을 주셨다.
어떤 일에도 흥분하지 않는 분의 약간 달뜬 표정이 낯설었으니 윤동주를 과대평가된
작가로 폄훼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다음해 1994년 평양에서 출판된‘문예상식’
에 3면에 걸쳐 윤동주 시 ‘서시’ ‘슬픈 족속’ ‘쉽게 쓰여진 시’ 에 대한
분석이 실렸 는데.... 북한에서 윤동주를 평가 하기 시작한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간도 용정 에서 성장한 윤동주가 국내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총독부에서 지정한 고등보통
학교에 진학해야 하는지라 9월 평양 숭실중학교 4학년에 입학하려 했던 윤동주는
결국 3학년에 편입하니 큰 좌절이었지만 10월에 처음 자신의 글이 활자로 변하는
체험을 했으니....... 숭실중학교 YMCA 문예부에서 낸 ‘숭실 활천’ 에 ‘공상’ 을 발표했습니다.
이어년 12월에는 최초의 동시 ‘조개껍질’ 을 썼으니 이 시
끝에는 평양의 ‘봉수리 에서’ 썼다고 쓰여 있는데...
하지만 더 큰 좌절이 닥치니 숭실중학교는 신사참배에 반대 하자 평남도지사는
1936년 1월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는 숭실중하교 교장 맥큔의 교장 인가
를 취소하고 파면하니... 학생들은 동맹휴학 을 시작하고 3월에 윤동주는
문익환과 숭실중을 떠나는데 이 무렵 3월 24일에 ‘모란봉에서’ 란 시를 씁니다.
앙당한 소나무 가지에
훈훈한 바람의 날개가 스치고,
얼음 섞인 대동강 물에,
한나절 햇발이 미끄러지다.
허물어진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들이
저도 모를 이국 말로
재질대며 뜀을 뛰고.
난데없는 자동차가 밉다.
작게 움츠러져 있는 ‘앙당한’ 솔나무는 윤동주나 친구들 모습 일까. ‘얼음 섞인
대동강 물에,/한나절 햇발이 미끄러지다’ 라는 표현도 신선하지만, 2연을
더욱 주목할 수밖에 없으니 허물어진 모란봉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들이/
저도 모를 ’이국말(일본말)로 노래 부르며 ‘재질대며’ 뜀뛰며 일본 놀이를 하고 있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침략해 오는 일제가 밉다는 뜻이니 이 시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 이태준 단편소설 ‘패강랭’ 을 생각하게 하는데...
성터와 함께 허물어지는 한 나라의 언어와 생활 을 천천히 응시하게 하면서도
윤동주는 희망을 잃지 않았으니 동시 ‘창구멍’ 은 1936년 초에 창작된 시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다리를 건너니 여긴 벼랑 이라 어디 시비를 세울만한 장소 가 보이지 않습니다.
해서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찾지 못한지라 저 아래쪽에 댐 옆에 또
다른 자동차가 다니는 백홍교(白虹橋) 다리 가 보이는지라 내려가서는 다리 앞에
이르러 아래쪽으로 내려가니 더 이상 내려갈수 없으니 비는 어디가서 찾아야 한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지만 마냥 찾을수도 없어 벼랑길 바위를 더듬어 다시
올라오는 데.... 아???? 오른쪽 모퉁이에 비가 보이는게 아니겠습니까?
해서 처음 여기 도착 했을 때의 자세를 취해 보니 당연히 보이건만.....
비가 저 아래쪽 어디에 있을거라 여긴 선입견 때문에 놓친 것입니다.
되돌아 서서 마눌을 불러 함께 비 앞에 서니 누가 다녀갔는지
꽃이 한송이 보이기로 우린 꽃은 준비하지 못한지라...
풀 잎을 따서 바치고는 함께 묵념 을 하고는 비 주변 을 살피니... 비를
세운 유래며 몇가지 글들 이 보이기로 가슴에 담고 돌아 섭니다.
이제 강 동쪽에 오솔길을 걸어서 아사히 야끼 (朝日燒 조일소)와 우지 진자 宇治神社
(우지신사) 를 보고는 세계 최초의 여류 소설가 인 무라사키 시키부 를
만나러 겐지모노가타리 뮤지엄 源氏物語 博物館(원씨물어 박물관) 을 찾아 갑니다.
첫댓글 그렇게도 애타게 찾으시던 윤동주시인의 비를 드디어 찾으셧군요. 저도 너무 기쁩니다.
2017년 10월에 시인 윤동주의 기억과 화해의비를 윤동주를 기리는 사람들의 뜻이 합쳐져서
드디어 시비를 양국글씨를 새겨서 세웟군요.
매년 이곳에서 시를 읽고 꽃을 우지강에 던지는 추모행사를 거행하는군요.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불과 광복을 얼마 않두고 돌아가셔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저도 영화에서 형무소에서 밤마다 이상한 주사를 맞는걸 보앗습니다.
일본인들 정말로 나쁩니다.
그래도 윤동주시인님의 시비를 찾으셔서 너무 다행입니다.
저 윤동주시비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고나광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강변 구석에
있는지라 참으로 애를 먹었습니다!